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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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이다. 자는 공로(公路).
사공 원봉의 삼남으로 4대에 걸쳐 삼공의 직위에 오른 원가의 적자 후예이다. 원소와는 사촌관계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소가 아들이 없는 원성의 대를 잇기 위해 입적된 원봉의 얼자(孼子)라는 기록이 있어 호적상으로는 사촌관계, 생물학적으로는 이복형제였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어릴 적엔 호방하게 양갓집 자제들과 사냥을 즐겼으며[1] 나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효렴[2] 에 천거되어 낭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중앙과 지방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북당서초에서는 원술이 장수교위로 재임할 때 수레와 말이 호화로웠고, 사치스러움을 사랑하여 행렬이 거리낌없이 방자했으며, 항상 위압적인 기세로 사람들을 능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일컫길 "거리의 한귀, (=악귀, 사나운 귀신), 원 장수교위"라 불렀다.(북당서초 권 6)는 기록이 있고 위지에도, '장수교위를 지냈는데 사치와 음란함을 좋아해 분수에 맞지 않는 화려한 수레를 타며, 사람들에게 위세를 부렸다. 사람들이 일컬기를, "거리의 한귀, 원 장수교위." 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선 어지간히 행패를 부리고 다녔던 듯하다. 후한서 원술전에서는 원술이 스스로의 명성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그 천성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므로 자신만이 고귀하다고 여기며 모든 것을 깔봤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는데, 이처럼 원술의 인물상은 젊은시절부터 대단히 자긍심이 높고 오만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삼국지 원술전에서는 효렴에 천거된 이후 낭중을 거쳐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절충교위,호분중랑장까지 이르렀다고 하며, 후한서 원술전에서는 효렴에 천거된 이후 여러차레 옮겨져 하남윤,호분중랑장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 외에 영웅기에서는 원소가 시어사로 승진했을때 원술이 상서였기에 상서대 아래에 있고 싶지 않아 칭병하며 사직했다는 토막 일화로 등장하며[3] , 앞서 언급된 북당서초와 위지의 기록에 따르면 장수교위를 지낸 적이 있다.
삼국지 순유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장번의 한기에 따르면 원술은 당대의 호걸로 이름을 떨치며 원소와 그 명성을 두고 겨룰 정도였는데 하옹이 원소는 매우 높게 평가한 반면 원술은 아예 찾아가지도 않았기에 원한을 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원소의 분주지우였던 허유를 음란하고 불순하며 탐욕스러운 자라며 깠는데 도구홍은 원술이 지적한 허유의 단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허유를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 진흙탕을 걷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인물이라며 나름대로 호평해주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몇 안되는 젊은 시절의 기록이 원소와 좋지 않은 관계임을 보여준다.
원술은 당시 6년상 등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을 높이던 원소를 질시하는 한편 경쟁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나타나는 원술 본인의 발언을 봤을때 적통인 자신이 노비 소생의 얼자에게 뒤쳐질 수 없다는 자존심 문제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원소가 6년상으로 명성을 떨쳤을 때 그 모친상[4] 의 대상이 원술의 친어머니였다는 기록을 보면[5] 노비의 자식이 자기 어머니 이름 팔며 효자 행세하니 고깝다는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한편 삼국지와 후한서 원술전이 동일하게 원술이 당대에 협명이 높았음을 언급하고 있고, 하진이 의협을 숭상하는 것으로 이름높은 원술을 후대하며 호걸들을 아우를 수 있었다는 후한서 하진전의 묘사와 호걸이라는 평가와 함께 일찍부터 원소와 정치적 지명도를 둔 경쟁관계였다는 한기의 묘사를 볼때 원술은 비록 대단히 사치스럽고 오만해 저잣거리의 귀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떠돌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당대에 원술을 대단히 전도유망하고 유능한 인물로 호평하는 여론들도 제법 있었고, 협명,의협,호걸 같은 표현이 여러차례 언급되는 점을 볼때 원술은 명문가 출신으로는 특이하게도 주먹패나 무인 같은 부류 사이에서 카리스마적인 존재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술은 무능하면서 가문의 힘으로만 출세했다는 인상이 강하고 역사적 평가도 최악이지만 남은 기록들을 종합해 볼때 젊은시절의 원술은 사치스럽고 오만하지만 가문 밖에서도 나름의 자체적인 입지가 있던 유망주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2.2. 영제 사후
189년. 영제가 죽고 하진이 정권을 잡아 십상시와 대립할 무렵에는 호분중랑장으로 황실의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나 하진에게 포섭된다. 이보다 앞서 당시 중군교위였던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해 건석과 대립을 부추기며 점차 발언력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선비들을 다루는데 도통한 원소와 의협을 숭상해 협명이 높은 원술이 하진에게 가세하니 하진은 뛰어난 인재들을 충분히 뽑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원술은 십상시의 난 당시 하진의 피살 사실을 알자마자 하진의 부곡장인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며 청쇄문에 불을 지르는 등 가장 먼저 무력행사에 나선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장양 등 십상시들은 황궁을 수비하며 시간을 끄는 한편 군권 장악을 위해 하남윤과 사례교위 등의 요직을 자파 인물들로 교체한 상황이었으나 원소가 선수를 쳐 이들을 제거하고 주요 기관을 장악한 뒤 황궁에 돌입하면서 십상시 측의 패배를 결정지었다.
원술이 원소와의 개인적 관계가 무척 나빴기 때문에 하진의 원술 포섭이 급격히 영향력이 확대되는 원소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당시 원술은 황실 근위대의 지휘 책임자였고 자체적인 명성 또한 상당했다는 점만으로 이미 하진이 포섭할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진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결과적으로 이때 원소와 원술은 십상시의 반격에 맞서 협력 비슷한 모양새를 취하긴 한다.
그러나 결국 남 좋은 일만 되버린 것이 운 좋게도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 동탁#s-1이 허장성세를 통해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자 하진 사후 어디에 줄을 서야 될지 감을 못 잡고 있던 낙양의 군사들은 죄다 동탁에게 붙어버렸고, 정원마저 제거하면서 견제세력이 없어진 동탁이 정권을 잡게 된다.
2.3. 남양 점거
동탁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원소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다 결국 원소가 실각해 하북으로 달아난 것과 대조적으로 동탁은 원술을 고위 장군직인 후장군으로 삼으려 하는 등 처음부터 상당히 호의적인 제스처로 접근했다. 원소는 청류파들의 우두머리였고 원씨들은 암묵적인 환관 지지파였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대립 + 원소의 복잡한 출생으로 집안 어르신인 원외를 비롯한 원가는 원소를 견제했고 그러므로 원가의 유망주인 원술을 포섭해서 명문가인 원씨의 지지를 얻으려는 동탁의 정치적 계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원술은 '''동탁의 영입 제의도 무시하고''' 남양으로 달아난다. 비록 전통적으로 원소가 본인의 가문을 정치적 장기말로 냉혹하게 악용했다고 해석하나, 원술 또한 간접적으로 가문의 몰락에 일조했고 본의 아니게 라이벌인 원소의 주가를 올렸다. 동탁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정면 대립한 원소는 그렇다 쳐도 원술마저 주는 벼슬도 내팽겨치고 야반도주하니 원씨 가문을 잠재적 뒷문의 적/반란 호응세력으로 간주하고 머지않아 실제로 멸문했다. 얼자인 원소가 원씨 적통인 원술을 제치고 18로 제후들의 맹주가 된 여러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원소는 "천하의 힘있는 자가 동공뿐만이 아니다"라고 동탁과 정면으로 맞붙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쇼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인데, 원술이 동탁의 회유에 겁먹어서 자신의 가문을 내팽겨치고 야반도주한 것과는 대조된다.
공손찬이 황제에게 올린 표에 따르면 원소는 분명 원씨 일족을 살릴 수 있었는데도 고의적으로 동탁을 자극해 애꿎은 원씨 일족이 죽어나갔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당시 공손찬과 동맹을 맺고 있던 원술의 시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원술은 친형 원기를 비롯한 일가친족이 멸문당한 사건으로 원소에게 대단히 원한을 품은 듯 하다.
이후 원소를 중심으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이에 가세한다. 동탁이 정권을 잡은 직후 원소와 대립해 원소를 쫓아내고는 다시 발해태수로 삼아 회유한 것과 달리, 원술은 처음엔 쫓겨나지도 않고 후장군으로 임명되는 등 동탁 정권에서 우대를 받다가 원소가 발해태수로 임명될 무렵에서야 남양으로 달아난 상황이었기에 남양에서 아무런 공권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비슷한 케이스로 조조가 있었는데[6] 조조와 차이점이 있었다면 고향으로 달아나 사재를 털어 거병한 조조와 달리 원술은 남양으로 달아났다는 것인데, 원술이 남양으로 간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의 한 수'''가 된다.
당시 장사태수 손견은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임지를 벗어나 낙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평소 개인적인 원한이 있기도 했고, 마침 조인#s-2의 부추김도 있어 형주자사 왕예#s-1를 죽인다. 손견의 왕예 살해는 하극상에 가까웠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왕예는 반동탁연합에 참가하고 있던 관리였기 때문에 손견은 중앙에 거스르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관리들은 물론 중앙에 반기를 든 관리들에게서도 고립되는 형세에 놓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임지인 장사군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손견은 자력으로 보급을 해결할 능력도 전무했기에 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멸하거나 도적떼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장사군이라는 임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손견이 두려울 게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손견이 주둔하던 노양과 장사군은 2800리나 이격되어 있어서 직접적인 보급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애초에 손견은 모든 세력은 이끌고 북상한 이후 원술에게 소속된 이후로는 다시는 장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때 원술은 손견을 중랑장으로 삼으며 접선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7] 원술의 제의를 받아들인 손견은 곧 군량 조달에 비협조적이라는 트집을 잡아 남양태수 장자를 죽였고[8] 그 남양군을 원술에게 바치며 그의 휘하로 귀부하였다.
이렇게 손견이 막나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여러 추측만이 가능하다. 당시 동탁이 반군의 맹주가 된 원소에게 본보기를 보인답시고 낙양의 원씨 일족을 몰살시킨 것이 오히려 동정론이 지배적인 추세가 되면서 각 지방의 이탈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원씨의 복수를 명분삼아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매우 흔했기 때문. 원술은 원씨의 종가[9] 이자 적통 가주였기에 손견의 불법행위에 대한 반대 여론을 간단히 무마시키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며, 임지를 버리고 고립된 이상 유력 패권주자인 원술의 형주 장악에 기여하고 그에게 후원을 받는 편이 본인에게도 안전하다고 계산했을 수도 있다. 다만 사서엔 구체적인 이유를 딱히 명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왕예의 후임으로 파견된 형주자사 유표는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도록 상주하는 표문을 올리며 원술의 남양 지배를 묵인했고,[10] 본격적인 군벌의 반열에 들어간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 겸 파로장군으로 삼으며 동탁과 맞서도록 한다.
