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톡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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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ond Stockdale
1923년 12월 23일 ~ 2005년 7월 5일. 최종계급 해군 중장.
1. 소개
2. 베트남 전쟁 : 8년의 포로 생활을 견뎌내다
3. 스톡데일 패러독스


1. 소개


1946년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파일럿 트레이닝 등을 거쳐 해군 항공대 테스트 파일럿이 된, 평범한(?) 해군 항공 조종장교였다. 하지만...

2. 베트남 전쟁 : 8년의 포로 생활을 견뎌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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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추되기 몇주 전의 사진. 40대 중반임을 감안하면 제법 미남.
1964년 통킹만 사건을 USS 타이콘데로가 항공모함에서 지켜본 그는 적 군함을 하나도 보지 못했음에도 린든 B. 존슨 행정부가 북베트남에의 공습을 지시하자 명령을 따랐다. 1965년에는 USS 오리스카니 항공모함에서 A-4 스카이호크를 몰고 발진하여 임무를 수행하다가 북베트남에서 대공포에 격추되어 겨우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을에 착지한 스톡데일 중령은 북베트남에서 곧장 붙잡혔다. 장장 8년이라는 포로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북베트남인들로부터 분노와 증오에 찬 폭행, 고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착지 과정에서 다친 척추 따위는 고통으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행당하여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마비되어 평생 장애를 갖고 살게 되었다.
스톡데일은 '하노이 힐튼'이라 불린 악명높은 호아 로 수용소에서 상상 이상으로 가혹한 환경과 마주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육체적 고문이 줄을 이었고, 폭행, 채찍질, 질식 고문은 예사에 정신력을 시험하는 무자비한 정신력 고문까지 당했다. 그것도 '''7년 반'''을. 그러던 와중에도 동료 수용자들의 결집을 이끌어냈다. 일부 포로들은 미국의 전쟁범죄를 인정하면 관대하게 대접해주겠다는 북베트남측의 회유에 넘어가기도 했지만, 스톡데일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근성으로 버텨나갔다. 심지어는 언론에다 공개하기 위해 평소와 달리 갑자기 전쟁포로치고 괜찮은 대접을 해주던 수용소 측의 의도를 간파하여 손목을 긋는 자해까지 서슴치 않으며 죽음을 불사한 저항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스톡데일의 독기에 수용소에서도 기가 질렸는지 슬슬 고문을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정에 합의하여 베트남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했고, 마침내 그는 여러 포로들과 함께 석방되기에 이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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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포로 수용소에서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동료 수용자들을 통해 전해졌고, 은성무공훈장 등 각종 훈장으로 소련식 방탄복을 만들 기세가 되었으며 심지어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에는 명예 훈장까지 수여되었다. 40대 중반에도 웬만큼 미중년이었던 외모는 고된 수용소 생활로 할아버지 몰골이 다 되었고, 가족들은 그런 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미 해군대학(Naval War College) 학장 등을 지내면서 최종계급 중장으로 퇴역했다.
1992년에는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을 제압하는 그 선거에서 제3후보 로스 페로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출마하기도 했다. 옛날 커티스 르메이가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1968년 선거에서의 조지 월러스 후보가 남부의 5개 주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 것과 달리 선거인단 확보는 실패했지만 전국 18% 전후의 득표율을 기록하는등 군소후보로서 분전했다.
말년에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다가 2005년 7월 5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해군사관학교 묘지에 안장되었고, 이후 해군에서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의 이름에 그의 이름을 붙여 기리고 있다.

3. 스톡데일 패러독스


그가 석방된 후 무려 8년에 가까운 포로 생활을 견뎌낸 것에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곧 풀려날 거라고 섣불리 낙관만 하는 포로들은 금새 좌절해서 죽었다. 하지만 나는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장기간 버텨야 한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덕분에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담은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고 알려져 있으며, 막연히 잘 되겠지라는 식의 희망사항식 낙관론보다는 당장의 어려움을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현실에 임하는 쪽이 바람직하다는 교훈을 준다. 특히 2020년의 전세계적인 코로나 확산 장기화로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만연한 요즘의 세태에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1] 당시 비슷한 시기 포로수용소에 함께 있었던 이들 중에는 훗날 미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존 매케인 3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