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킹만 사건
1. 개요
통킹만 사건(영어: Gulf of Tonkin Incident, 베트남어: Sự kiện Vịnh Bắc Bộ)은 1964년 8월 2일 통킹 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합중국 해군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매독스 함을 공격하여 양국 함대가 교전한 사건이다. 이 교전의 결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정 3척이 손상을 입었고, 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미 해군은 구축함 1척과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전사자는 없었다. '''통킹만'''은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있는 만(灣, bay)으로, 현대 베트남에서는 이 만을 박보 만(Vịnh Bắc Bộ)이라 하기 때문에 사건도 박보 만 사건(Sự kiện Vịnh Bắc Bộ)이라 한다.
흔히 미국이 사건 전체를 조작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북베트남에 의한 공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1차 공격 이후 2차 공격을 당했다고 미국 측에서 선전했으며 이것이 일명 제2의 통킹만 사건이 되면서 미군의 북베트남 공격 명분이 된다. 허나 이 2차 공격은 실제로는 '''없었다'''.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과 단지 부정확한 보고에 따른 실수였을 뿐이란 주장이 지금도 논란으로 남아있다.
2. 논란점
- "북베트남에 의한 2차 공격" 발표는 미국의 의도적 조작인가? 실수로 인한 착오인가?
미국은 북베트남이 수 차례에 걸쳐 미군을 선공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군사 개입 의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8월 7일, 미 의회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통킹 만 결의'를 의결하였으며, 1965년 2월부터는 B-52 폭격기를 동원한 북폭에 나섰고, 1965년 3월에는 미합중국 육군과 해병대 등도 파견되었다.
그런데 북베트남 해군의 첫 공격[1] 이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71년 6월 뉴욕 타임스에 통킹만 사건의 두 번째 교전은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쓴 실 니항 기자가 7000 페이지에 달하는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입수하여 분석한 결과, 통킹 만 사건의 두 번째 교전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연방정부는 미국의 안보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 보고서와 관련한 언론 보도를 금지하고자 하였으나 미국 연방 대법원의 비호 아래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기사를 게재할 수 있었다. 뉴욕 타임즈는 2005년에도 로버트 한요크 NSA 역사연구관의 말을 인용하여 NSA의 중간 간부들이 감청내용을 왜곡했고 정책결정자들은 허위보고에 근거해 폭격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반면, 실제 두 번째 공격은 없었지만 공격이 있었다는 발표가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견해 역시 제기되고 있다. 당시 북베트남의 무선통신을 감청하던 NSA는 그 내용을 해석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구축함 터너 조이(Turner Joy)의 음탐사가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착각하여 북베트남 해군에 의한 어뢰 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하자(어떤 요인이 작용했는지는 모르나 다른 승조원들 역시 공격이 있었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다급한 상황에서 취합한 정보들을 해석하던 중 잘못 해석하여 생긴 일종의 실수라는 것이다. 이는 신호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 대표적 사건 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통킹만 사건 직후 북베트남 정부와 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자국 해군 간부 및 산하기관에 각종 등급의 훈장 150여 개와 20여 개의 명예깃발을 수여하였는데[2] 시기도 시기이거니와 수훈의 규모가 상당하여 미국의 의심을 더욱 샀을 가능성이 있다.
또 상술된 로버트 한요크 역사연구관의 결론에 대해서도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 및 존 프라도스 NSA 역사연구관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라며 흥미로워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신호정보 해석 오류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확증이 존재하지 않기에 관련 정보의 수집과 연구를 촉구하는 선에서 끝났었다. 일단 맥나마라 본인은 자신이 북베트남에 의한 두 번째 공격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보를 당시 쥐고 있었다고 2005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어쨌든 이렇게 2차 공격은 미국 측의 착각 혹은 조작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1차 공격은 북베트남 측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북베트남의 발표에 의하면 "매독스 함을 베트남 공화국 해군 함선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즉, 미국 함선인 줄 몰랐다는 것.[3]
그런데 북베트남 해군의 첫 공격[1] 이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71년 6월 뉴욕 타임스에 통킹만 사건의 두 번째 교전은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쓴 실 니항 기자가 7000 페이지에 달하는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입수하여 분석한 결과, 통킹 만 사건의 두 번째 교전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연방정부는 미국의 안보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 보고서와 관련한 언론 보도를 금지하고자 하였으나 미국 연방 대법원의 비호 아래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기사를 게재할 수 있었다. 뉴욕 타임즈는 2005년에도 로버트 한요크 NSA 역사연구관의 말을 인용하여 NSA의 중간 간부들이 감청내용을 왜곡했고 정책결정자들은 허위보고에 근거해 폭격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반면, 실제 두 번째 공격은 없었지만 공격이 있었다는 발표가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견해 역시 제기되고 있다. 당시 북베트남의 무선통신을 감청하던 NSA는 그 내용을 해석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구축함 터너 조이(Turner Joy)의 음탐사가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착각하여 북베트남 해군에 의한 어뢰 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하자(어떤 요인이 작용했는지는 모르나 다른 승조원들 역시 공격이 있었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다급한 상황에서 취합한 정보들을 해석하던 중 잘못 해석하여 생긴 일종의 실수라는 것이다. 이는 신호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 대표적 사건 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통킹만 사건 직후 북베트남 정부와 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자국 해군 간부 및 산하기관에 각종 등급의 훈장 150여 개와 20여 개의 명예깃발을 수여하였는데[2] 시기도 시기이거니와 수훈의 규모가 상당하여 미국의 의심을 더욱 샀을 가능성이 있다.