당시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동탁이 유협을 내세워 수립한 조정을 괴뢰정부로 규정했으므로 유협 대신 유우를 옹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자 했으나, 원술은 동탁은 역적이지만 유협은 정통 황제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대하고 원소와 대립했다. 원소는 그러한 논란 속에서도 한복과 함께 독단적으로 유우를 옹립하였으나 유우 본인이 극렬히 거절하는 바람에 그 입장이 대단히 난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원술은 계속 서진을 주장했고 동탁 토벌전에서 손견을 선봉으로 내세워 마침내는 동탁을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하기에 이르러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기록을 보면 동탁 진영에서도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가 원소, 원술 중 누구인지 헷갈렸는지 아예 원씨로 묶어서 칭하고 있다.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된 오서와 산양공재기 등에 따르면 손견은 동탁을 무찌르고 낙양을 수복한 뒤 동탁이 불을 지른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옥새를 발견했다. 이에 원술은 손견의 아내로부터 옥새를 강탈했다고 하나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오나라의 사가들이 시조인 손견을 미화하고자 날조한 기사로 여겼다. 그러나 후한서 원술전에도 이 내용이 남아 있고, 후한서 서구전에도 원술 사후 그 옥새를 조정에 돌려줬다는 기록이 있는 등 오직 오나라 사가들만이 이 내용을 쓴 게 아니었다. 여튼 이 옥새는 후일 원술이 참칭할 마음을 품으면서 손견의 처로부터 빼앗았다.
원술이 남양에 있을 때 그 호구가 수백만이었으나 원술은 법도를 세우지 않고 약탈을 일삼았으며, 원술이 사치스럽고 방자하였으므로 그 영지에 편안할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이로 인하여 항상 고통을 받았다고 후한서에 묘사되지만 이 경우는 신세력인 원술이 동탁군과 싸우기 위해 짧은 기간에 최대한으로 남양을 쥐어짰던 반증이라고 보는 편에 가까워 보인다. 상식적으로 손견이 동탁군과 싸울 수 있었던 군사나 무기, 군량 등의 전비가 원술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자라나는 셔틀이 꺼림칙했는지 손견을 참소하는 말을 듣고 잠시 군량 공급을 중지한 바 있는데, 이때 손견이 부리나케 달려와 애걸한 덕분에 별탈없이 해결된 바 있다. 이것이 연의에서는 손견이 동탁에게 패배한 원인인 것으로 과장되어 묘사된다.
2.4. 원소와의 대립
하지만 남양에서의 지나친 수탈과 학정으로 반대세력도 만만찮게 생겨났는데, 특히 단양태수 주흔은 원술과 격렬히 대립했으며 원소 또한 주흔을 포섭함과 동시에 주흔의 동생인 주앙, 주우#s-1 등을 관리로 임명하며 원술을 견제했다. 이 무렵 반동탁 연합군은 완전히 결딴나서 원술은 공손찬 등과 편먹고 원소는 유표#s-1 등과 편먹고 서로가 전쟁을 벌였다.[11] 진수는 이를 두고 형제간에 화합치 못하고 먼 사람들과 어울렸다며 비판했다.
어쨌든 원소에게서 예주자사가 된 주앙 혹은 주우가 낙양에 있던 손견의 배후를 공격해 사예지역과 남양을 잇는 중간거점인 양성을 빼앗았다. 공손찬은 원술에게 사신으로 파견한 동생 공손월을 장수로 임명하고 자기 병력을 떼어주며 손견과 같이 반격을 시도했다.
비록 공손월이 전사하긴 했지만 손견은 주씨 형제를 다시 양주로 축출하였다. 삼국지 공손찬전에는 손견이 패했다고 적고 있지만 다른 사서들은 모두 여러번 싸운 끝에 주씨 형제가 불리해져 축출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공손찬전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손견의 패배는 국지적 부분에 한정될 것이다.
원술은 원소와 전쟁을 하면서 천출인 원소에 대한 마음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그가 집안의 노비(家奴)이며 원씨도 아니라고 비방하였다. 이는 당시 동탁에게 원씨 일족이 몰살당하자 가문의 복수를 명분삼으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왔던 원소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참고로 원소는 원가에서의 입지는 낮았지만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쇼맨십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6년상이나 불출사, 원가 멸족 사건 등, 원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을 대외에 어필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혹은 악용)하며 이익을 얻은 사례가 꽤 있다.
즉 원술의 주장에 따르면 원소는 사실은 노비의 자식으로 아비가 불분명한 사생아였고 원씨 가문에서 자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씨의 일원인 척 약을 팔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원소는 천하의 둘도 없는 개쌍놈, 패륜아이며 그때까지의 모든 행동이 위선이었음을 강제 커밍아웃당하게 된다. 사실 원소의 본성과 행보를 생각한다면 종놈은 아니더라도 약 판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설령 사생아설이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원소의 행적에 정말 진정성이 있었는지를 재고하는 음모론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원소의 태생에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의혹이 증폭되었는데, 원씨 내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라 사도 원봉의 적자인 원술이 사생아라고 발표해버렸기에 원소 입장에서는 치명타가 될 만도 하다. 그 때문에 철면피로 유명한 원소도 포커페이스가 깨지고 대노할 사건이었다.
원술은 주씨 형제를 몰아낸 후 그 기세를 타고 손견을 시켜 남쪽의 유표도 치게 했다. 손견은 서전을 유리하게 이끌며 양양에서 농성하는 유표를 포위한다. 하지만 손견은 유표가 별동대[12] 를 성 밖으로 내보내 기각지세를 시도하는 것을 저지하려다 너무 깊이 추격하는 바람에 황조군의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죽어버렸다.
원정군 지휘관이었던 손견이 끔살당하자 전세는 뒤집혔고, 원술의 침입을 격퇴한 유표는 한수 이남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굳히게 된다. 반면 손견을 잃은 원술은 남양에서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된다.
2.5. 패배와 재기
한편 북쪽의 공손찬 또한 원소에게 연이어 발리면서 원소의 영향력이 미친듯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에 공손찬은 서주목 도겸을 끌어들여 발간(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해 원소를 압박하는 한편 유비를 고당에, 선경을 평원에 주둔시키며 원소를 압박했으나 원소는 조조와 함께 이들을 모조리 발라버린다. 이에 원술 역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흑산의 장연, 남흉노 어부라와 연합하고[13] 원소계 군벌이었던 조조의 근거지인 진류를 공격했다.
그 동안 군사적으로는 주로 손견에게 의존해 오던 원술이 처음으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펼친 것이고, 그것도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형주 방면을 정리하자마자 감행하는 매우 모험적인 행동이었는데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원소계 군벌인 조조가 연주를 기반으로 황하 이남에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원술과 공손찬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연주에서 조조의 기반이 아직 취약한 틈을 타 조조를 공략하는 것이 유리했다. 또한 원소에게 밀리고 있던 공손찬을 지원하고 조조를 몰아낸다면 흑산, 흉노와 힘을 합치고 공손찬과 함께 남북으로 원소를 압박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재정돈하고 연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핵심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다는 측면도 있다. 이미 원술은 무분별한 수탈로 민심을 잃었고, 손견이 죽은 뒤로 남쪽에서 유표의 압박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술의 영향력은 형&예주뿐만이 아니라 양주까지도 미치고 있었다. 만약 연주를 장악한 뒤 이를 기반으로 내부를 공고히 정돈하기만 한다면 사실상 황하 이남 전역을, 더 나아가 패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이에 더해 원소가 마음대로 임명한 짭퉁 연주자사 조조에 의해 임지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쫓겨난 조정의 정식 연주자사 김상이 원술에게 망명했던 사건은 원술에게 매우 중요한 개입 명분을 제공했다.
한편 이때 장안에서는 동탁이 여포에게 죽고 여포는 이각,곽사에게 쫓겨나자 동탁을 죽여 원씨의 원수를 대신 갚아줬다는 명목으로 원술에게 의탁하는데 삼국지 여포전에 따르면 원술은 여포의 언행이 자주 바뀌는 것을 꺼려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며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원술이 처음에는 여포를 매우 후대했지만 여포가 동탁을 죽인 공을 믿고 마음대로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다가 원술의 미움을 사 쫓겨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포는 원술의 밑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원술과 대립관계였던 원소에게 의탁하며 기병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우지만 여기서도 버릇을 못 고치고 방자하게 굴며 약탈을 일삼다 쫓겨나게 되는데, 이때 생긴 원술과 여포의 악연은 훗날 양자가 공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193년 초, 원대한 전략을 구상한 원술은 마침내 진류로 북진해 올라갔다. 조조가 도겸과 싸우며 견성에 주둔하는 틈을 타 배후를 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했던 듯 하지만 결과적으론 조조군에게 완전히 참패하고 만다.
이후 이어지는 조조의 추격전에서 탈탈 털리고 타격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아예 남양을 버리고 양주의 구강군 일대로 옮겨 도망갔다. 원술의 전략은 좋게 보면 지금까지의 열세를 만회해 자신이 황하이남 전역을 아우르고 서쪽으로는 장연과 어부라가, 북쪽으론 공손찬이, 동쪽으로는 도겸이 제각기 원소를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하고 압박할 수 있게 되는 원대한 계획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잘 안되면 오히려 쓸데없이 전선만 넓어져서 양주에서는 주씨 삼형제, 형주에서는 유표, 연주에서는 조조 식으로 원소계 군벌들에게 완전히 역포위, 역관광을 타는 형국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이 컸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양주로 도망가서는 양주자사 진우를 내쫒는다. 원래 양주자사는 진온이었는데 병으로 죽고 양주 일대에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원술은 진우를 보내 양주자사로 삼았었다. 그런데 정작 원술이 패퇴하자 진우는 과거 신세졌던 원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진우를 공격했고, 진우는 하비로 달아났다. 삼국지 원술전이나 후한서 원술전에서는 진온이 원술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오나 왕찬이 작성한 영웅기에서는 위의 내용이 적혀있다. 이에 대해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수하면서 위의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왕찬이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기록의 신뢰성을 더 높이 산 것 같다. 어쨌든 구강군을 기반으로 이 일대에서 주씨 형제를 완전히 결딴내고 서주백(伯)까지 자칭하는 등 다시금 재기에 성공하였다.
당시 동탁이 죽고 정권을 잡고 있던 이각과 곽사는 원술과 손잡을 생각을 하여 태부 마일제를 보내 좌장군과 양적후의 벼슬을 내렸다. 원소가 헌제를 동탁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해 완전히 무시했던 반면 원술은 적어도 유협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만큼 최소한의 타협점은 있고, 따라서 잘하면 원술의 도움으로 관동지역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술은 관직만 받았을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절로 파견된 태부 마일제를 억류하고 협박해 삥을 뜯었다.
원술은 마일제를 억류한 뒤 부절을 빼앗고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라고 협박하는데, 군웅할거의 시대였다지만 호족들을 포섭하며 일정한 세력권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이거나 적어도 합법을 가장한 방식에 따른 체계가 필요했고, 무력에 의한 지배만으로는 이러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관직은 매우 중요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황제와 동탁 정권은 장안에 고립되어 있었고 정통성 측면에서도 최악이었기에 군벌들에게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시당하는 상황이었기에 각지의 군벌들은 일단 관직을 임시로 임명 혹은 자칭하고 조정에 보고한다는 형태를 취한 것인데 장안 조정의 관점에서 볼때 이들은 반란군이었고, 반란군 수괴의 하나가 자기사람을 천거하는 표를 올린다고 해서 어떤 직을 내릴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애초부터 승인받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고 표면상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는데, 원술은 일단 관직상의 권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던 마일제를 구금하고 태부의 권한으로 자기 부하들을 천거해 관리로 삼도록 하여 부하들에게 내리는 관직의 권위를 포장하며 부하들의 충성심을 얻어내려던 것으로 보인다.
