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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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2007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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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2. 역사
3. 고대 도시국가 시절
3.1. 사회
3.2. 정치
3.3. 성인들의 생활
3.4. 공동 식사
3.5. 여성들
3.6. 노예 계급 : 헤일로타이
3.6.1. 인간사냥
3.6.2. 차별대우
3.6.3. 저항
3.7. 스파르타식 교육 : 아고게(Agoge)
3.8. 배타적 순혈주의
3.9. 종교
3.10. 기타
4. 전체주의 떡밥
5. 이야깃거리


1. 설명


라케다이몬인들의 도시가 폐허가 되고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에게 과연 명성만큼의 실력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라케다이몬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펠로폰네소스인들 전부와 수많은 외부 동맹군을 이끈다. 그들은 한 도시에 모여 살지도 않고, 값비싼 신전이나 물건도 없고, 그리스의 옛 관습에 따라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살기에 외견상 초라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아테네에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외관만 보고 이 도시가 실제보다 두 배나 더 강했다고 추측할 것이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10장, 2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있는 도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도시국가로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스파르타가 아니라 스파르테(Σπάρτη)이나 이는 아티카식이며, 도리아식으론 스파르타(Σπάρτα)이므로 딱히 틀린 명칭은 아니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스파르티'라고 읽는데 Η/η 모음 읽는 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건국왕 라케다이몬의 아내인 스파르타의 이름을 딴 것이며, 당시 폴리스의 공식 명칭은 라케다이몬(Λακεδαίμον = 라케대몬), 혹은 라케다이모니아(Λακεδαιμονία=라케대모니아)였다.[1] 때문에 스파르타 전사들의 방패에는 '라케다이몬'의 첫 글자인 대문자 '람다(Λ)'가 그려져 있었고 라케다이몬과 스파르타라는 이름은 서로 통용되었다.
고대 스파르타 특유의 군인 양성방법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하여, 현대에도 혹독하고 자비심 없는 비인간적인 단련 과정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하곤 한다. '스파르타식'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 그러나 스파르타식 교육 말고도, 시민의 정치참여와 안정성을 적절하게 타협시킨 혼합정 시스템으로도 유명하다.

2. 역사




2.1. 성립


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직후, 고대 그리스암흑시대에 스파르타 지역에는 정착촌 4곳이 있었다. 그중 2곳이 동맹을 맺어 다른 2곳을 멸망시킨 것이 스파르타의 기원[2]으로, 스파르타 특유의 이중왕(Dual King) 제도도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여긴다.
스파르타는 미케네 문명이 파멸할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도시이다. 아테네와도 비슷한데, 스파르타는 특히 미케네 문명 시대의 전통이 잘 보존되었다. 스파르타 특유의 집단 전사 문화나 자유로운 여성 문화는, 미케네 문명 시대의 그리스 전사 문화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던 스파르타는 이웃 폴리스 메세니아와 라코니아를 정복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이렇게 세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양극화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제2계층과 제3계층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이 혼란을 극복하고자 독특한 사회체계로 알려진 리쿠르고스 체계가 성립됐다고 전한다.
이때 스파르타는 독특한 삼권분립 제도를 만들고 사치를 금지하며, 공동식사 제도를 확립하고 교육제도를 정비했다. 흔히 알려진 스파르타식 교육제도도 이 시기에 정립된 듯하다. 당대 기준으로 봐도 뜨악한 교육제도를 갖추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를 바탕으로 군사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사 육성 특화식 교육과는 다르게 페르시아 전쟁 이전까지는 대규모 확장에는 주저했는데, 후에 스파르타가 확장정책을 펴다가 쇠락의 길을 걸었음을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3]
어쨌든 그리스 육군 최강국으로 인정받았고, 그 결과 페르시아 전쟁 시 결성한 델로스 동맹에서 수장이 되었다. 사실, 병력 동원 비율이나 그 구성원들의 외교관계를 생각하면, 이때 그리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주력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스 편에 든 나머지 도시국가들도 대부분이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속국들이었다.
페르시아가 반드시 멸망시키려고 했던 도시가 스파르타와 아테네란 점에서는 당연히 생존을 위해 모든 걸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테베는 페르시아와 함께 연합전선을 꾸리기도 했다.

