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스 르메이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
Curtis Emerson LeMay

<colbgcolor=#8e8efe><colcolor=#000> '''출생'''
1906년 11월 15일
미국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사망'''
1990년 10월 1일 (83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마치 공군기지
'''정당'''

미국 독립당
'''배우자'''
헬렌 메이틀랜드 (1934~1990)
'''학력'''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졸업
'''복무'''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United States Army Air Forces)
미합중국 공군
(United States Air Force)
'''복무 기간'''
1929년~1947년
1947년~1965년
'''최종 계급'''
대장
'''근무'''
미합중국 전략사령부
미합중국 공군 참모총장
'''지휘'''
3 폭격사단
20 폭격사령부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6.25 전쟁
'''수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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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훈 십자 훈장
에어 메달(5회)
공로 훈장(3회)
은성 훈장
공군 수훈 십자 훈장(3회)
공군 수훈장(4회)
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욱일장(일본)

1. 개요
2. 생애
2.1. 초창기
2.2. 제2차 세계 대전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3.1. 한반도 초토화 폭격
2.3.2. 전쟁 이후의 행적
3. 문제점
3.1. 지나친 강경함
3.3. 실책
4. 석기시대 마니아
5. 의외의 면모
6. 어록
7.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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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육군 항공대 장군을 역임하고 후에 미합중국 공군 장군이 되어 냉전 시대 미 공군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별명은 Iron-ass, Big Cigar. 굳어버린 오른쪽 얼굴을 가리려고 시가나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어서 붙였는데, 덕분에 아래의 시거 물고 있는 타임지의 표지 사진이나 위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비행기가 처음 하늘을 비행한 시대에 가난한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에 입대, 이후 항공기 기술이 미국 전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데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아래 석기시대 언급으로 보면 육군의 조지 S. 패튼이나 해군의 윌리엄 홀시의 공군 버전, 아서 해리스[1] 미국 버전이라고 하면 딱 맞다.

2. 생애



2.1. 초창기


1906년 11월 5일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다. 성만 보면 프랑스계인데, 정확히는 아버지가 프랑스 위그노를 조상으로 둔 프랑스계 영국인 이민자 집안이다. 집안이 가난했던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이직에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지냈는데, 아버지가 제대로 가장 구실을 못한 탓에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돈을 벌면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박관념 수준으로 자리잡고 말투도 이후처럼 직설적으로 변했다. 여가를 즐길 시간이 없어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광석 라디오(게르마늄 라디오)를 손수 조립하고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네 살 때 처음 비행기를 목격했을 때부터 비행에 대한 환상을 가진 그는 이후 중학교 때 친구와 돈을 모아 5분간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한 뒤 개인 비행기를 사서 마음껏 날겠다는 꿈을 가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역하기 전까지 그에게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 비행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Kozak,2009]
고향인 오하이오 주 소재 고등학교 졸업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육군 ROTC에 입대했는데, 육군 소위 임관 사령장만 세 번을 받은 희대의 경력이 있다. 처음엔 연방 육군 예비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가 주방위군 육군 군적이 있으면 조종사 선발 과정에서 사관생도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곧바로 예비군을 그만두고 주방위군 육군 현역 소위로 임관하는 우여곡절을 거쳐 1928년 연방 육군의 항공단 조종 병과를 지원했다. 그렇게 1930년 계급이 소위로 리셋되면서 조종 장교로 임관했다. 전간기의 미군은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승진이 연공 서열에 묶여 있었던지라 중위는 대학 졸업 후 군생활을 시작한 지 7년이 되어서야 달았고 1940년에 대위, 1941년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1945년 8월 13일 타임지.[2]
육군항공대 중령으로서 B-17로 구성된 제8공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다. 진주만 공습으로 폭격을 맞은 미국은 즉시 일본과 추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당연히 폭격기를 비롯한 항공 전력이 엄청나게 필요하게 되는데, 이 당시 제305 폭격비행단(305th Bombardment Group)에 배속된 르메이 중령은 말 그대로 맨 땅에서부터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마련하는 생고생을 시작해야 했다. 이 때 과로로 인해 안면 신경마비가 일어나 한동안 오른쪽 얼굴이 굳어진 탓에 훗날 괴팍하고 무뚝뚝하기만 한 장군 이미지가 더욱 강해지게 된다.
영국에 도착한 뒤 제8공군이 먼저 수행한 폭격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르메이 중령은 폭격의 피해가 폭격기 추락으로 인한 피해보다 못할 정도로 명중률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그 까닭이 목표 상공에서 대공포 사격이 시작된 뒤 폭격기들이 10초 안에 탑재한 폭탄을 모두 떨구고 단체로 회피 기동에 들어갔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첫번째 출격에서 르메이 중령은 목표에 도달했을 때 폭격이 끝나기 전까지 '''회피 기동을 포기하고 대형에 맞춰 직선으로 비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폭격기 승무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B-17을 상대로 한 88mm 대공포의 예상 격추율은 자신이 계산해본 결과 372발당 1대로[3][4] 비행단이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하고,[5]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가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다!''' 결국 탄착률이 종전의 2배로 늘어나고 목표 상공에서 7분간 직선 비행을 하면서도 대공 사격에 폭격기 한 대도 잃지 않는 성공을 거뒀다. 이 폭격 전술은 제8공군 전체에 도입되게 된다. 이후로 르메이는 고속 승진이 시작되어 1943년 말 준장으로 진급하여 별을 달았고, 1944년 3월 불과 37세의 나이로 당시로는 최연소 소장이 되었다.
이때 훗날 미국의 국방장관이 되는 로버트 맥나마라[6]가 르메이 장군의 부하로 있었다. 이때 르메이 장군은 휘하 폭격기들의 높은 임무포기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맥나마라는 특유의 분석력으로 임무포기의 원인 대부분이 공포에 있음을 알아챘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석기시대 매니아는 "돌아가는 놈들은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라고 외치며 '''또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다.''' 이 때는 부조종사로 탑승했다. 조종사로 탑승해보니 조종에만 신경쓰느라 폭격기 대형을 조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즉시 임무포기율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그러나 이후 폭격기들은 호위기들이 따라가 보호해줄 수 없는 초장거리 임무에 나서야 했고, 그 덕에 폭격기 손실과 전사자는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결국 폭격기의 임무 범위는 호위기의 한계거리로 제한되기에 이른다. 이는 P-51이 개발되기 전까지 독일 본토를 폭격하는 것이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 종전시까지 독일군에 의해 격추, 완파된 B17 폭격기는 총 4751대로 집계되며 이는 독일 폭격에 투입한 전력의 1/3 에 해당했고 4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임스 캐럴은 자신의 저서 '전쟁의 집 - House of War'에서 2차대전 당시 르메이 장군이 지휘한 폭격기 편대는 영국군이나 다른 미 육군 폭격기 편대보다 낮게 날았기 때문에 타부대의 2배에 해당하는 탄착을 보여준 한편, 피해도 컸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B-17의 방어대형인 컴뱃 박스(combat box)를 창안하기도 했다. 슈바인푸르트 폭격작전에도 참가하여 비행대대를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1944년에는 중국 전선으로 전속된다.

2.2.1. 일본 본토 공습


중국 전선에서는 중화민국에서 출발하여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러한 임무는 B-29로서도 너무 멀었기 때문에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도 일부러 만주에서 방공망이 가장 밀집된 곳으로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하고'''[7], 대공포에 적중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체가 멀쩡하고 요격기는 고고도로 못 쫓아오는 것을 파악하여 일본의 대공 능력이 B-29를 상대로 사실상 유명무실함을 입증하였다. 일본 육군 항공대가 충칭 등 중국 도시들에 소이탄으로 효과적인 공격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일본 도시에 써먹을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을 구상하던 1945년 2월 대일 폭격을 책임지는 제21 폭격기 사령부[8]의 사령관에 취임해 대일 폭격을 총괄한다.
부임 직후 효율이 떨어지는 고공 정밀 폭격에서 좀더 위험하지만 효과적인 저고도 소이탄 폭격으로 전환하였으며, 목재 가옥과 건물이 많은 일본 도시를 대상으로 한 그의 작전은 성공과 명쾌한 파괴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미국 폭격기대는 고고도에서 특정 목표를 맞추는 정밀 폭격 작전을 시행했으나 그 효율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르메이 장군의 전임 사령관인 육군소장 헤이우드 핸셀 장군이 르메이 장군으로 교체된 것도 이런 작전 결과의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이는 작전 자체의 문제 보다는, 이에 필요한 기술력의 미비였다. 당시로선 최첨단 장비인 B-29노든 폭격조준기로도 일본 상공에서 부는 제트기류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핸셀 장군이 주장한 고고도 정밀 폭격이 그 효율성을 발휘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야 가능했다. 이 때문에 르메이 장군은 정밀 폭격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핸셀 장군 본인에 대한 비난은 꺼내지 않았다.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나온 말이 바로 지금도 논란이 되지만 총력전의 뜻을 꿰뚫는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란 말.

