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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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미 육군, 미 해군, 미 공군용 명예 훈장.
1. 개요
Medal of Honor.[1]
미국 의회의 이름으로 미국 대통령이 군인에게 수여하는 최상위 훈장이며 '''미합중국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넷플릭스에 같은 이름의 컨텐츠가 있는데 실제로 이 훈장을 받은 영웅적인 병사의 활약을 영상화한 프로그램이다.
2. 역사
미합중국 최초의 무공 훈장은 미국 독립전쟁 때 조지 워싱턴이 만든 Badge of Military Merit으로, 이후 그 외 훈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남북전쟁 때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관련 법안에 서명하면서 명예 훈장이 만들어졌다.
첫 명예 훈장은 남북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수여되었다. 1861년 2월달, 미 육군 7연대 조지 N. 베스컴 중위와 60명의 부하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아파치에 포위되자 버나드 어윈 하사(31세)가 당나귀를 타고 160㎞을 달려와 포위를 뚫고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부대원 모두를 생환시킨 무공을 치하하여 링컨 대통령이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명예 훈장이 정식으로 제정된 후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이들은 남북전쟁 때 대열차추적(Great Locomotive Chase, 앤드류 습격대)에 참여했던 대원들이었다. 이들은 미리 전보선을 끊어 남부군이 습격을 알지 못하게 한 후 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를 노려서 기습했다. 이 습격에 참여했던 이들은 후에 남부군에 체포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제임스 J. 앤드류스(James J. Andrews)와 7명이 처형되었고 민간인이었던 앤드류스와 캠밸을 제외한 나머지 19명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남북전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수여되었고, 신미양요 때도 15명의 미합중국 해군 소속 장병들이 받았다.
유일한 무공 훈장이다보니 지나치게 남발되는 경우가 많아, 이후 하위 훈장들을 제정하면서 수여 기준을 올렸다.
3. 수여 자격
수여 자격은 미군 내의 각군 소속이면 되고, '''미국의 적과 전투 중에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무 범위를 넘어 눈에 띄는 용맹을 보여준 군인'''이라고 판단될 때 수여하는 훈장이다. 의회의 동의를 얻어 의회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이라 의회 명예 훈장이라는 별칭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냥 명예 훈장이다.
각군 지휘관 재량으로 추천을 받아서 각군부 장관 및 국토안보부 장관(해안경비대부가 없는 미 해안경비대 한정)이 하원에 추천을 올리면 투표를 통해 2/3 동의를 얻고 나서 국방부 인적자원부 및 국방부 부장관의 승인과 합참 심사를 거쳐 국방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뒤,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승인 및 수여하는 식으로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 여기서 군과 입법 및 행정기관이 번갈아 가면서 심사하는 과정만으로도 미국 특유의 문민통제와 삼권분립을 엿볼수 있다. 각 부처의 결정권 순위대로 번갈아가면서 심사해서 어느 단계에서든지 비토권을 행사할수 있는 구조로, 군인들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수여하는 훈장이라는 특유성에서 기인한다. 절차적으로만 보면 이곳저곳 기관의 순서만 바꿔주면 미국이 전쟁 선포하는 것과 비슷한 절차다. 참고로 전쟁 선포시에는 보통 국방부 브리핑을 받은 상하원의 의결을 통해 전시 선언및 적국을 공표하면 그것을 대통령이 승인하여 장관에게 작전 허가를 내리면 국방장관이 병력 전개 및 전쟁활동 개시를 지시하는 구조이지만, 2차대전 이후로 전시상태 선언이 있던 적은 없고, 상하원이 특정 대상에게 작전 행위를 의결하면 그 의결문을 토대로 국방부가 작전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 및 국방부는 ‘이라크 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이라크 자유 작전’이라고 부른다. 베트남전도 명목상으로는 의회의 승인하에 전개된 수많은 작전들이고, 한국전쟁도 이하 마찬가지다.
훈장의 특성상 살아서 받기가 상당히 힘들다. 수훈 사례의 약 70%가 수훈 대상자 본인의 사망으로 가족이나 친지에 의해 대리 수령되었다.
현대에 들면서 미군의 전쟁 양상은 다수의 소규모 전투들이 여러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맞게 전군 정예화를 추구하는지라 전술적 목표 달성의 실패가 거의 확실하면 무리한 임무 완수보다는 생환을 택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통신두절과 포위되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면 무공훈장을 수여할 만한 상황 자체가 잘 생기지 않는다. 특히나 현재의 미군 정책으로는 이런 상황들은 생긴다면 지휘관의 실책이나 정보 오판으로 인한 일이라 애초에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고, 발생도 드물다. 그러므로 무공훈장 수여가 2차대전 이후로 매우 생소해졌고 그만큼 수여자에 대한 대우가 수직상승하고 있다.
냉전기를 시점으로 곰곰히 생각해보면 무공훈장 수여 케이스 대다수는 누군가가 똥을 싸서 전투원이 사지로 내몰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영예를 얻을 때 누군가는 옷을 벗게 되거나 대차게 까이는 훈장이기도 하다.
미군은 기본적으로 아무리 전투상황일지라도 필요 이상의 위험을 부담해 가면서 작전을 펼치지 않는다. 또한 엄청나게 위험한 작전에 위협을 무릅쓰고 임한 경우에도 훈장 수여에 해당사항은 없다. 목숨을 내걸고 임무 완수 및 동료 보호 기타 등등을 위해 용맹하게 전투에 임했는데, 이게 작전 계획중에 이미 예상된 수준의 위험도 안에서 이행된다면 ‘필요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4. 명예 훈장과 수훈십자장
몇몇 사람들은 수훈십자장을 미군 최고 훈장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실제 훈장으로서의 격은 명예훈장>수훈십자장>은성무공훈장>동성무공훈장 순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착각이 일어날 만도 한게, 명예훈장 수훈자의 거의 70퍼센트 이상이 살아서 훈장을 받지 못했고, 전사하고 나서 한참 후에 영웅적인 희생과 전공이 재발견되어 추서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보통 살아서 바로 받는 최고의 훈장이 수훈십자훈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 명예훈장은 그 디자인이 수훈십자장과 다르게 3군용(해병대, 해안경비대는 해군용을 수훈) 약장은 아예 다 똑같다.
두 훈장의 특성이 다른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명예훈장의 경우 뛰어난 무공도 당연히 훈장 수여 심사 항목이지만 그것보다 미합중국 군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것에 더 수여 심사의 기준을 맞췄다.[2] 한편 수훈십자훈장의 경우는 순수 무공이라는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춰서 수여된다. 수훈십자장도 서열 2위의 무공훈장인 만큼, 이거만 받아도 군생활 및 전역 후 생활과 여러 혜택이 많다. 명예는 말할 것도 없다.
2차대전 당시도 명예훈장 수여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사를 보면 엄청난 공적을 올려 당연히 명예훈장을 받았겠거니 싶었는데 받지 못한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 중에는 명예훈장 수훈자를 압도하는 전공을 세우고도 수훈십자장밖에 못 받은 군인들도 있다!