2.2. 페르시아 전쟁


스파르타가 후세까지 이름이 남은 이유는 페르시아 전쟁 중에서 벌어진 테르모필레 전투가 이후 그리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국가에서 군인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정작 전투 자체는 그냥 사흘을, 유명한 스파르타 300명+1000명의 군대로는 몇 시간 밖에 버티지 못한 국지전에 불과했다. 거기에 레오니다스가 끌고 간 300명은 대를 이을 자녀가 있는 전사들이었는데, 스파르타의 특성상 그 정도로 오래 살아남은 전사들은 대부분 지휘관급 장교들이다. 이 때문인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이후 별 활약을 못해, 테르모필레에서 살아돌아온 스파르타 군인 아리스토데모스가 온갖 왕따를 당하면서도 1년 넘게 큰 전투가 없어서 싸우지도 못했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바로 플라타이아 전투로,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주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주력이 된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을 크게 물리치며 페르시아를 내쫓는 데 성공했다. 스파르타의 페르시아 전쟁은 여기서 마무리가 된다. 이후 아테네는 이오니아해와 에게해 등에서 세력확장을 위해 페르시아와 추가적인 전쟁을 벌였지만, 스파르타는 소극적으로 나서며 손을 뗐다. 그래도 왕이 무리수로 죽었다는 사실과, 막판 숟가락 얹기에 성공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공적을 나란히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이곳에서 한 번 더 전투가 있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군이랑 아테네에 위치한 전쟁박물관에 가면 그 당시의 선전물들을 볼 수 있다.

2.3. 펠로폰네소스 전쟁


페르시아를 격퇴한 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스파르타는 우호적인 폴리스들을 모아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었고, 아테네도 마찬가지로 우호적인 폴리스를 모아 델로스 동맹을 만들었다. 점차 격화된 충돌은 마침내 격렬한 전쟁으로 발전했다.
전 그리스 세계를 휩쓸고 간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것은 스파르타였다.[4]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모된 전쟁비용과 물자를 동맹관계에 있던 폴리스들에게 전액부담시키자, 타 폴리스와 동맹관계가 금이 갔다. 스파르타가 강력한 군사력에 비해 장기전에 필요한 전비와 물자 생산 능력이 부족했고 식민지 메세니아에서 조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타 폴리스를 스파르타 아래로 보는 스파르타 특유의 선민의식과 패권주의 사상도 주된 원인이었다.