According to General LeMay the Japanese model of production was intricate and complex. He described in his memoirs: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커티스 르메이에 따르면 일본의 생산방식은 복잡하고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설명했다.

"일본은 실제로 이렇게 되어 있다. 공장이 하나 있다. 인근의 가구들은 집에서 작은 부품을 제조한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제조하고, 옆집의 하루노보 가족은 64호, 65호나 63호 너트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를 만든다. 이웃에서도 똑같은 걸 제조한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정해진 순서대로 부품을 가져간다."[9]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일본 정부가 관동 대지진 이후 도쿄를 재건할때 주거지에 군수품 공장과 그 공장에 하청업체로 200명 남짓한 초소형 공장(공장 자동화라는 개념이 없이 완전 수동으로 돌아가던 시기라 이정도면 정말 적은 것이다)을 곳곳에 알박기식으로 건설해 공장과 주택간 거리가 10m도 안 되었고, 거기에 도쿄 시민을 노동자로 고용하고 그걸 모든 주거지에 비슷한 방식으로 설치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놓아, 정말로 도쿄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도쿄만이 아니라 그 당시 일본 대도시 대부분이 저런 초소형 부품공장을 대량으로 차려 놓아서 이런 공장이 국가 총 생산력의 절반을 감당했다! 미군이 이 공장을 모두 부수지 않으면 일본의 생산력이 떨어지지 않아 아군이 죽어나가고, 이를 부수자니 민간인 피해를 생각하면 고고도 폭격은 순도 100% 무유도 폭탄에저 빌어먹을 편서풍의 제트기류로 집탄군(목표 적중률 50%) 이 분무기 수준이라 불가. 중저고도로 가자니 저 과부제조기 제로로도 요격이 가능하므로 아군 피해가 극심해 불가라는 환장할 상황인데,[10]그렇다고 폭격을 안하면 아군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윤리적인 문제를 배제하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적인 판단이 초소형 공장을 노동자 째로 학살해 제거하는 것이다. '''적국 민간인을 죽이고 아군을 살리고서 '호전광 새끼'라 욕먹는다''' VS '''아군을 죽이는데 기여하는 적국 민간인을 살리고 '적국 민간인을 우리 국민보다 소중히 한 무능한 매국노새끼'라 욕먹는다''' 라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건 아니라서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러한 르메이 장군의 관점을 비판하며 인터뷰에서 목표를 달성한다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폭격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 바 있는데, 에롤 모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포그 오브 워에서 직접 나온다.
간혹 르메이의 논리를 진주만 공습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주만 공습은 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이다.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했던 어쨌던 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습한 것과 이미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적의 전략거점을 타격한 것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없다.
하여튼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으로 건물 26만 7천 채를 부수고, 도쿄 거주자 8만 9천명이 사망했으며 6만 6천 명이 부상당하는 등 일본 제국에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만들어낸 피해를 상회하는 기록이다. 또한 대량의 기뢰를 폭격기로 투하하여 일본의 주요 항구를 봉쇄[11], 일본 전역에 기아를 몰고 오기도 했다. 그의 지휘 하에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시점엔 일본 주요 도시의 60%가 잿더미로 변했으며, 일본의 공업생산량은 폭격 전 대비 40% 이하로 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폭격 전과 폭격 후의 도쿄'''
중간에 일본의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예측한 미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3월 중순부터 일본군 비행장 폭격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르메이 장군은 이럴 시간에 차라리 공장이 숨어 있는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게 더 효과적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육군과 해군의 협의에 따라 니미츠 제독에게 르메이의 항공대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임무를 계속 수행했지만 틈만 나면 이 임무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쳤다. 르메이의 과격한 성향과는 관계없이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 전선의 미군에서 단 2명 뿐(다른 1명은 맥아더)인 원수고 당시 일본 본토 폭격을 총괄했고 합참의 직할 휘하였던 르메이의 계급은 고작 소장이었다. 전쟁 전엔 불과 소령이었고 전쟁으로 전공을 세워서 고속승진이 가능했지만 그래봐야 종전 직전의 최고계급이 소장이었는 것이다. 니미츠 제독과 비교해도 3계급 차이가 있다. 그가 3성장군으로 진급한건 베를린 봉쇄가 시작된 1948년이 돼서였다. 니미츠 제독은 통합군전구사령관(군종과 국적을 초월하여 해당 전쟁구역 전체를 총괄했다.)이었던 까마득히 높은 상관으로 오키나와 전투시점에선 르메이보다 계급이 높았던 현지 지상군 총지휘관 버크너 육군중장의 지상진격이 미적거리자 해임할 뻔 했다가 봐준 사례가 있다. 이런 니미츠 제독의 절대적인 영향력 속에 계통상 합참과 아놀드 원수의 총애를 받는 르메이 소장도 그가 해군에게 억지로 떠맡은 임무에 대해서 직접 니미츠 제독에게 대들진 못하고 자신의 군종상 상관이었던 아놀드 원수에게 SOS를 요청해야했다.
약 2주 정도 폭격을 마친 1945년 4월 1일, 르메이는 '이쯤 폭격했으면 일본 육, 해군 항공대 비행장들은 충분히 무력화됐다.'란 보고와 함께 작전 제외를 요청했다. 하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1주일 내에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우리가 봤을 때는 아직 멀었다."란 반응을 보이며 요청을 씹어버렸다. 이렇게 4월 중순까지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육군원수 헨리 아놀드 장군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 빼준다며 투덜거렸고 이에 아놀드 원수가 해군참모총장인 어니스트 킹에게 비행장 폭격에만 치중된 폭격기 부대의 임무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킹은 "그러면 우리 해군은 철수할테니깐 육군 혼자 잘들 해봐."라고 답변하여 아놀드 장군을 침묵시켰다.
결국 기대와는 달리 '21폭격기 사령부의 임무는 해군에게 협조하여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이란 명령서가 다시 한 번 내려오면서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졌다. 결국 이 임무는 5월 11일까지 계속되었다. 임무가 끝난 직후 니미츠 제독은 궁시렁대면서도 폭격 임무를 완수한 르메이 장군에게 감사 서신을 보내 치하했다. 여담으로 한 전후 연구에 따르면 미 육군 폭격기가 허구헌날 비행장을 두드려대는 바람에 실제 일본 육해군이 확보했던 항공기에 비해 출격한 항공기의 수가 급감하여 카미카제 작전의 효율까지 덩달아 떨어드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비행장을 폭격하는 와중인 4월에는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폭격기 일부를 차출해 항만지역에 기뢰를 살포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이 역시 직접 폭격이 아니어서 르메이 장군의 입맛에는 안 맞았지만 위에서 시키는 데 별 수 있나. 하여튼 그렇게 한달동안 기뢰 1만 2천여개를 살포했는데, 그 결과 약 100만톤에 달하는 일본 수송선단을 격침시키고 본토로 들어가는 원자재 수송량을 80%나 잘라버렸다. 또한 연안 해운이 마비되니 여기에 의존하는 일본의 국내 교통망도 덩달아 마비되는 효과를 낳았다. 도쿄 대공습에 가려지긴 했지만 전후 분석 보고서는 이 기뢰 살포가 일본 본토 공격 도중 가장 가성비가 뛰어난 작전이었다고 적고 있다.[12]
이 작전으로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30만 여명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미군 장성들 중에서 민간인을 죽인 숫자로는 가장 높은 것이다. 전후 분석 결과로는 해상 수송을 차단한 것 역시 효율적이었을 것이란 평가도 나왔다.[13] 한편, 르메이의 평전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을 쓴 워런 코작이라는 기자는 이렇게 일본 전역의 공업 기반을 쑥 재배지로 만들어버린 덕분에 몰락 작전을 굳이 벌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제의 공업 생산량이 급락해서, 원자폭탄과 함께 수십만명을 죽였지만 결국 수백만명의 목숨을 살린 비정하지만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다고[14] 한마디로 그를 옹호하는 주장을 했는데, 사실 이 분야 전문가 중 한명인 존 키건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낸 수단으로 평가받는 건 도쿄대공습이 아니라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본다.[존키건,2007,864-867]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3.1. 한반도 초토화 폭격