- 미드웨이 해전에서 월드론 소령은 일본 함대를 상대로 전투기의 호위없이 거의 자살공격에 가까운 뇌격에 돌입해 전사했으나 그 결과 일본 호위기들을 저공에 잡아둘 수 있었고 미국의 급강하 폭격대가 아무런 방해없이 일본 함대를 폭격해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월드론 소령은 명예훈장을 받지 못했고 해군십자장(Navy Cross)을 받았다. 다만 한 미국의 기자는 윌드론이 명예훈장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제6급강하폭격기대대 대대장 C. 웨이드 맥클러스키 소령은 그 유명한 운명의 5분으로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켰는데도 명예훈장을 못 받았으며 그 다음 훈장인 해군십자훈장을 받는데 그쳤다. 맥클러스키의 뒤를 따르던 리처드 베스트 대위는 자기 편대를 이끌고 돌입, 일본군 나구모 함대의 기함인 아카기를 폭탄 한 방으로 격침시켰는데도 역시 명예훈장을 못 받았고 해군십자훈장을 받았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격추한 토마스 랜피어 대위도 명예훈장을 못 받았다. 사실 랜피어 대위는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면서 무전으로 "내가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다"고 떠들어대서 기밀을 누설한 적이 있어 이를 전해들은 홀시 제독이 훈장 주지 말라고 했다가 다른 사람들의 만류로 육군의 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해군십자장과 동격)이라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훗날의 연구와 조사에 따르면 실제 야마모토를 격추한 것은 렉스 바버(Rex T. Barber) 중위로 확인되었으며, 미 공군은 랜피어와 바버 두명의 공동격추로 인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거의 바버의 단독 격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더 퍼시픽으로 유명한 미 해병대의 전설 루이스 풀러 장군도 못 받았다. 대신 이 쪽은 해군십자장을 5개나 받아서, 잠수함 에이스인 로이 밀턴 데븐포트 제독과 함께 역대 해군십자장 수훈 공동 1위이다.
-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을 이끌며 처절한 장진호 전투를 치른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소장)도 명예훈장을 못받았다. 당시 수많은 미 해병대 장병들은 올리버 스미스가 당연히 명예훈장을 받았어야 했다며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다.[3]
- 레이테 만 해전에서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의 함장이었던 아모스 T. 해서웨이는 어니스트 에반스의 구축함 USS 존스턴의 뒤를 따라 돌격했고, 돌격한 존스턴, 호엘, 사무엘 B. 로버츠이 격침당했지만 히어만은 살아 남아 다른 호위항공모함, 호위구축함과 함께 끝까지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와 일본의 자랑이라는 전함 나가토를 발목을 잡는 기적을 일으켰고, 일본군 결전함대가 후퇴할 때까지 버텨냄으로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명예훈장을 못 받았다. 대신 명예훈장 바로 다음 등급인 해군십자장이 수여되어 그의 공적을 기렸다.
5. 외양
육군, 해군, 공군마다 고유한 디자인이 각각 있으며, 미 해병대와 미 해안경비대는 해군 훈장을 받는다. 이는 십자수훈장도 비슷하나, 십자수훈장은 해병대는 해군십자장을 받지만 해안경비대는 해안경비대 십자장을 2010년 10월 15일에 따로 제정했다.
목에 거는 부분은 옅은 파란색을 띠는 비단으로 만들었고, 너비는 30㎜, 길이는 552㎜이다. 수여식 및 정장 패용시에는 목에 걸지만, 약장으로 패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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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개로 우주 개발 시대가 열린 뒤에는 Congressional Space Medal of Honor라고 해서 우주인들을 위한 명예 훈장도 있다. 닐 암스트롱, 존 글렌, 앨런 셰퍼드, 프랭크 보먼 등 초대 수훈자들부터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데, 아무래도 달나라 마실가듯 다녀오고 하던 시대는 아닌지라 우주왕복선 시대에는 STS-51-L, STS-107 등 우주 개발 과정에서의 순직자들을 위한 추서 훈장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6. 혜택 및 법적 보호
'''살아서 받으려면 저승문 노크 정도는 하고 오는 것이 기본'''[4] 인 훈장인 만큼, 명예 훈장 수훈자에게는 굉장한 혜택과 법적 보호가 주어진다. 더군다나 수여하는 국가가 국가다 보니...[5]
- 각 명예 훈장 수여자는 명예 훈장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며, 이는 재향군인회에서 인증하여 수여자가 받을 자격이 있는 다른 군 연금이나 다른 혜택 유무와 관계없이 월 1,027달러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2004년 12월 1일부터 이 연금은 생계비 인상의 대상이다.
- 수여자가 사병(병 및 부사관)일 경우 새 군복을 요구 시에 지급한다. 과거 사병들의 월급이 사비로 피복을 맞추기 곤란할 만큼 적은 데다, 군 피복이 정복과 전투복의 구분 없이 하나만 지급되어 전투 후 수여식 등에 참석하려면 훼손된 피복을 입고 가야 하는 일이 많아 생긴 규정이다. 현재도 훈장 수여식에 가급적 깔끔한 정복을 입고 가야 하는 사병들 입장에선 새 피복 지급 시기 이전 혹은 예비역이라 추가 지급이 안 나올 경우 등에 매우 유용하다. 장교의 경우는 제정 당시엔 사비로 맞춰 입게 되어 있었기에 이 혜택이 없었는데, 지금도 규정이 개정되지 않고 있다.
- 미 국방부 규정 4515.13-R이 명시하는 Space-Available Travel 규정에 따라, 명예 훈장의 수여자는 신분에 관계 없이 미 국방부 소속 항공기를 여행 목적으로 탑승하는 것이 허용되며, 국내-국내/국외-국외/국내-국외 전부 해당된다. 즉 민간인[6] 신분으로도 서류 몇 장 준비하면 이용 가능하다. 여행하려는 경로에 적합한 미 국방부 소속 항공기 일정이 있고, 명예훈장수훈자는 자리만 있다면 국방부 소속 항공기로 공짜로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명예훈장수훈자의 dependents는 동승자 조건만 갖추면 국외-국외/국내-국외 여행 목적의 탑승이 허가된다. [7] 물론, 민간 소속 항공기라도 명예 훈장 수훈자가 탑승한다면 엄청난 우대를 받는 것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항공사측에서 굉장한 영예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국내선이라면 명예훈장 수훈자가 탑승중이라고 기장이 자랑하는 일도 비일비재이다. 1등석 자리가 비어 있으면 자리를 1등석으로 옮기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 수여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식별증, 매점과 환전 특전이 주어진다.
- 수여자는 따로 자격이 누락되지 않는 한 사후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갖는다.
- 수여자의 자녀들에게는 추천과 할당 요구사항에 관계 없이 미국의 각군 사관학교의 입학이 보장된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사관학교 입학은 해당 주 출신 미국 상원 의원의 추천이 필요한데, 추천 여부와 무관하게 본인이 원하면 자유롭게 입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훈장 수훈자의 출신 군종과 다른 사관학교에 입학을 희망해도 이 규정은 적용된다.
- 훈장 수여자는 미 연방법 10장 3991조에 의거하여 퇴직금의 10%를 더 받을 수 있다.
- 2002년 10월 23일 이후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자는 명예 훈장 기를 수여받는다. 또한 연방법 14장 505조에서는 현재 생존한 이전 수여자 103명에게도 이 기를 수여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집에 걸어놓거나 하며 명예 훈장 수훈자 거주중이라 표시하는 데 써도 되고, 명예 훈장 수훈자가 행사에 참석하거나 할 경우 및 본인의 장례식 등에 이 기를 걸 수 있다.[image]
- 명예 훈장 수여자는 다른 모든 훈장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민간인 복장에 명예 훈장을 착용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상업적, 또는 과격주의 목적 등이 아니라면, 임의로 군복을 입을 수 있다고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8] 은퇴한 다른 군 인사는 규정된 행사시에만 군복을 착용할 수 있다.[9]
- 군 규정에는 없지만 모든 미군은 계급불문 상관이라도 명예 훈장 수여자에게는 먼저 거수경례를 하는 게 관례이며 이것이 강력하게 권장된다. 4성 장군도, 심지어 대통령도 먼저 경례를 한다. 이는 수상자가 현역인지 아닌지완 무관하다. [10]
- 2006년 후반까지 명예 훈장만이 유일하게 연방법으로 위조 및 매매가 금지되어 있었다가 2005년의 도난 훈장 법령 (Stolen Valor Act)이 2006년 12월 20일부터 제정됨에 따라 모든 훈장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 모든 명예 훈장은 미 국방부에서 원본을 수여자에게 수여하며, 훈장의 오용(인가되지 않은 생산 및 착용 포함)은 최대 10만 달러의 벌금 또는 1년의 금고형에 처할 수 있다. (미 연방법 18장 704(b)조에 의거)
- 미 50개중 40개 주는 매우 낮은 가격, 혹은 아예 무료로 자동차(오토바이) 번호판을 명예 훈장 수상자의 차량에 제공한다. 이 번호판은 공통적으로 medal of honor라 표기되어있으며 (물론 발급한 주 이름은 붙는다.) 이 특별한 번호판은 이런저런 장식이 붙는 일반적 미국 차량 번호판과는 달리 명예 훈장 이미지나 성조기등의 이미지만을 사용하는 간단한 디자인이다. 해당 번호판은 수상자의 평생 영구 사용이 가능하며 [11] 주에 따라 수상자의 배우자 역시 이 번호판을 사용 가능하다. 또한 사용자가 차량을 교체할경우 매우 낮은 가격, 혹은 아예 무료로 해당 번호판을 그대로 옮겨 달 수 있다. 수상자의 이 번호판의 사용은 강제가 아니며 선택이다.