마일제는 유명한 학자인 마융의 후손으로 덕망이 높은 대신이었는데, 원술에게 수치를 겪는 것에 걱정하고 성내다가 얼마 안 있어 죽는다. 이때 원술의 협박으로 마일제의 천거를 받은 원술의 부하들 중 이름이 기록된 게 주치와 손책인데, 일단 손책전에서는 마일제가 손책을 높게 평가해서 벼슬을 준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적당히 걸러서 봐야 할 것이다.
마일제를 억류하면서 조정과의 관계도 냉각되었는지 조정은 원술의 양주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유요를 양주자사로 임명해 원술과 대립하게 했다. 유요는 원술이 점거한 북양주를 피해 장강을 끼고 장강 남쪽에서 1년간 항거하지만 194년에 손책에게 패했고, 장강 이남의 세력들도 차례로 손책에게 격파되면서 원술은 다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2.6. 유비와의 대립
193년에 조조에게 패한 원술이 양주로 달아나 양주자사였던 진온 혹은 진우를 격파하고 북양주를 점거한 채 서주백을 자칭했으며 마일제를 억류했다는 것은 삼국지와 후한서 원술전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나 이후 원술전의 기술은 곧바로 원술의 칭제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 사이의 행적은 다른 인물들의 열전에서 언급되는 기록이나 정황으로 본전의 공백을 채울 수 밖에 없다.
원술이 북양주를 점거한 이후 서주백을 자칭하며 서주의 지배권을 주장한 것에 대해 서주목 도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원술전이나 도겸전에서는 딱히 나타나지 않으나 여범전에서는 여범이 손책의 지시로 오국태를 맞이하러 광릉으로 가자 원술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해 붙잡아 고문하는 등 원술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나타난다. 한때 원술과 도겸은 반원소,반조조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제휴하기도 했지만 원술이 근거지를 서주와 인접한 북양주로 옮긴 이후 서로 이권이 충돌하게 되었고 원술의 서주백 자칭을 기점으로 불화가 표면화되며 대립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4년에 도겸은 유비에게 자신의 지위를 넘긴 채 병사했고, 195년 시점에 원술은 서주 침공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던 여강태수 육강을 2년의 공성 끝에 축출했다. 원술은 196년부터 유비가 지키는 서주를 공격했으나 서로 번번이 이기고 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결정적인 승부를 가리지 못했는데, 마침 유비 진영에서 근거지인 하비를 지키고 있던 장비가 하비상 조표와 대립하면서 내전이 일어났고, 여기에 개입한 여포가 단양병들의 추대로 하비를 손쉽게 장악하자 급보를 들은 유비는 황급히 귀환했으나 하비에 도착하자마자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이 탈영하면서 공성의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등을 돌려야 했으며, 유비는 광릉을 거점으로 세력을 재조직하고자 했으나 거듭된 원술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군량도 떨어지고 군중에 식인이 발생할 정도로 곤궁해진다.
이때 원술은 여포를 끌어들이기 위해 승리의 공을 여포에게로 돌리며 여포의 하비 장악을 부추기고 물자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크게 패하고 광릉에 고립된 유비의 숨통을 끊기 위해 기령을 보냈으나 여포는 서주목을 자칭하고 유비의 투항을 받아들이며 기령을 막아서는데, 여포가 유비를 살려준 것은 원술이 장패와 같은 태산의 군벌들과 연합해 자신을 고립시키며 압박할 것을 우려한 것이라는 것이 삼국지와 후한서 여포전에 동일하게 나타나나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이와 별개로 여포가 유비의 투항을 받아들인 것이 원술이 군량을 보내다가 다시 끊은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여포와 틀어지게 된 원술은 학맹과 진궁을 사주해 여포에게 반기를 들 것을 부추겼지만 학맹의 반란은 고순의 활약으로 진압되는데, 원술은 이에 두려워하며 여포에게 서로 사돈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여포는 이를 받아들인다.
한편 삼국지 선주전에서는 유비가 196년에 원술과 싸우던 중 조조를 통해 진동장군,의성정후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무제기에 따르면 진동장군은 조조가 196년 6월에 헌제를 영접하는 과정에서 받은 직책이며 같은 해 9월에 조조가 대장군이 되기 때문에 이 일이 빨라도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여 조정을 장악한 196년 9월 이후의 일로 여겨지나 삼국지 여포전에서는 이미 유비를 내쫓고 서주목을 자칭한 여포가 원술의 사주를 받은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시점이 196년 6월로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명백하게 시점이 틀렸다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무제기에서는 여포가 서주를 취한 것을 196년에 일어난 일로 뭉뚱그리고 있어 연도 외에는 정확한 순서 파악이 어렵다.
원술은 오랫동안 서주의 지배권을 탐내고 있었고 배후의 위협들을 차례로 제거한 이후 야심차게 친정에 나섰지만 순욱전에 나타나는 순욱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유비 치하의 서주는 도겸 시절의 패배를 거울삼아 작정하고 군비에 치중했기에 쉽게 넘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며, 유비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원술은 여포에게 쓴 편지에서 원술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라며 낭패감을 드러내는데, 당시 유비는 지명도가 그리 높은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대 패권다툼의 메인 플레이어였던 원술의 시점에서는 유비를 철새 행보로 벼락출세한 듣보잡 뜨내기 정도로 우습게 여겼던 듯하다.
물론 유비가 실제로 하비상 조표를 비롯한 내부 반대파들의 저항으로 인해 쫓겨났던 만큼 명성이 낮고 굴러온 돌이었던 유비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성립되며 원술도 이를 이용하려 했던 측면이 나타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비의 불안정한 입지를 찔러 서주를 장악하는 과실을 따먹은 것은 원술이 아니라 여포였고 여포는 하비를 장악하자 곧바로 서주목을 자칭하며 상황이 원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기에 원술은 잔뜩 공들여 친정을 나서서 고전 끝에 기껏 유비를 격파하고도 정작 원하는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원술전 본전에서는 이 무렵의 행보가 완전히 생략된 채 칭제를 향한 원술의 빌드업이 중점적으로 묘사되는데 사서상 묘사되는 원술은 이때부터 '''슬슬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다.'''
2.7. 황제 참칭
이 이전인 195년, 이각, 곽사의 무리에게 핍박받던 헌제 유협이 장안을 탈출했는데, 당시 한참 잘 나가고 있던 원술은 이를 보고 한 황실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판단해서 원씨 적통의 위광을 믿고 황제를 참칭할 마음을 먹었으나 부하들이 만류하자 그만두었다.
하지만 197년, 원술은 예언서의 내용을 명분삼아 결국 천자를 자칭했다. 국호는 중(仲).[14] 그와 더불어 자신의 거성인 수춘이 있는 구강군을 '''회남윤'''(淮南尹)으로 고쳤다.[15] 반면 촉한과 오는 칭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장관하는 군의 태수와 행정구역을 윤尹으로 승격시키지 않았다. 이는 자칫 한나라 400년 역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으로 보여 민중에서 거부감을 크게 느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인데,[16] 원술의 부하들은 미친듯이 반대하였으나 원술이 우격다짐으로 강행하였다. 원술은 황제로 즉위하자 황제에는 대장군이 꼭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 중 장훈을 자신의 제국인 중나라의 대장군에 임명했다.
원술이 황제에 오른 근거가 완전히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나라 시기의 유학은 후대의 유학과는 그 모습이 크게 달라서 참위와 오행을 중시하였으며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미신에 가까웠다. 사실 공자, 맹자, 순자로 대표되는 선진유학 시기에 이미 유학사상은 상당히 종교적 성격이 옅은 편이었다.[17]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한 차례 타격을 입은 후 복원이 이루어진 한조 시기에, 동중서 등이 상제(上帝)의 권위를 강화하고 오행론을 적극적으로 접목하여 유학의 강령을 우주적 계시화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것이 민간의 도참 및 민간신앙과 이상하게 짬뽕이 되기 시작한 것.[18] 그래도 전한 시기에는 어떻게든 이전의 공맹유학을 복원하려 시도했으나, 그나마도 후한이 세워진 후로는 종래의 유학이 가장 중요시했던 '괴력난신의 타파' 기조가 크게 줄어들고, 도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며 유학인데 유학인듯 아닌듯한 '''이상한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는 도교와 유학의 혼합 또는 근세 기독교나 말기 성리학이 보여준 망조에 가까웠다.[19][20]
물론 당대에도 이러한 기조를 비판하는 정현이나 노식 등 고명한 후한 시기 유학자들이 있었지만, 아직 후대의 당나라처럼 과거제도를 통해 국학으로서의 유학이 어느 정도 체계화되거나 학문의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는 풍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행이니 도참이니 주역이니 하는 것들을 '제법 그럴싸하게' 우길 말빨이 된다면 그것도 유학의 한 해석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던 셈이다. 당장 우번이 주역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걸 공융이 칭찬했으며,[21] 태평도니 오두미도니 하며 후한 말은 도교가 크게 흥성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자왈 맹자왈의 시대가 아니었다.
일부 지배층이나 식자층은 공자왈 맹자왈 순자왈 증자왈 할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백성들은 아이고 신선님 아이고 선녀님 하는 도교 시대였으며, 심지어 지배층조차도 손자에 주석을 달았던 조조나 법가나 군사계열 책의 독서를 권장한 유비 등 후대에 비하면 유교 경전을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22] 이러한 분위기는 군웅할거와 삼국정립 시기의 현학#s-1을 거쳐 청담사상으로 이어진다. 후한 말~위진남북조 시대까지는 대체로 도교가 사실상의 헤게모니로 작용했고, 불교는 부도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던 시기였으며 성리학과 양명학이 생기고 유교 철학이 정립되려면 수백 년은 지난 송나라~명나라 때까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여튼 후한 말엔 오행상생이 유행하여 한나라를 불에, 순임금을 흙에 비정하는 기조가 대세였다. 오행상생에 따른다면 한나라의 뒤를 이을 자는 흙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23] , 마침 원술의 원씨가 순임금의 후예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도대체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고대엔 이런 게 명분으로 먹혔고[24] , 장각도 황건의 난을 일으킬 때 한나라를 대체할 천하로 황천을 주장했다. 다만 한나라를 대체할 자가 원술은 아니라는 여론이 중론이었을 뿐이다.
