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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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전 197년까지 로마와 그리스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와 맞서 싸운 두 번째 전쟁. 이 전쟁의 승리로 마케도니아 왕국은 쇠퇴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충돌하게 된다.
2. 배경
라피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격퇴한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급사하고 6살 된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파라오에 즉위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제5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켜 이집트 영토를 침공한다. 한편, 필리포스 5세는 이집트령 사모스를 포위하고 밀레투스를 점령하면서 소아시아 원정을 시작했고 페르가몬의 성전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필리포스를 두려워 한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1세는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이에 로마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비이누스를 파견해 그리스의 정세를 조사토록 한다.
3. 서막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에서는 엘레우시아 비의 행사가 개최되고 있었다. 행사 도중 데메테르 신전에 무단으로 침입한 2명의 젊은이가 신성 모독죄로 사형을 선고 받아 죽었는데 이들은 아카르나니아인이었고 쉼마키아[1] 의 맹주인 필리포스 5세에게 개전 승인을 받은 아카르나니아가 아티카[2] 를 침공한다.
그러자 아테네는 페르가몬, 로도스와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에 선전 포고하였으며, 이후 기원전 200년 가을에 로마군이 상륙할 때까지 필리포스는 3차례에 걸쳐 아티카를 침공하고 페르가몬의 아탈루스는 키클라데스 제도를 점령한다.
4. 아티카 공방전
기원전 200년 가을 무렵, 필로클레스는 보병 2천과 기병 200기를 이끌고 코린토스를 출발하여 그리스 해안을 위협하던 칼키스[3] 해적들과 함께 아티카를 공격한다. 아티카를 방어하기 위해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가 이끄는 20척의 3단층 갤리선이 로도스가 보낸 3척의 4단층 갤리선과 3척의 아테네 함대와 합류하였고 아탈루스가 보낸 페르가몬 지원군과 용병들이 도착하자 마케도니아에 맞설 세력을 구축하게 된 연합군은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진군했다. 연합 함대는 칼키스를 기습하여 대량의 물자를 차지하였고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데메트리아스에 주둔한 필리포스는 5천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대를 에우보이아로 급파한다.
보이오티아[4] 로 넘어간 마케도니아군은 아티카로 진격하여 아테네를 기습하고자 하였으나 아테네측 척후병에게 발각되었고 로마와 페르가몬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기습을 포기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엘레우시스를 기습했으나 엘레우시스의 방어가 만만치 않는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합 함대가 엘레우시스를 구원하기 위해 피라이우스[5] 를 출발한 탓에 아티카의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시도가 좌절로 돌아간 마케도니아군은 주변 지역을 약탈하면서 물러난다.
이렇게 필리포스 5세가 아카이아에서 뻘짓을 거듭하는 동안 마케도니아군과 트라키아인으로 구성된 2천의 병력을 이끄는 필로클레스 또한 엘레우시스의 연합군을 유인해 공격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필로클레스와 합류한 필리포스는 다시 한 번 엘레우시스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클라우디우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엘레우시스에 상륙하게 된다. 공격을 중단한 필리포스는 필로클레스에게 절반의 병력을 주어 아테네로 보내고 자신은 피라이우스를 공격하러갔지만 엘레우시스를 지키던 로마 함대가 이번에는 피라이우스에 상륙하면서 공격을 포기한 필리포스는 아테네로 가다가 회랑 성벽[6] 의 폐허에서 연합군의 기습을 받는다.
계속된 실패에 빡친 필리포스는 약탈과 파괴 활동을 벌였고 겨울에 접어들고서야 보이오티아로 물러난다.
5. 로마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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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본토의 약 80%에 해당하는 영토와 4개의 동맹국을 지배하에 둔 공수동맹체제(쉼마키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저항하는 아이톨리아와 아타마니아의 그리스 연합군을 돕기 위해 아폴로니아에 상륙한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왕국을 사방에서 공격하는 전략을 펼치게 된다. 우선 술피키우스 갈바가 이끄는 로마군(S)이 서쪽, 일리리아에서는 플레우라투스가 이끄는 아르디아에이족(P)과 바토의 다르다니아족(D)이 북쪽, 로마와 페르가몬의 연합 함대(F)가 동쪽, 아이톨리아(A)와 아타마니아(A) 연합군이 남쪽의 마케도니아 영토를 대대적으로 침략한다.