쉽게 말해서 르메이의 지론인 "총력전 상황에서는 인민은 전쟁의 부속일 뿐이다"를 매우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적과 얽히면 무조건 학살을 철저히 시행해서라도 적의 부속이 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펼첬다. 명백히 적국인 북한 인민이든 동맹국인 남한 국민이든 르메이에겐 그런건 알 바가 아니었으며 오로지 침략자인 북괴로부터 동맹국인 남한을 지킨다는(=점령당한 영토 수복) 목적만 충실했다.
그의 지론은 전쟁에서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것이었고, 일본 본토 공습 당시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드는 것 뿐이다.'라는 말이 그의 사상을 대표하기로 널리 유명하다. 전쟁사에 관심있는 많은 한국인들이 여기까지는 대체로 알지만 사실 그가 '''한국전쟁에서 박씨와 옆집 김씨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고 있지 않다. 1950년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에서 독립한지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고, 35년 간 사실상 일본땅이나 다름 없었는데 일본 본토와 산업 구조나 공장 위치가 다르면 얼마나 달랐겠는가. 실제로도 당시 일본처럼 공업지대와 민간인 거주구역이 그렇게 구별되어 있지 않은 가내수공업 형태였다.
당시 미 공군에게는 지상에 있는 민간인들을 하늘에서 피아식별할 수단이 거의 없었는데, '''인민군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민간인들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15], 르메이는 '''민간인 무리를 무차별, 무조건 공습하는 지침을 내렸다.''' 그나마 초기에는 북한이 점거한 동맹국 남한의 영토에서는 별다른 초토화 폭격을 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르메이의 "총력전 상황에서 전쟁 부속인 인민은 알 바 아니고, 존망 위기인 국가 자체를 살리는 데만 집중해야 한다."는 지론을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인민군이 점거한 남한 영토는 '''수복해야 하는 동맹국 영토'''이기 때문에 초토화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수복하거나 점령했던 영토를 중공군이 개입하며 다시 상실하자 르메이는 점령지든 수복 영토이든 따지지 않고 중공군이 점령하기 전에 무차별, 무조건 초토화 전략 폭격으로 싸그리 갈아 엎었다. 이런 와중에서 민간인 피해는 철저히 무시하였으며, 오히려 '''동맹국을 위협하는 적이 활용할 여지가 없도록''' 잠시 점령했던 북한 지역을 포함해서 1.4 후퇴 당시 중공군에게 내줘야 했던 남한 지역 건물과 민간인들을 '''완벽하게''' 초토화시켰다. 북한만 폭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서울 근교 시설과 민간인들도 대거 유엔군 폭격으로 떼죽음을 맞았다.
중공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에서 무단으로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괴뢰 집단을 영구히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분위기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며 이 희망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르메이는 양상이 이렇게 되자 즉시 최소한의 목표인 동맹국의 군사적 안전을 위해 적이 가져갈 기반을 싸그리 없애버리자는 극도로 냉혹하고 치밀한 계산을 한 것. 이 여파로 북한은 물론 남한의 기반이 죄다 파괴되고 남북한 합쳐 수많은 민간인들이 불지옥에서 비명횡사하였으나 전략 자체는 제대로 먹혀들어가 북한과 중공군은 생각보다 빠르게 공세종말점을 맞았고, 전선은 국지전으로 바뀌어 교착 상태로 빠졌다.
사실 이런 무차별 전략 폭격은 2차대전부터 2000년대 중동 전쟁까지 어느 군대든 반드시 시행하는 작전 패턴이다. 달라진 점이라면 르메이식 방식보다 조금 부드러워져서 민간인 소개를 최대한 유도한다는 것과 이전과 달리 방어측 방공능력이 충분히 강해졌으므로 완벽한 초토화는 불가능하다는 것 뿐이다.

(6.25 전쟁) 우리는 '''인구의 20%를 죽였다.'''

we killed off … 20 percent of the pop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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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

우리는 한국의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우리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신이치,190]

'''르메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미래 전쟁 과정에서 전략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이 같은 확신 속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전략공군 비행사들의 훈련과정을 체계화했고, 극동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전략공군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와 함께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다. '''르메이가 불러들인 인물 중에는 2차대전기 그의 휘하에서 일본폭격을 주도한 오도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도넬은 한국전쟁기 최초의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으로서 북한 지역 폭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08, 42-43

민간인 보호와 대량파괴라는 상반된 가치의 공존과 갈등은 한국전쟁에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엔군의 집행대리인인 미국은 북한지역 폭격 시 군사 산업 목표만을 선별적으로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군 최고 지도자들은 이 같은 정책의 엄격한 준수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극동지역의 공군 사령관들과 조종사들은 워싱턴의 여러 제한조치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으로 부임한 '''오도넬은 맥아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의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투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도넬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전략폭격의 강화를 주도했던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위의 책, 4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는 소이탄 사용을 통해 북한 내 목표지역은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는 소이탄 공습으로 주요 산업목표를 파괴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전소시킬 수 있었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전략공군은 폭격기사령부의 B-29rl 2대가 1조의 편대를 이루어, 1대는 목표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다른 1대는 산업시설에 정밀공격을 가하기 위해 과열폭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전략공군은 이 계획을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에게 송부하여 극동군 사령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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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책, 43~44

워싱턴은 미 공군의 북한 지역 폭격 시 국경지역 및 민간지역 폭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북한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대량폭격하고자 하는 세력이 완전히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전쟁초기부터 소이탄을 사용한 북한 도시지역 무차별폭격을 주장했다. 오도넬은 맥아더와의 첫 만남에서 "북한 내 5개 산업중심지를 불살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전쟁 초기 르메이나 오도넬의 주장은 여러 정치적 고려 속에서 묻히고 말았을 뿐이다.

위의 책, 7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전쟁 초기부터 b-29기의 소이탄 활용을 주장했지만, 중공군이 참전할 때까지 미 극동공군은 b-29기의 주무기로 GP폭탄만을 사용했다.

위의 책, 76

중국공산군의 압록강 도하라는 새로운 전쟁 국면에 직면하여,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기존에 없던 매우 공세적인 폭격 정책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의 주요 사령관들에게 '''북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와 농촌 지역 자체를 주요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의 목적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은신처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민간 지역의 '사전파괴''''였다. 맥아더와 미 극동공군 수뇌부는''' 추운 겨울 한반도 북부의 민가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림'''으로써 공산군의 휴식처와 보급기지를 사전에 파괴하고자 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파괴작전의 성공을 위해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본토 공격에서 활용되었던 소이탄 폭격을 지시'''했다.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폭격은 2차대전 시기 영국공군의 독일 도시폭격이나 미 공군의 일본 본토폭격에 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무차별폭격이었다. 맥아더는 새로운 민간인 거주지역 파괴작전을 '초토화정책'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맥아더의 북한지역 초토화작전 명령이 그를 향한 '''미 극동공군 장교들의 지속적인 건의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점이다.''' 초토화 작전을 강력히 건의한 이들은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폭격기사령관 오도넬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2차 대전 시기 미군의 극동지역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인물들'''로서, 전후 전략공군의 확충에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전시민간인보호를 주장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폭격정책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이 위기에 처하자 항공력을 공세적으로 활용하길 원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후 북한지역은 그 작전명처럼 완전히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4일 B-29기 수십대의 소이탄 투하는 연일 지속되었다. 1950년 11월 폭격으로만 만포진의 95%, 회령과 남시의 90%, 초산의 85% 강계 희천 삭주의 75%등이 완전파괴되었다. 이 시기 북한지역 폭격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당지역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소이탄 투하 후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실시하거나 다양한 시간간격의 시한폭탄을 소이탄과 동시에 투하했다는 것이다. 극동공군은 표현 그대로 북한 도시와 농촌의 '초토화'를 기도했다.'''

위의 책,296-297

위 글에서는 북한 지역만 소개하는데 초토화 폭격은 남한 지역도 가리지 않고 포함했었다. 글을 읽어보면 정작 남한 지역이 북한에게 점령 당했을 때는 네이팜 폭격이 없었다. 1.4 후퇴를 하면서 중공군에게 점령 당하기 전에 네이팜 폭격을 한 것이다.

지상군의 후퇴에 따라 극동공군의 초토화작전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남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 조사 사례 중에는 1951년 초 미 공군의 소이탄 공격에 의한 대규모 집단희생 사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1951년 1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강원 · 경기 · 경북 · 충북 지역''' 폭격 피해 사례들은 사실상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그중에서도 도진순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심도 깊은 현지조사가 실시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폭격에 대한 연구논문과 조사보고서, 경북 예천 · 충북 단양 · 경기 · 강원 지역 폭격사건 조사보고서 등은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 확산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만하다.

김태우, 폭격, 2013, 326-327

남한지역 초토화작전의 진행과정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술 중 하나는 이 시기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한 내 작전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전폭기 임무보고서의 적정 항목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네이팜탄 폭격이 진행되었다. 산성동 폭격의 정찰관 중 하나였던 조지 울프는 "많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성동 폭격에 관여한 또 다른 정찰관 네빌은 "우리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사람이나 물건은 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51년초, 미 공군은 적 점령하의 남한지역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같음, 329-330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배럿(G. Barrett)은 1951년 초 경기도 한양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벌의 옷을 부여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16]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있었다.'''

