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

 


1. 후한의 인물 1
1.1. 관련 사료
2. 후한의 인물2
3. 후한의 인물3


1. 후한의 인물 1


鄭弘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영제 때 마을의 색부(嗇夫)가 되었고 벼슬을 얻기 위해 낙양으로 향했는데, 성에 도착하지 못하고 어떤 곳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정홍은 그 곳에서 옛 친구를 만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황량하기만 한 들판 뿐으로 촌락은 멀기만 해서 술을 받아올 곳이 없었는데, 친구와 회포를 풀 방법이 없자 돈을 냇물 속에서 던져 넣고서 친구와 함께 그 을 마셨다.
저녁 내내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잔뜩 술에 취할 수 있었으며, 그 냇물에 침양천(沈釀川)이라 이름을 붙이고 이튿날 아침에 각기 떠났으며, 정홍은 관직이 상서에 이르렀다.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지만 청나라 때 허상질이 술을 좋아하고 정홍이 이름을 붙인 침향천이 허상질이 살던 곳에 있었으므로 침향천을 호로 삼았다.

1.1. 관련 사료



2. 후한의 인물2


'''丁鴻
정홍
'''
'''작위'''
노양향후(魯陽鄕侯) → 마정향후(馬亭鄕侯)
'''최종직위'''
사도(司徒)
'''성씨'''
(丁)
''''''
(鴻)
''''''
효공(孝公)
'''아버지'''
정침(丁綝)
'''생몰 기간'''
음력:?년 ~ 94년 1월 21일
양력:?년 ~ 94년 2월 24일
'''고향'''
영천군(穎川郡) 정릉현(定陵縣) 
'''사도 재임기간'''
92년 4월 29일 ~ 94년 1월 21일
자는 효공(孝公)이고, 영천군(穎川郡) 정릉현(定陵縣) 사람으로 사도(司徒), 태상(太常)등을 지내었다.
86년 태상(太常)이 되었다.
92년 4월 29일 사도(司徒)가 되었다.
92년 6월 두헌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하다는 상소를 올리고 화제는 이 의견이 옳다 여겨 정홍에게 태위(太尉) 대리와 위위(衛尉)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고서 정홍은 군대를 출진시켜 남궁과 북궁을 점거하며 두헌의 대장군직을 박탈시켰고, 마침내 두헌은 자살하였다.

폐하께서 만약 직접 정무를 장악하고 초반에 손을 써서 싹을 자르면 저들의 흉포한 일은 없어질 것이고 화는 사라져 평안할 것입니다

(若敕政責躬 杜漸防萌 則凶妖銷滅 害除福湊矣/ 약칙정책궁 두점방맹 즉흉요소멸 해제복주의)

여기서 두점방맹(杜漸防萌)의 고사가 나왔다
94년 1월 21일 정홍(丁鴻)이 죽었다.

3. 후한의 인물3



'''鄭弘
정홍
'''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鄭)
''''''
(弘)
''''''
거군(巨君)
'''생몰 기간'''
?년 ~ 86년 4월 23일
'''고향'''
회계군(會稽郡) 정릉현(山陰縣) 
'''태위 재임기간'''
84년 8월 11일 ~ 86년 4월 23일
1번 문단의 사람과 이름이 같다
회음태수(淮陰太守) 시절 순행을 하는데 사슴 2마리가 수레 옆에 붙어 떠나지 않아 황국(黃國)이란 사람에게 물어보니 황국이 절하며 말하니 "옛날 삼공(三公, 태위,사도,사공)이 타는 수레에는 사슴을 그려넣었다니 이것은 명부(明府)께서는 재상이 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정홍은 정말로 84년 8월 11일에 태위(太尉)가 되었다.
86년 두헌의 권세가 날로 강해지자 두헌의 권세가 강하다는 상소를 올리지만, 오히려 두헌의 음모의 휘말려 태위에서 면직되고 고향으로 내려갈려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자, 모함받은 억울함에 분통을 터트리며 주저 앉았다.
결국 고향에 내려왔음에도 후한의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는지 임종 전에 "두헌의 악행은 하늘에 닿고 땅에 달하니 사해(四海)의 모든 사람이 두헌을 미워하고 있다"라고 글을 올렸고, 유구(劉炟)란 자는 이 글을 읽고 크게 깨달아 즉시 정홍의 집에 의사를 보냈으나 이미 정홍은 죽어있었다. 그 후 유족들은 정홍의 유언대로 황실이 준 모든 물건을 되돌려 보내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