정혼
1. 定婚
혼인하기로 정함.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인할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집안간의 이해에 따라 가장이나 부모들끼리 그 자손간의 혼인을 미리 약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이러한 약속은 혼인할 당사자들이 미성년자일 때는 물론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혼은 혼인할 당사자들이 법률이 정하는 나이에 이르러 자기 자신이 미래에 할 혼인을 직접 예약하는 '''약혼(約婚)과는 다르며,''' 대한민국 민법이 약혼에 대해 일정한 효력을 부여하는 것과 달리 '''정혼에는 법률상 아무런 효력도 인정되지 아니한다'''.
2.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鄭渾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관료로 자는 문공(文公). 정태의 동생.
하남군 개봉현 사람으로 고조부와 아버지는 유명한 유학자였다고 한다. 그의 생애는 사람들이 못 사는 마을을 되살려놓고 다시 사람이 못 사는 마을로 부임해서 다시 되살리는 인생(…)
자신의 형 정태가 죽자 정태의 장남 정무를 데리고 회남으로 피신을 갔다가 회남의 군주인 원술이 정혼을 잘 대해줬지만 원술이 잘 될 것 같지는 않아 정혼은 예장태수로 있던 화흠에게 투항한다.
그후 조조의 부름을 받아 연, 하재현의 장, 소릉현의 령 등을 역임하고 당시 백성들이 아이를 낳아도 기를 방법이 없어 기르지 않았기에 정혼은 백성들의 낚시와 사냥 도구를 빼앗아 밭을 개간하고 뽕을 재배하게 하면서 자식을 버리는 행위에 대해 강도 높은 벌을 내린다.[1] 백성들은 처음에는 이런 그의 행위에 두려워했으나 곧 생활이 윤택해져 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없게 되자 아이들의 성을 정혼의 성인 정을 쓸 정도였으며, 그의 소식을 듣고 조조는 그를 승상연속으로 임명하고 좌풍익 태수로 승진시킨다.
그 때 마초와 함께 반기를 들었다가 패주한 양흥의 패잔병이 좌풍익으로 자리를 옮겨 좌풍익 내부에 5천여 가구를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여러 현은 그를 막을 수 없었기에 역소를 성 아래로 옮기고 정혼에게 와서 역소를 험한 곳에다가 옮기라고 청하지만 여기서 정혼은
그렇게 말했다가 성곽을 수리하고 역소에서 양흥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적을 약탈해 얻는 것의 7할을 주기로 약속했으며, 이 백성들은 양흥군의 재물과 부녀자를 약탈한다(…).양흥 등은 산산이 흩어져 산속의 험한 곳에 숨어 있을 것 입니다. 비록 따르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대부분 협박당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협박당해 따르는 자들을 위해 투항의 길을 열어주고, 그들에게 조정의 은총과 믿음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험준한 요충지를 찾아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약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인과 딸을 약탈당한 적들은 정혼에게 항복하면서 돌려주기를 청하니 정혼은 여기서 '''다른 사람의 부인과 딸을 잡아오면 돌려주지'''라는 조건을 걸자 적의 세력은 순식간에 와해되었으며, 말을 잘한다는 자들을 산골짜기로 보내서 설득하게 하니 그들도 항복한다.
자신의 세력이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지는 꼴을 본 양흥은 녹성에 병력을 집결하지만 조조가 보낸 하후연의 지원군에 힘입어 돌격한 정혼과 백성들에게 참수되며, 양흥의 부하인 근부라는 자가 또 하양현과 소릉현의 백성들과 관리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정혼은 근부를 격파하고 백성과 장리를 구출하며, 조청룡이 좌내사 정휴를 죽이자 정혼은 장사를 파견해 조청룡의 머리를 내걸어 4천여호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산적들이 모두 소탕되어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만들자 정혼은 상당태수로 전임된다(…).
조조의 한중 정벌 때 경조윤으로 임명되어 종군하는데, 여기서 정혼은 새로 모인 백성들의 이주에 관한 법률을 만든다. 그 법령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족을 갖고 있는 자와 독신인 자를 한 조로 하고, 온정과 신의가 있는 자와 고독하고 나이가 많은 자를 짝이 되게 해 농경에 힘쓰도록 하고 법령을 밝혀 나쁜 일을 적발했다.
이런 그의 노력에 자연스럽게 농업은 발달하고 도적들은 줄어들었다. 특히 조조의 대군이 한중으로 들어왔을 때 군량미 수송에 있어 제일의 성적을 보이며 활약한다.[2] 또 정혼은 백성들을 한중으로 보내 경작에 참여시켜 도망치는 자가 없었고 조조는 정혼의 실적에 더욱 감동해 또 승상의 연으로 승진시켰다가 조비가 즉위한 후에는 시어사로 임명되었고 부마도위의 관직이 더해졌으며, 후에 또 양평과 패군의 태수로 승진되었다.
그가 관할하는 군의 경계 지대의 땅은 저습해 수해 걱정이 있었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고통받자 정혼은 소, 상 두 현의 경계지역을 선정해 제방 공사를 시작하고 밭을 만들기로 했다. 군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하자 정혼은
그러면서 직접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해 공사를 시작해 겨울 한철에 완공하며, 그렇게 고생한 보람이 있어 이듬 해에는 풍부한 수확을 거둬 논의 면적은 점점 증가해 조세 수입은 평상시의 두 배나 되었다. 백성들은 이렇게 얻은 이익에 대해 정혼의 공을 돌에 새겨 그를 노래했으며, 호를 정피(鄭陂)라고 했다.이 땅의 형세는 낮고 습해 관개 사업에 적합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물고기와 쌀을 오랫동안 계속 생산할 수 있는 이로움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농민이 부유해지는 근본인 것입니다.
이렇게 양평과 패군을 발전시키자 또 정혼은 산양과 위군의 태수로 전임(…)되자 정치 능력을 발휘해 백성들이 목재 부족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집마다 느릅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울타리 안쪽으로는 다섯 그루의 과일나무를 심도록 감독한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집집마다 느릅나무가 모두 울타리가 되었으며, 다섯 그루의 과일 나무에는 과실이 풍부했다.
정혼이 다스리는 위군 지역은 촌락이 하나같이 정제되어 있고, 백성들은 모두 풍족한 재원과 넉넉한 물건을 얻었다. 조예는 이 소식을 듣고 조칙을 내려 표창해 천하에 알렸으며, 아울러 정혼을 장작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정혼은 청렴하고 소박한 관리로서 마음은 공적인 일에만 있었으며, 그의 처자식은 항상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했다.
진수는 그를 창자와 함께 백성을 구휼함에 있어서 방법이 있어 이들은 모두 위나라 역사상 유명한 태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2.1. 창작물에서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형 정태와 마찬가지로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68, 무력 32, 지력 67, 정치 87, 매력 82이며 일러스트는 털보 아저씨 같은 얼굴로 왼손에 죽간을 들고 있다. 개성은 축성, 진흥, 법률, 농정, 여망, 주의는 형과 같은 왕도, 정책은 공법개혁 Lv 4, 진형은 학익, 투석, 전법은 견제, 저지, 치료, 친애무장은 화흠, 혐오무장은 없다. 생년은 159년, 몰년은 223년까지 되어있다.
[1] 당대의 둔전제와는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자세한 것은 둔전(삼국지) 참조.[2] 두기 또한 한중 수송 때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아 칭찬을 받았으나 정혼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