이러다보니 필리포스는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켰고 갈바가 이끄는 로마군은 닷사레티스와 펠라고니아를 휩쓸고 륀코스와 에오르다이를 잇는 통로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격퇴하였다. 수도 펠라를 3일 거리에 둔 갈바의 로마군은 동쪽으로 가지 않고 남하하여 에오르다이와 오레스티스를 공격한 뒤, 아폴로니아로 철수했는데 이것은 로마군이 보급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영토는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척박한 지역이었고 로마군이 기지로 삼으려 했던 륀코스는 일리리아와 25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다 초가을에 접어들면서 현지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된 술피키우스가 더 이상 동쪽으로 진군하지 못한 것이다.[7]
결국 로마의 이러한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로마와 페르가몬의 함대(F)는 칼키디케의 주요 항구인 카산드레아를 함락시키는데 실패하였고 전리품을 챙기고 돌아가다가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을 받은 바토군(D)이 패배하였으며, 테살리아를 공격하던 다모크리투스의 아이톨리아 연맹군(A) 또한 술피키우스가 아폴로니아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필리포스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산드레아 공략에 실패한 로마와 페르가몬의 연합 함대는 건재하였고 이들의 연합 함대에게 에우보이아의 항구 도시인 오레오스를 함락당한 필리포스는 그리스의 동맹국과 공조할 방법을 잃는다.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 남쪽의 그리스 도시들은 아이톨리아 연방이 테르모필레를 장악하고 있어서 에우보이아의 항구를 거쳐야만 로크리스나 보이오티아로 건너갈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오레오스 항구가 연합군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6. 아오이 스테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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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98년, 필리포스 5세는 에페이로스로 진입한 연합군의 주력 야전군인 로마군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필리포스는 아테나고라스에게 선발부대를 맡겨 카오니아와 안티고니아를 잇는 통로를 확보하고 진을 치기 적합하다고 판단된 아오이 스테나에 주둔하였는데 이를 본 로마군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계곡으로 통하는 정면은 좁고 마케도니아군의 측면이 험준한 산으로 보호받기 때문에 그들의 수적 우위를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정관 티투스 퀸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로마군은 8km 거리에서 진군을 멈췄고 방어에 유리한 험지에 있던 필리포스 또한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이렇게 플라미니누스의 로마군과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군은 50일 동안 대치하게 되는데 아오이 스테나는 일리리아에서 에페이로스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인데다 로마군이 닷사레티스에서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가는 루트를 압박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전선이 고착된 탓이다. 게다가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의 악명높은 팔랑크스를 정면으로 공격할 정도로 무모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결국 에페이로스 연방의 중재로 회담에 나섰으나 '''테살리아를 포기하라'''는 플라미니누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던 필리포스가 격노한 탓에 회담은 결렬되었다.[8]
마침내 로마군이 아오스 스테나의 마케도니아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철벽과도 같았던 마케도니아군의 팔랑크스는 에페이로스 연방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데 에페이로스의 카로프스라는 자가 로마군에게 아오이 스테나의 지형을 알려주면서 협곡을 지키고 있던 마케도니아군이 갑자기 배후에서 나타난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2천의 손실을 입은 필리포스는 이틀에 걸쳐 에페이로스의 경계까지 도주하였고 며칠간 숙영하며 마케도니아로 돌아갈지 테살리아로 이동할지 고민하다가 로마군이 테살리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는 첩보를 받고 테살리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7. 테살리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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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 스테나 전투에서 필리포스 5세가 패배하자 아이톨리아와 아타마니아는 기다렸다는 듯 테살리아를 침공했고 아타마니아군은 로마군의 지원을 받으며 테살리아 서쪽의 곰피라는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에 테살리아에 진입한 필리포스는 에니페우스 강을 기준으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지역에 소개령을 내렸고 주민들이 피난한 뒤, 도시는 불태워졌다.
