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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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씨 제나라(田齊)의 제4대 군주이자, 제나라의 첫 번째 국왕이다. 이름은 인제(因齊). 제환공(齊桓公)의 아들. 제선왕(齊宣王)의 아버지.
문관으로는 추기, 무관으로는 전기, 병법으로 유명한 손빈, 그리고 순우곤도 이 시대 제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본인도 자처했지만 인재콜렉터의 느낌이 강하다.
이때부터 왕을 칭했으며, 왕을 칭하기 전에는 진후 인제(陳侯因齊)로 불리기도 했다. 전제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 생애
2.1. 사기를 참조한 기록
즉위 후부터 정사를 돌보지 않고 모든 일을 경대부에게 맡겼다. 9년이 되도록 제후국들이 제나라를 공격해도 제나라의 사대부들은 개의치 않아 했다. 제 위왕은 즉묵의 대부를 부르면서 매일 헐뜯는 상소가 빗발쳤다면서 사람을 시켜 확인하니 즉묵의 상태는 좋다고 하면서 좌우 사람들을 매수해 환심을 사지 않았다면서 즉묵의 대부를 만 호의 고을에 봉했다. 아읍의 대부를 불러 말하면서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면서 아읍을 살펴보니 아읍의 상태가 전혀 안 좋았다면서, 예전에 조나라와 위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물리치지도 못했지만 자신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보물을 통해 주위 사람들을 매수해 좋은 말만 하게 했다면서 아읍의 대부를 가마솥의 끓은 물에 삶아죽였다. 사람을 색출해 아읍의 대부로부터 뇌물을 받은 자를 모두 삶아죽였으며, 군사를 일으켜 조, 위 등을 공격해 빼앗긴 땅을 찾아왔다. 위나라의 군사를 추격해 탁택에서 포위했고 위혜왕이 관 땅을 바치면서 화의를 요청했으며, 조나라에서는 장성을 돌려주고 이로 인해 제나라의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을 두렵게 했다. 제후들이 이로 인해 이후 20여 년간은 함부로 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고 추기를 등용해 간언을 받아들이고 어진 사람들을 등용했다.
기원전 356년, 조나라의 왕과 평륙에서 회견하였다.
기원전 355년, 위혜왕과 사냥에 나서면서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위 혜왕은 구슬이 달린 수레를 보물로 말하고 제 위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보물로 이야기했다.
기원전 335년, 제나라의 견 땅에서 위 혜왕과 회동했다.
기원전 332년, 연, 조, 초 등과 위(衛)나라에서 만나 위(魏)나라를 제외시키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같은 해에 제나라의 전반, 위나라의 공손연이 위, 제 두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공손연이 전반을 설득해 위, 제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자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 조나라에게 패할 것을 우려해 위 혜왕과 함께 전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가서 조나라의 군사를 격파했다.
기원전 323년, 부인이 죽자 7명의 처첩이 있어서 제 위왕은 처첩을 모두 총애했는데, 맹상군으로부터 7개의 귀고리를 받으면서 그 중 특별히 훌륭하게 만든 1개의 귀고리가 있었다. 다음날 가장 아름다운 귀고리를 하고 있는지 확인해 그녀를 부인으로 삼도록 권고받았다.
기원전 321년, 정곽군(전영)[1] 으로부터 관의 회계 기록에 대해 매일 듣고 자주 열람해야 한다는 간언을 들었는데, 5일 만에 싫증내서 정곽군이 일임하도록 했다.
추기로부터 조정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대왕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신하들은 대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대왕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하는 기대를 품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대왕의 시야가 가려져 있다는 간언을 하자 제 위왕이 잘못을 면전에서 지적하는 사람을 상급의 상, 글로 지적하는 사람을 중급의 상, 시정에서 왕을 비방해 그 소문이 들어오게 하는 자를 하급의 상을 받을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간언하는 신하들이 많다가 몇 달 뒤에는 가끔 간언하는 자만 있게 되고, 1년 후에는 간하고 싶어도 간할 것이 없게 되자 연, 조, 한, 위 등의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고 제나라에 조배했다.
2.2. 죽서기년을 참조한 기록
제 위왕 원년(기원전 356년), 한(韓)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의 삼진(三晉)이 제 환공이 죽은 틈을 타서 제나라의 영구를 쳤다. 제 위왕은 평륙 땅에서 조나라, 송나라와 회맹했다.