2.4. 빛 좋은 개살구


그러다보니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테베코린트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걱정해 완전히 멸망시키진 않았다. 대신, 친스파르타 정치인들로 이루어진 과두정을 패배한 아테네와 그 동맹국에게 강요했다.
아테네 밑에서 민주주의를 맛보다 느닷없이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의 독재를 겪어야 했던 시민들은 이에 심하게 반발했다.[5] 게다가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은 민주주의자를 죽이는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에 반감은 더욱 심해졌다.[6] 그래서 아테네는 항복한 뒤, 단 1년 만에 스파르타에게 반기를 들어 스파르타가 세운 30인의 독재정부를 엎어버리고 민주주의로 되돌아갔다. 아테네를 따라 곳곳에서 과두정이 붕괴됐으나,스파르타는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패권국 스파르타가 가진 문제는 이렇게 각처에서 반기를 드는 폴리스들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파르타군은 분명 당시 그리스 최강이었으나 1만 남짓의 '''소수''' 정예였기 때문에[7]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수가 너무 적었고 게다가 이러한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외부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내부의 헤일로타이라는 노예 계급 때문에 불가능했다.[8] 이는 아테네라는 명백한 적수만 상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마치 현대 미군이 소수의 보병으로 이라크 전쟁을 이긴 뒤 전후 처리에 골머리를 썩혔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전체를 움직였지만, 이들 또한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기는 마찬가지인 데다[9] 스파르타군처럼 마음대로 장기 주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이기기 위해 페르시아와 연합해 해군을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받았는데, 그리스 연합의 명분 자체가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망각한 짓이었다. 이것 때문에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그리스 연합의 존재 이유가 불분명해졌으므로 그리스계 폴리스들은 스파르타가 단지 그들의 야욕 때문에 그리스 연합을 유지하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과거의 펠레폰네소스 동맹, 델로스 동맹처럼 자발적인 연합이 불가능했다. 아테네가 패배한 뒤, 스파르타 휘하의 그리스 연합은 매우 불안정했다.
델로스 동맹을 이끈 아테네는 그들 자체가 동맹국 중 가장 인구가 많고[10] 부유했으므로 여러 가지 해외 원정도 하고 수백척의 전함을 끌고 다니면서 문제를 처리하는 등 맹주 노릇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지만[11] 스파르타는 오직 중보병 군사력에만 의존하던 가난한 국가였기에[12] 이런 프로젝트를 가동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전함을 보유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했는데 노잡이만 해도 수만 명이고 함선을 건조하고 유지하는 비용도 무지하게 비싼,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줘야할 정도로 당시 해군은 무엇보다도 비싼 존재인데, 사치를 배척하며 독선적인 데다가 인구를 늘릴 생각도 안하고 강한 전사만 키우려고 아기를 절벽으로 떨어뜨리거나 내다버리는 스파르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다른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용맹한 최고의 군사국가라고 자칭하면서 동맹국들에게 야비한 술수를 부려 신뢰를 잃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동맹군들을 모두 우익에 내놓고 자신들은 좌익에 배치하여, 동맹군들을 방패로 삼아 자신들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다 가져가려는 수작이었다.[13]
더불어 용감하다는 프로파간다[14]가 우습게도 정작 중요한 전투에는 불리하다 싶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발뺌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라톤 전투테르모필레 전투였다. 둘 다 그리스 동맹국들은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대를 막기 위해 육군 최강국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작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마라톤 때에는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고 테르모필레 전투 때는 주전파 국왕이 간신히 300명만 끌고 왔다. 그들이 자랑하던 라코닉(laconic) 화법도 제일 잘 써먹을 때가 군사적 책임을 회피할 때였다. 그렇다고 스파르타가 정말 종교적이였냐면, 그리스에서 올림피아 제전때[15]는 그리스 모든 폴리스가 휴전함이 규칙이었는데, 이를 어긴 유일한 국가가 스파르타다.[16] 이런 행보 때문에 비아테네 동맹들까지도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었다.
비록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맹주 노릇을 하며 일군 문화와 사상, 사치에 버금갈 재산 등이 축적되어 퍼지자, 경제적인 사치를 오랫동안 접하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오히려 아테네의 문화에 점점 빠져들어 초심을 잃었다. 특히 아테네가 민주정을 계속 나아갔던 반면, 스파르타는 과두정이라는 정치체계와 동맹국들 간 신임을 깨뜨리고 아테네보다 더한 행패를 부렸다. 결국 동맹국들도 반발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오랫동안 문제시되었던 메세니아와 같은 지배한 국가 시민들에 대한 불평등이라는 내부적인 문제로 멸망을 자초했다.