때문에 로마군이 핀도스 산맥을 너기도 전에 아이톨리아군, 아타마니아군, 마케도니아군에 의해 테살리아가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페라이 시민들은 필리포스의 소개령에 저항하였고 팔로리아, 아이기니온, 아트라코스 지역에 수비군을 배치한 필리포스는 주력군과 함께 템페에 주둔하면서 전황을 관망한다. 이때까지 에페이로스에서 자원병을 모집하고[9] 암브라키아만을 보급항으로 제공받은 플라미니누스의 로마군은 팔로리아를 함락시킨 뒤 메트로폴리스와 키에리온의 항복을 받으며 아트라코스에 당도한다. 아트라코스는 로마군에 저항하였고 공성병기에 무너진 성벽으로 진입한 로마군이 팔랑크스에 가로막혀 공성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플라미니누스는 아트라코스 공략을 포기하고 대신 코린트스에 면한 항구 도시인 안티키라를 점령하기 위해 포키스로 향한다.
이때 중부 그리스에서는 반 마케도니아 연합군이 집결하고 있었다. 수니온 곶을 돌아 사로니코스 만으로 들어온 함대가 연합군과 합류하였고 쉼마키아에 속한 보이오티아와 아카이아 연맹은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플라미니누스는 아카이아 연맹에 사절을 보내 연합에 합류하면 코린토스를 되찾아줄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솔깃한 아카이아 연맹은 연합군에 가담하여 코린토스를 공격한다. 하지만 상황이 당장 아카이아 연맹이 원하는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코린토스를 지키는 필로클레스의 마케도니아군은 굳건했고 숙적 스파르타가 남아있는 이상 아카이아 연맹이 전력을 동원하여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8. 로크리스 회담
8.1. 회담 첫째 날
아카이아 연맹이 배신하자 필리포스는 로마에 강화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했고 플라미니누스는 니카이아 인근 해안가에서 연합의 대표들도 참석하는 조건으로 회담을 열었다. 로마측 대표는 집정관 티투스 퀸티우스 플라미니누스였고 마케도니아측 대표는 당연히 필리포스 5세였다. 페르가몬 왕 아탈루스와 로도스의 대표로는 함대 제독들이 파견되었고 아타마니아 왕과 아카이아 연맹의 아리스타이누스와 크세노폰, 아이톨리아 연방의 파이네아스가 대표로 참석한다.
회담의 첫째날은 연합이 요구 조건을 제시하는 날이었는데 회담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곳의 사람들을 믿을 수 없고 아이톨리아인들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데메트리아스에서부터 배를 타고 내려온 필리포스가 내리기를 거부한 탓에 연합 대표가 해변에 서서 요구 조건을 말하고 필리포스가 배 위에서 이를 듣는 괴이한 형식이 되었다.
반 마케도니아 연합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로마 : 그리스 지역의 모든 마케도니아 세력은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철수하고 포로들을 각자의 나라로 송환할 것. 포이니케 조약(BC.205)[10]
이래 점거한 일리리아 지역을 로마에 넘기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사망 이후 이집트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할 것.
페르가몬 : 키오스 해전(BC.201)에서 나포한 전선과 포로를 반환할 것. 필리포스 5세는 마케도니아군이 파괴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아테네 니케포로스 신전을 복구할 것.
로도스 : 페라이아를 비우고 이아소스, 바르귈리아, 에우로모스에서 철수할 것. 세스토스, 아뷔도스를 비롯한 아시아의 모든 항구에서 물러날 것. 페린토스를 반환할 것.
아카이아 연방 : 코린토스와 코린토스 공성전 당시 마케도니아군이 점령한 아르고스를 반환할 것.
이 요구 조건에 필리포스는 각 대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이톨리아 연맹 : 그리스 지역의 모든 마케도니아 세력은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철수할 것. 과거 아이톨리아 연방에 속한 모든 도시를 반환할 것.