7. 수훈자
원칙적으로는 공을 세우거나 전사한 뒤 2년 내에 대통령에게 소식을 알리고 3년 내에 수여되도록 하고 있지만, 시체조차 찾지 못한 전사자들이나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고군분투했던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훈장을 받은 이들도 많다. 또한 공적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여 수훈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아직도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에서의 영웅적 활약을 기려 명예 훈장이 수여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이 경우 수훈 당사자가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으므로[12] 그 가족이 대리로 수여받는다.
총 3,465번 수여되었으며 수여자는 3,446명이다. 19명은 2중 수여를 받았는데, 이 중 5명은 같은 행동으로 서로 다른 군의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경우이며 나머지 14명은 다른 행동으로 두 번 수여받았다. 육군이 가장 많은 수여자를 배출했고 가장 적은 수여자는 해안 경비대로, 1943년 5월 27일 더글라스 먼로 신호중사가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활동으로 해군판을 받았던 것이 해안 경비대의 유일한 수상 사례이다. 아무래도 해안 경비대는 영해에서 말 그대로 해안 경비에 치중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해외에 파병되더라도 미 해군과 함께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선이기에 이런 무공훈장 받을 정도로 험한 일은 드물다. 만약 해안 경비대가 몇십 명씩 무더기로 명예 훈장 받을 일이 있다면 그건 분명 '''미국 본토가 공격받는 상황'''일 것이다(...)
7.1. 실제 수훈자
각종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수훈자 위주로 나열했다. 수여받은 사람의 수가 총 3470명이나 되는만큼 너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훈장을 받을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란 말은 아니다. 물론 이 훈장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뛰어났던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고. 남북전쟁 시기에 너무 남발됐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 이렇다 할 훈장이 없어 좀 잘 싸웠다 싶으면 줬다. 심지어 운디드니 학살사건에 가담한 20명의 장병들에게도 훈장이 수여되었고, 그 훈장은 현대에도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들어 중간 단계의 훈장들이 여럿 생기고, 규정이 엄격해져서 그 가치가 올라가, 2차 세계 대전 즈음에는 지금과 같이 살아서 받기 힘든 훈장이 되었다. 물론 미국이 참전한 전쟁 규모나 미국이 동원한 병력 수를 생각하면 이 수훈자 수도 많다고 할 수 없다.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항목도 참조. 미국이 역사는 짧은데 배는 너무 많아서 붙일 만한 이름이 바닥났고 전사자들의 이름을 따오는 전통 아닌 전통이 생겨서 명예 훈장이 추서된 전사자들의 상당수(특히 해군·해병 출신)는 최신 전투함의 함명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두고 77보병사단 308연대와 306·307연대 잔존병 500여 명을 이끌고 5,000명에 가까운 독일 육군에 포위되어 필사의 항전을 벌여서 독일군 전선을 크게 무력화시켰다. 영화 '로스트 바탈리온'과 Sabaton의 노래 'The Lost Battalion'이 이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군 중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병으로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자신을 포함한 17명의 분대가 프랑스 샤텔셰에리 북쪽 223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 무력화에 나서 무력화에 성공했으나 고지에 위치한 다른 기관총 진지에서의 기습으로 분대장을 비롯해 9명이 죽거나 다치고 분대에 이등병 7명 밖에 남지않자 단신으로 기관총 진지 무력화에 나서 자신의 M1917 엔필드 소총으로 진지 내의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20명이 넘는 독일군을 사살했다. 소총의 총알이 다 떨어질 무렵 독일군 6명이 총검돌격을 해오자 재빨리 M1911 권총을 꺼내 6명 모두 사살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와중에 기관총 진지를 지휘하던 독일군 장교가 그의 뒤로 우회해 그에게 권총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가자 장교는 자신의 부대가 입은 피해상황을 고려하여 그에게 항복의사를 전달해왔다. 이 전투에서 그는 혼자서 32정의 독일군 기관총을 무력화했으며 최소 28명을 사살하고 132명의 포로를 생포했으며 그의 맹활약 덕분에 소속 부대였던 미 328보병연대는 목표였던 샤텔셰에리 북쪽의 철도 장악에 성공했다.
- 둘리틀 특공대의 바로 그분. 살아서 돌아온 뒤 대령을 건너뛰고 준장이 되어[15]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중장으로 예편했지만 노년을 보내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기 대통령이 명예 공군 대장으로 진급시켜줬다.
- 당연히 "I shall return"과 인천상륙작전의 그 맥아더 맞다. 필리핀 바탄 반도에서 분전[16] 하던 맥아더에게 호주로의 철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아버지이자 육군 중장까지 지낸 아더 맥아더 주니어도 명예 훈장 수훈자라 부자가 각각 명예 훈장을 받은 기록이 나왔다.
- 2012년 12월 사망하기 전까지 정치 생활 내내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의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와이에서 진주만 공습에 이은 행정명령 9066호로 수용소에 끌려갈 위기에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처음엔 의무병이었지만 전쟁이 길어지며 현지임관으로 장교가 된 뒤 독일군 기관총 방어진지 제압 작전에서 한 팔을 잃고도 소대를 잘 지휘한 공로가 인정받아 상이 기장과 청동십자훈장을 받았고,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추천을 받아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최종 계급은 대위. 1963년 1월 하와이 주의 1대 연방 상원 의원에 당선된 후 2012년 12월 작고할 때까지 연방 상원 의원으로 9선의 기록을 달성하여 미국 역사상 네 번째, 非백인계 인종으로는 제일 오래 중앙 정계에 몸담은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 2012년 12월 작고한 뒤 장례식에서는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과 수많은 정계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랩터의 추모 비행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후 알레이 버크급 플라이트 IIA: 기술 실험 버전의 세번째 함정으로 예정된 DDG-118[17] 과 펜타곤 산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연구소, 미국국립군의관의과대학 간호대학원 및 다니엘 K. 이노우에 국제공항의 명칭을 이노우에의 이름을 따 붙였다.
- 두 명의 델타 포스 저격수. 영화 블랙호크다운으로 유명한 모가디슈 전투에서 2번째로 추락한 MH-60 페이브 호크 콜사인 슈퍼 64의 생존자인 조종사 마이클 듀란트를 보호하기 위해 상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 민병대와 무수한 군중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당시에 ' 슈퍼 64' 가 추락한 위치 근처에 집들이 여러 채 있어서 반군들이 엄폐해서 사격하기 매우 좋았으며 건물과의 간격이 매우 좁아서 절대적으로 수비하기에 불리했지만 랜디 슈가트와 게리 고든은 반군 1000명 이상을 상대로 무려 2시간 이상 버텨낸다.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끝도 없이 몰려오는 모두를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타군인 미 해군에서도 그들을 기려 신형 군수지원함 2척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다.