2.5. 몰락


결국 스파르타가 패권국이 된 뒤 1년 만에 보이오티아의 맹주이자 오랫동안 스파르타의 동맹이었던 테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2인자였던 코린트가 손을 잡고 민주정 복구 이후, 제국까지 되돌리고자 했던 아테네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스파르타에 대항해 코린토스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스파르타가 패권국이 되면서 기존의 동맹국들까지 차별하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는 이때에도 어쨌든 지상전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돌아온 아테네에게 해상전에서 다시 완패를 맛보고 패권국으로 거느리던 여타 폴리스들이 아테네에게 붙어 2차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막지 못해 페르시아에게 중재를 간청했다. 이후에도 스파르타에 반기를 든 세력은 곳곳에서 나타났고 이에 각지에서 정신없이 싸우다가 끝내 스파르타는 테베군에게 완패당했다.
그 절정은, 여기서 써먹은 사선대형과 '''전 부대원이 게이로 이뤄진 것으로 유명한''' 신성부대(Sacred band)[17]가 나선 것으로 유명한 에파미논다스의 레욱트라 전투. 테베군이 우익 대신에 좌익 병력을 두텁게 한 방진에 스파르타군 우익은 말 그대로 궤멸적 피해를 입고 말았다. 직후 반 테베 세력과 힘을 합쳐 반격을 시도했으나 에파미논다스의 군단에 야습을 허용해버려 1만의 보충병과 잔여병력마저 싸그리 날아갔다.[18]
이때 테베에게 당한 패배는 사실상 '''스파르타의 멸망'''이라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안 그래도 수가 줄어들고 있던 '완전시민 계급'의 중보병이 레욱트라 전투 한방에 거의 깡그리 바닥나버렸다. 이 피해는 스파르타가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기존의 중보병 개개인의 전투력보단 전술의 중요도가 커지면서 스파르타처럼 굳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병사 하나하나를 인간병기로 만들 필요성이 없어져 갔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고집스럽게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안 받아들이다가 결국 레욱트라 전투에서 그 대가를 치렀다.
당시 테베인들은 스파르타 식의 훈련과는 거리가 먼 시민들이었기에 개개인의 전투력 수준은 스파르타인들에 비해 떨어졌다. 하지만 단지 좌익에 물량을 집중한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로 테베군이 스파르타군의 우익을 붕괴시키고 배후로 돌아 협공함으로써[19] 스파르타군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테베도 신성부대만큼은 스파르타에 필적할 정도로 훈련을 받았지만, 그 숫자는 최대 300명에 불과했다.[20]
더구나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왕인 클레옴브로투스(Cleombrotus)가 죽든 말든 지들끼리 도망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하는 둥 이미 몰락하고 있었다. 본래 스파르타의 법률이면 이들을 다 처형해야 했으나, 극심한 인구 감소에 시달리던 당시 스파르타는 도망자 처형 법률을 시행하지 않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이미 막장이었다.[21]
게다가 고대 시대 이래로, 스파르타의 성인 남성 인구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폐쇄적이고 가혹한 사회구조를 유지하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주민은 없고, 받아주지도 않았고[22], 영아 살해와 유기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끝없는 전투로 계속 인적 자원이 소모되며, 워낙 비싼 아고게 비용을 감당 못해서 두눈 시퍼렇게 뜨고 시민권이 박탈되어버리는 일도 빈번하니 사람이 남아날 수가 없었다.
실제로 테베에게 패배할 무렵, 스파르타 중보병의 핵심인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숫자는 페르시아 전쟁시의 1/10 정도인 1천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전설적인 스파르타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나머지는 이런저런 편법으로 끼워넣은 다른 계층의 구성원들이었다. 주로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에서 몰락한 반자유민(페리오이코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면에서도 스파르타는 몰락했다. 흔히 '노예 계층'으로 묘사되는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계급은 엄밀히 말하자면 '피정복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시기부터 스파르타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이웃 폴리스 '메세니아'를 점령하고, 메세니아 주민 전체를 '국가의 노예'로 삼음으로써 농업 경제력과 자기들 내부적으론 상대적으로 평등한 생활상을 확보한 것이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제국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스파르타와 같이 경제력의 거의 모든 부분을 식민지 하나에 의존했던 경우는 유일무이하다. 특히 남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아예 유례를 찾기도 어렵다.[23]