이때 손책은 원술에게 경고장의 형식을 지닌 서한을 원술에게 보내고 칭제하지 말 것을 진언했으나 원술은 씹었고, 이게 원인이 되어 원술은 본인에게 있던 최고의 아군인 손책과 척을 졌고 손책은 원술로부터 이탈하게 된다. 이 서한의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술은 한 황실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지만 헌제는 조조에게 옹립됨으로써 오히려 표면상이나마 황실의 위세는 더 높아졌다. 조조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때까지 헌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던 원소조차도 헌제가 내린 대장군의 직위를 받아들임으로써 헌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원술이 칭제하자 휘하 세력인 손책 등이 완전히 원술과 결별하고 독립해서 나갔는데 이로 인해 원술은 사방에 적을 두게 되었다.
2.7.1. 원술의 칭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
하지만 원술도 후한 조정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조조보다 앞서서 협천자를 시도했다고 보는 견해는 한국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꽤 오래 된 떡밥이다. 이는 나름의 사료적 근거도 뒷받침되고 있는데〈조진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략에선 이 무렵 조조가 원술의 무리와 치열하게 싸웠고 이때 조진의 부친인 진소가 조조 대신 죽었다고 하며 무제기에서는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기 위해 서쪽으로 가는 과정에 예주에서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를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있고 원사의 투항을 받은 후 조조는 여남 일대의 황건적 잔당인 하의, 유벽, 황소, 하만 등을 격파하는데, 연의에서 이들은 여포와 싸우는 도중에 군량이 모자라게 된 조조에게 공격당에 물자를 강탈당하는 역할로 나오지만, 무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손견이 예주목이었던 시절부터 원술에게 협력해 왔던 범 원술계 군벌들이었다.[25]
이에 더해 유협의 측근들도 원술과 상당부분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 한데, 위장군 동승은 원술과 연합해 조조의 협천자를 저지했으며,[26] 조조가 황실을 장악하면서 쫓겨난 한섬, 양봉은 원술에게 의탁했다. 양표 또한 원술의 인척이며[27] 조조가 훗날 양표를 실각시키는 표면적인 이유도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목이었다. 게다가 원술은 분명히 참칭 이전까지는 유협의 정통성을 결사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동승 같은 헌제의 측근들이 보기에 원소의 끄나풀로 진의가 의심스러워 보였을 조조와 달리 원술은 일단은 원소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친 헌제파 포지션이었다.
비록 원술이 마일제를 억류한 채 장표에 서명이나 하는 기계로 만들어 조정의 기대를 한 차례 배신하긴 했지만 조정의 입장에서 조정의 정통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던 원소나 원소계 세력들을 원술보다 긍정적으로 인식했을 리가 없으니, 이들에게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장양이나 원술 같은 비 원소계면서 수도권과 인접해있는 세력들을 우선적으로 포섭하고 이들을 통해 정국 안정을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인 범주의 판단이었고 동소전의 기록을 보면 196년 시점까지도 조조는 원소의 끄나풀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동승이 원술과 연합해 조조를 저지했다는 무제기의 기록은 조정의 입장에서 군벌들 중 그나마 대화라도 통할 것 같은 상대가 원술이라 낙양 환도를 앞둔 시점에서 낙양과 인접한 예주에도 여전히 일정부분 영향력을 유지하는 원술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원술도 이런 여론에 편승해 조조를 견제했으나 조조는 진국상 원사의 항복을 받고 하만,황소,하의,유벽 등 원술계 군벌,토호들을 군사적으로 박살내며 이와 동시에 조정에 선물공세를 퍼부어 조정의 경계를 풀고 한섬과 동승 간의 불화를 틈타 동승의 요청으로 낙양에 진입하면서 협천자 레이스의 최종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조조가 이토록 협천자를 위해 196년 내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동안 원술의 행보는 본전에서는 확인조차 되지 않으며 동승과 연계해 조조를 견제했다는 무제기의 기록과 서주를 두고 유비와 드잡이질을 벌이다 여포가 서주를 장악하자 학맹과 진궁을 회유해 여포를 축출하려 했고, 이 계획이 실패한 후 여포와 사돈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는 선주전,여포전의 기록 뿐이고, 본전에서는 이 행적이 생략된 채 바로 칭제 메타로 넘어가는데, 원술전 본전에 생략된 정황들을 종합하면 원술은 적어도 196년 시점까지는 조정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예주에 여전히 남아있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통해 조조의 조정 장악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더욱 대담한 공세를 펼쳐 오는 조조에 맞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예주로 향해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맞대응하기 보다는 지지세력들을 방치한 채 서주백을 자칭한 이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서주 원정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등 안이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조정 장악은 물론 서주 장악이라는 전략적 목표 달성까지 전부 실패하는 최악의 형태로 스텝이 꼬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유비가 조조에게 진동장군,의성정후의 작위를 수여받은 것 또한 조조가 순조롭게 조정을 장악하는 동안 원술의 어그로를 잔뜩 끌며 시간을 벌어준 것에 대한 논공행상의 성질을 가진다고 볼 수 있고, 원술이 서주 장악이 실패하고 유비 축출까지 가로막히며 여포에게 물을 먹었음에도 여포와의 정면 충돌을 극히 꺼리며 학맹,진궁 등을 부추기는 정치적 공작을 통해 여포를 처치하려 했고 이 시도가 실패하자 아예 두려워하며 사돈을 제의하는 등 저자세로 나오는 것도 앞뒤가 들어맞게 되는데, 결국 이 시점에서 황실은 조조가 장악하게 됐고 원술은 앞서 언급된 마일제 능욕 사건만으로 충분히 책을 잡혔는데 황실을 자신이 장악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적대 세력인 조조에게 황실을 내 주었으니, 어차피 그때까지 고수해 왔던 충신의 이미지는 날아가고 한순간에 역적으로 지명될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으므로 여포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원술 나름의 입장에 따라 호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원술의 칭제는 이미 붙잡을 길이 없어진 충신 이미지를 포기한 채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며 후한 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해 후한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조정에 거역하는 기존의 논리적 모순을 바로잡고, 도참사상을 통해 지배의 당위성을 세우고 명문 원씨의 적통이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부귀영화를 보증해 지지세력을 최대한 결집시키는 방책으로 볼 수 있는데, 엄청난 모험수이긴 하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생각이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원술이 칭제로 단결시켜려 했을 주요 지지세력 중의 하나인 손책은 전술했다시피 원술이 칭제하자마자 독립해버렸다.[28]
2.8. 끝없는 몰락
삼국지 원술전에 따르면 원술은 당시 패국상을 지내고 있던 서주의 명사 진규와 어릴적부터 친분이 있었다. 원술은 진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친구사이이면서 어떻게 조조를 도울 수 있냐고 따지고 자신을 도와 대업이 성공하면 진규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이라며 회유하지만 진규는 천자를 옹립하고 있는 조조를 정상 질서로의 복귀라는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은 국가재건의 기수에 빗대며 칭송하고 원술이 길을 잃었으나 아직 돌아올 수 있다며 원술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원술의 칭제를 만류했다.
앞서 서술했듯 원술은 서주를 장악하고 있었던 여포와 자식간의 정략결혼을 통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조조에 맞설 우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원술을 견제하던 여포 역시 조조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서로 인척관계를 맺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원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술은 칭제와 동시에 여포에게 사신을 보내 칭제한 것을 알리며 혼약에 따라 딸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여포는 원술의 칭제 사실을 알고도 딸을 순순히 원술에게 보내는데, 원술이 공식적으로 칭제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진규가 원술을 만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이듯 여포 또한 원술이 이미 조조와 허도 조정에 대항해 칭제할 계획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손잡는다면 서주와 양주가 합종하는 것이라 국가적 혼란이 그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조정을 봉영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조조에게 정의가 있으니 원술과 혼사를 맺으면 오명만을 뒤집어쓸 것이라며 여포를 설득하고 여포는 원술이 칭제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딸을 보냈음에도 진규의 말을 듣고 기병대를 급파해서 이미 보냈던 딸을 되찾아오고 원술의 사신인 한윤은 압송해 조조에게로 보낸다. 여포 본인도 이미 조조가 황제를 옹립하고 원술이 칭제를 공식적으로 밝힌 시점에서 진규의 지적과 같은 너무나 당연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굳이 딸을 보냈다가 진규의 설득에 결정을 물린 이유는 불명확하다. 이에 대해 사서상으로는 원술이 이전에 여포를 받아주지 않은 일을 비롯한 원술에 대한 여포의 개인적 원한이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사서상 나타나는 상황에서도 원술은 진궁과 학맹을 부추겨 여포를 죽일 것을 사주해 놓고 이 시도가 실패하자 뻔뻔하게 혼담을 제의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여포는 나름의 이해득실을 고려해 원술과 혼약을 맺긴 했으되 원술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상당히 복합적이었을 것이고, 원술과 오랜 개인적 친분이 있기도 했던 진규는 아마 이런 측면을 부추겼을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한윤을 참수했고 완전히 체면을 구긴 원술은 수 만명의 군사를 동원하고 장훈과 교유를 대장으로 삼아 서주를 친다.
여포는 두려움에 떨며 진규를 책망했지만 진규는 원술의 부장인 한섬, 양봉이 원술에게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전리품을 모두 그들에게 준다는 약속을 하면 넘어올 것이라고 여포를 설득했다. 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원술군과 여포군과 불과 100보 거리에 다다랐을 무렵 진규의 회유공작에 넘어가 있던 한섬과 양봉의 군대가 배신해 일제히 원술군을 공격했으므로 원술군은 철저히 괴멸당하고 망신만 당하게 된다. 한섬과 양봉이 배신하게 된 표면적인 동기 역시 일단은 원술이 참칭한 것이 원인이었는데 이들은 헌제의 수레를 호송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로 한실에 협력한 충신들인데 천자를 자칭한 원술에게 붙어 역적의 누명을 써서야 되겠는가라는 명분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대승리를 거둔 여포는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며 회수를 건너 원술의 근거지인 수춘까지 당도했고, 아때 여포는 원술에게 편지를 보내 (원술이) 휘하에 싸움에 굶주린 맹장,무사들이 많아 제어하는데 곤란을 겪는다며 항상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회수 남쪽에서 여포 자신이 호랑이처럼 걸어다니는데도 맹장과 무사들은 보이지 않고 원술은 수춘에서 쥐새끼처럼 숨어있다며 조롱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를 받은 원술이 보기 5천을 이끌고 친히 응전하러 나섰지만 이미 회수를 건넌 여포군이 크게 비웃으며 다시 원술을 조롱한 뒤 돌아갔다는 능욕수준의 일화가 전해진다.
원술은 세력이 끊임없이 약해지자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진(陳)국을 쳐서 점령한다. 본디 원술은 형주 북부와 예주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했으며 근거지를 양주로 옮긴 이후에도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와 여남의 원술파 군벌들이 확인되는 등 예주에 상당한 지지세력을 갖추고 있던 것으로 보이나, 낙통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사승의 후한서에 따르면 당시 진국의 제후왕이었던 진왕 유총#s-1은 이미 원술이 예주에서 주씨 형제와 대립하던 시절부터 사방으로 원술의 영향권에 둘러싸인 섬 같은 판도에서도 자체적인 군사력과 통령체계를 엄격히 유지하며 원술과 선을 그은 채 독자노선을 걷던 인물이었고 낙통의 아버지인 낙준은 진국상이자 유총의 유능한 보좌로서 명망이 높았다. 유총이 다스리던 봉국에서는 경계지역을 철통같이 지켜 도적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아 재해가 발생하지 않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인접한 지역의 거주민들 대부분이 유총에게 귀부하면서 유총이 10만의 무리를 거느렸으며 주와 군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양하에 주둔하며 보한대장군을 자칭했다고 나온다.
