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콥 아르미니우스

 



1. 개요
2. 상세


1. 개요


제이콥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네덜란드목사이자 신학자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창시자이다.

2. 상세


아르미니우스는 1560년 네덜란드 오우데바터(Oudewater)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그의 홀어머니는 어린 아르미니우스를 개종한 가톨릭 신부의 양자로 맡겼고. 신부가 죽은 후에는 마르부르그(Marburg)의 한 교수가 그를 루터란 대학교(Lutheran University)에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스페인 사람들이 오우데바터를 점령했다.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기를 거부하자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에는 아르미니우스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편협성이 준 상처로 인하여 그는 후에 종교적 편협성에 대한 반항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로테르담의 개혁교회의 목사 피터 베르티우스(Peter Bertius)의 집에 머무르고 베르티우스 목사는 그를 라이덴의 대학으로 보냈다. 여기서 그는 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교회의 후원자들로부터 목사로 돌아와야한다는 조건으로 제네바 대학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곳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주의 주창자인 베자와 다른 스승들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그는 이 때에 극단적인 칼빈주의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자가 되었다. 그는 제네바 교육 후에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훌륭한 설교가이자 천부적인 성경 주석가였으며, 또한 겸손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였다. 그는 특히 강해 설교(Expository message)로 유명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1589년 평신도 코른헤르트가 주장한 베자의 이중예정론 반박에 대한 강연과 저서가 네덜란드 신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는데에 교계는 칼빈주의에 대한 위협과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가 주장한 것을 검증하기 위하여 아르미니우스에게 그 임무가 맡겨졌다.[1] 아르미니우스는 이 주장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살펴보고, 교부들의 책을 통하여 살펴보고 나서 이 주장이 성경적으로 타당하고 베자[2]의 이중예정론의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후에 개신교의 구원론의 하나인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시작이 된다.
그는 이 발견을 한 후에 로마서강해를 더욱 풍성하게 전하게 되고 이에 대한 반발이 시작이 되었다. 그를 향하여 음모와 공격이 있게 되는데에 어린 시절의 신부와의 관계로 인하여 가톨릭적이고 펠라기우스적인 성향이 들어났다든지, 친구와 함께 여행갔던 로마 여행은 그의 가톨릭적인 성향이 드러낸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의 성경주석에 대한 그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가 공적으로 주어질 때마다, 아르미니우스는 건전하고 차분한 학식으로 매번의 논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아무도 성경해석을 기초로 하여 그를 논박할 수 없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으로 인하여 교회의 분쟁이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 아파했으며, 공식적인 공청회를 원했지만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신학적으로 성숙한 후에 라이덴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고, 거기서 고마루스(Gomarus)의 극단적 칼빈주의(hiper Cavinism)과 부딛치게 되었다. 신약교수인 고마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게 성경적 권위에 근거해서 도전했고,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성경적 해석을 신조들이 종속시키기를 거부했다.
누구도 예정론적인 입장을 옹호하는 데에 있어서 성경사용에 실패한 일 외에는 아르미니우스의 성경 사용에 관하여 비난하지 않았다. 아르미니우스는 권위가 사람들의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한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 네덜란드의 교회지도자들은 아르미니우스가 성경을 최종적 권위로써 설교하는데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칼빈주의적 신조를 실제적인 최종 권위로 만들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신적 작정에 관한 타락 전 예정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

1. 그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2. 과거 1500년간, 그것은 책임 있는 기독교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지도 않았었고 전체 교회에 의해 수용되지도 않았었다.

3. 그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

4. 그것은 창조되지 않은 사람에 관해 선택의 작정을 만든다.

만약 베자와 고마루스[3]

가 가르친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하는 원인이라면, 하나님은 곧 죄의 창시자이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전 예정설의 논리는 결코 이런 결론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오류를 비난하는 데 전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이러한 신학적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1609년에 세상을 떠났다.
[1] 이는 칼빈주의에 대한 반발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대적 상황이다.[2] 칼빈의 제자로써 칼빈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로써 칼빈주의 기반을 다졌다.[3] 라이덴 대학의 신약학자로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