같음, 330

나는 임무에서 돌아온 조종사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여인을 쏘아서 그녀의 몸이 터지는 장면을 보았다고 으스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민간인들이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Raymond Sturgeon John Darrell Sherwood, officers in flight Suits,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6, 105

이 증언을 보면 미군 조종사들이 커티스 르메이의 사상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양심의 가책으로 지시를 거부하거나 후술되어있듯 결국 민간인을 폭격하고 PTSD에 걸린 조종사들도 많았다.
북한 김일성 회고록에서는 미군 폭격으로 73개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평양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은 2채의 건물만 남았다고 언급하였다. 북한 인구 20%가 폭격으로 죽고 북한 22개 도시가 네이팜탄 공격을 받았는데 평양 75%가 파괴되고 흥남 시가지 85%, 원산 80%, 신의주 60%, 사리원 95%가 파괴됐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을 철저히 증오하고 전후 군사 시설이나 중요 시설을 재건할 때 폭격을 대비하여 대부분 지하화 하였다. 지금도 북한은 B-52 등 미군 폭격기 훈련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 만큼 미군 폭격은 북한 전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도 마찬가지로 북한과 미국의 군사 갈등에서 이 당시 트라우마가 북한에게 많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2.3.2. 전쟁 이후의 행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은근히 역사적으로 덜 알려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B-29 폭격기를 몰고 일본 열도북아메리카 논스톱 비행을 시도하여 성공한 것이다. 이때 B-29의 역사적인 기록이 이어지는데, 첫째로는 역사상 최대 중량 이륙, 둘째는 역대 최장거리 논스톱 비행, 셋째로는 최초의 일본-시카고 논스톱 비행이었다.[17] 이 당시 폭격기 세 대가 기록에 도전하여 각각 육군중장 바니 자일스 장군, 르메이 장군, 육군준장 에멧 오도넬 장군이 조종을 맡았는데 이 중 르메이 장군의 폭격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연료부족으로 당초 목표인 워싱턴을 못가고 시카고에 착륙하여 급유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르메이 장군은 끝끝내 워싱턴 DC까지 가려고 들었고, 전쟁부에서는 그런 르메이 장군을 뜯어말리며 날씨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시카고로 보냈다고는 하는데 실은 쓰리스타가 못한걸 투스타가 해내면 꼴이 우스우니까 그랬을 뿐이라는게 정설이다. 셋 다 비행훈장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육군 항공대가 미합중국 공군으로 재편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1949년 전략공군사령관이 되며, 강철의 대원수베를린 봉쇄를 하자 "'''전 세계의 C-54 조종사들에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이라고 말했다. 동원 가능한 모든 미국 해군, 공군 수송기들을 모아 그 유명한 베를린 공수 작전을 시행했다. 이때 소련 방공포병들이 수송기를 건드렸으면 동독과 소련을 쑥밭으로 만들 계획이였다. 그리고 1957년에 물러날 때까지 세계대전 이후 무능한 사령부가 다 되어있던 전략공군사령부를 혹독하게 훈련시켜 다시 정예 사령부로 육성해놨다. 이는 당시 전략공군사령부를 비롯한 미국 공군이 해군 등 타군과의 알력 때문에 영 상태가 좋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다. 특히 전략공군사령부는 핵무기 문제 때문에 더 사정이 복잡했다. 이 부분은 미합중국 공군 문서, 제독들의 반란 문서 등에 나와 있으므로 참고할 것. 이후 전략공군사령부는 한동안 미군의 핵전력 전체를 사실상 총괄하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이후 해군이 SSBN과 SLBM 등을 갖추면서 핵전력을 공군 위주로만 담당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나와서 전략공군사령부는 점차 조직이 축소되다가 해체된다. 전략공군사령부의 임무 중 미군 핵전력 전체의 총괄 임무는 미합중국 전략사령부(STRATCOM)에, 공군 자체의 핵전력 관리는 지구권타격사령부로 이관되었다.
르메이는 이 과정에서 신형 폭격기의 개발과 배치, 공중급유기 개발[18], 각종 전술과 전략연구, ICBM 및 순항 미사일 개발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1951년 전략공군사령관 재임기에 대장으로 진급했는데 44세의 나이에 세운 이 기록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래 최연소 기록이었다. 57년에 공군참모차장, 61년에는 공군참모총장이 되었으나, 케네디 정권하에서는 '효율'을 내세우는 국방장관이자 자신의 옛 부하였던 로버트 맥나마라, 그리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제101공수사단장 출신으로 유명한 당시 합참의장 육군대장 맥스웰 테일러 장군과 여러 면에서 충돌한다. 특히 맥나마라가 기용한 민간인 계열 인사에 대해서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아래 쿠바 미사일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피그만 침공 당시 (원래부터 변수가 너무 많아 성공할만한 작전은 절대 아니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만약 성공을 원한다면 폭격을 비롯한 공중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묵살당했는데, 자신의 예상대로 피그만 침공 자체 실패한 것을 넘어 흑역사가 되자 불신은 더더욱 깊어졌다.
케네디 정부 때 피델 카스트로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자 쿠바에 선제 핵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초강경파로 이름을 날렸다. 케네디와 맥나마라는 의견이 극단적으로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르메이 장군을 공군참모총장에 임명했는데, 이는 만에 하나 핵전쟁이 정말로 벌어질 경우 핵전쟁을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휘관은 르메이 장군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둘 다 르메이 장군을 일종의 필요악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르메이 장군(오른쪽 2번째)과 케네디 대통령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 맥나마라 국방장관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 공군참모총장 자리에서 사임하였다. 가장 의견 차이가 컸던 분야는 미 공군의 차기 주력 병기가 무엇이 되겠냐는 것이었는데, 르메이 장군은 XB-70 발키리의 도입을, 맥나마라는 XB-70을 취소하고 유도 미사일에 대한 연구투자를 주장하여 서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소련의 SAM 기술이 초음속 항공기 기술보다 더 빨리 발달하여 XB-70은 실패작이 되고 비슷한 기체 컨셉의 B-1 랜서 역시 장거리 폭격은 물건너가고 CAS만 하는 신세가 되면서 결국 르메이 장군의 판정패가 되고 말았다.
1968년 미국 민주당 내에서 남부보수파(딕시크랫)를 대변하던 조지 월리스리버럴 성향이 뚜렷해진 민주당에 불만을 품고 뛰쳐나와서 '미국독립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커티스 르메이 장군에게 부통령 후보를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인다. 당시 미국 부통령 후보 자리를 승낙하는 연설에서부터 전쟁 이야기와 "필요하다면 핵무기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덕분에 월레스의 지지율은 피크 때의 1/3 수준으로 줄어버렸다고 한다. 하여튼 조지-커티스 조합은 13% 정도의 지지만을 받는 데 그쳐 정계진출은 실패로 돌아간다. 월리스[19]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일지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양당제가 굳건한 미국에서 저 정도라면 제3정당 후보로서는 매우 높은 지지율이다. 남부지역에서는 '''5개 주'''에서 선거인단을 가져갔을 정도. 덕분에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당선되고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가 떨어지기에 톡톡한 구실을 했다.
르메이 장군은 M16 시리즈의 미군 채용에 중요한 구실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M16 소총, 그러니까 AR-15가 처음 나왔을 때 개발사인 아말라이트사는 이 총의 미군 제식 채용을 노렸지만, 미군은 기존에 쓰던 M1 개런드 소총과 비슷하다는 까닭으로 M14 소총을 고집한 탓에 판매실적이 영 빌빌대던 상황[20]이었는데, 르메이만은 이 총에 주목하여 AR-15가 공군 군사경찰(구 헌병) 경비대용으로 채용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 이 때 르메이 장군은 공군이 쓰던 M1 카빈의 대체품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장성들이 모인 생일 파티에 있던 AR-15를 수박을 표적으로 시험삼아 쏴보고는 그 성능에 어찌나 감탄했던지 공군참모총장에 올라가자마자 한 일이 AR-15 8만정을 주문한 것이었다.[21] 기지 방어에는 고위력 소총이 아니라 PDW에 가까운 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던 차에, M1 카빈보다 위력이 좋고 반동도 적절한데다 연사까지 용이한 상위호환 총기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좋은 인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터진 베트남 전쟁에서 M14의 '제식 소총에 요구되는 다양한 상황에서 적절한 대처능력'의 부재가 만천하에 공개되자 미군은 제식총기를 바꿀 필요성을 느끼고 차세대 소총인 SPIW 계획을 발진시켰는데, 그게 금방 결과물이 뚝딱 나올리 없는 관계로 계획이 완료될 때까지 땜빵으로 공군 군사경찰이 쓰던 AR-15에 주목하여 잠시 채용했는데 막상 보니 땜빵이 제법 쓸만하여[22] 결국 M16이라는 이름으로 채용되어 50년이 다 되어가도록 미군 부동의 제식 소총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M16은 오늘도 군경과 민간 차원에서 끊임없이 개량되고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석기시대 운운하는 무식한 이미지로 알려져있지만 어디까지나 석기시대 얘기는 드립성이 짙을 뿐 항공과 지상을 아울러 군사 병기의 진가를 알아보는 안목은 2차 대전때나 베트남전 때나 변함없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또한 M16 외에도 이전까지 질적 수준이 낮던 공군 헌병대의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공군의 특성상 지상 전투부대 자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편이었고, 이 때문에 공군 군사경찰(구 헌병)대는 본래는 육군에게 의존하는 영향이 매우 컸다. 그러나 M16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공군의 기지 방어 임무에도 관심이 많던 르메이는 공군의 독자적인 전투병력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군사경찰(구 헌병)대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르메이의 이런 노력은 실제로 성과가 있어서 1960년대 이후에는 공군 군사경찰(구 헌병)대 전력도 기존의 육군 병력과 비교해서 그 질이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그러는 한편으론 도쿄를 초토화시킨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본에서 항공자위대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욱일대수장, 그것도 최고 등급인 훈일등 욱일장을 받았다. 전시상황이 아니라는 까닭으로 거부되긴 했지만 원수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나왔던 적이 있는걸 보면 나름 이 방면에선 출세한 인물.
이후 1990년 10월 1일에 사망했다. 향년 83세.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를 동반한 합병증이었다.