- 네이비 씰 대원으로, 영화 론 서바이버에 나오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레드윙 작전의 정찰 임무를 수행 중 탈레반과의 교전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도 산악 지형이라 본부와의 통신이 되지 않자 동료들의 구출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개활지로 이동, 통신을 시도하여 지원군을 요청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교전 끝에 전사했다.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의 62번함 DDG-112에는 마이클 머피의 이름이 붙었다.
- 아프간 전쟁에서의 네 번째 수훈자이자 베트남 전쟁 이후 최초로 생존자로서 명예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2007년 10월 25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매복에 걸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탈레반에 끌려가는 동료를 구해냈다. 미국 내의 반응도 아주 뜨거웠는데 스티븐 콜베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비롯해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2011년 하사 계급까지 달고 전역하여 콜로라도 주립 대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 플라잉 타이거즈에 잠시 몸담은 적도 있는 해병대 항공대 최고의 에이스(28대 격추). 보잉턴의 활약은 자서전
과 동명의 TV 드라마로 극화되었다(1970년대 후반 MBC TV에서도 방영). 하지만 모난 성격이라 이리저리 치고받기도 했으며 이런 성격 때문에 플라잉 타이거즈의 지휘관 클레어 센놀트 대령과 불화가 생겨서 팀을 나왔다. 원래 1944년에 명예 훈장 수훈이 결정된 상태였지만 하필 태평양 전쟁 말기를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일제 패망 이후에 풀려났기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수훈한 훈장을 해리 S. 트루먼에게서 받았다. 최종 계급은 대령.
- 인천상륙작전 항목 첫 번째 사진에서 맨 위쪽에 참호를 넘고 있는 군인. 유일하게 실전 경험이 없던 중위이며, 상륙 후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뒤 곧바로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하려 했으나 적군의 자동화기에 가슴과 오른 어깨를 피격당해, 막 투척하려던 수류탄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자신의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어 대원들을 구했지만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전공을 기려 사후 추서되었다.
- 과달카날 전투에서 무려 48시간 동안 일본 육군 3,000명과 맞서 싸웠다. 전투 도중 고장난 기관총을 수리하거나 아군 기지까지 포화를 뚫고 돌아가 탄약을 메고 다시 돌아오는 등 미친듯이 활약을 펼쳤으며, 적들의 시체가 시야를 가로막자 적진으로 뛰어가서 시체담을 무너트리고 다시 돌아와 기관총을 갈기거나, 무려 15㎏이 넘는 수냉식 브라우닝 M1917을 들고[18] 일본군을 죽이기도 했다. 확인된 것만 37명 이상의 적을 사살해 생존한 채로 명예 훈장을 받고 전쟁채권 홍보 등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으나, 사무직으로 남는 것을 거부하고 해병 신병교육대 교관을 거쳐 다시 최전선 파병을 지원하여 제5해병사단에 배치되었지만 이오지마 전투 초반에 전사했다. 전사할 당시 계급은 중사. 후에 바실론의 이름을 딴 기어링급 구축함이 진수되었다. 더 퍼시픽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패피 보잉턴 대령과 함께 해병대에서 보기드문 명예 훈장과 해군 십자장을 모두 받은 용자이자 이 기록을 가진 유일한 부사관이기도 하다.
-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16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하여 이탈리아 전선, 프랑스 전선에서 용감히 싸워 은성무공훈장 등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현지임관으로 소위가 되었다. 1945년 1월 26일 홀츠마이어 전투에서 1개 소대 병력으로 독일군 2개 대대 병력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특히 격파된 아군 M10 울버린 구축전차 포탑 위에 단신으로 뛰어올라가 포탑의 대공기총으로 독일군을 격퇴하면서 화력유도까지 해내는 공을 세워 명예훈장을 받고 중위로 진급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전투를 영화화한 영화 'To Hell and Back'에 본인 역을 스스로 맡는 등 영화배우로 전업하여 활동하였고,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참전용사들의 PTSD 치료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71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45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현재까지 미 육군 장병 중 가장 많은 훈장을 수훈한 사람이자 최단기간에 이등병에서 장교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전후의 일이긴 하지만 유일한 명예훈장 수훈 프리메이슨이란 기록도 가지고 있다.
- 베트남 전쟁 이후 살아서 명예훈장 수훈자가 2명이나 나온 캄데쉬 전투의 수훈자들이다. 2009년 10월 3일 캄데쉬 전투 당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내고 소초 정문을 탈환하여 기지를 탈환한 전과를 이룬 로메샤 하사와 총성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중상을 입은 동료를 구한 카터 상병은 그 공을 인정받아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로메샤 하사는 전역한 뒤 자신이 명예훈장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복무한 미 육군 제2 보병사단에 자신의 명예훈장을 기증하였고 자신이 겪었던 캄데쉬 전투에서의 상황을 묘사한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카터 상병은 명예 훈장을 수훈받은뒤 PTSD에 걸리게 되어 결국 만기전역하였고 현재 자신과 같은 상황에 발생한 퇴역군인들을 치료하고 있다고 한다. 이 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웃포스트(2020)이 있다.
- 다코타 마이어(1988년 6월 26일~)는 아프간 전쟁 중 2009년 9월 8일 아프가니스탄 쿠나르 지방 간즈갈 계곡 전투에 참여하여 탈레반 50명의 기습을 받았다. 이 기습으로 동료 미군 4명이 사망했고, 36명의 아프간 정부군이 발이 묶였다. 마이어 병장은 말리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동료인 로드리게스 차베즈 하사가 험비 운전을 하고, 마이어 병장은 험비 상부 기관총을 잡고 5회 왕복을 하며, 동료 미군 시신 4구와 아프간 정부군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마이어 병장은 4회째 왕복에서 오른팔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마이어 병장은 전역하였고, 건설회사에 근무하던 중 2011년 9월 15일 명예 훈장을 수여받고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역대 최연소 수훈자이고,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생존한 미군으로는 3번째, 미 해병대에서는 첫 번째 수훈자였다. 동료인 차베즈 하사는 명예 훈장을 받지는 못했으나 두 번째로 높은 "Navy Cross" (해군 십자상, 육군 수훈 십자상과 동일하다)를 수여받았다.[20]
- 윌리엄 스웬슨(1978년 11월 2일~)은 마이어과 함께 간즈갈 계곡 전투에서 싸웠던 육군 대위다. 스웬슨은 당시 전투에서 구출 작전을 주도했고 그로 인해 명예 훈장 후보에도 올랐으나 탈락했다. 이유는 수뇌부에게 개겨서…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상부에 화력 지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이를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수뇌부에게 밉보인 스웬슨은 당연히 수훈에서 탈락했다. 훈장도 받지 못한 채 2011년에 전역, 이후 미혼에 무직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스웬슨을 알던 종군기자가 이후 마이어의 수훈과 그 전공에 의문을 품고 추적해 이러한 사실을 폭로했다. 마이어도 자신의 저서에서 종군기자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해병대에서는 크게 반발했지만, 캘리포니아의 하원의원이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져, 2013년 10월 15일 명예 훈장을 받았다(마이어 역시 해당 전투에서 작지 않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수훈은 유지되었다). 참고 1 참고 2 위키백과의 스웬슨 대위 항목 역시 참고해도 좋다. 스웬슨은 2014년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다시 복무하고 있다. 2020년 현재 중령이다.
- 남북전쟁 중 와그너 요새 공략 중 기수가 저격을 받아 쓰러지자 대신 깃발를 들고 돌격하였으며 연대장인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성공적으로 퇴각시킨 공훈으로 받았다. 퇴각 당시에 총 4곳에 총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카니 상사는 미군 최초의 흑인이자 유색인종 부사관이며 또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서 명예 훈장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카니 상사가 소속되었던 부대 또한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부대인 매사추세츠 54연대였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영광의 깃발이다. 영화 중에서 모건 프리먼이 맡은 역할이 카니 상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의 주인공인 티아나의 아버지 역시 카니를 모티브로 했다. 사족으로 맨 마지막에 나오는 쇼 대령과 부대원들이 조각된 기념비는 실존하는 것으로 보스턴에 있다.