또 상술된 로버트 한요크 역사연구관의 결론에 대해서도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 및 존 프라도스 NSA 역사연구관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라며 흥미로워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신호정보 해석 오류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확증이 존재하지 않기에 관련 정보의 수집과 연구를 촉구하는 선에서 끝났었다. 일단 맥나마라 본인은 자신이 북베트남에 의한 두 번째 공격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보를 당시 쥐고 있었다고 2005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어쨌든 이렇게 2차 공격은 미국 측의 착각 혹은 조작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1차 공격은 북베트남 측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북베트남의 발표에 의하면 "매독스 함을 베트남 공화국 해군 함선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즉, 미국 함선인 줄 몰랐다는 것.[3]
-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군함으로 착각" 주장은 사실인가? 거짓인가?
펜타곤 기밀문서에 의하면 이때 남베트남은 속칭 34-A 작전이라는 비밀작전의 일환으로 특공대를 보내 북베트남 연안에 대한 습격 행위를 하고 있었고 미 해군이 은근슬쩍 이를 지원하고 있었기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북베트남 측이 매독스함이 미군이라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착각했다는 북베트남의 변명이 옹색한 게, 1960년대까지 남베트남 해군이 운용한 함정들은 450톤의 PC-461급 구잠정 정도였지, 한번도 1,000톤 넘어가는 군함을 운용해본 적이 없다. 나중에 1,500톤급인 에드솔급 호위구축함이나 바드갓급 수상기모함을 공여받아 운용하긴 하지만 1970년대 일이다. 그런데 2,000톤이 넘어가는 본격적인 구축함인 알렌 M. 섬너급을 남베트남 해군으로 오인했다고 주장하는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과연 북베트남 해군 지휘관이 이런 수준의 기초적인 정보마저 몰랐을까하는 말이다. 북베트남군을 무슨 아프리카 원주민 수준으로 착각한다면 모르겠는데 1960년대 북베트남군은 10년전인 1950년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완전히 끝장낸 현대화된 군대이며, 동조자가 많던 남베트남에 대한 첩보력은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첩보력 이상이었다. 광복한 지 5년밖에 안된 대한민국 정부도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북한이 보유한 군함 정도는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일선에서 함종을 착각하는일은 있을 수 있으나[4] 통킹만 사건은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미구축함을 겨우 9.3km거리에서 어뢰로 공격한 사건이다. 이 거리에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 모두가 표준배수량 2200톤급 미구축함을 커봐야 500톤급을 넘지 않는 남베트남 함정으로 착각했다고 주장하는건 매우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매덕스는 북베트남 어뢰정에 대해 접근하지 말라고 5인치(127mm) 주포로 3발의 경고사격까지 했는데 이걸 착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2008년 CNN에선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군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당시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만남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보응우옌잡 장군은 1차 공격은 인정했지만 2차 공격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특별할건 없는게, 이미 1995년에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었다.#
사실 착각했다는 북베트남의 변명이 옹색한 게, 1960년대까지 남베트남 해군이 운용한 함정들은 450톤의 PC-461급 구잠정 정도였지, 한번도 1,000톤 넘어가는 군함을 운용해본 적이 없다. 나중에 1,500톤급인 에드솔급 호위구축함이나 바드갓급 수상기모함을 공여받아 운용하긴 하지만 1970년대 일이다. 그런데 2,000톤이 넘어가는 본격적인 구축함인 알렌 M. 섬너급을 남베트남 해군으로 오인했다고 주장하는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과연 북베트남 해군 지휘관이 이런 수준의 기초적인 정보마저 몰랐을까하는 말이다. 북베트남군을 무슨 아프리카 원주민 수준으로 착각한다면 모르겠는데 1960년대 북베트남군은 10년전인 1950년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완전히 끝장낸 현대화된 군대이며, 동조자가 많던 남베트남에 대한 첩보력은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첩보력 이상이었다. 광복한 지 5년밖에 안된 대한민국 정부도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북한이 보유한 군함 정도는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일선에서 함종을 착각하는일은 있을 수 있으나[4] 통킹만 사건은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미구축함을 겨우 9.3km거리에서 어뢰로 공격한 사건이다. 이 거리에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 모두가 표준배수량 2200톤급 미구축함을 커봐야 500톤급을 넘지 않는 남베트남 함정으로 착각했다고 주장하는건 매우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매덕스는 북베트남 어뢰정에 대해 접근하지 말라고 5인치(127mm) 주포로 3발의 경고사격까지 했는데 이걸 착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2008년 CNN에선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군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당시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만남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보응우옌잡 장군은 1차 공격은 인정했지만 2차 공격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특별할건 없는게, 이미 1995년에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었다.#
3. 참고 문헌
[1] 당시 북베트남 총사령관이던 보응우옌잡의 증언을 따른다면, 이것은 현지 지휘관의 판단하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2] Huy Dương Phạm, "Đại thá̆ng mùa xuân 1975(1975년 봄의 대승리)", 2005[3] 이와 관련해 1차 공격 땐 미군 함선인 줄 몰랐다는 북베트남측의 주장이 먹힐 수도 있지만, 2차 땐 뻔히 같은 함선을 타격한 꼴이니 확실한 명분을 챙길 수 있다고 미국은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4] 1만톤 남짓한 순양함을 3만톤이 넘는 전함으로 착각하거나 그 반대로 3만톤이 넘는 전함을 그냥 순양함으로 착각하는 사례는 물론이고 유조선을 항공모함으로 착각해서 두들기는 동안 반격으로 항공모함을 날려먹는 사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