로마인이라면 모를까, 아이톨리아인들이 그런 말(마케도니아 세력은 그리스에서 철수하라)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대관절 그리스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이톨리아의 아그라이, 아포도티, 암필로키는 그리스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차지해도 된다는 것인가?
내 능력으로는 (신전을)수리할 수 없다. 하지만 나무와 정원사는 보내주겠다.
아이톨리아인들을 비아냥거리는 필리포스의 블랙 유머에 웃음을 지은 플라미니누스는 페르가몬의 요구를 수락하면서도 모욕하는 필리포스의 기묘한 센스에 다시 한 번 웃움을 터뜨린다. 필리포스는 아카이아 연맹의 요구에 대답하기에 앞서 자신과 선왕 안티고노스 도손이 그동안 아카이아에 베풀었던 후의와 아카이아에서 자신들에게 바친 명예를 나열하고 아카이아의 배신으로 마무리 지으면서도 아르고스는 돌려주되 코린토스에 대해서는 플라미니누스와의 회담을 희망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플라미니누스에게 아오이 스테나 전투에 앞선 회담의 "마케도니아는 테살리아를 포기하라"는 의미가 자신이 차지한 영역인지,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역까지 포함되는지 물었는데 플라미니누스는 침묵을 지키다가 같이 의논할 사람도 없으니 각국의 대표들이 제시한 요구 사항을 글로 적어주면 곰곰히 생각해 보고 싶다는 필리포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필리포스가 선대왕 이래의 중신들을 자주 처형한 일을 비꼬는 것이었고 조소한 필리포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간다."그야 당연히 의논할 사람이 없으실테죠. 폐하의 친구들은 폐하께서 다 죽여버려셨으니까요."
8.2. 회담 둘째 날
필리포스는 황혼이 깔리고 대표들이 거의 포기한 시점에 배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고민할 것이 많다보니 늦었다고 해명했지만 아리스타이누스와 파이네아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고 시간을 끌었다는 의혹을 품은 연합 대표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자 필리포스는 플라미니누스에게 단 둘이 논의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필리포스와 회담을 가진 플라미니누스는 멀리서 구경하던 연합 대표들에게 필리포스가 내놓은 협상안을 전달한다.
1.아이톨리아 연맹에 파르살루스와 라리사[11] 를 할양하되, 테바이 프티오티데스는 줄 수 없다.
2.로도스에 페라이아를 반환하되, 이아소스와 바르귈리아는 줄 수 없다.
3.아카이아 연맹에게 코린토스와 아르고스를 반환한다.
4.로마에 일리리아 지역을 넘기고 모든 포로를 송환한다.
5.페르가몬에 나포한 선박과 포로를 송환한다.
이 조건을 들은 연합은 "마케도니아는 모든 그리스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시했고 필리포스는 날이 늦었다는 핑계와 함께 돌아간다.
8.3. 회담 셋째 날
이날의 회담은 니카이아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트로니온 해변에서 열렸다. 필리포스는 제때 회담 장소에 도착했고 새로운 제안을 제시하며, 결론을 내지 못하면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그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연합 대표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였지만 이 제안에 플라미니우스가 동의하면서 그들은 원로원에 사절을 보낸다.
8.4. 협상 결렬
연합 대표단과 플라미니누스의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198년 12월에서 기원전 197년 1월 사이였고 집정관 플라미니누스의 임기는 연장되었다. 연합 대표단은 칼키스, 코린토스, 데메트리아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있는 한 그리스의 자유는 불가능하며, 이를 두고 다른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은 당장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한 술수라고 지적한다. 마케도니아 사절은 그 세 도시에서 물러날 것이냐는 발언에 지시 받은 바가 없다고 대답했고 이것으로 협상의 희망이 무너진 마케도니아는 협상을 받아들이느냐 전쟁이냐는 두 가지 선택지에 놓인다.
