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결집
1. 개요
석가모니 부처 입멸 백 년쯤 뒤인 기원전 383년경 인도의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진 결집으로 결집이 이루어진 장소를 따서 '''바이샬리 결집''' 또는 '''700결집''', '''700집법'''이라고도 한다.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샤 장로(耶舍長老, Yasa, Yaśas, Yaśoda, 야사존자)가 당시 바이샬리(毘舍離國, 웨살리)의 밧지뿟따까(Vajjiputtaka, Vṛjiputraka, 跋闍子) 출신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될 소지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열 가지 행위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7백 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로 소집해 그러한 열 가지에 대한 심의를 행하면서 이루어진 경전 결집이다.[1]
이를 계기로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교단 내에서 더욱더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지만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의 차이가 있다.[2] 또한 이 2차 결집을 촉발한 '야사 십사'에 대한 인정 여부를 놓고 '''상좌부 불교(Sthaviravādins)와 대중부 불교(Mahāsāṃghikas)가 분파'''되었으며[3] , 불교사에서는 이를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부르며 불교의 역사를 다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된다. 바이샬리는 인도 동부에 위치하며, 바이샬리의 이른바 '야사 십사'를 비법이라 비판했던 야사 비구 및 고승들은 인도 서부 출신자들이었다.
2. 전개
당의 승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바이샬리에서 동남쪽으로 14~5리 가면 큰 수토파가 있는데, 7백 명의 이름난 승도들이 2차 결집을 행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바이샬리 결집을 촉발시킨 야사십사란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인도 동부 지역의 도시 바이샬리의 승단 및 재가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열 가지 행동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 염사정(鹽事淨, siṅgiloṇa). 그 전날 받은 소금을 비축해 두었다가 식사 때에 쓸 수 있다.[4]
- 이지정(二指淨, dvaṅgula). 중식을 먹은 뒤에라도 해 그늘이 두 뼘 길이가 될 때까지 먹을 수 있다[5]
- 수희정(隨喜淨, gāmantara).[6] 밥을 먹은 뒤에라도 다시 또 먹을 수 있다.[7]
- 도행정(道行淨, āvāsa).[8] 이미 도량에서 식사를 했더라도 도량 즉 사원 밖에서라면 다시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9]
- 낙장정(酪漿淨, amathita).[10] 소유(酥油)[11] 나 꿀, 석밀(石蜜) 등을 우유에 타 두고, 밥을 먹지 않을 때 먹을 수 있다.
- 치병정(治病淨, jalogipātum).[12]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사루가주[13] 는 마실 수 있다.
- 좌구정(坐具淨, adasakaṃ nisīdanam).[14] 비구의 체구에 따라 좌구, 즉 방석의 크기를 조정할 수 있다.
- 구사정(舊事淨, āciṇṇa).[15] 그 이전 사람이 하던 일을 따라 하면 율에 위반되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 고성정(高聲淨, anumati).[16] 따로 갈마법을 짓고 나중에 와서 억지로 다른 이의 용서를 구한다. [17]
- 금보정(金寶淨, jātarūparajata).[18] 금, 은 및 돈(화폐) 등을 보시받을 수 있다.[19]