- 보기 드문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출신이다. 플레처급 구축함 USS 존스턴 함장으로 태평양 전쟁 참전하여 레이테 만 해전 중 사마르 해전에서 전사했다. 에반스가 속한 '태피 3'는 고작 지상공격 혹은 대잠, 대공화력만을 갖춘 최대 28대 비행기를 수용하는 마이너 항공모함인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6척과 구축함보다 작은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4척, 그리고 같은 플레처급 구축함이 존스턴을 포함한 3척뿐이었고, 상대는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1척,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1척,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 2척,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와 스즈야 2척, 타카오급 중순양함인 초카이 및 아가노급 경순양함 노시로, 야하기, 다수의 구축함들로,배수량만을 따지면 미국 태피 3의 모든 함을 모아야 겨우 야마토 한 척과 비슷한 실정이라 무장이 매우 빈약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명령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일본 주력 함대를 향해 돌격, 쿠마노 호의 함수를 어뢰로 날려버렸고, 대파된 쿠마노를 피하려던 스즈야도 미군의 공습에 대파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공고와 야마토의 포에 큰 손상을 입혔지만, 호위항공모함을 노리고 접근하는 일본 경순양함, 구축함들을 향해 또 홀로 덤벼들어서 전선을 흐트려 놓았다. 유감스럽게도 일본군의 공격으로 USS 존스턴이 격침되어 실종되고 말았지만, 에반스의 돌격은 태피 3의 다른 함선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으며, 에반스의 용기를 이어받은 태피 3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운 끝에 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필리핀의 수많은 미군을 구하고 일본을 무찔렀다. 사후 추서.
- 대위 시절 베트남 전쟁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로 활약했다. UH-1 휴이를 몰았다. 미군과 북베트남군 사이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인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21] 에서 자신과 편대장이 실어나른 육군 대대가 집중 포화를 받자 포화를 14차례나 뚫고 들어가 보급품을 운송하고 부상자 30명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착륙 지점은 전투가 벌어지던 곳에서 불과 200여 m밖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프리먼의 헬리콥터도 사격에 노출되었고, 이 때문에 프리먼 대위는 팔과 다리에 총 네차례나 총상을 입었다. 부상을 입은 후 비행 부적합 판정을 받은 뒤에는 공병으로 전과했다. 프리먼의 편대장이었던 브루스 크랜달(Bruce Crandall) 소령 역시 같은 전투에서 활약하여 명예 훈장을 받았다. 훈장 추천 시기가 늦어서 당시에는 받지 못했지만 명예 훈장의 추천 시기 제한이 없어지면서 2001년 7월 16일에 수여받았다. 관련 영화로 위 워 솔져스가 있다.
- 천주교 군종 신부. 6.25 전쟁에서 명예 훈장을 받은 이들 중 거의 유일한 비전투요원이자 사제. 한국전쟁에 군종 신부로 참전하여 아군은 물론 적군까지도 가리지 않고 돌봤으며, 부상당한 적군에게도 대놓고 투항하라고 권유할 정도로 간 큰 인물. 운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뒤 같이 포로가 된 장병들의 탈출도 돕고 자신의 배식도 동료 포로들에게 나눠주며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다가 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신부이자 장교로서 모범이 된 인물이다. 60여 년이 지난 2013년에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미국 가톨릭에서는 카폰을 순교자로 인정해야 한다며 카폰 대위의 시성에 필요한 기적도 조사되는 등 시성 운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젊은 시절 번역한 카폰의 전기가 출간되기도 했다.
- 위의 카폰, 워터스와 함께 비전투요원으로서 훈장을 받은 사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자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에 입대했지만 집총을 거부하고 대신 의무병과에 지원했다.[22] 그는 지휘검열이 있는 토요일에도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며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전투병과로 보직 변경을 하라는 지휘관의 설득을 거부해 군대 내에서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다. 미 육군 77사단 307보병연대 1대대 소속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전투 내내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쓰러진 전우들을 일일이 확인해 생존자들을 아군 진지로 들어 날라 총 75명의 생명을 구했다. 그중에는 일본군이 대놓고 수류탄을 던지는 참호 앞까지 가서 생존자 7명을 구한 것도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해당하지만 의무병으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우를 구한 행동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2016년에는 그의 활약에 대한 영화인 핵소 고지가 개봉했다.
- 6일 전쟁 당시 리버티 사건에서 이스라엘 해군 어뢰정과 공군에게 피격당한 기술연구함(사실은 NSA와 공동운용하는 정보수집함) USS 리버티의 함장이었다. 이스라엘이 뒤늦게 "미국을 건드렸구나 ㅅㅂ 우리 x됐어요" 해서 똥줄 태우며 어뢰 쐈던 그 어뢰정(…)을 보내 구호지원을 제의했지만 쌩까고 자신도 부상을 당한 채로 USS 리버티를 지중해 미 해군기지까지 무사히 자력 항해하였다.[23] 살아서 명예 훈장을 받는다는 사실은 백악관 초청이 당연한 용자의 상징이지만, 이 사건 자체가 기밀이었기 때문에 해군부에서 조촐한 수여식만 거행했다. 어찌보면 안습.
-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 중 최고 계급으로 리학구 총좌와 교환되어 석방된 장군. 미 육군 24보병사단장으로서 대전 전투를 이끌었다. 인민군의 엄청난 공세에 맞서 수많은 전차를 부수는 등 분전했지만 버텨내지 못하고 본대와 떨어진 뒤에도 부상을 입고도 사단장으로서 로켓 포와 수류탄을 들고 싸우는 등 절박하게 본대와의 만남을 위해 애썼지만 끝내 전북 진안에서 주민의 밀고로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훈장 수여 당시에는 부인과 자식들이 대리 수여하는 등 미국에서도 전사자 취급을 했으나, 1953년 포로교환에서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와 전쟁영웅으로 대접받았다.[24] 이후 미국으로 귀국 후 미군 제6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몇 년 재직한 후 중장 진급과 동시에 퇴역하여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 아프간 전쟁에 해병대 제1사단 소속 자동소총 사수로 참전하여 2010년 전투 중 동료에게 수류탄이 날아오자 몸을 던져 수류탄 공격을 막아내고 동료와 함께 중상을 입은 채 살아남았지만(온전히 몸으로 덮은 것은 아니었다고) 얼굴과 오른팔에 중화상을 입어 한 눈을 잃었는데 이후 눈물겨운 재활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며 미국 전체가 감동받았다. 해병대에서 의병 제대한 뒤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체육교육을 공부하고 있으며 2014년 6월 19일 백악관에서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생존하여 명예 훈장을 받은 인물로서 역대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 DEVGRU 소속. 바이어스 상사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라그만 주에서 탈레반에 의해 운전사와 통역사와 함께 납치된 '딜런 조셉' 박사의 인질 납치 첩보를 입수한 미국이 편성한 구출팀에 소속되어 작전에 참가하였다. 맨 처음 건물로 침투한 니콜라스 체크 중사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현장에서 즉사하였으나 바로 뒤에 있던 바이어스 상사는 탈레반과 교전을 시작하고 인질이 갇힌 독방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갑자기 달려드는 탈레반을 확인하고 맨손으로 제압한 후 총격전 중에 인질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몸으로 인질을 가려 보호하며 무사히 구출하도록 했다. 씰계 대원으로는 6번째이자 DEVGRU 대원으로는 첫번째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오하이오 출신의 바이어스 상사는 1979년생 현재 40세이며 1998년 해군에 의무병으로 입대 후 2002년 BUD/S 수료후 네이비 씰 대원으로 활동하다 2011년 DEVGRU 오퍼레이터가 되었으며 복무기간 동안 총 11번의 파병을 다녀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수여식에서 "바이어스 상사는 적을 맨손으로 제압하면서까지 동료들이 작전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왔고 전광석화와 같은 임무수행능력으로 인질과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하였다. 20년간 해군에서 근무한 뒤 2019년 원사(Master Chief Petty Officer)로 전역하였다.