제 위왕 2년(기원전 355년), 추기가 부국 강병책을 논하니 제 위왕은 불필요한 주색 가무를 그만두고 인재를 초빙해 부국 강병을 이루었다. 그리고 추기를 재상으로 삼았다.
제 위왕 3년(기원전 354년), 제 위왕은 추기(鄒忌)를 성후에 봉했다. 조나라가 위(魏)나라의 속국 위(衛)나라를 쳐서 칠급과 부구를 차지했다. 그러자 위(魏)군이 한단을 포위했다.
제 위왕 4년(기원전 353년), 조나라는 사자를 보내 제나라와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제 위왕이 대신과 상의했는데, 추기는 구원을 반대했다. 그러나 단간붕은 제 위왕에게 군사를 보내 양릉을 쳐서 위나라의 포위를 풀게 했다. 그리하여 제 위왕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병사를 나눠 하나는 위나라의 양릉을 치고, 하나는 전기(田忌)와 손빈이 지휘하여 조나라 군을 직접 구원하라고 했다. 바로 이때 손빈이 계책을 내어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치게 되었다.[2] 그리하여 위군이 군사를 회군시켰다. 그래서 10월 제나라 군대와 위나라 군대가 계릉에서 교전해 위군을 개발살내니 이것이 바로 계릉 전투다.
제 위왕 6년(기원전 351년), 제 위왕이 즐거움을 탐해 정사를 돌보지 않자 노나라가 제나라를 쳐 양관에 진입했다. 한, 조, 위 삼진이 제나라를 쳤다. 그래서 박릉에 이르렀다.
제 위왕 7년(기원전 350년), 위(衛)나라가 제나라를 쳐 설릉을 점령했다. 제나라는 장성을 보수했다.
제 위왕 9년(기원전 348년), 조나라가 제나라를 쳐서 견성을 점령했다.[3] 그러자 제 위왕은 총희 우희의 간언을 듣고 다시 정사를 돌보았다. 그는 즉묵 대부가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으나 사실은 재정을 튼실하게 하는 등의 업적이 있었고, 아 대부는 반대로 백성들의 찬사를 들었으나 재정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제 위왕은 아 대부를 삶아 죽였다. 그리고 제 위왕은 주나라 천자에게 조회해 사람들은 제 위왕을 현명한 군주로 우러렀다.[4]
제 위왕 11년(기원전 346년), 대부 모신이 제 위왕의 인재 천거가 부당하다고 하니 제 위왕은 그를 죽게 했다.
제 위왕 13년(기원전 344년), 제 위왕은 진(秦)나라를 방문했다.
제 위왕 16년(기원전 341년), 위나라가 한나라를 포위하자 한나라가 제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다. 제나라는 그것을 받아들여 제 위왕은 전기를 주장, 전영, 전분을 부장, 손빈을 군사로 삼아 위나라의 대량을 치게 하니 위군은 수도가 공격을 받아 망할 위기에 처하자 회군했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포위가 풀렸다. 그리고 마릉에서 방연(龐涓)을 해칠 계략을 세웠다.[5] 그리고 마릉 전투에서 방연을 복병으로 죽이고 위군을 박살내 제나라의 위엄을 떨치게 되어 동방의 패자가 되었다.
제 위왕 23년(기원전 334년), 제 위왕은 조무령왕과 평륙 땅에서 회맹했다. 같은 해 위의 양혜왕은 제 위왕과 회맹했고, 그 외에 한나라와 소국들을 데리고 서주에서 회맹했으며, 이때 사람들이 제 위왕을 왕으로 받드니 역사에서 서주에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제나라 군주는 왕이라 불리게 된다.[6]
제 위왕 34년(기원전 323년), 진(秦)나라가 제나라를 침입해 상구에서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진나라가 패했다.
제 위왕 36년(기원전 320년), 제 위왕이 죽고 그 아들 전벽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제 선왕이다.
3.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전인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이 일러스트는 중국에 있는 똑같은 포즈의 동상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1] 맹상군의 부친으로 유명하다.[2] 위나라를 공격해서 조나라를 구한다. 이것이 바로 위위구조의 고사이다.[3] 훗날 조조(曹操)가 연주의 대부분이 먹혔을 때 남았던 곳 중 하나다.[4] 그도 그럴 것이 주나라가 이 때는 거의 대놓고 제후들의 개무시를 당했지만 그럼으로써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5] 왜 그랬는지는 손빈과 방연 문서 참조.[6] 그 전까지는 제의 후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