심지어 자국의 화폐가 다른 폴리스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할 정도로 부실했던 것이 스파르타 경제의 현실이었다. 이건 스파르타의 화폐는 '''철막대기'''였기 때문이다. 이 역시 리쿠르고스의 개혁 때 정해졌다고 하는데, 사치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른 폴리스 상인들이 철막대기를 받고 사치품을 스파르타에 팔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폴리스에서는 금이나 은 같은 걸 화폐로 사용했으니 스파르타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실존인물인지도 불분명할 정도로 오래 전 사람인 리쿠르고스 때 정한 통화 정책을 한 국가 연맹의 맹주가 된 시점까지도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통화 정책의 부작용은 시대가 지날수록 불어났다. 이후 스파르타가 패권을 상실하여 군사적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나마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가 되었는데, 면밀히 따져보면 스파르타식 통화정책이 야기한 결과이다.[24]
테베가 스파르타를 꺾은 이후, 테베는 스파르타로부터 메세니아를 독립시켜서 떼어내버렸다. 메세니아인들은 수백 년 만에 독립을 되찾았고, 한맺힌 메세니아는 독립하자마자 다른 폴리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스파르타에 모든 지원을 중지했다. 이로써 스파르타는 농업 경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남은 토지는 대귀족에게 집중돼 사회 내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져 전통적인 스파르타 중보병을 양성하기도 어려워졌다. 더구나 스파르타 본토 내의 농업 수확량도 매우 적었는데, 수백 년간 스파르타의 식량을 메세니아의 농업에 의존하다보니 본인들 스스로 신농법 개발이나 종자개량에 무지했다. 그나마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거나 전수받은 메세니아인이나 노예를 반란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죽여버린 탓에 새로운 농사법이 전수되지 못했다.
더욱이 지나친 공동체주의와 양극화도 문제였다. 스파르타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집단주의를 택했지만, 경제 부분에서는 개인에게만 부담을 지는 원칙을 고수했다. 성인 남성들은 15명씩 조를 짜서 함께 공동식당(Syssitia)에서 식사를 했지만, 그 비용은 각자 개인이 부담하는 독특한 체제였다. 자녀를 학교(Agoge)에 보내는 비용도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공동 식비나 교육비를 내지 못하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으로서 최악의 수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시민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기에 개인은 무조건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했고 거부권도 없었다.
물론 스파르타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양극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경제 시스템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25]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부(富)가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고작 100여 개 정도로 줄어들었다.[26] 결국 빈곤의 늪에 빠진 절대 다수의 스파르타인들은 본국에서의 삶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테네 등 주변 국가들로 도망쳐버리는 길을 택했다.[27] 그 결과,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성인 스파르탄(Spartan; Spartiate)들은 기원전 640년 9천 명에서 300년 뒤에는 1천 명으로 급감했다. 아무리 무적의 군대를 갖고 있던 스파르타라 해도 그 숫자가 턱없이 줄어들자, 중과부적으로 몰려드는 적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28]
사실, 이 부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인들이 스스로 검소함을 버리고 사치에 취하면서 생긴 문제도 있다.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검소함을 강조하는 스파르타의 현실상 스파르타인들은 그러한 격리된 환경 속에서 생활했기에 경제관념에 무지하거나 제대로 인지를 못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가 동맹시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소위 돈맛을 알게 된 스파르타인들은 거의 무제한적인 사치에 빠졌다. 경제관념을 알고 있어도 사치에 빠지기 쉬워서 몰락하기 쉬운데 경제관념을 모르는 매우 극단적인 케이스의 부류가 사치에 빠지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토지를 팔아제끼는 사태까지 번졌다.
이는 결국 앞서 이야기된 공동식사 문제와 교육비와 같은 비용을 내지 못하는 사태가 되면서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성인 스파르탄(Spartan; Spartiate)들이 대거 몰락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병력으로 동원하거나 그들의 기본 사회체제인 극단적인 전사양육에 참여하는 숫자가 대대적으로 감소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형태는 시민권을 갖는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런 사회체제 변화가 오는 과정에서도 스파르타는 그러한 사회구조 개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복고를 주장하는 형태나 그저 정체된 사회체제를 유지함으로서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다. 이런 전쟁과 내부적인 이유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스파르타는 그나마 명맥은 유지됐지만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패권국의 지위를 노릴 수 없는 약체 폴리스로 전락했다.