- 전무후무한 코스트 가드 출신의 명예 훈장 수훈자.[26] 통신부사관으로, 과달카날 전투의 제1차 마타나카우 전투에서 루이스 풀러 중령의 해병 7연대 소속 1대대가 전멸할 위기에 놓이자 일본군의 십자포화가 빗발치는 가운데 상륙주정을 이끌고 들어가서 기관총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전사했지만 그 덕에 해병대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미군에서도 쓸데 없는 자부심과 높디높은 콧대로 유명한 해병대가 진정한 은인이라며 두고두고 떠받들어 모실 정도면 말 다했다.
해군에서도 먼로의 이름을 딴 구축함을 진수했고, 해경에서의 위상은 말할 것도 없다. 국토안보부가 워싱턴 D.C. 남동부에 짓고 있는 해경본부 신청사의 명칭을 더글러스 A. 먼로 빌딩으로 정했으며, 해안경비대에서도 레전드 급 경비정에다 그의 이름을 붙여서 기리고 있다.
- 중령 시절 베트남 전쟁에서 A-4 스카이호크를 조종하다 북베트남에서 격추된 뒤 포로수용소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을 잃지 않고 버텨내며 끝내 살아 돌아온 공로로 수여.[27] 이후 중장으로 퇴역했다.
- 화염방사병 출신.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관총 공격을 줄이기 위해 약 32kg에 달하는 화염방사기를 들고 홀로 적진으로 돌격해 화염방사기로 공격하고 다시 뒤로 물러나 연료통 교환 후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행동을 무려 4시간 동안 반복했다.[28] 전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10월 5일 백악관에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2020년 현재 96세(1923년생)로 아직 살아 계시며, 이오지마 전투에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병사 중 최후의 생존자이시다. 2018년 2월 4일, 수퍼볼 LII에 나와서 코인 토스를 할 정도로 아직 정정하시다. 해당 영상 쭉빵한 치어리더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도 하시고 방송 자막에는 아예 Living Legend라고 쓸 정도. 미국에서 명예훈장 수훈자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영상이다.
- 미 육군 그린베레 출신으로 사병에서 시작해 대령으로 전역한, 그리고 전역 시 현역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군인이었다. 하워드는 베트남전에 54개월간 참전하는 동안 8개의 퍼플하트[29] , 4개의 동성 훈장, 은성훈장, 수훈 십자상, 그리고 명예 훈장을 수훈한 인물이다. 중사 계급으로 MACV-SOG에 소속되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미군이 작전한 거의 모든 전역에 투입되었다. 또한 명예 훈장 수훈 추천을 3번을 전부 다른 작전에서 펼친 활약으로 추천되었으나, 캄보디아에서 비밀임무에 종사하고 있을 때의 전투였기 때문에 처음 2번의 추천은 다운그레이드되어 은성훈장과 수훈 십자상이 수훈되었다. 마지막의 북베트남 전역에서 실종 아군 수색구조 임무에서 헬리콥터에서 투입된 직후 2개 중대에 포위당해 소대장이 부상당하고 자신도 부상당한 상태에서 소대장 위치까지 기어가 응급처치를 한 뒤 낙오된 소대장을 끌고 소대가 위치한 지점까지 끌고 간 다음 구조 헬리콥터가 도착할때까지 항공지원을 받아가며 3시간 반 동안 방어를 지휘해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이 공로로 하워드는 명예훈장과 퍼플하트를 수여받았다. 사망할 당시, 하워드는 가장 수훈한 훈장이 많은 명예 훈장 수훈자였다.
- 헨리 E. 어윈(Henry Erwin) 공군 상사 : 추천 후 최단 시간 내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인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 항공병으로 1942년에 입대했다. 직책은 육군 항공대의 B-29 폭격기의 통신 담당 승무원이었다. 1945년 4월 12일, 폭격기 편대의 선두기에 탑승했는데 표적 표시용 백린탄[30] 을 투하하라는 지시를 받고 폭탄의 안전핀을 제거하였는데, 이때 신관의 이상으로 폭탄이 기체 안에서 바로 터져버렸다. 1,100도 짜리 화염덩어리가 된 폭탄은 그대로 어윈의 얼굴을 강타, 어윈은 그대로 양쪽 눈의 시력을 잃고 한쪽 귀가 타버리고 코가 뭉게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 백린탄에서 나온 연기가 기체 안을 가득 채워 조종사가 자기 앞에 있는 계기판을 못 볼 지경이 되어 추락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이 폭탄을 가만히 놔두면 다른 폭탄까지 터져 전부 죽는다는 생각을 한 어윈은 불붙은 백린탄을 맨손으로 감싸들고 기체 맨 앞의 부조종사석의 창문으로 향했다. 비행기 중간에서 폭탄을 들고 가던 어윈은 항법사의 책상이 앞을 가로막자 폭탄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으로 수초간 책상을 밀어 재낀뒤(양 눈이 멀고 불붙은 폭탄을 맨손으로 든 상태에서 한손으로 길을 더듬어가며!) 마침내 부조종사석까지 도달했고, 폭탄을 밖으로 던진 뒤에야 쓰러졌다. 연기가 걷히자 조종사는 비행기가 바다를 향해 다이빙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종간을 당겨 바다 위 90m 지점에서 간신히 비행기를 구했다. 승무원들은 어윈을 구하려 했으나, 백린탄은 산소가 있으면 절대 꺼지지가 않아 어윈의 몸에 붙은 불길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고, 이 와중에도 어윈은 의식이 있어서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도 도리어 승조원들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이오지마까지 도착한 기체에서 어윈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사들은 어윈이 아직 살아있다는데 놀랄 지경이었다.
몇 시간의 수술 끝에[31]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어윈의 상태는 워낙 위중해서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후 훈장이 수여되기 까지의 상황도 매우 드라마틱한데, 지휘관이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새벽에 훈장 추서를 요청하는 전화를 자다 깨서 받았으나 상황을 설명받자 그 즉시 명예훈장을 추천하고, 전속부관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용사가 죽기 전에 훈장을 가져 올 것" 을 지시했다. 어윈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였고, 때문에 부관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명예훈장 재고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즉시 수송기 편으로 호놀룰루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 재고라는 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훈장이었다. 그러자 부관은 그 박물관의 훈장을 훔쳐서 다시 특별 수송기 편으로 가져왔고, 그 동안 괌으로 후송된 어윈은 4월 19일 괌의 병실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놀랍게도 어윈은 이 혹독한 참사로 죽지 않았고, 향후 30개월 동안 40번이 넘는 대수술을 받아 시력을 부분적으로 회복하고 한쪽 팔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후유증으로 상시 선글라스를 끼고 살아야 했다. 이후 1947년 공군으로 전군하여 상사(Master Sergeant)로 전역했으며, 2002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이 폭탄을 가만히 놔두면 다른 폭탄까지 터져 전부 죽는다는 생각을 한 어윈은 불붙은 백린탄을 맨손으로 감싸들고 기체 맨 앞의 부조종사석의 창문으로 향했다. 비행기 중간에서 폭탄을 들고 가던 어윈은 항법사의 책상이 앞을 가로막자 폭탄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으로 수초간 책상을 밀어 재낀뒤(양 눈이 멀고 불붙은 폭탄을 맨손으로 든 상태에서 한손으로 길을 더듬어가며!) 마침내 부조종사석까지 도달했고, 폭탄을 밖으로 던진 뒤에야 쓰러졌다. 연기가 걷히자 조종사는 비행기가 바다를 향해 다이빙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종간을 당겨 바다 위 90m 지점에서 간신히 비행기를 구했다. 승무원들은 어윈을 구하려 했으나, 백린탄은 산소가 있으면 절대 꺼지지가 않아 어윈의 몸에 붙은 불길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고, 이 와중에도 어윈은 의식이 있어서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도 도리어 승조원들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이오지마까지 도착한 기체에서 어윈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사들은 어윈이 아직 살아있다는데 놀랄 지경이었다.