3. 문제점



3.1. 지나친 강경함


르메이의 전략은 역사상 최악의 총력전이었을 2차대전 당시에는 일견 유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특히 르메이 장군이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일본제국을 박살낸 것,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의 전략폭격은 이런 방법이 그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허나 르메이의 진짜 문제는 그의 강경함이 냉전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세계의 파멸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1950년대엔 미군 내 강경파 끝판왕으로 통하던 맥아더보다 더 전쟁에 미친 남자라는 평가가 이미 나돌고 있었고,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엔 쿠바 폭격, 더 나아가 소련과의 전면적 핵전쟁(...)을 추진하려고 했다. 물론 당시 대통령인 케네디가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순 없다고 그를 제지해 실제로 소련 핵폭격 계획이 실행되진 않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던 1962년 10월 18일 케네디 대통령은 군 장성들을 모아 긴급한 회담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때 합참의장인 육군대장 맥스웰 테일러 장군과 르메이 장군간의 열띤 공방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시대적 변화를 고려해 소련도 신뢰라는 과정에 발을 맞추게 될 것이며 이를 따라 쿠바를 봉쇄하자는 안을 내세운 테일러 장군에 맞서 르메이 장군은 이번 사태의 유일한 해결책이 소련과의 전쟁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들어본 케네디는 테일러 장군의 해결책을 따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지나친 강경함 문제는 위에도 서술된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상 가장 끔찍한 총력전' 이 이미 개전된 상태에서, 일개 전선 지휘관이었던 2차 대전 당시의 르메이라면 (다소 비판의 여지는 있으나) 납득 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어설픈 고려보다는 어떻게든 전쟁 자체를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효율적인 동시에 인도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고, 또한 정부와 상위 지휘부의 지휘 아래서 특정 전선만을 담당하는 전선 지휘관 되는 자라면 더 복잡한 판단은 상부에 맞기고 자신은 자기가 담당한 부대의 전술적 승리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핑계로 인도적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지만, 상위 지휘부와 정부가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라면 이는 분명히 자기 책임을 다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의 미국 정부는 물론 사소한 실수나 문제는 종종 일으켰지만, 독일이나 일본 등의 미쳐 날뛰던 국가 및 정부와는 달리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적에서 주된 비판을 받는 2차대전 이후 냉전기 및 베트남 전쟁기의 경우 일단 그의 지위 자체가 일개 전선 지휘관이 아닌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전략공군 사령관이나 공군참모총장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기 자신이 전략적으로 대국을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상 일개 전선 지휘관과는 수준이 다른 전략적 판단력이 필요한데, 르메이의 강경한 태도는 전선 지휘관으로써 보여주던 태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미국이 정상적인 문민통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대통령 케네디와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르메이의 호전적인 강경론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이 안전망으로 기능하기는 했다.
르메이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을 대비하여 발탁된 인물이고, 그를 발탁한 인물들에게는 그의 강경론을 통제할 자신이 있었으며, 실제로 통제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비상사태에 편향된 극단성을 보이는 인물을 발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의 군사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에 관여하는 인물 중 하나가 지나친 극단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시스템적으로 그런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인물 자체를 평가할 때에는 애초에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또한 르메이의 호전성은 전시에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전시를 평시로 되돌릴 수 있는' 덕목이지만 평시에서는 오히려 평시를 전시로 바꾸는(...) 악으로 발휘된다. 이 시기 르메이가 호전론을 주장했던 많은 위기들을 미국은 전쟁이 아닌 다른 대안으로 해결했다. 르메이는 다른 대안이 있는 상태에서 전쟁을 주장하는 '''실수'''를 여러 번 저질렀다.
그가 전략공군사령관이나 공참총장으로 활약했던 냉전기는 본질적으로 '공포에 기반한 평화'의 시기였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다 죽는다는 공포가 서로를 극단적으로 적대하는 양 진영 사이에서 직접적인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던 시대였다. 르메이는 툭하면 핵폭격을 주장한 것으로 악명높은데, 정작 상대인 소련의 정치인 중에서도 선제 핵공격을 주장한 이는 거의 없었다. 당연하지만 당시의 소련은 꽉막히고 비효율적인 면모는 있었어도 2차대전 때의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처럼 미쳐 돌아가는 곳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태반이 독소전쟁 경험자들이자 당관료 출신들로 구성된 소련 지도부는 냉전 시대 내내 중요한 고비마다 핵전쟁을 회피하기 위하여 애썼다. 서로에 대한 극단적 불신과 적개심이 팽배했던 이 시대에조차 '적들이 우리에게 핵공격을 가할 테니 이에 대해 보복할 핵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하여 상대의 선제 핵공격으로 자국의 지휘부가 붕괴될 경우 무인 시스템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적을 파멸시킬 수단을 마련할지언정 '우리가 먼저 핵공격을 가하자' 고 주장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르메이는 이런 위험한 시대에 '선제 핵공격' 을 주장한 드문 인물 중 하나였다.
르메이의 한계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잘 드러난다. 르메이 본인도 설마 인류의 파멸을 바라고 그런 극단론을 주장한 것은 아닐테고, 본인으로써는 선제 공격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주장한 것이겠지만... 해당 위기의 전개와 결과를 생각해 보면 르메이가 충분히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무모한 강경책을 주장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르메이의 강경책은 기본적으로 '소련이 미국과의 핵전력 격차를 좁혀오는 상황에서, 전면 핵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더 이상 격차가 좁혀지기 이전에 선제 핵공격을 통하여 핵전쟁에서 승리해 버리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라는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전면 핵전쟁은 피할 수 있었고, 만에 하나 핵전쟁이 발발했을시의 피해는 최소화하더라도 감당하기 지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엄청난 본토 피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은 있었다.
르메이 자신도 1985년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이 점을 결국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폭격에 나서기 전에 항상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에게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설교를 하곤 했는데, 민간 지역 폭격으로 PTSD를 앓게 된 장병들이 극도의 자극을 받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육군 항공대의 군무이탈이 꽤나 많았다고 한다. 언론과 대중들은 그를 전쟁 대스타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의 밑에서 일했던 일선 장병들은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르메이의 '소련을 밟아 없애버리자'라는 사상은 소련이 제대로 핵무장도 하지 못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그나마 풍요로웠던 서부가 쑥대밭이 된 데다 수천만이 희생당하고 독소전쟁 때문에 공업 구조가 군사적 목적의 중공업에 치우쳐 경공업, 군수에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고[23] 소련 점령지의 정리가 끝나지 않은 1945 ~ 1950년이 가장 적기였고 미국에게 유리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물론 막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해서 싸운 소련을 아무 명분도 없이 갑자기 칠 수는 없었겠지만.
굳이 르메이 장군을 변호해주자면 이런 강경파가 있어야만 협상력이 유리해지는 외교적 문제도 있다. # 굳이 상부에서 자기들과 성격이 전혀 반대인 강경파를 올려준 건 이런 요소도 있을듯. 또한 르메이는 자기 생각과 맞지 않더라도 임무 수행은 잘 하는 편이다. 위의 일본 비행장 공습 건을 참고할 것.