두 기록은 동일하게 원술이 군량을 요구했고 평소부터 원술을 싫어했던 유총과 낙준이 이를 대번에 거절하자 자객을 보내 두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근거지를 옮기기 이전부터 원술의 통치는 평가가 나빴고 원술이 근거지를 수춘으로 옮기면서 거리도 멀어진데다 칭제로 명분도 잃었고 여포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등 원술의 상태가 총체적으로 좋지 않았고 한때 예주에서 원술이 가지던 입지는 능력과 덕망을 검증한 고귀한 제후왕 유총에게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었고 유총은 보한대장군을 자칭하며 원술과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포지션으로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진국을 치는 한편 자객 장개양을 보냈고 장개양은 거짓 투항한 뒤 술자리에서 유총과 낙준을 죽였다. 남은 무리를 손쉽게 정리하고 순조롭게 진국을 점령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조조는 진왕의 죽음을 명분삼아 곧바로 개입하며 실력행사에 나서는데 이때 원술은 꼴사납게도 조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하장수인 교유,이풍,양강,악취를 남긴 채 본인은 회수를 건너 수춘으로 달아났고 교유 등은 패하여 모조리 참수된다. 그리고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원술은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여포와 조조에게 패한 이후 원술전에 나타나는 기록들은 황제를 자칭한 이후로 끊이지 않는 사치의 기록들인데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 일종의 현실도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원술은 후궁을 수백 명을 두었으며 황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로 상당한 돈을 낭비하였다. 원술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원술의 후궁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풍씨는 원술의 후궁 중에서도 미모가 뛰어나 원술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이때 다른 후궁들이 이를 시기하여 풍씨보고 지조와 절개가 있음을 보이면 원술의 총애를 더 받을 수 있으니 원술앞에서 항상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라라고 권유하니 풍씨는 원술만 만나면 눈물을 흘렸고 원술은 이를 가련히 여겼다. 그 뒤 얼마 안있어 후궁들이 풍씨를 목졸라 죽이고 기둥 위에 목매달아 놓았더니 원술은 그녀가 항상 슬퍼하는 모습을 보아온 지라 슬픔에 못이겨 자결한 것으로 여겼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치와 무도함이 극에 달하여 그가 다스리던 강회(양자강, 회남 일대)에서는 굶주린 백성들끼리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이런 기근은 원술만의 잘못은 아니고 기후적으로도 197년부터 원술의 영역이었던 강회엔 지독한 가뭄이 덮쳐온 탓도 컸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선 원술도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다만 몰락 직전 원술의 마지막 발악으로 싹이 잘려버렸던 유력 정치주자 유총만 해도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농사에 전념토록 해서 해마다 풍년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원술은 번번히 군사원정과 토목공사를 밥먹듯 벌였기 때문에 이런 변명이 상당히 궁색하기도 하며, 자연재해를 이유로 일부 책임이 경감된다 한들 백성 구제는커녕 고기와 비단이 썩어날 정도로 개인적 사치만 부리며 현실도피의 늪에 빠진 것은 도저히 변명이 어려운 추례한 모습이었다.
결국 원술의 부하로 있던 패국상(相=봉국의 승상으로 군 태수급) 서소#s-2가 굶주리던 백성들을 보다못해 원술이 군량미로 쓰려고 비축해둔 쌀 10만 섬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다. 당연히 원술은 격노하여 군사들을 시켜 서소를 붙잡고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때 서소는 원술에게 "한 사람의 명을 바쳐 수많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라고 원술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에 원술은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며 '''"그대는 어찌 그런 아름다운 이름을 혼자서만 남기려 하는가, 나와는 함께 누릴 수 없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일화로부터 원술의 성향을 알 수가 있는데 원술은 천성이 오만방자하고 사치를 일삼았을지라도 의외로 감수성이 섬세하고 유독 '세간의 평가' 내지 '명성'을 크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정치적 행보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실제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면서도 세간의 명사들을 초빙하려 무척이나 애썼다. 그 명사들이 죄다 원술을 피해다녀서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서소는 원술의 명예욕 혹은 감상적 경향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원술전의 기록은 여기서 끊기고 몰락하여 원담에게 의지하러 가는 내용으로 이어지지만, 여포전에 따르면 이후 여포가 다시 원술 편으로 붙어 고순을 보내 유비와 하후돈을 격파하고 조조의 본대가 도착하자 원술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29] 주석으로 인용된 영웅기에 따르면 당시 원술은 여포의 처지가 멋대로 혼약을 파토낸 인과응보라며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여포가 무너지면 자신도 끝이라는 판단에 따라 몸소 군을 이끌고 여포를 구원했다고 하나 삼국지와 후한서의 여포전 본전에서는 원술이 능히 구원하지 못했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원술이 도착하기 전에 여포가 패망했거나 어쩌면 이미 원술도 힘이 다 빠진 상태라서 강해진 조조의 포위망에 정면으로 도전할만한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원술의 세력은 거듭된 패배에 가뭄과 학정까지 겹치는 바람에 민심이 완전히 원술로부터 이반했고, 백성들이 난민이 되어 사는 곳을 떠나면서 세금도 걷을 수 없게 되자 원술의 마지막 밑천이었던 군대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졌다. 북쪽은 조조, 남쪽은 손책이 원술을 삼키려 하였고, 애증의 관계였던 여포는 이미 패망해서 죽은 후였다. 재정적 자립이 불가능해진 원술은 궁여지책으로 궁을 불사른 뒤 남은 무리를 이끌고 휘하 세력인 여강의 진란, 뇌박에게 의지하려고 했으나 진란 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주군이랍시고 뜬금없이 와서 자기들이 힘들게 모은 쌀을 축내는 격이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또한 원술을 받아들였다간 조조, 손책 등 주변 거물들의 미움을 살 것이 분명하므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원술이 강했을 때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힘도 다 빠져서 별로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진란과 뇌박은 원술을 성문을 닫아걸고 원술에게 저항했고, 원술은 군량이 모자라 공성전을 벌일 여력조차 없었는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부하들을 응징하지도 못하고 되돌아가지도 못한 성 앞에 진을 치고 3일 동안 머무르다 군량이 떨어져 되돌아갔다.
이 사건은 원술에게 상당히 치명적인 타격이었는데, 그나마 원술이 의지할 대상으로 여기며 찾아갔던 진란과 뇌박이 주인인 원술을 정면에서 거부하며 문전박대했음에도 원술이 이들을 응징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군대를 물린 것은 원술의 다른 부하들도 원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곧 원술을 중심으로 묶여 있던 토호들이 원술이라는 간판을 포기하고 제각기 각자도생에 나서면서 원술의 세력 자체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의미했다.
휘하세력의 이탈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원술은 근심과 절망에 빠져 어찌 할 줄 모르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하며 결국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원소에게 황위를 양보하며 투항하기로 마음먹고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천하가 원씨의 것이 될 것이라는 설레발만 빼면 한나라의 운명을 정확히 꿰뚫고 있긴 했다. 원소는 내심 이말이 옳다 여겼다고 하며, 이 무렵 원소 끗발이 장난이 아니었던 터라[31] 여기에 혹해서 한번 여론을 떠 보기도 했다. 주부(主簿) 경포(耿苞)로 하여금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칭제하라고 권하도록 자작극을 꾸몄는데, 막상 해보니 신하들이 흥분하며 경포를 죽이라고 하자 바로 죽이고는 입을 싹 닦았다.
칭제 자작극 사건의 결과로 원소가 원술을 손절했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으나, 어쨌든 청주를 다스리던 원담은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고 했다.[32]
2.9. 비참한 최후
그간 대놓고 무시하던 원소에게 읍소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미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존심을 세울 여력이 없었다. 원술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청주로 향했는데, 도중에 조조가 유비와 주령, 노초를 하비로 보내 가로막는 바람에 청주에 갈 수 없었다. 원술은 우회로를 택해서 수춘으로 발길을 돌려 강정에 이르렀는데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주방에는 기껏 맥곡 가루 30곡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에 더위가 극심했기 때문에 원술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꿀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결국 구하지 못했다. 이에 원술은 평상에 걸터 앉아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더니 '이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엎어져서 피를 한 말이나 토하더니 결국 죽었다. 이처럼 당대의 명문가 출신인데다 한때 최고의 유력자로 끗발을 날렸던 인물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이것이 199년 6월의 일로[33] , 한때 황제를 자처했던 원술의 말로 치고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나마 조조의 명령으로 원술을 요격하려 나선 유비와 주령을 만나 역적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게 오히려 다행이지 않을까 싶긴하다.
이 죽음이 워낙 인상적인 탓에 후대 사람들이 '원술' 하면 바로 '꿀물 황제'라는 별명을 떠올릴 정도로 꿀물은 원술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후대의 각색본들은 이 원술의 최후를 좀더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각종 덧칠을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연의에서는 유비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고, 뇌박과 진란이 이때다 싶어서 군량을 다수 강탈하고, 도적떼들의 공격까지 받아서 위와 비슷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이 와중에도 밥이 거칠어 넘어가지 않는다고 꿀물을 찾았고, 이에 요리사가 "꿀물은 커녕 샘물도 흔치 않은뎁쇼, 병사들이 흘린 핏물은 널려있구먼요"라고 퉁명스럽게 비아냥대서 울분이 터져 사망한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원술이 물을 찾으러 민가에 들어가자 원술임을 알아본 백성이 있던 물도 일부러 다 엎어버린 후에 "물이 방금까진 있었는데 이젠 없소. 피라면 내 몸에는 조금 남아 있고 다른 건 다 당신에게 뺏기고 말았소. 그러니 이제 내 몸을 잘게 썰어 피라도 빨아 잡수시오."라며 원술을 가혹하게 내쫓아버린다. 직후 "내가 물 한 모금 못 얻어 마시는 황제가 되다니!"라고 절규한 후 피를 토하고 죽었다. 김홍신 평역판 연의에서는 이를 좀 더 극적으로 서술했다. 원술이 남의 집에 도착해서는 무턱대고 "짐에게 꿀물을 다오!!"라고 소리쳤는데 그 집주인이 냉소를 지으며 "꿀물? 있다면 핏물밖에 없소."라고 응수하자 "저런 무례한 놈이-"라고 소리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2.10. 사후
원술이 죽자 남은 무리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원윤과 원요, 황의 같은 원술의 일족들은 과거 원술이 임명해 놓은 여강태수 유훈#s-2에게 의지했으나, 이와 달리 손책에게 귀의하려 한 양홍과 장훈은 유훈에게 토벌당했다. 원술의 직계세력들이 여전히 많기는 많았는지 원술의 무리를 흡수하면서 세력이 비대해진 유훈은 군량이 부족해졌고, 예장태수 화흠에게 군량을 요청하지만 여의치 않는다. 이때 손책이 여강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며 유훈과 거짓 동맹을 맺고 남쪽으로 군대를 동원하라고 부추긴다.