몇 시간의 수술 끝에[31]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어윈의 상태는 워낙 위중해서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후 훈장이 수여되기 까지의 상황도 매우 드라마틱한데, 지휘관이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새벽에 훈장 추서를 요청하는 전화를 자다 깨서 받았으나 상황을 설명받자 그 즉시 명예훈장을 추천하고, 전속부관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용사가 죽기 전에 훈장을 가져 올 것" 을 지시했다. 어윈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였고, 때문에 부관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명예훈장 재고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즉시 수송기 편으로 호놀룰루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 재고라는 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훈장이었다. 그러자 부관은 그 박물관의 훈장을 훔쳐서 다시 특별 수송기 편으로 가져왔고, 그 동안 괌으로 후송된 어윈은 4월 19일 괌의 병실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놀랍게도 어윈은 이 혹독한 참사로 죽지 않았고, 향후 30개월 동안 40번이 넘는 대수술을 받아 시력을 부분적으로 회복하고 한쪽 팔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후유증으로 상시 선글라스를 끼고 살아야 했다. 이후 1947년 공군으로 전군하여 상사(Master Sergeant)로 전역했으며, 2002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마이클 A. 몬수어(Michael A. Monsoor) 해군 하사
1981년 4월 5일생으로, 해군 군사경찰(Master At Arms)로 군생활을 시작해 특전 쪽으로 전과, 2006년 9월 29일에 이라크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 Mk.48 LWMG 문서의 맨 처음 사진이 그의 실전 투입 중 찍힌 모습이다. 사후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줌왈트급 구축함 2번함 DDG-1001이 그의 이름을 딴 USS 마이클 A. 몬수어 함으로 명명되었다.
- 클린트 L. 로메셔(Clint L. Romesha) 육군 하사
전역 후 2년이 지난 2013년 2월 11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공으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백악관에서 수여받았다. 그의 할아버지인 오리 스미스 로메셔(Aury Smith) 또한 2차대전 당시 미 육군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 어니스트 코우마(Ernest R. Kouma) 육군 상사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 현실에서 퓨리를 찍은 사람이다. 계급은 당시 중사로, 1950년 8월 31일 낙동강 전선에서 M26 퍼싱을 타고 교전하던 도중 다른 보병들은 후퇴하고 그가 탄 퍼싱이 혼자 후미를 지키고 있었다. 곧이어 북한군 보병들이 그의 전차를 공격하였고, 어니스트는 전차포와 기관총을 이용해서 교전했다. 이 때의 교전은 딱 퓨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북한군이 전차에 올라타자 직접 해치를 열고 기관단총을 쏘거나 포탑을 돌려서 북한군을 쳐 떨어뜨리는 일까지 있었다. 어니스트의 전차는 약 9시간 동안 교전하면서 250여명의 북한군을 사살했다. 어니스트의 전차에서 전사자는 없었다. 이후 1951년 5월 19일에 어니스트를 비롯한 장병들에게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 찰스 린드버그 공군 준장
- 윌리엄 H. 핏센바르거(William H. Pitsenbarger) 공군 하사
- 토머스 페인(Thomas P. Payne) 육군 원사
9.11 테러를 보고 크게 분노하여 2002년 미 육군에 자원 입대, 제75레인저연대에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작전에 여러 차례 참전한 후 OTC 선발과정을 통과하여 델타 포스 대원이 되었다. 중사 시절이던 2015년 10월 22일 이라크에서 대 ISIL 작전 도중 ISIL이 불타는 건물에 가둬놓은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적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건물로 진입하여 인질 37명을 구출하였다. 그가 직접 구출한 인질 37명을 포함하여 그 작전에서 구출된 인질은 75명에 달하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9월 11일 명예 훈장을 받았다.# 현재 원사로 계속 델타 포스 복무 중이며, 최근에는 오스틴 스콧 밀러 ISAF 사령관[32] 경호팀 중에 있는 것이 목격된 바 있다.
7.2. 가상의 수훈자
- 납골당의 어린 왕자 - 한 겨울[33]
- 더블 타겟 - 아이작 존슨 대령
- 더 록 - 프랜시스 재비어 험멜 장군
- 람보 시리즈 - 존 람보[34]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 썬더볼트 로스
- 마블 코믹스 - 프랭크 캐슬
- 메탈 울프 카오스 - 마이클 윌슨 주니어 대통령
- 메탈 기어 솔리드 3 - 네이키드 스네이크[35]
- 스펙 옵스: 더 라인 - 존 콘래드
- 에어 포스 원#s-2 - 제임스 마셜 대통령
- 월드 인 컨플릭트 - 파커
- 커리지 언더 파이어 - 카렌 월든 대위
- 콜 오브 듀티: 고스트 - 일라이어스 T 워커
- 톰 클랜시의 소설들 - 존 클라크
- 포레스트 검프 - 포레스트 검프
- 빅 게임 - 오스카리
- 폴아웃 4 - 유일한 생존자(男) [36]
8. 미군의 포상제도 목록
9. 미국의 포상제도 목록
[1] Congressional Medal of Honor 와 혼용되지만, 정식 명칭은 그냥 명예 훈장이다. 군이 아니라 국가 전체(국민 전체; 의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구이므로 국민 전체 즉, 전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가 인정하는 면을 강조하기 위해 국민을 대변하는 의회가 수여한다고 Congressional이라고 붙이는 것.[2] 예를 들자면 부상을 입었어도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용감히 싸웠다거나, 후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지키기 위해 혼자 남아 적군과 맞선 것 같이 말 그대로 미군으로서의 '명예'를 지킨 행위를 높게 친다. 비교적 덜 알려진 수훈자를 중심으로 보면, 2차 세계대전 미드웨이 전투 당시 포격으로 중상을 입었음에도 자리를 지키면서 통신시설을 복구하도록 하고 자신은 전사한 조지 캐넌 중위, 타라와 전투 당시 혼자서 여러 일본군 총좌를 파괴하고 그 와중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동료 병사까지 구출한뒤 다시 공격을 이어나가다 전사한 윌리엄 보들론 해병 중사, 사이판 전투 당시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직접 기관총을 잡고 일본군에 맞서 부하들을 지키다 결국 전사한 윌리엄 오브라이언 육군 대령, B-29 폭격기 안에서 백린탄의 오발로 기체가 추락할 위기에 처하자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태워(!) 동료 전우들과 기체를 구한 헨리 어윈 육군항공대 상사(수십차례의 수술 끝에 생존) 등이 그 예이다.[3] 마틴 러스, '브레이크 아웃' (나남출판) 참조.[4] 거기에 위기에 처한 미군 전우들이나 무고한 사람들 여럿을 같이 데려오면서 자기가 살아야 할 정도니 살아서 오는 군인이면 영화 한편 만들어져도 이상하지 않다.[5] 이 혜택 규모가 미국답게 어마무시한 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최고 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수여자의 혜택과 비교하며 우리나라의 시궁창스러운 군인대우 정책을 까는 글이 자주 보인다.[6] 말이 민간인이지 이 훈장을 받았다는 건 거의 전쟁영웅이기 때문에 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전설급 인물일 것이다.[7] Space-A는 어디까지나 그 근본적 목적이 군사 목적인 프로그램이고, 편의를 봐줘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규정에 맞기만 하면 이용은 가능한데, 군인 우대 항공표를 파는 단체들에서는, Space-A를 이용하다가 표가 취소되거나 해서 문제가 발생해서 휴가 미복귀 크리 같은 안습한 상황이 터저도 우린 책임 못짐. 애초에 이 목적으로 쓰지 말라니까.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휴가 목적으로는 진짜 시간 널널하게 주어진 경우에나 써야함" 이라는 설명도 있다.[8] 그러니까 그냥 평소에 군 정복에 명예훈장을 착용하고 다녀도 법으로 보장된다.