3.2. 폭격 만능주의


그 당시엔 전략 폭격하면 르메이 장군을 떠올릴 정도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전략 폭격의 당대 최고 전문가였다. 또한 주변 국가, 특히 일본의 방공망은 빠삭하게 알고 있던 그였기 때문에 폭격하면 르메이 장군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말 그대로 폭격의 달인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장의 양상이 바뀌면서 그의 폭격 만능론은 빛을 잃게 되었다.
미 공군은 그의 이론대로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며[24] 엄청난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쏟아부었으나 그 효율성은 극악이었다. 무차별 융단 폭격을 해도 사람 한 명 사살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기점으로 이미 폭격은 전략 폭격, 융단 폭격에서 전술 폭격, 정밀 타격으로 그 양상이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핵 폭격기인 XB-70 설계를 진두지휘했으나 이 역시 유도 미사일 개발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도 미사일 개발 계획은 이후 순항 미사일이 되어 걸프전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이미 그의 폭격 이론은 정밀성과 가성비를 추구하는 현대전장에서 상당히 케케묵은 생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시대에 맞춰 새로운 병법이나 군사 기술을 단련하면 좋았을텐데 오직 폭격과 공군만 밀고 나가다 후반에 빛이 바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3.3. 실책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냉전이 가장 극에 달해있던 1950년대 후반에 소련의 비행장과 방공망의 상황이 너무나 궁금했던 르메이 장군은 도박을 감행한다. 수송기에 전자장비를 부착하고 소련 영공을 넘나들며 공중 정찰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전을 대통령 모르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고, 작전 이후 수십차례가 넘는 비행에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은 생사를 왔다갔다 했다. 결국 정찰용으로 개조한 C-130 한 대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어 공군 장병 십여명이 죽고마는 초대형 참사가 터진다.
한국으로 치자면 대한민국 공군C-17이나 IL-76이 매우 비싼 값에 도입되었는데, 공군 지휘관 개인의 군사적 호기심을 충족할 목적(물론 군사적인 필요성도 있기는 했겠지만)으로 북한에 갔다가 격추되어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면 된다. 그런데 대통령도 이 사실을 모르고, 합참의장도 이 사실을 모르고, 이 비행기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알고보니 언론에 이름을 날려본 어떤 유명한 공군 사령관이 상부 지시를 무시하고 정찰한다고 비행기 날려 사진찍고 다니다 비행기랑 장병들을 잃어버린 초대형 병크가 터졌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보면 병크지만 그 당시 분위기가 냉전이라 쉬쉬하는 분위기도 있었고, 사진도 쓸만한걸 많이 찍어왔기 때문에 유야무야 덮고 넘어갔다고 한다. 다만 당시에는 정찰위성 기술이 지금보다 발달하지 않았던 상황이라는 점은 고려해야 된다. 다른 대안과 옵션이 많은 21세기 현재에는 전략성이고 군사적 필요고 나발이고 저런 식의 독자적 정찰 강행은 빼박 병크 맞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극단적 강경함이 장점도 있는 양날의 검인 것은 사실이나 전반적으로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WW2 전시상황 시절의 신념과 행동패턴을 반복한 꼴과 대충 비슷하다. 2021년 지금은 냉전시절에 비해 정찰에 있어서 다른 옵션이 많다. 위성사진을 찍거나, 북한군 인트라넷을 해킹하거나, 굳이 항공정찰을 해야 겠다면 격추의 리스크가 덜한 무인 드론을 보내거나.

4. 석기시대 마니아


We should bomb Vietnam back into the stone age.

'''베트남을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돌려놔야 합니다.'''

'''석기시대 마니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명언. 전체 원문은 다음과 같다.

"My solution to the problem would be to tell them frankly that they've got to draw in their horns and stop their aggression or '''we're going to bomb them into the Stone Age.''' And we would shove them back into the Stone Age with Air power or Naval power—not with ground forces."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 그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입니다. 그들은 공격의도를 멈추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들을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되돌려 버릴 것이다.''' 그리고 지상병력이 아닌 항공력과 해군력으로 그들을 밀어버려서 석기시대로 후퇴시키겠다."라고 말입니다.

[25]

But who was it who'd go far beyond the enemy lines and attempt to destroy not only enemies in the field, not only supplies and fuel dumps and tank concentrations up near the front; but would go deep into the enemy's homeland, and thus try to eliminate his basic potential to wage war?

'''Bombers, nothing but bombers.'''

"최전선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것, 전선에 걸쳐 있는 물자 및 유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 모여있는 전차 대열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과연 어떤 병기가 적의 본토 깊숙히 침투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꺾어버릴 수 있겠는가?

'''폭격기다. 오직 폭격기 뿐이다.'''[26]

베트남 전쟁 때 적을 '''"폭격기로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는 발언을 자주 하였다. 오죽하면 이런 패러디가 나돌정도... 위에도 적혀있다시피 부통령 후보 출마 때 베트남전을 어떻게 끝낼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대답이 '''"베트남을 폭격으로 석기시대로 돌려놓겠습니다."'''였다. 이 석기시대 드립은 르메이 장군의 사후에도 이어져서 9.11 테러 이후 눈이 뒤집힌 미국이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영공 열라고 협박할 때 정말로 쓰이기도 했다.
다만 북베트남이 항복하지 않으면 석기시대로 되돌아가도록 폭격하겠다는 말은 원래 자신의 전속부관이자 전기 작가였던 칸토어(MacKinlay Kantor)가 약간 과장을 섞어서 넣은 문장이었고, 본인은 그저 미 공군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취지로만 말했다고 이후 인터뷰에서 직접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칸토어가 르메이 장군에게 원고를 주고 최종 확인을 해달라고 했을 때 본인이 귀찮아서 대충대충 읽다가 이 부분을 놓친 것이라 할 말은 없다. 1960년대 후반에는 대세를 되돌릴 수 없음을 체감하고 자기 변호를 그만두었다. 오늘날에도 영화나 이런저런 대중매체(밀리터리 장르가 아니어도 심심찮게 나온다!)에서 bomb back into(또는 to) the Stone Age 같은 표현은 거의 관용어구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6.25 전쟁 때는 석기시대 드립이 확인된 바가 없다.
또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을 주장, 보다 강경하게 밀어붙이기를 원했고,[27] 존슨 정부하에서도 북베트남에 대해 전투기/전폭기/공격기에 의한 소규모 전술 폭격이 아닌, '''대대적인 전략 폭격'''을 요구했다. 극단적으로 호전적인 성향의 주전론자로, 자신의 전쟁관을 요약해서 말하기를 '''"충분히 많이 죽이면 더 이상 못 덤빈다. 그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라고.
본인은 전쟁 초장에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하여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어버리면 결과적으로 전쟁이 일찍 끝나니 아군도 덜 죽고 적군과 적측 민간인도 덜 죽는다는 사고 방식으로 전쟁에 임한다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전쟁 수행원들이 죽음을 포함한 약간의 불행을 감수함으로써 모두의 불행이 덜해진다는 일종의 공리주의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명령과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재래식 전쟁의 끝판왕이었던 2차대전 때는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잘 먹혀들어서 그렇게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르메이 장군만 그런게 아니라 남북전쟁 당시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이나 리처드 조던 개틀링 등 비슷한 주장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의 바램은 결국 '모두 다 죽을 수 있는' 핵무장의 등장으로 아무도 전쟁을 치룰 엄두를 못내는 상황이 도래함으로서 입증이 되긴 했다.
다만 르메이 장군의 전략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세계대전=핵전쟁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진 이후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매파의 전략은 인류 멸망을 불러올 수도 있는 관계로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인류에게는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냉전은 그가 1990년에 사망한 뒤인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핵전쟁 없이 조용하게 종식되었다. 사실 르메이 장군 같은 호전론자가 많았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르메이 장군이 시의적절하게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볼 수 있다.
텍사스 주 상원의원인 테드 크루즈(Ted Cruz)는 2014년 8월경 한 집회에서 "ISIS가 현대를 버리고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면, 저희도 도와줄 의향이 있습니다.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되돌려줘야 합니다."("They want to go back and reject modernity. Well, I think we should help them. We ought to bomb them back to the Stone Age.")라고 발언하였다. 그리고 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토론회에서도 ISIS에 융단 폭격(Carpet Bombing)(!)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의외의 면모


위의 내용만 놓고 보면 좋게 말하면 과격파, 나쁘게는 무차별 폭격으로 사람이고 건물이고 모두 잿가루로 만들자는 소리나 질러대며 부하 장병들의 희생과 위험증대를 쉽게 강요하는 잔인한 다혈질의 전쟁광으로 보기 쉽다. 창작물에서도 르메이 본인이나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오면 그렇게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직 미국 본토에 있던 중령 시절 르메이를 처음 본 신병들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겁을 먹었다거나, 목소리가 너무 조용해서 가까이 귀를 기울여야 했고 곁의 부하들은 말을 듣느라 알아서 조용해졌다는 일화가 많다. 명령 역시 두 문장을 넘어가는 일이 없었고 문장 길이도 짧았다. 이렇게 말을 아낀 덕분에 일단 말이 나왔을 때는 그만큼 더 설득력이 있었다고 한다.
1985년 당시의 Quest for Peace에서의 인터뷰공군전략사령부 10주년 기념 연설(1분 35초부터) 등 생전 동영상을 보면 달변가나 정열적인 연설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을 볼 수 있다. 르메이와 마찬가지로 전쟁광이란 평가를 받는 조지 패튼생전 연설과 비교해보자.
그리고 무식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하들의 사기 진작에 대해서는 조지 S. 패튼 보다 제법 잘 챙겨줬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신 역시 수십 번이나 선두 기체에 탑승해 폭격을 진두지휘하면서 쌓은 경험으로 폭격기가 대공포에 격추당하는 것은 승무원의 기량과 전혀 상관 없이 순전히 운에 달려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28], '''어차피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평등하게 죽은 목숨이니까''' 죽기 전에 임무는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사기 관리를 해준 것이다. 승무원을 모두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폭격기 조종사가 동료들이 죽는 건 더 이상 견딜 수 없지만 비행기는 계속 몰고 싶다고 하자 썬더볼트 조종사로 보직 변경을 시켜줬다거나, 종교 차별을 하고 삥뜯는 장병을 직접 지상 부대로 쫓아냈다거나, 휘하 장병들이 영국 아가씨들과 사귀는 걸 눈감아주고 아가씨의 아버지가 사고 친 병사를 부대까지 쫓아왔을 때 어르고 달래 되돌려보낸 등의 일화가 있다. 보직 변경을 시켜준 조종사의 예에서 보듯 부하들의 고충이나 공포에 대한 고백도 마다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폭격기 조종사: "젠장할. 어떤 '''개새끼'''가 23,000피트에서 폭격하라고 만든 웅장한 비행기5,000피트로 내려보내서 내가 윙맨을 잃었는지 알고 싶군요. 그는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God damn it, I'd like to know who the '''son-of-a-bitch''' was that took this magnificent airplane, designed to bomb from 23,000 feet, and he took it down to 5,000 feet and I lost my wingman. He was shot and killed.")