손책은 황조#s-2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유훈이 남쪽으로 출정하여 환성을 비운 즉시 그 뒤통수를 거하게 날려 주유와 함께 2만 명을 직접 거느리고 환성을 점령한 뒤 유훈, 원술의 처자식을 모두 사로잡는다. 이후 원윤의 행방은 묘연하지만 원술의 아들 원요는 손권 아래서 낭중령이 되고 원요의 여동생이자 원술의 딸은 손권의 후궁에 들어가 원부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원요의 딸이자 원술의 손녀는 손권의 오남 손분#s-2의 아내가 된다.
원술의 무리를 받아들인 게 화근이 되어 유훈도 결국 손책에게 망한다. 손책은 사로잡은 무리들을 모두 동쪽의 오군으로 보내고 부하였던 이술을 여강태수로 삼아 3천 명과 함께 주둔케 한 뒤 자신은 전군을 이끌고 유훈을 추격하였다. 유훈은 강하쪽으로 물러나며 손책에 저항했지만 손책이 모조리 때려잡는다. 결국 모든 것을 손책에게 빼앗긴 유훈은 조조에게로 달아난다.
3. 평가
漢末刀兵起四方(한말도병기사방) 한나라 말기 군벌이 사방으로 일어나더니
無端袁術太猖狂(무단원술태창광) 원술이 감히 미쳐 날뛰었네
不思累世為公相(불사누세위공상) 대대로 공경 벼슬 누린 것은 생각않고
便欲孤身做帝王(변욕고신주제왕) 갑자기 홀로 제왕이 되려 하였네
強暴枉誇傳國璽(강포왕과전국새) 난폭하게 부질없이 전국옥새를 자랑하다가
驕奢妄說應天祥(교사망설응천상) 교만하고 사치하여 망령된 말을 하니 응당 천벌을 받았구나
渴思蜜水無由得(갈사밀수무유득) 목이 말라 꿀물을 찾지만 얻지 못하고
獨臥空床嘔血亡(독와공상구혈망) 텅빈 침대에 외로이 누워 피 토하고 죽었도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원술의 최후에 대해 평한 시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란하였으니 그가 망한 것은 자업자득일 뿐이다
당대에도 후대에도 최악의 평가를 받았던 인물. 천하를 휘어잡을 수 있는 탁월한 조건을 갖고 태어났으나 능력, 인성, 운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했고 과욕을 부리다가 몰락을 자초한 경우이다. 결국 가짜황제 역적원술, '''꿀물좌''' 등 웃기는 별명들과 함께 웃음거리로 남고 만 자.사치스럽고 음란하다는 말만으로는 원술의 거대한 악행을 간단히 평할 수 없다
배송지, 정사 삼국지 주석
3.1. 현대의 평가
원술에 대한 전근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항상 최악이었고 모자라는 능력으로 분수에 넘치는 야심을 부리다 비참하게 몰락했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딱히 재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동탁은 종종 파격적 재해석이라는 명목 아래 사실은 개혁자였다는 어그로성 논평이나 각색이 유행을 탔던 것에 반해 원술은 그런 것도 없고 오히려 소인배적 면모가 극대화되며 희화화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번역된 역사적 기록들이 인터넷 상 관련 커뮤니티에 퍼지고 원술에 대한 분석적 담론들이 나타나는 팬덤문화 발전의 과정에서 원술은 일정 부분 재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강한 자의식으로 인해 젊은시절부터 복합적 평가를 받아왔을지언정 한때는 대단히 인기있던 유력 정치주자였고, 전략적 구상과 추진력만큼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동탁을 피해 맨몸으로 달아났지만 손견이라는 강력한 무장을 포섭하며 드넓은 남양군을 장악했고, 헌제의 정통성 문제와 유우 추대라는 일종의 분리독립 이슈로 표류하던 반동탁 연합에서 친헌제 반동탁과 헌제 구출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하며 낙양을 수복해버리는 강렬한 면모를 보였으며, 이후 이어지는 원소와의 대결에서도 공손찬-장연-어부라-도겸을 동원해서 원소와 친원소 군벌들에게 대항하는 대포위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원술의 이런 면모들은 대부분 소탐대실의 결과로 나타났는데 그는 큰소리 쳐대던 것과 달리 이런 전략적 구상을 현실화시키고 판도를 결정지을 군사적 승부에서 아주 취약한 모습을 보였고, 그나마 나타나는 성과의 대부분은 손견을 비롯한 부하들의 공에 기댄 것이 많았다,[34]
이런 점 때문에 원술은 명문 원가의 마지막 적통 생존자로써 천하를 호령할듯한 기세를 선보였지만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중대한 전투에서 번번히 패배하는 종이 호랑이 같은 처지가 되었으며, 부족한 군사적 능력을 메꾸기 위해 상대 진영을 깊숙히 이간질하고 반란을 부추기며 자객을 보내는 등 암수와 모략에 의존하고 이리저리 태도를 바꾸는 모습은 그의 정치적 신뢰도를 적잖이 훼손시켰는데 실제로 그의 몰락에 결정적 역할이 됐던 여포가 일방적으로 혼약을 깨고 조조에게 붙어버린 사건은 물론 여포의 줏대없음과 어리석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런 원술의 행보에 시달려 왔던 여포가 원술에 대한 감정적 원한과 불신을 가지게 되면서 촉발된 측면이 크고, 여포만큼이나 원술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손책의 이탈 역시 원술이 여러차례 말을 바꾸며 손책에게 감정적 피해의식을 심어준 것이 크게 작용했다.
또한 원술이 자신의 전략구상을 강력히 추진하며 중국 정세를 뒤흔들던 바탕에는 가혹한 학정이 깔려있었고, 그러면서도 중요한 전투에서 번번히 패하는 등 실패한 밀덕후 같은 모습을 보이던 상황에서 원술은 개인적 사치향락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질 정도로 처신에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나 원술의 전기에서 193년 이후의 행적이 끊어진 채 도참에 심취해 황제를 참칭하는 모습으로 곧바로 넘어가는 점에서 보이듯 사서에서 나타나는 원술은 처음부터 참칭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고, 기록의 교차검증을 통해 나타나는 원술의 칭제 시점 상황은 그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원술이 역적의 상징으로 불리한 증언들 위주로 기억되고 그 증언들이 부정적 시선 아래 편집되면서 실제 원술과는 괴리가 있는 굴절된 인물상을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어느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3.2. 능력 및 인성
원술이 양아치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기는 하고 실제로도 명문가 빽을 믿고 오만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의외로 인품에 대한 일화는 오히려 '''인간적'''인 부분이 많다. 조조나 원소, 동탁, 공손찬 같은 인격 자체가 의심되는 몇몇 군웅보다 훨씬 인간적인 면모를 자주 보이는 군웅이 원술이다. 후술되는 육적회귤 고사도 그렇고, 서소와 관련한 일화도 그렇고, 후궁 풍씨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손책과의 관계도 잘 보면 원술이 자꾸 손책을 이용해 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조가 조인을 휘하에서 쓰려고 태수로 임명하는 대신 의랑으로 임명해 곁에 두고 아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원술 또한 손책을 직속으로 두고 싶어서 독립을 막았을 가능성도 있다. 원술이 손책을 아들과 같이 대하며 손책이 원술의 군영에서 법령을 어긴 것을 사죄하자 오히려 손책을 두둔하는 등 노골적으로 손책을 편애해서 군중에서 더욱 손책을 두려워하고 꺼렸다는 기록도 남아있기 때문. 심지어 자치통감에 따르면 원술은 칭제 당시 부하들의 숱한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손책의 절연장을 받아들자 크게 상심하며 몸져 누웠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이러한 원술의 면모는 손책을 이용만 하는 갑질상사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들이고 나름대로 일관되게 손책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손책은 이런 원술의 총애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구실을 얻자마자 원술을 배신하고 독립해 버린다.[35] 난세의 패배자로 남은 인물인만큼 남은 기록이 원술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있을 것을 감안하면 원술은 어느 정도 불쌍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화봉요원에서는 원술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꿀물도 못 먹고 죽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꿀물 찾을때 주방에 보리가 30곡이었다는 사서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사실상 거지떼나 유랑도적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원술의 잔당들을 탐낸 손책과 유훈이 대립하는 기록들에서 드러나듯 원술의 일족들을 비롯한 원술의 직계세력들은 수 만명에 달할 정도로 여전히 많기는 했는데, 패기 넘치게 황제를 자칭하고 저 지경까지 몰려버린 상황도 기막히지만 저 지경까지 몰리고도 여전히 수 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상황 역시 기막힌 일이긴 했다. 어떤 의미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귀족적이었던 인물. 이들은 최종적으로 손책의 세력에 흡수되었다.
젊은시절의 원술에 대해 서술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의협을 숭상하며 호걸들과 자주 어울리고 그 자신도 협명이 높아 호걸이라는 평판이 있었는데, 이런 기록들을 볼때 원술 자신은 지휘관으로서의 군사적 재능은 시원찮았으나 적어도 군사 실무 전반에 어느정도 익숙하긴 했으며 주먹패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을 만큼 개인적으로 뛰어난 전사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내전기 이전부터 다수의 커리어를 군사적 관직을 역임하고 스스로도 호걸로 이름이 났던 인물이 정작 군벌의 가장 기본적인 필수요소인 군재가 부족한 것은 치명적인 결점이었는데, 전쟁에 전혀 경험이 없던 원소가 당대 대군벌인 공손찬을 상대로 연승을 거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된다. 유력 패권주자로 꼽혔으나 군재가 형편없었던 유표가 원술과 비견될 수 있겠는데 그나마 유표는 중요한 군사적 고비마다 적당한 행운이 따랐고, 그 행운을 살려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체급을 키우고 세력을 더 오래 지탱할 수 있었으나 원술은 모험적 전략을 고수하면서 판돈만 키우고 정작 판도를 결정지을 전투에서 연전연패했기에 빠른 몰락을 피하지 못했다.
저런 면모 때문인지 비록 승률은 처참하지만 유표와 달리 매우 적극적인 친정 기록이 돋보이는데 원술이 친정에서 거둔 몇 안되는 승리 기록으로는 자신을 거부했던 양주자사 진우와 원소 편에 서서 양주자사가 된 원유를 격파하며 쫓아내고 북양주를 점거한 것과 서주에서 유비를 격파한 일, 진국을 쳐서 유총을 격파한 일이 있다. 다만 유비의 경우 딱히 전황에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국지적 승패만 반복하다 여포를 끌어들이는 책략에 의존했으며, 그렇게 유비를 이기고도 결국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고, 유총의 경우 역시 자객을 동원한 승리였던 데다 곧바로 이어진 조조의 개입에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세우고 달아나는 등 꼴사납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며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유총은 무려 후한의 제후왕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 난세를 만나 거지꼴로 굶어죽던 다른 고위 황족들과 달리 자신의 능력으로 지역적,군사적 기반을 갖추는 데 성공하고 어느 순간부터 본래 원술이 예주에서 가지던 입지를 대체하며 세를 급격히 불린 끝에 197년 시점에서는 10만의 무리를 이끌며 보한대장군을 자칭하는 등 예주의 지역 군벌 수준을 뛰어넘어 조조,유표,원소,원술,공손찬과 같은 패권전쟁의 메인 플레이어로 도약할 잠재성이 충분했던 초 거물급 황족이었고, 유총의 사망은 결과적으로 원술 자신에겐 별다른 이득도 없이 조정을 장악하려는 조조의 아주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만 줄여준 셈이라[36] 역사 기록에 남은 원술의 군사적 승리 중 그나마 지도자로서의 군사적 성과를 과시하고 그 성과를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끈 깔끔한 승리라면 사실상 북양주 점령이 유일하다. 원술은 이후로도 계속 모험적 전략을 고수하다 이때 잡은 밑천을 전부 날려먹긴 했지만 적어도 이 군사적 성과로 인해 그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한동안 유예할 수 있었다.