2.6. 헬레니즘 시대


이런 식으로 그냥 쇠퇴해나갈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헬레니즘 시대엔 아기스 4세와 클레오메네스 3세가 고대 스파르타 체계의 복구를 위해 복고적 개혁을 시도했다. 시민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일정 액수 이상의 돈을 낸 제2계급이나 노예들을 시민으로 삼는식으로 스파르타 제1계급의 수를 채우려고 했다. 재산공유, 공동식 등 전통적 풍습의 부활을 내건 이 개혁은 일시적으로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 귀족들의 반발과 마케도니아의 개입 등으로 실패했고 아기스 4세는 폐위돼서 사망했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로 망명갔다가 그 곳에서 내분에 휩쓸려 사망했다. 클레오메네스 전쟁 문서 참고.
그 외에도 스파르타의 왕들은 아직 그 명성이 자자했던 스파르타 군대의 전통을 살려, 외국의 부유한 군주들이 주는 돈을 받고 자국민들을 외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런 스파르타의 용병 정책은 주로 이집트 같은 부유한 나라에서 자주 쓰였다.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왕은 이집트로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어 이집트의 넥타나비스 왕을 도와 이집트의 반란군 10만 명을 쳐부수어 넥타나비스 왕으로부터 230탈렌트를 받았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1탈렌트는 노 200개가 달린 삼단노선의 노꾼들을 1개월 동안 고용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이 방법은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는데, 실제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파르타인 용병 대장인 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가 주는 돈을 받고 카르타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로마군을 쳐부수고 집정관인 루쿨루스를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렇게 국력이 다시 강성해진다 한들,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과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자릿수가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에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스파르타는 기껏해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역 강국에 불과했으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면서 연명하는 게 한계였다. 다만,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파르타를 굳이 정복하려 하진 않았다.[29]
아무튼 이 때의 개혁 때문에 공동식사 등의 리쿠르고스 체계가 복귀되고 잔존하는 데 성공했고, 로마시대에까지도 이어졌다.

2.7. 로마 제국 시대와 그 이후


스파르타 역시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똑같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또한, 로마인들은 한때 페르시아를 상대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패권을 다투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역사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들 두 도시에게는 속주세 면제라는 혜택을 주었다. 이 혜택은 그리스 애호가인 네로가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하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원상복귀 시켰는데 그 때도 이들 두 도시는 꾸준히 제외됐다.
로마 치하에서도 문화 도시로 각광을 받은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는 '특이한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관광지'로 각광받았다. 예를 들어 아고게 항목에서 언급하는 소년들의 채찍질 버티기 대회 같은 것이 로마 제국 시대에는 관광 명소가 됐다. 스파르타 병영 체험을 본 로마 귀족과 부호들이 답례로 돈이나 음식을 바닥에 던져주면 그것을 주워다가 생활비를 충당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엔 동로마를 도와 서고트족과 싸우다가 제대로 박살이 났다. 7세기에 슬라브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이르자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소규모 마을로 전락했고, 주민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다른 대도시들로 이주한 듯하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세 시대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의 수도 미스트라스가 성장하면서 거의 버려진 상태까지 갔다가, 후술하듯 그리스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1834년에 재건됐다.