9. 보이오티아 공방전
필리포스는 아직 마케도니아에 남아있는 에우보이아와 보이오티아를 통해 아르고스를 점령하고 아르고스를 미끼로 스파르타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나비스 4세는 아르고스를 얻자마자 필리포스를 배신하였고 아카아이 연맹과 휴전하여 연합군에 참전하기로 한다. 플라미니누스는 나비스가 지원한 600명의 크레타 병사들을 코린토스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필로클레스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한다. 필로클레스는 거부라기보다 결심을 뒤로 미루는 듯한 답변을 보냈고 플라미니누스는 형인 루키우스 퀸티우스 플라미니누스를 아카르나니아로 보낸 뒤, 자신은 직접 보이오티아 연방으로 향했다. 엘라테이아에서 아탈루스의 페르가몬 군대와 합류한 로마군은 포키스를 지나 보이오티아로 진입했고 보이오티아를 공격하기 보다는 동맹을 제안하기로 한다. 고령인 아탈루스 왕이 연설 중 쓰러지는 사고가 있었으나 보이오티아는 플라미니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합에 가담한다. 이후 테베에서 플라미니누스의 간호를 받고 페르가몬으로 귀국한 아탈루스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였고 에우메네스 2세가 페르가몬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10.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이렇게 보이오티아까지 이탈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쉼마키아가 붕괴되자 필리포스는 결전을 결의한다.[12] 기원전 197년,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2만 5천 500명의 마케도니아군과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3만 3천 400명의 로마군은 마침내 키노스케팔라이에서 조우한다. 가장 먼저 정찰 부대가 교전을 벌이자 양군은 서로 증원군을 파견하였고 플라미니누스가 병력을 배치하는 사이 필리포스가 보낸 기병대가 도착하자 연합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힐 무렵, 병력의 배치를 끝낸 플라미니누스는 병력을 나누어 코끼리와 우익 병력은 대기시키고 자신은 좌익 전열을 이끌고 마케도니아군을 공격하였다.
필리포스는 니카노르에게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따라오라는 명령을 남긴 뒤, 투창병과 팔랑크스 병력을 이끌고 언덕을 올라갔다. 하지만 필리포스가 언덕에서 부대를 배치하는 동안 필리포스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던 니카노르의 마케도니아군은 뜻하지 않게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공격을 받았고 이 공격을 견딜 수 없던 니카노르군이 패주하고 만다. 결국 필리포스가 지휘하는 마케도니아군은 후방에서 나타난 로마군의 협공을 받아 대열이 무너졌고 마침내 필리포스는 패주한다.
11. 그리스의 자유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승리한 플라미니누스는 연합 대표들과 함께 템페에서 회담을 가진다. 필리포스는 대표단의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필리포스를 제거할 것을 주장한 아이톨리아 사절단의 요구는 플라미니누스에게 거부당한다. 필리포스는 둘째 왕자 데메트리우스를 로마에 볼모로 보내고 이후 기원전 171년에 병사한다. 필리포스 사후 마케도니아의 왕위는 그의 첫째 아들인 페르세우스#s-2가 이어받았고 결국 피드나 전투를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는 멸망한다.
[1] 필리포스 5세가 자신을 중심으로 구축한 그리스의 공수동맹체제[2] 아테네가 위치한 지방[3] 아테네 동쪽에 위치한 섬[4] 마케도니아와 아테네의 접경 지방[5] 아테네의 서쪽에 위치한 외항[6] 아테네와 피라이우스를 잇는 성벽. 펠레폰네소스 이후 기원전 4세기 초에 복구되었으나 파손되었다.[7] 이 때문에 보급 문제를 겪은 술피키우스는 일리리아로 돌아가면서 펠리온을 점령하고 이 곳을 중간 기지로 삼는다.[8] 필리포스는 자신의 대에 점령한 지역이라면 반환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테살리아는 선왕 대부터 물려받은 영토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9] 쉼마키에 속한 에페이로스는 아오이 스테나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길안내를 해준 카로프스를 제외하고 여전히 로마에 적대적이었기에 공식적으로 로마에 가담하진 않았다.[10]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필리포스가 일리리아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한니발을 지원하지 못한 필리포스가 단독으로 로마와 체결한 강화 조약[11] 크레마스테. 테실리아 중부의 대도시 라리사와는 다른 곳이다.[12] 아카르나니아는 마케도니아의 동맹국으로 남았지만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영향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