[9] 전역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전환된 군인들은 군, 혹은, 자신의 모교/지역 연회들에 참석한다거나, 각종 개막식 등의 특별한 행사 등에 규정에 따른 군 정복의 착용이 허가되고,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역 후에도 군복 착용이 장려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런 미국에서도 전역 후에는 규정을 씹고 마음대로 입고 다니면 맑고 고운 소리 드립을 듣게 된다. (...) 미국이 얼마나 문민통제가 강력한 나라인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명예 훈장 수훈자는 그런 것 없이, 그냥 군복을 착용하고 다녀도 아무 상관이 없는 파격적 대우를 받는다. 일단 그냥 멋지고 정갈한 슈트(?)같은 목적으로 착용하는 것을 규정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그렇다고 막나갔다가는 정치권에서는 막강한 민군통제로, 군에서는 명예 훈장에 대한 모독으로 갈굼을 시전할 것이다. 어쨌든 저승 문턱을 밟고 와도 간신히 받을까 말까 하는 훈장인 만큼, 이것을 모독했다고 까임을 받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는 지옥에 빠지리라...[10] 미드 NCIS 시즌 2 7화에서 2차대전에 참전한 할아버지가 찾아와 아군을 죽였다고 자백하며 처벌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게 언제인지도 기억을 못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냥 좋게 끝내려 하는데, 군대식으로 인식번호를 물어보니 군대식으로 바로 답을 하는 등 상황이 들어맞자 하는 수 없이 체포하려고 헌병들이 출동했는데, 할아버지의 넥타이를 옆으로 넘기니... 명예 훈장이 나왔다. 그것을 보자마자 헌병들은 바로 직립부동 자세로 경례했고 담당 장교인 콜맨 소령은 경례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부동 자세를 취했다.해당영상 현역 영관급 장교가 퇴역 사병에게 부동 자세를 취하는 것은 굉장한 예우다. 헌병들의 경우는 실내에서 모자를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시피 경계근무(on duty) 중이었고 경례가 가능했다. 일상 근무중이었던 장교는 모자를 벗고 있었기 때문에 경례가 불가능 했고 대신 차렷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경례를 대신 했다.[11] 미국은 자동차세를 낸 후 받을 수 있는 번호판에 유효 기간이 있다. 그런데 이 유효기간이 없는것. 즉, 주에 따라 자동차세를 평생 한번만 내거나 그냥 0원이다. [12] 애초에 수훈자 중 다수는 전사하는 경우가 많다.[13] 1921년 11월 뉴욕에서 아바나로 가는 배 안에서 실종되었다. 자살했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14] 정확히는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훗날 공군이 창설되자 공군으로 전군했다.[15] 둘리틀의 진급은 진짜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파격적이었다. 소령에 진급한 지 몇 개월 안 되어 둘리틀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중령이 되었고 그걸 성공했다고 바로 준장이 된 건데 소령에서 준장으로 올라간 게 같은 나이라는, 실로 괴물같은 고속승진을 한 것이다.[16]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해서 사기만 깎았다. 그냥 해당지역에서 최악의 상황 에도 불구하고 분전한 육군을 대리하여 받았다고 보는게 옳다[17] 미 해군 함선 중에서 일본계 함명으로는 강습상륙함 이오지마 이후 오랜만에 나오는 사례.[18] 이로 인해 손에 화상도 입었다.[19] 좌우의 인물은 존 매큐 육군장관과 레이먼드 오디어노 육군참모총장이다.[20] 명예 훈장 수여를 알리기 위해 백악관에서 마이어가 일하는 곳으로 전화를 했는데, 마이어 병장은 지금은 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며 업무 시간에 다른 짓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없다며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이에 백악관에서는 점심시간에 맞추어 다시 마이어와 통화를 했으며, 통화를 마친 마이어는 다시 일을 하러 갔다고 한다. 후에 백악관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오바마는 이 일화를 언급하며 "내 전화를 받아줘서 감사하다"는 조크를 했다.[21] 영화 위 워 솔저스로 영화화되었다.[22] 당시 미군 의무병은 무장을 하지 않았다.[23] 하지만 이스라엘군이 리버티함의 승조원들 전부를 몰살시키려고 공격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고, 이 사건을 기밀로 처리한것도 이스라엘과 마찰을 빚기 싫은 미국 고위층들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다.[24] 개판 오분전의 급조된 파병 부대를 가지고도 지연전을 훌륭히 성사시켰고 수적, 질적이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단장이 몸소 전선에서 싸우는 등 그 공이 결국 포로가 됐음에도 적지 않았다. 더군더나 딘 소장은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음에도 포로가 된 후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고 결국 한국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한국 입장에서도 참 고마운 장군.[25] Signalman First Class. 국군에서는 번역시 이 계급을 하사로 보고 있지만 실질적인 위상을 감안하면 중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26] 먼로 중사의 모친 역시 미합중국 해안경비대 출신으로 최종 계급 해안경비대 중위로 전역하셨다. 먼로 중사의 모친은 ‘The Hero’s Mother’ ‘Old Lady’의 별명등으로 불렸다. 훌륭한 모친 밑의 훌륭한 자식의 대표적인 예로 미군 역사에서 위치하는 먼로 중사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27] 포로로 살아온게 뭐 대수냐 싶을 수도 있지만..스톡데일의 항목에도 일부 나와있듯이 그는 북베트남의 비인간적인 포로 대우와 선전을 위한 각종 모략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힘을 내어 미군 포로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결국 꺾이지 않고 살아 돌아와 미군의 기상을 보여주었기에 그 공이 결코 작지 않았다. 비슷하게 Jeremiah Denton은 눈을 깜빡임으로서 Torture이란 단어를 모스 부호를 통해 북베트남의 비인간적인 포로 대우를 알린 공로로 2등급 무공훈장인 해군수훈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래도 이해가 안가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이란 고문을 다 받고 조국으로 살아돌아왔다고 생각하면 된다.[28] 말이 4시간이지 화염방사병은 일본군 기관총좌 입장에선 최우선제거 대상인걸 고려하면 그야말로 초인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그것도 일본군이 가장 치밀하고 조직적이게 싸웠다고 평가받는 이오지마에서다. 그야말로 바실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의 해병. 후술하겠지만 아예 미국 방송의 자막에서는 Living Legend란 표현까지 썼다.[29] 부상은 14번 당했다고 한다.[30] 선두기가 떨어트린 이 폭탄으로 지상에 불이 나면 그 연기와 불꽃을 보고 후방에서 따라오던 기체들이 폭탄을 투하한다[31]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백린은 한번 불이 붙으면 산소가 완전히 차단될때까지 꺼지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이뤄졌을 시술중 하나는 불붙은 부위를 도려내는 것이었을 것이다...[32] 이분도 델타포스 출신이며, 육군 대장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도 직접 M4 카빈으로 무장하고 다닌다.[33] 두번 받는다[34] 월남전 참전 활약으로 한 번, 베트남에서의 인질 구출 임무로 또 한번 추대된다.[35] 스네이크 이터 작전 후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직접 수여받으나 후에 곧바로 더 보스의 묘비에 올려두고 몇년간 종적을 감춘다.[36] 다만 이분은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미국자체가 사라져 명예훈장이 쓸모없어진 불쌍한 분이다. 거기다가 안습하게도 자신이 목숨걸고 지킨 국가의 실험용쥐가 되어 아이스바가 되었다가 핵전쟁으로 황무지가된 조국에 던져지거나 자식을 지키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