원술 측 진영 중에는 원씨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여럿 보이고 어느 정도 활약을 보이는 반면, 원소 측 진영에는 원소의 직계자손 외에는 원씨 가문 출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한 평소 원씨 문중과 원소가 대립했던 것으로 봐서는 원씨 문중에서는 대체로 적자인 원술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와는 호적상의 사촌관계로 생물학적으로는 배다른 형제라는 설이 유력한데, 노비의 자식인 원소가 두각을 드러내 정실의 자식인 자신을 제치고 주위의 신망을 얻자, 이로 인한 컴플렉스로 비뚤어졌던 것으로 추측해 봄직도 하다. 실제로 원술은 원소를 '노비의 자식'이라고 공공연히 부르고 다녔고, 원소가 사실 원가의 씨가 아닌 사생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3.3. 가문
진정한 명문가 출신으로 다른 주요 인물들에 비해 '''족보'''만은 완벽했다. 아래는 참고할 만한 불리한 조건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다. 불리한 특이사항은 볼드로 표시한다.
- 도축업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여동생이 황제의 황후가 된 덕분에 권력을 산 하진.
- 원술과 같은 명문가 원씨의 자손이나 노비 출신 친어머니를 둔 얼자 출신의 원소.
- 역시 어머니가 낮은 가문 출신이라서 서자 취급 받고 출세하기 어려워 태수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서야 겨우 제대로 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공손찬.
- 한경제의 후손이지만 전한 시대에 집안이 몰락해 가난한 시골 일반인이었던 유비[37]
- 지방 하급 귀족 가문 출신에 불과하며 천박한 무인이라 천대받던 손견.
- 변방이며 오지인 삭방에서 태어나 오직 무예 하나만으로 유명해진 여포.
- 역시 변방이며 오지인 서량의 나무꾼 출신이며 아예 이민족의 피가 섞인 마등.
- 변방에 오지인 서량의 별볼일 없는 무인집단의 우두머리 출신인 동탁#s-1.
- 환관[38] 의 양손자 조조
- 아버지가 변방 중의 변방에다가 오지 중의 오지인 일남의 태수였던[39] 사섭
4. 가족 관계
5. 인간 관계
- 원소: 원소가 말이 원술의 이복형이지, 실상은 원소의 어머니가 노비라서 원술은 원소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종놈이라고 불렀다.[40] 원술은 원소를 증오하고 깔보며 업신여겼다. 자신과 달리 천출임에도 세간에서 자신보다 훨씬 알아주던 것에 대한 열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초반엔 둘 사이도 이 이 정도로 나쁘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감정이 극단적으로 악화된 원인은 아래 여담 참고. 만약 원소가 얼자가 아닌 친형이라면 그냥 따랐거나, 이복동생이었다면 아랫사람들은 나름 챙기던 원술답게 항렬로 찍어누르면서 아랫사람으로 대했을 수도 있었지만 원소의 항렬이 더 높다는 문제가 있었다. 골치아픈 것은 두 사람의 생년은 불명이지만 원소의 행적을 역추적했을때 원소의 생년은 153~157년 사이에서 유년기부터 조조와 친구였다는 기록을 감안해 조조와 동년인 155년에 가까운 방향으로 범위가 좁혀지는데, 진규와 원술도 어린시절부터의 친분이 언급되고 170년대 초반생인 진규의 장남 진등의 나이를 고려할때 진규가 원술보다 몇 살 연상일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원술과 원소와 나이차이가 크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 어쩌면 나이 자체는 같으나 생일의 차이로 항렬이 갈린 수준이었을 수도 있고, 이렇게 볼 경우 원술로서는 더욱 피가 거꾸로 솟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 공손찬: 이것은 굉장히 의외의 일인데 한마디로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 원소라는 공통된 적을 두고 둘이 연합한 관계였다. 실제로 원소가 유우를 옹립하려 하자 원술과 공손찬이 힘을 합쳐 원소를 깠다. 그리고 공손찬은 자기 동생 공손월까지 보내 원술군 장수가 되어 원술은 그 공손월에게 손견을 붙여줘서 주앙과 맞붙게 했다.
- 조조: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고 은근히 행적도 자주 겹치는 편이었지만, 조조는 원소와 달리 원술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정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실의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 0순위라는 이유 때문에 원술 퇴치에 당시 휘하 군벌 중 가장 뛰어난 유비를 보내서 처치한 것을 볼 때 얕잡아본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건 전장이 유비의 홈그라운드이자 조조의 이미지가 시궁창인 서주였던것을 감안해야 한다.
- 여포: 여포가 유랑군인 시절에 여포를 잠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포가 약탈을 일삼자 여포를 내쫓았다. 이후 여포가 서주에 자리잡을 때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려고 했으나 팔랑귀인 여포를 진규가 꾀어 이 혼인을 결렬시키고 이에 빡친 원술은 여포를 공격했다.
- 손견, 손책, 손권: 손견 대에는 둘이 연합해서 동탁을 타도하기도 했고 원술이 공손찬과 연합하자 손견과 공손월이 주앙과 싸우기도 했다. 손책 대에는 손책이 원술의 명령에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토호(土豪)들을 개박살내고 다녔다. 원술이 패망해 없어진 뒤 살아남은 원술의 딸 원부인은 손권의 첩이 되었기 때문에 손권의 장인어른이기도 하다. 손가 군벌은 자신에게 있어서 부하이자 가족이었던 셈이다.
- 동탁: 동탁은 원술의 숙부 원외#s-2를 포함하여 낙양의 원씨 가문을 모두 죽인 장본인으로, 원씨 가문의 철천지원수다. 사실 동탁의 원씨 몰살은 원소가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했으며, 원소가 이를 가지고 언론플레이를 하며 자기 입지나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원술이 원소를 싫어한 것에는 이 이유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유비: 원술 입장에서의 진 최종보스. 유비는 공손찬의 부하지만 정작 유비는 공손찬과 관계를 끊고 원소파에 합류했다. 원술 입장에서 세력확장을 위해 유비를 서주에서 대립하나 원술이 몰락하고 원술이 최후의 도피망의 원소에 가려고 했던 계획과 꿀물의 최후을 안겨 준 인물이 바로 그 유비이다. 훗날 유비는 원술처럼 스스로 황제로 칭했다. 원술이 조롱거리밖에 안 되는 것과 달리 유비는 정사 삼국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을 생각한다면 취급이 하늘과 땅 차이다.[41]
6. 여담
보통 매체에서는 원술이 처음부터 원소 무시하고 괴롭혀왔던 것마냥 묘사되지만 시각에 따라서는 오히려 원술을 피해자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원술은 십상시의 난 때 청쇄문을 불태우면서 분전했고 반동탁연합 때도 나름 성과를 보여준 몇 안되는 정치가 중 한명. 사이가 안 좋았다고는 해도 십상시의 난 당시 원술은 십상시라는 공적을 두고 원소에게 그럭저럭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원소는 동생한테 똥만 가져다주었다(...).
- 삼년상으로 엿먹임. 얼자인 원소가 원술의 생모에게 삼년상을 치른 반면 친모의 삼년상을 치르지 않은 원술이라, 세인들의 입방아에 올랐을 가능성이 몹시 농후하다. 삼년상을 안 치른것 자체는 당대에도 그렇게까지 욕먹을 일은 아니었으나, 얼자인 원소가 삼년상을 하는데 적자인 원술이 안한다는건 얘기가 달라진다. 원술 입장에서는 안 먹어도 될 욕을 얼자 원소 때문에 먹는 상황이었으며, 나아가 원소가 육년상까지 치러 명성을 크게 얻으니 이 상황에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군자.
- 원씨 가문 망하는거 방관. 동시대 인물인 공손찬이 황제에게 올린 원소의 죄상을 알리는 표문 중 원소의 죄 세 번째가 '동탁을 공격해야 하는데 입닫고 군사를 키우면서 가문에 알리지 않아 죽게 내버려둠'이었다. 다시 말하면 원소는 미리 가문에 알려서 방비하도록 할 수도 있었지만 안하고 팔짱끼고 관망했다는 소리다. 공손찬의 말에 따르면 숙부 원외, 원술의 동복형 원기와 원술의 친어머니도 이때 죽었다.
- 원술은 손견과 함께 낙양을 수복하며 명성을 떨쳤다. 근데 원소는 원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주흔 형제를 포섭해 원술과의 대립을 부추겼으며 얘네는 원술의 근거지인 예주와 낙양을 잇는 주요거점인 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근거지를 빼앗긴 원술은 치명타를 입는다.
훈훈한 일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어린 육적이 부모에게 주려고 귤을 품에 숨겨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귤을 더 퍼주었다는 육적회귤의 고사가 있다. 근데 이건 주로 육적의 효심을 강조하는 쪽이 많고 원술의 훈훈함은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미지가 워낙 시궁창이라서 그런가.
이후 육강은 원술과의 관계가 틀어져 부임지 여강을 손책에게 공격받아 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육적은 친척 육손 등과 함께 고향 오군으로 피신하여 훗날 오의 신하가 된다. 훗날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오에 왔을 때 설전배틀에서 무참히 깨지는 역할로 재등장했다.
헌제의 명을 받아 유우에게 가던 그의 아들 유화를, 중간에서 붙잡아 억류한 적이 있다. 헌데 이게 오히려 유화에게 득이 되어서, 유우가 일가친척과 같이 공손찬에게 살해당할 때 그 혼자 살아남았다.
낙양가람기의 북위 황족들의 이야기 중, 원술이 언급된다. 장무왕 원융이라는 자는 자신이 전국 최고의 갑부, 기껏해야 고양왕 원옹이라는 자가 자신과 대등할 것이라고 자긍하였으나, 하간왕 원침이라는 자가 그 이상의 재력을 과시하자 분해서 보고 앓아누웠다고 한다. 이때 강양왕 원계가 원융의 병문안을 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대는 회남의 원술 같이 되어 세상에 유비가 있는 것도 모를려고 하시오?"라고 하였고, 원융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원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다.
먼 훗날 원술의 종씨가 원술과 비슷한 행각을 벌인다.
- 죽기 직전 꿀물을 찾았다는 점 때문에 삼국지 매체들에서 원술을 다룰 때 꿀물 관련된 덧글 개그들이 자주 나온다.