2.8. 현대


Σπάρτη(스파르티)
펠로폰네소스 주 라코니아 현의[30] 현청 소재지. 인구는 3만 5천 명이고 이 중 읍내(?)에 1만 7천 명 정도가 거주한다.
옛 라이벌 아테네가 지금도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것과는 달리 현대 스파르타는 그냥 지방 중소도시가 됐다. 전 세계인이 그 이름을 알 만큼 이름값이 높은데도 여기가 그다지 관광지로 알려진 것도 아닌데, 아테네에 비해서도 현대의 스파르타엔 딱히 가도 구경할 게 별로 없어서다. 이는 고대 스파르타인들이 자기들이 가진 국력에 비해서 대규모 건축물을 만드는 데 돈을 많이 안 쓰는 검소함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도 별로 없어서기도 하다.[31] 애초에 현대의 스파르타는 1834년 오톤 왕의 칙령으로 고대 스파르타의 터에 재건된 것이다. 굳이 볼거리라면 읍내는 그럭저럭 아기자기하고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사진 찍는 포인트다. 올리브 박물관도 있고 그리고 어쨌든 그리스라 여기도 아크로폴리스에 고대극장 등 유적이 좀 있으나 아테네나 페르시아와 싸우던 그 시절 스파르타 유적은 아니고 로마시대의 스파르타 유적이다.
현대 스파르타 인근에 동로마 제국 당시의 요새인 미스트라스 성채(Μυστράς)와 콘스탄티노스 11세 시절에 부흥했던 모넴바시아(Μονεμβασιά)의 유적이 자리 잡고 있어 이 유적들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스파르타에 숙소를 잡는 경우가 많다. 스파르타에 간다면 볼 게 거의 없는 스파르타 유적에 실망하지 말고 미스트라스와 모넴바시아로 가 보는 게 좋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동생들을 모레아로 보내 분조(分朝)를 경영하게 했기 때문에 이 시대에 모넴바시아가 번영했던 것이다. 다만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제국이 멸망한 후 서로 싸웠고 형인 디미트리오스가 오스만 제국을 불려들어 1460년 모레아도 점령되어 동로마 제국은 이 때 완전히 멸망한다. 이 시기의 일은 모레아 전제군주국 항목 참조. 다만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끝까지 동로마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고 나름 자랑스러워한다.
왕국시대(1832-1923, 1935-73)에 그리스 왕세자(디아도코스 διάδοχος)의 칭호가 바로 스파르타 공(Duke of Sparta)이었다. 다만 스파르타 공이라는 작위의 유례가 없었고 당시 그리스 법은 왕 이외의 그리스 시민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일에 법적 근거를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 웨일즈 공 등과 달리 단지 관례적인 칭호에 그쳤다.
한편 정치적으론 그리스에서 가장 보수색이 짙은 도시로, 좌파 시장이 한 번도 배출되지 않은 곳이며, 1974년의 국민투표 당시 군주제 유지 결과가 더 많이 나왔던 도시이기도 했다. 2012년 총선에서도 신민주당황금새벽당 득표율이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2015년 총선에서도 변함없이 황금새벽당이 10%의 득표율을 올리긴 했고, 신민주당이 1위를 하긴 했지만 신민주당의 득표율은 32.7%에 그쳐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동네는 아니다. 한편으로 사회당의 득표율이 11.6%를 차지해서 가장 높은 득표율이 나왔는데 그 만큼 전국적으로 사회당이 몰락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전에 후보조차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좀 나은 편이지만. 또 스파르타가 속한 라코니아 현은 2015년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에서도 구제금융 찬성표 비중이 가장 높게 나왔다.

