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후한)

 


<colbgcolor=#a11><colcolor=#ece5b6> '''한 제19대 황제'''
'''和皇帝 | 화황제'''
[image]
'''묘호'''
[1]
'''시호'''
효화황제(孝和皇帝)
'''연호'''
영원(永元, 89년 ~ 105년 3월)
원흥(元興, 105년 3월 ~ 105년 12월)
'''출생'''
79년
'''사망'''
106년 2월 13일
'''재위'''
'''후한의 황제'''
88년 4월 9일 ~ 106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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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
유(劉)
''''''
조(肇)
'''부모'''
부황 장제, 모후 공회황후 양씨
'''황후'''
효화황후 음씨
화희황후 등씨

1. 소개
2. 생애
3. 후비와 자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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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나라의 제19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4대 황제.'''

2. 생애


장제(후한)의 넷째 황자로 생모는 귀인 양씨이다.[2] 장제의 황후였던 장덕황후 두씨의 횡포 때문에 폐위된 이복형을 대신하여 황태자가 되었다. 이후 장제가 붕어한 88년 4월에 9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화제 이후 어린 황제가 계속 즉위해 후한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당연히 9살 아이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기에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고, 황태후의 오빠인 두헌이 외척보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두헌은 북흉노 정벌에서 전공을 세워 대장군이 됨으로써 군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화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실권이 두헌에 있어서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두헌 측이 화제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지만, 화제 또한 이를 알아차리고는 환관을 이용하여 두헌 일파를 제거하기로 도모하였다.[3] 그렇게 환관을 이용해서 92년 두헌을 궁정 내에 불러들여 체포한 다음 대장군의 인수를 거두어 실권을 빼앗은 뒤, 열후로 봉해진 봉국으로 보냈다가 자살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친위쿠데타의 1등 공신이었던 환관들은 화제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 거기에다 화제의 환관들에 대한 신임이 갈수록 높아져서 화제의 정치는 측근 정치의 색을 띠었고 이것이 후한에서 환관들이 부린 횡포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어린 황제가 계속 등장하면서 외척 세력과 환관 세력간의 격렬한 다툼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환관의 위세는 그 이름도 유명한 조조의 의붓 할아버지인 조등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환관인데 자식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환관의 위세가 엄청나게 대단해졌음을 의미한다.
화제의 치세까진 사실상 전성기고 외부로는 후한시대에서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서역의 50여 개국이 후한에게 복종했다. 다만 이것은 반초 개인의 활약으로 된 것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반초 사후에 서역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 지배력은 한순간에 쇠락하였다.
또한 환관인 채륜이 105년에 기존에 포장이나 잡다한 용도로만 쓰이고 서사재료(글씨를 쓸 수 있는 본바탕)로서 역할하지 못했던 종이를 개량하였다.
이렇게 후한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화제는 불과 28세에 요절했다. 그의 뒤를 이은 상제를 제외하면 후대 후한 황제들은 모두 장제의 후손들이다.
여담으로 삼국지 등장인물 중 최연장자인 법진과 두 번째 연장자인 지양군(동탁#s-1의 어머니)은 화제 치세기간인 100년과 103년에 각각 태어났다.
삼국연의(1994)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황제이다.

3. 후비와 자녀



4. 둘러보기




[1] 190년 좌중랑장 채옹의 건의로 취소되었다.[2] 두씨 일족 제거 후에 공회황후로 추존하였다.[3] 환관은 일반적인 문무백관들이 출퇴근하는 것과는 달리 24시간 동안 황제와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잔다. 본디 환관의 업무라는 게 황제의 수발을 들어주는 것이라서 항상 황제와 같이 붙어 있어야 한다. 황제가 환관을 상대로 비밀리에 모의하기도 매우 쉬웠는데 문무백관들이 퇴근하고 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