7. 미디어 믹스
8. 둘러보기(계보)
[1] 순화된 표현이지만 방탕하게 놀고 다녔다는 소리다.[2] 본래 청렴하고 효성스러운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인데, 추천제였기에 권문 자제들의 일반적인 출세 루트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3] 일각에서는 상서 시절 원소를 갈궜다고 추측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그런 기록이 명확하지는 않기에 정확한 이유는 불문. 다만 원소가 상서대의 아래 있고 싶지 않아했다는 표현과 이 사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둘의 사이가 쭉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을 감안할때 원술과 무관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4] 천첩인 원소의 어머니는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았기에 모친상의 대상은 적모였다.[5] 황보밀 일사전.[6] 이 무렵까지의 행적에 한하면 조조와 원술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7] 헌제춘추.[8] 원술에게 중랑장으로 임명을 받은 직후 장자를 죽였는데, 왕예의 살해는 우발적으로 휘말린 쪽에 가깝지만, 이 시점에선 대놓고 막나가는 지경이라 원술의 뒷배를 믿고 강짜를 부렸다고 볼 수 있다.[9] 원봉의 장남은 원기였으나 이때 동탁에게 살해되었고, 차남 원소는 얼자라는 태생 때문에 원성의 후사로 입적되면서 원봉의 가계에선 배제되었다. 집안의 큰어른이었던 원외도 동탁에게 죽었기에, 원씨의 가주는 원술이 되는 것이 맞다.[10] 후한서 원술전.[11] 이 당시 삼국시대 세 나라의 시조인 유비, 조조, 손견은 전원 이들한테 속한 소군벌이였다. (유비는 공손찬 휘하, 조조는 원소 휘하, 손견은 원술 휘하)[12] 보통 황조로 알려져 있고 이 설이 우세하나 기록에 따라 여공이라는 이설도 있다.[13] 당시 장연, 어부라 모두 원술과 마찬가지로 원소와 대립하고 있었다.[14] 일부 판본은 충(沖)으로 나오고 삼국지연의에서 성(成)으로 나온다.[15] '수도'를 관장하는 직책에만 윤尹을 붙인다. 현대 한국 기준 '특별시'와 같은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다. 윤尹은 특별 행정구역 장관의 관직명인 동시에 행정구역명 그 자체로 쓰였다가 한나라 후에는 관직명으로만 쓰이게 된다. 한나라 기준으로는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 일대를 경조윤,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 일대를 하남윤으로 불렀다. 조선에서 한성을 관장하는 직책도 판윤이었다.[16] 촉한의 경우는 후한의 계승을 표방했기에 낙양을 회복해야 할 진짜 수도로, 성도는 단지 임시 수도로 취급했을 수도 있다.[17] 없다고 단정할 순 없다. 선진유학자들이 기독교의 하느님 같은 인격적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했는가는 아직도 이론이 매우 갈린다. 시경 등 고문헌에 보이는 상제(上帝), 황천(皇天) 등은 인격신적 색채가 진하긴 한데, 주 왕조 시기를 거쳐 동주시대로 가면 이미 하늘(天)이 탈인격화가 진행된 정황이 눈에 띄기 때문. 어쨌든 선진유학은 하늘을 인격신으로 보든 이신(理神)으로 보든 간에 그러한 하늘의 뜻은 '''궁극적으로 신비를 배격한 합리적 정치활동을 통해 구현되며, 하늘은 정치철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종 권위''' 이상의 뭔가로 보는 건 아니었다.[18] 유학의 우주론-국가론-심성론이 견고한 형이상학적 일관성을 갖추어 통합된 사상체계는 정주의 성리학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추상성이 매우 강한 불교 교리가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9] 원래 유학이 발생한 이유는 바로 은나라 시절의 기괴한 풍습을 없앴던 것을 본받아 춘추전국시대의 무너진 윤리의식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공자가 시경과 서경을 중시 여긴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은나라는 점복을 중시 여겼고 온갖 괴랄한 풍습이 퍼져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순장과 식인 풍습, 인신공양 등이었다. 공자가 말한 괴력난신이란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공자가 주공을 성인으로 모신 것도 바로 주공이 이런 은나라의 야만스러운 풍습을 없애는데 주력했기 때문이었다.[20] 이런 이상한 형태의 유학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바로 훈고학이었다. 하지만 훈고학이 변질되어 도참이나 서진 시대 이후의 청담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참고로 이런 유학을 다시 한번 불순물을 걸러내고 집대성하여 현실 추구용 유학으로 다시 재정비한 것이 바로 성리학이다.[21] 뭐 주역은 공식적인 유가경전이니 주교에 능하면 현대에도 인정을 받을 만한 일이긴 하다.[22] 물론 이 시기의 공식 역사서래봤자 춘추, 사기, 한서 정도에 주자나 정이 주돈이 등 주요 유학자들의 저서가 없으므로 유교 공부량 자체가 후대에 비해 많이 적긴 하다.[23] 훗날 조비도 헌제에게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세울 때 연호를 황초로 정했다.[24] 조경래 작가의 소설 삼국지 마행처우역거에서는 흙이니 물이니 불이니 청룡이니 하며 이러한 당대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25] 특히 유벽은 이후 관도전에서도 원소에게 호응해 후방을 공략하는 등 원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26] 무제기에 따르면 조홍을 보내 헌제를 영접하게 했으나 동승이 원술의 부장 장노와 함께 험요지를 지키며 이를 막았다. 헌제기 등 다른 기록에서 드러나는 정황상 당시 안읍에 체류하던 동승이 군사를 동원해 조홍을 막는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에 이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당시 헌제와 조정이 조조보다 원술을 유력한 파트너로 여겼을 가능성은 있지만 적어도 동승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조조를 저지한 것 같지는 않다.[27] 양표의 아내가 원술의 누이인 양태위부인 원씨이다.[28] 연의에서는 이를 약간 비틀어서 손책이 전국옥새를 대가로 병사를 빌려 동오로 떠났다고 서술했다. 이 대목은 손책의 야망을 나타내는 동시에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여 몰락하게 된 계기를 나타내고 있다.[29] 다만 여포전의 진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조조는 처음부터 원술이 몰락한 뒤엔 여포를 토사구팽할 생각이었고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군이 여포군의 말을 약탈하고 이 일로 여포가 유비를 치자 조조가 개입했다. 영웅기에 후술되는 원술의 반응 또한 멋대로 혼약을 깬 인과응보라며 여포의 태도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비꼬고 있기 때문에 여포가 원술한테 붙어 반란을 일으켰기에 토벌했다는 여포전의 서술은 조조 측에서 사후에 내세운 명분에 가까울 것이고 실제 상황은 여포가 조조에게 토사구팽당할 상황에 몰리자 태도를 바꿔 원술에게 읍소한 것에 가깝다.[30] 평생을 종놈이라고 무시하던 원술이 완전히 몰락하고 그제서야 처음으로 원소를 형님이라고 높여 부른 격이다.[31] 공손찬의 세력을 흡수하여 하북을 막 평정했을 때이다.[32] 원소의 손절을 가정할 경우 원술 영접은 원담의 독자노선 시도와 원소의 관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3] 정사 삼국지 무제기는 12월에다가 원술의 죽음 기사를 붙여놨는데 후한서 효헌제기, 원술전과 자치통감은 6월로 기술하니 무제기의 오류인듯 하다. 따라서 여기선 후한서와 자치통감의 서술을 따른다.[34] 아이러니한 것은 원술이 젊은시절 역임한 것으로 알려진 커리어는 상서를 제외하면 모두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직책이었으며 특히 하남윤이나 호분중랑장처럼 정치적 성격도 강한 관직과 달리 절충교위나 장수교위 같은 직책은 순수한 무관직에 나름 실전적인 직책이었다.[35] 물론 충분히 등 돌릴 만한 명분(=원술의 칭제)이었고, 원술이 여러차레 말을 바꾸며 손책에게 독립적 지위를 주지 않고 직속으로 붙잡아 두던 것은 손책의 시점에서는 원술이 충성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자신을 이용만 한다는 피해의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또한 원술이 칭제하려했을 때 직접 서신까지 보내 만류하는 등 부하로서의 역할은 다하고 독립했다.[36] 이런 측면 때문인지 원술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한 편인 화봉요원 같은 작품에서는 유총 살해의 진짜 배후가 사실 조조 측이었으며 이들이 원술의 악명을 이용해 역사의 진실을 은폐했고 적어도 이 사건에서 원술은 순수한 피해자의 입장이라는 음모론적 각색이 들어가기도 했다.[37] 반동탁군이 결성되던 시절까지만 해도 관우나 장비 같은 최측근들이나 유비가 황족인 걸 알았지, 그 외의 대부분 사람들은 유비가 뭐하는 인간인지도 몰랐다. 유비가 황족이라는 사실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여포가 패망한 후 조조가 유비에게 좌장군 관직을 천거하는 과정에서였다. 거기다 젊은 시절 유비는 단순히 신발, 돗자리나 짜며 산 게 아니라 동네 건달들과 함께 어울려다니며 건달 두목짓도 하고 살았다. [38] 조등의 경우 결과적으로 십상시 대두의 원흉이라 할 수 있어 명분적으로 좋지 못했다. 거기에 환관은 본래 귀족 세력들에게 천시되는 신분이다.[39] 오늘날의 북부도 아니고 중부 베트남이다. 당시로 보면 한나라 영토의 최남단.[40] 원술이 원소를 종놈이라고 부른 기록은 있는데 정확히 원소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고 따로 있을 때 종놈이라고 부르면서 원씨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평소 원소 앞에서 원소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알 불명이나 최후에 원소에게 구걸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낼땐 원소를 군(君)으로 지칭했다.[41] 그도 그럴게 유비의 경우 칭제하던 당시 익주 정도는 확보하고 있었고 어쨌거나 당시 군웅들이 '돗자리나 짜던 놈', '귀 긴 놈'으로 욕할지언정 혈통으로 시비걸 수 없었을 정도로 한 황실의 후예라는건 분명했으며 시기도 막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받은 시점이었기에 한 황실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워 칭제를 할 수 있었다. 결국 유비는 혈통, 세력, 명분 모두 칭제할 수준이 된 상태였던 셈. 더욱이 유비의 주요 적대세력조차 일단 당시에는 감히 유비의 혈통을 부정할 수 없었는데 유비가 전국구로 한 황실 후손임이 알려진건 조조가 유비를 좌장군에 추천하면서다. 조조 입장에서는 증거도 없이 부정하려고 했다가는 헌제 앞에서 구라친게 되고 그 자손들 입장에서도 조조가 헌제 앞에서 구라친게 되거나 조조가 유비에게 속은 거 둘 중 하나가 되고 조조가 뭐라 못하면 다른 군벌들도 함부로 부정하려 했다가는 "황제 폐하께서 인정하신걸 부정하냐?"(조조가 황실을 장악한 만큼 조조가 그렇다고 하면 헌제도 그렇다고 하는 셈이며 결정적으로 어쨌거나 헌제도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임을 인정했다) 라며 욕먹을 거리밖에 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