르메이: "우리가 왜 여기 있나? 우리가 왜? 자네가 윙맨을 잃어서 나 역시 가슴이 아프다네. '''내가 그를 내려보냈어.''' 나도 그곳에 있어봤어. 그게 뭔지 알아.[29]

그러나 자네는 윙맨을 잃었지만 우리는 도쿄를 파괴했네."("Why are we here? Why are we? You lost your wingman, and it hurts me as much as it does you. '''I sent him there.''' And I've been there. I know what it is. But you lost one wingman, and we destroyed Tokyo.")

-도쿄 대공습 이후, 로버트 맥나마라의 회상, CNN 인터뷰에서.

그는 폭격 임무가 끝난 후 디브리프를 할 때 조종사를 비롯한 승무원들이 자신에게 득달같이 달려와 '''개쌍욕을 하고''' 작전 과정에서 벌어진 오류를 비판하는 것을 '''오히려 권장'''했다고 한다. 그렇게 욕하면서 하는 비판이야말로 장병들의 처지에서 작전을 진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간접 경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HAM 라디오에 열중하고 있는 소년과 함께 찍은 사진.
전쟁이 끝난 후 전략공군사령관이었을 때도 휘하 장교들이 민간 항공사로 이직하면 일할 사람이 없다[30]는 근거를 들어 비슷하게 장병과 군무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써줬다. 이 복지 정책 중에서 르메이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스트레스 해소 및 취미 생활 목적으로 쓰도록 기지마다 설치한 공용 작업장이었다고 한다. 본인도 HAM 라디오와 자동차 조립이 취미여서, 장병들과 같이 자동차 조립도 했다. 르메이는 폭격기를 타면서 HAM 라디오를 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SSB 방식 무전기를 손수 테스트하여 기존에 B-52에 탑재되던 AM 방식 무전기를 대체하기도 하였다. 르메이의 콜사인은 KØGRL과 W6EZV였다. 그 외에도 1950년대 당시에 차별받던 '''흑인도 백인과 똑같이 훈련을 받으면 똑같이 잘할 수 있다. 안그래도 사람이 모자라는데 일하겠다는 사람을 차버릴 까닭은 없다'''고 역설하면서 흑인 조종사/기술자의 육성 및 현장에서의 인종간 통합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미국 위키의 커티스 르메이 항목에 나온 부분인데 태평양 전쟁 이후 미 공군 사령관이 된 이후에는 미 공군에 유도를 보급했다고 한다. 실제로 라이프 61년 10월호에는 커티스 르메이가 유도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 나와있다. #
[image]
믿기 힘들겠지만 그 역시 딸바보였다. 부인이 유산을 수차례 겪다가 겨우 낳은 딸이어서 비행장 구경을 시켜주거나 몸개그까지 부리는 등 매우 각별하게 여겼다고 한다. 르메이 장군의 외동딸 제이니는 워렌 코작이 저술한 아버지의 평전(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을 읽고 아마존닷컴에다 서평을 남기기도 했다.# 부인과의 금슬도 매우 좋아서, 무뚝뚝한 게 지나쳐 웃거나 스트레스를 풀 줄 모르는 르메이 장군이 그나마 사람답게 즐거움이란 걸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덕이었다고 한다.

6. 어록


커티스 르메이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기록들을 모은 문단이다. 이 기록들은 자서전, 기밀이 해제된 보고서, 각 대학에서 출판한 연구집 및 인터뷰에 실린 실제 발언들이다. 다만 일부는 정확한 출처가 없어서 본인이 직접 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즉 실제로 발언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조건 맹신하지 말고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우린 매캐한 잔해 속에서 숯덩이로 발견된 일본인들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ㅡ 헨리 '햅' 아놀드 장군의 편지에 대한 답장[31]

I'll tell you what war is about. You've got to kill people and when you kill enough of them, they stop fighting."

"전쟁이란 게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사람을 죽일대로 죽이다가 충분하다 싶었을 때 싸움이 끝나죠."[32]

중성자탄 W70 탄두의 개발자 새뮤얼 코헨에게 지휘관의 책임과 무게에 대해 설명하며 남긴 말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최대한 빨리, (나중에 모자라게 투입했다는 실수가 벌어지지 않도록)[33]

필요한 것 이상의 군사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군사력을 사용하는 목적은 오로지 전쟁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전쟁을 끌게 되면 문명화된 세계와 인류 사회에 점진적인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자원을 낭비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효율의 극치이죠.

("...The main thing is to get it over with as quickly as possible....")

To me winning is the only solution if you don’t like the war. And if you don’t think you’re going to win, you might as well give up without going, unless you prefer to be dead and defeated.

"전쟁이 싫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승리 뿐이다. 적에게 패배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라."

"핵전쟁에서 '이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일단 이길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34]

We should bomb Vietnam back into the stone age.

"베트남을 폭격해 석기시대로 돌려 놓겠다."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이 세상에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 그들은 자기 정부를 위해 (어떤 형태로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며 우린 무장한 적군하고만 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죄없는 방관자''''들을 죽여도 딱히 괴롭거나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35]

Killing Japanese didn’t bother me very much at the time…. I suppose if I had lost the war, I would have been tried as a war criminal….. every soldier thinks something of the moral aspects of what he is doing. But all war is immoral and if you let that bother you, you are not a good soldier.

"나는 당시에 일본인을 죽이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중략) 만약 전쟁에서 졌다면 전범으로 기소되었을 게 뻔하다.(중략) 모든 군인은 윤리적인 딜레마를 겪는다. 하지만 모든 전쟁은 비윤리적이며, 훌륭한 군인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36]

I had blood upon my hands as I did this, but not because I preferred to bathe in blood. It was because I was part of a primitive world where men still had to kill in order to avoid being killed, or in order to avoid having their beloved Nation stricken and emasculated.

"매번 전쟁터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결코 이런 행위를 즐기지 않았다. 단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면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원시세계의 일원이었을 뿐이다."[37]


7. 대중문화에서


  • 생전에 워낙 강경한 모습을 보여온 탓에 여러 영화에서 전쟁광의 모습으로 패러디 되기도 했다. 예컨대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터짓슨 장군은 르메이 장군의 패러디다. 1983년작 영화 워게임에서는 NORAD 사령관인 미 공군대장 베린저 장군의 행동거지나 생김새가 워낙에 석기시대스러워서 이 영화 처음 보는 밀덕을 뿜게 만든다.
  •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2001년작 영화 에서도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다. 아래 사진의 왼쪽이 극중 모습이다.
  • 스티븐 킹타임슬립 대체역사물 11/22/63에서는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이 끝난 후 월러스 행정부의 당시 미국 부통령으로 하노이 핵폭격을 직접 지시한다. 결국 하노이가 한줌의 먼지로 사라지는 비극이 벌어진다. 이후 월러스가 암살되면서 미국 대통령이 됨.
  • 영화 The Rock에서는 전직 해병대 테러범 중 하나가 독가스 로켓을 이용한 인질극이 뜻대로 되지 않자 "놈들이 여길 석기시대로 되돌려버릴 거야.(They're going to bomb our ass back to the Stone Age.)"라고 하기도 한다.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니었겠지만, 영화 막판에 마지막 남은 독가스 로켓을 처리한 것은 테르밋 플라즈마(Thermite Plasma)라는 폭발물이다. 사유는 영화 초반에도 나오지만 험멜 장군 일파가 해군 탄약창에서 훔친 VX가스를 네이팜이 태울 온도가 되지 못한다는 까닭으로 이걸 사용한 것이다. 테르밋이라는 물질은 실존하지만 테르밋 플라즈마라는 폭발물은 없다.
  • 일본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주적으로 등장. 도쿄 대공습 직전 일본 어린아이 흉내를 내며 부하들의 심금을 울렸다가 바로 일본을 석기시대로 만들 도쿄 대공습을 밀어붙인다. 현대에서 타임슬립한 주인공 쿠루스도 이 분은 막을 방법이 없어서 일본은 개박살이 난다.
  • 여름의 폭풍! 8권에 딱 1컷 등장하지만 포스가 대단하다. 작중 중요사건이 요코하마 대공습을 지휘한다.