십사 중 가장 크게 문제시된 항목은 각염정(소금 쟁여두기)과 금은정(돈을 보시받기)이었다. 소금은 고대에는 화폐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했던 물건이므로[21][22] 각염정의 본질 역시 금보정과 같은 화폐의 문제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는데, 문제는 석가모니 부처 당시는 화폐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율장에는 화폐에 대한 뚜렷한 언급이 없다. 바이샬리는 또한 인도에서도 일찍부터 화폐 경제가 활발하게 발달한 곳이었다. 석가모니 부처 입멸 후 100년이 지나면서 '''화폐경제가 발달'''하자 동쪽 교단에서는 소금을 쟁여두거나 금은 혹은 화폐를 보시받는 것을 정법, 즉 관행으로 수용한 것이다.#
야샤 장로가 바이샬리에서 본 것은 포살법회 날 비구들이 법회에 모인 대중들 한가운데 물을 가득 채운 바리때를 놓아 두고 '승단(상가)의 필수품을 구입하는 데 쓸 금은과 화폐를 그곳에 넣어 주세요.'라고 요구하고 대중들이 거기에 돈을 던져넣는 모습이었다.[23] 이제까지 승단의 비구들은 신도들에게 옷이나 음식만을 공양으로 받아 왔다. 석가모니 부처 당시에는 활성화되지 않았던 화폐 즉 돈이 널리 사용되고 퍼지자 불교 승단이 이를 수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지 이견이 생긴 것이다.[24]
보수적인 관점을 견지한 야사 장로는 당연히 "이건 계율 위반이다! 부처님께서 어디 금은을 받으라고 하셨냐! 출가한 사문이 재물을 손에 쥐다니?" 하고 주장했고, 더 이상 돈을 주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외쳤다. 이에 동방교단은 "부처님이 금은을 받지 말라고 하셨지, 돈을 받지 말라고 하신 건 아니었잖아? 그리고 우리가 해오던 대로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잘 해왔는데, 당신이 왜 이래라 저래라야?" 하고 반박했다. 나아가 동쪽 교단의 승려들은 이를 정법(관행)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야사 장로에게 하의갈마(下意羯磨, paṭisāraṇiyakamma)[25] 를 하라고 요구했다.
야샤 장로는 하의갈마를 하기는 했는데, 대상은 동방교단 비구들이 아니라 신도들에 대해서였다. 야샤 장로는 신도들을 모욕한 것을 사과하면서도 여전히 '비구는 어떠한 구실로서도 금이나 은을 받을 수 없다.'는 관점을 고수했다. 야사의 말에 설득된 신도들이 바이샬리 비구들을 나쁜 비구로 취급하자, 바이샬리 비구들은 야샤가 위임장도 없이 설법한 것이 계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에게 성직정지(聖職停止, ukkhepamiyakamma)의 벌을 내렸다.[26] 서로가 서로에게 한 대씩 주고 받은 셈.
야사 장로는 까우샴비로 피신해 서방교단인 빠테야(Pāṭheyya, 서인도), 아반띠(Avanti), 데칸(Deccan) 지방 비구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옹호해 줄 것과 동방교단 비구들이 10사, 즉 열 가지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함으로써 정율(正律)이 위협당하고 있으니 이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문제는 동쪽과 서쪽 교단의 갈등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27]
3. 과정
바이샬리에서 열 가지 관행들을 보고 기겁해 교단에 알리고 문제를 제기한 비구 야사는 당시 나이가 백 살이 넘었고,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아난다의 제자로서 원래는 브라만이었다가 불문에 귀의한 사람이었다.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지는 열 가지 일들은 '정법'으로 통용될 수 없고 '비법'이라고 여겨 야사 비구는 곧장 서방 교단에 알려 고승들을 바이샬리로 모았다.[28] 바이샬리 비구들 이외에 최근에 불교를 받아들인 지역[29] 출신의 고승을 포함하여 전통적 계율을 지키는 다른 지역의 고승들도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때 모인 고승의 수가 7백 명이었다.[30] 삼보가는 대중 속에서 가사의 오른쪽 어깨를 벗고[31] 장체[32] 한 다음 소리를 높여 말했다.