[1] 영국 공군의 '''커티스 복붙 폭탄마''' 되시겠다.(...)[Kozak,2009] Kozak, W.,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2009[2] 타임지의 표지로까지 나왔다는건 그만큼 2차 세계대전에서 도쿄 대공습의 위상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3]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이후 르메이 장군이 주관한 작전은 전부 수치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계산된 행위였다. 이 때 르메이의 부하 장교였던 맥나마라의 회상에 의하면, 이 계산의 목적은 작전의 최적화를 통해 '''단위 아군 피해당 단위 적 목표 파괴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4] 이런 계산에는 어느정도 규모의 아군 피해는 감수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리는데,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여러번 작전을 나눠서 수행하는 것보다 아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단 한 번의 작전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아군의 피해를 줄인다는 것이 르메이 중령의 지론이었다.[5] 이는 불완전한 정보에 바탕한 분석이라 독일군 측이 분석한 3,000발당 1대보다 과대 평가된 수치이지만, 대략적인 피해를 숫자로 말해주는 것 자체로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6]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국방장관으로써, 르메이의 상관이었다. 이 아이러니는 그가 나중에 찍은 회고록 형식의 다큐멘터리 포그 오브 워에서도 잠깐 언급된다.[7] 직속 상관인 헨리 아놀드 장군은 미친 짓 좀 어지간히 하라고 당연히 반대했지만, 르메이가 부탁 하자 딱 한번만 허용해주었다.[8] 계통상으로 당시엔 대개 번호공군(제O공군)급 부대 예하에 전투직종별(전투기/폭격기/수송기)항공사령부가 편제되어 있었지만 르메이가 있었던 제21폭격사령부는 피직속 번호공군이 아닌 한동안 미군 합참의 직할이었으며 6월 경 칼 스파츠 대장이 전략공군사령관으로 현지부임하여 상관을 맡긴 했다.[9] https://books.google.co.kr/books/about/Mission_with_LeMay.html?id=khpCAAAAIAAJ&redir_esc=y 1965, p. 384[10] 현대의 폭격을 생각하면 안된다.폭탄의 외형부터가 공기역학적으로 안정된 외형이 아닌지라 시속 '''수백km'''로 해수면 기준 '''70도'''각도를 유지한채 내리꽂듯 강하해 고도 150~300'''m'''까지 내려가 폭격하는 급강하폭격조차 길이 200m,폭 30m급 목표물에 50%의 명중률을 기록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이를 훨신 윗도는 일본과 독일의 명중률은 세계 최고급이다.문제는 이들조차 70~90%선이고 당시 일본을 폭격한 기종은 '''급강하 폭격=자살 이란공식이 성립하는 4발 중폭격기 B-29'''란 점이다.2차 대전기 수평폭격의 명중률은 문자그대로 '''운칠기삼'''그 자체였다.특히 일본에 경우 상술한 편서풍으로 '''명중하기를 기도하자''' 수준이었다[11] 이것은 육군 항공대가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닌 해군 측의 요청이 들어와서 한 것이다. 당연히 르메이 장군은 이런 거 할 시간 있으면 도시에 대한 폭격이나 더 해야 한다고 툴툴댔다. 구레 군항 공습 문서를 참조.[12]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 73[13]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p.90~92[14] Kozak, 2009[존키건,2007,864-867] 존 키건 저, 류한수 옮김,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864-867쪽. 다만 소련의 만주작전도 같이 언급했다.[15] 자기네 전투원들을 관련없는 일반 민간인들과 구분 안 하는 건 기본이고 일반 민간인들 사이로 일부러 섞여서 피아식별을 못 하게 만들고 비전투원과 전투원을 따로 구분 안 하는 행동을 반정부세력일 때 부터 했었기 때문에 정부나 그와 반대인 성향을 가진 세력이 이쪽 성향 세력과 싸우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말이 좋아 인민 속으로 들어가서 투쟁이지 사실은 자기네들이 안 잡히려고 일반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것이다. 세력이 없으니 선전선동을 하여 일반 민간인들이 자기들과 연대를 맺도록 세뇌한 건 덤.[신이치,190] 출처: 아라이 신이치, 《공습의 역사 ― 끝나지 않는 대량 학살》, 이와나미 신서, p190[16] 폭발음으로 인한 내상으로 사망한 가능성이 있다.[17] 물론 이런 기록들은 이후 딕 루탄-지나 예거의 무착륙 세계일주 비행기록에 묻혀버린다.[18] 유달리 대형 항공기를 많이 쓰는 미 공군은 미 해군과 달리 빠른 시간에 한 기체를 몰빵으로 급유할 수 있는 붐 방식의 급유기를 쓰는데, 이것이 르메이 장군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편대 단위로 여러 대가 급유를 받아야 하는 전투기들에게는 짜증날 법도 하지만 르메이의 목적은 전략폭격기 급유의 신속화였기에 전투기들의 투정은 무시당했다. 그래도 전투기들로서도 붐 방식 급유가 살떨리는 조종이 필요한 프로브 방식 급유(해군이 쓰는 방식)보다 편하긴 하다고 한다(X-32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가 이걸 실패했기 때문일 정도). 뒤에서 지시만 내리는 것이 아닌 자기가 직접 장병들과 최전선에서 굴러보면서 얻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정들 중 하나.[19]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나오는 앨라배마의 주지사가 바로 이분이시다. 그러나 나중엔 인종차별적 행보를 반성했다.[20] 때문에 라이센스가 콜트사로 넘어간다.[21] 단, 이 8만정은 베트남전 미육군에게 넘어가버렸다[22] 물론 보수적인 미군 장성들은 계속 M14를 고집했지만 맥나마라가 밀어붙여서 제식 채용이 되었다. 사사건건 싸워댔던 르메이 장군과 맥나마라의 의견이 일치한 몇 안되는 안건이었다. 그리고 맥나마라는 위의 8만정 주문이 무산된 후 M16이 모자라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르메이 장군을 달래기 위해 2만정을 공군에 제공하게 된다.[23] 군수와 경공업 미비 문제는 매우 고질적이고 끈질기게 소련군을 괴롭혀서 소련 해체까지 소련군은 결코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24] 초기 계획만 구상하고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65년도에 이미 공군을 나왔다.[25] LeMay, C. E., Kantor, M., <Mission With LeMay: My Story>, 1965, p. 565.[26] 르메이 장군 본인은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 훈련을 받아본 뒤 당시 프롭 전투기가 지니는 근복적인 한계를 실감하고 폭격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거기에 그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 당시 미군이 발주한 폭격기가 바로 '''B-17'''이었다.[27] 이 때 존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뮌헨 협정과 빗대어 비판하기도 했다. 문제는, 뮌헨 협정은 케네디 본인의 역린이기도 했다는 것.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뮌헨 협정 당시 영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28]대공포의 반응 속도를 예상하고 체계적으로 회피 기동을 할 경우 예측 사격은 저지할 수 있지만, 적이 예측 사격을 포기하고 아예 탄막을 뿌려버릴 경우 완벽한 회피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1944년쯤 되면 이미 파악이 된 상태였다.[29] 위에서 언급된대로 르메이 장군은 유럽 전선에서 선두 기체의 폭격기 조종사와 부조종사를 몸소 맡은 바 있다.[30] 중장이었을 때 받는 월급이 당시 민간 조종사의 월급과 똑같았다. 나머지 부하 장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이 것은 현재 대한민국 공군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문제이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소령만 달아도 월급, 진급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역을 택하고 민간 항공사로 빠진다. 그나마 조종병과면 별 달기가 수월하긴 하지만 단지 타 병과에 비해 쉽다는 정도다. 달지 못달지 보장없는 장군을 노리고 공군에 남기보다는 더욱 분위기도 자유롭고 급여도 많은 민항사가 더 선호된다.[31] "축하하네, 이번 일로 자네들이 무엇이든지 해낼 용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32] Kenneth D. Rose, <One Nation Underground: The Fallout Shelter in American Culture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뉴욕대학교 출판부, 2001, p.20[33] 피그만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34] Quest for Peace(1985) 인터뷰에서. (인터뷰 전문 커티스 르메이)[35] Michael sherry, <The Rise of American Air Power : The Creation of Armageddon>, 예일대학교 출판부, 1987, p.408[36] Paul Fussell, <Wartime: Understanding and Behavior in the Second World War>, 옥스포드대학교 출판부, 1989, p.152[37] J. J. Magee, <Indictment: For the Murder of John F. Kennedy>, 2013,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