바이샬리의 열 가지 관행은 정법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결코 야사 비구의 말대로 용납할 수 없고 불법을 저해하는 계율 위반인가,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동쪽 교단과 서쪽 교단은 각기 자파 출신의 장로를 네 명씩 추천해서 여덟 명을 대표로 선임했다. 이들은 바이샬리에서 8개월에 걸쳐 승려 7백 명들과 함께 경전 편찬 회의에 들어갔는데[35] 이들은 만장일치로 '야사가 제기한 바이샬리의 열 가지 일들은 계율(프라티목사)에 어긋나고, 정법이 아닌 비법 즉 잘못된 행위'라고 결정했으며[36] 이를 실행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37]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당시 법랍이 120년에 이르던 최고장로 사르바카마라는 비구는 아홉 가지는 비법인데 구사정 즉 '이전 사람이 하던 일을 따라 하면 그것이 율에 위반되더라도 꼭 죄라고는 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 한다.여러분, 떠드는 것을 삼갑시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봅시다. 옛날 적멸하신 이래 세월은 흘렀습니다만 그 말씀은 지금 오히려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이샬리 성의 태만한 비크슈는 계율을 어겨 범하고 십사의 비법[33]
을 행하며 십력(여래의 가르침)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이제 현자 여러분은 계를 지키는 것과 범하는 바에 대해 명찰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대덕 아난의 지수를 받은 분들입니다. 아무쪼록 불은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거듭 부처님의 성시를 펴 나가시기 바랍니다.[34]
4. 결과
십사 논쟁은 서쪽 교단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미 관행에 익숙해진 승려들은 서쪽 교단의 엄격주의를 두고 '시대를 역행하는 판단'이라고 하며 수용을 거부했다.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비구들이 따로 모여 대중부라는 파를 형성함으로써 승가는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는데, 이 사건을 이후의 여러 분열과 구분하기 위해 '근본분열'이라고 부른다.[38]
서쪽 교단은 본래의 전통 즉 '정통성'을 유지했다고 해서 '상좌부'[39] 라고 불렀고, 동쪽 교단은 '보편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중부'라고 하였다.
자현 비구는 근본분열을 설명하며 단순히 계율에 대한 관점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인도라는 광활한 땅에서 '불교'라는 하나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한 데에서 원인을 찾는다. 즉 불교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기후와 민족이 다양하게 분포된 인도를 하나의 원칙으로 유지하기는 불가능해졌으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엄격함을 고수할지 아니면 시대에 맞춰 유연함하게 대응할지 입장차가 생김은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것.[40]
또한 불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이지만, 포교도 전도도 결국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교단의 성직자가 수적인 면에서 재가 신자보다 아무래도 열세일 수밖에 없다. 근본분열을 야기한 야사의 십사 제기는 종교 공동체라는 하나의 사회를 지키고 그들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 이해시킴에 있어서 가르침(법)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상대(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잇다. '세파에 휩쓸리지 말고 교단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 엄격주의를 넘어선 근본주의에 빠졌다는 점도[41] '시대의 흐름을 읽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쪽도 결국 종교 자체의 세속화를 초래했다는[42] 단점 또한 명확했다.# 결국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다는 것.비구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고 또 1, 2차 결집이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불법은 포교 지역이나 포교 대상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재가신자들 위주로 펴 나가야 한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일이다. 승단은 설립 초기부터 승가, 즉 수도승(비구)과 그보다 숫자가 더 많은 재가신자(우바새)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구가 불법의 전파와 정신적 완성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라면 우바새는 가정과 사회를 불교와 연결시키는 사람들로 비구 못지 않은 역할을 한다. 구족계라는 227계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비구와 달리, 재가신자들은 비구 앞에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재가오계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면 그것으로 불자가 되었다. 살생하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은 갖지 말고, 삿된 음행을 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술(혹은 마약)을 마시지 말고, 만약 재가오계를 잘 지키고 삼보에 귀의한다면 그 불자는 팔정도를 따르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 신자들이 특정의식이나 의례를 일상적으로 치르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의 특기사항이다. 그러나 불심이 돈독하고 불교의 전통을 잘 따르는 불자들은 특정 행사일, 유골의 경배식, 불교 성지 순례 때에는 축하행사를 연다.
장식적 효과가 빼어난 돌기둥의 부조는 장식 기능뿐만 아니라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이 부조의 구성, 붓다의 발자국에서 시작하여 삼보와 왕의 일산으로 장식된 법륜으로 마감하는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붓다의 본질과 그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세기부터 나오기 시작한 붓다의 인간적인 이미지보다는 훨씬 먼저 유행한 이런 상징적 표현방식은 대승불교가 처음부터 급속히 교세를 얻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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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8~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