3. 고대 도시국가 시절



3.1. 사회


스파르타는 1계급의 시민권자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es), 2계급의 주변인과 항복한 자들인 페리오이코이(Perioeci), 3계급의 노예 헤일로타이(Helots)로 유지됐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는 스파르타 시민 계급은 전체의 5~10% 정도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오로지 정치와 군사에만 참여하고 헤일로타이들의 봉양으로 먹고 살았다.
2계급인 페리오이코이는 시 외곽지에 사는 피지배민들로 1계급에겐 금지된 일인 상공업에 종사하며 시민권이 없고 예비군으로서 군역을 졌다. 헤일로타이처럼 대놓고 업신받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유년시절부터 치열하게 교육받을 의무도 없었다. 그래서 스파르타 내에서는 그나마 인간답게 살았던 계급이기는 하지만 참정권은 없었다. 물론 완전시민이라 해도 돈이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제2계급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헤일로타이와는 다르게 유사시 병력으로 쓸 수 있고 반란의 위협도 적었던 데다가 상공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무기공급 등에 있어서 중요한 계층이었다. 그래서 제3계급 헤일로타이에게 잔혹한 억압을 자행했던 거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자치권을 주었고 해외로 여행갈 수 있는 특권도 주었다. 그래서 스파르타이아이의 수가 급속히 줄면서 이들이 사실상 스파르타의 병력공급원 역할을 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단련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헤일로타이를 내보내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이들은 메세니아와 코란도스가 떨어져 나가면서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던 헤일로타이가 해방된 이후의 스파르타를 떠받친 계층으로, 메세니아가 떨어진 이후로도 스파르타가 이름값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덕택이었다.[32]
3계급인 헤일로타이는 농업에 종사하며 스파르타인들을 위해 토지 경작의 의무를 졌다. 이들 헤일로타이는 모두 국가 소유였으며 스파르타이아이에게 분배됐다. 이들 헤일로타이는 가정을 꾸릴 권리가 있었으며 국가로부터 생산물을 바치거나 지급받아 그걸로 삶을 영위했다. 2계급과 3계급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지속적으로 이들의 숫자를 갖은 술수를 통해 줄이려고 탄압을 가했다. 밑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사회는 당연히 1계급인 스파르타이아이 얘기들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스파르타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그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독특함과 잔혹함으로 악명 높은 사회 체계이다. 이런 정신나간 제도는 리쿠르고스에 의해 확립됐는데 그에 대한 전기를 쓴 플루타르코스 조차도 워낙 전설적인 인물이라 실제인물인지도 의심스럽다고 할 정도다. 현재까지도 그 혹독한 훈련방식과 강인한 정치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식 훈련'은 혹독하고 집중적인 교육을 의미하는데, 주로 현대 대한민국 사교육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영어로 Spartan은 스파르타인을 가리키지만, 스파르타인들이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는 데에서 검소하고 엄격한 의미도 있다. Spartan lunch라고 하면 과일 샐러드에 우유 정도의 간소한 점심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전통적으로 고령자들을 우대했다. 고령자란 끊임없이 전쟁이 반복되는 스파르타인의 삶에서 끝까지 살아남을만큼 강하고 지혜로운 전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올림피아 경기 때 한 아테네 출신 노인이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때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시민들은 그 노인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거나 야유를 보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누가 자리 좀 양보해줘라.'라는 말이 관중석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노인이 스파르타인들이 앉은 응원석에 갔을때 그곳에 앉아있던 스파르타 젊은이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심지어 나이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부가 일어나기까지 한 이 상황에서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노인이 말하기를, "모두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진 알지만, 그것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은 스파르타인들뿐이구나." 이 장면은 THREE라는 그래픽 노블에서 그대로 언급된다. 영화판에서 사신의 팔을 자르던 바로 그장면에서 한쪽에 있던 스파르타인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비슷하게 전사를 중요시했지만 고령자는 이미 늙고 쇠약해 싸울 수 없다며 천시했던 흉노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농경에 종사하는 대규모의 노예로 경제적 부양을 받을 수 있었던 스파르타와는 달리, 흉노는 유목만이 겨우 가능한 거칠고 척박한 황무지가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3.2.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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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식 교육에 가려지긴 했지만,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흔히 아테네의 민주정과 비교되어 스파르타는 과두정이라고 설명되고, 실제로 스파르타인 스스로도 민주정이라 자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비교적 많은(최소한 당대의 국가 치고는 높은 비율의) 인민들의 정치참여가 유도되면서도 높은 안정성을 지닌 체제였다.
스파르타의 권력은 크게 3가지로 쪼개져있었는데, '왕과 집정관', '원로원', '민회'가 그것이다.
왕은 그 자신부터가 원로원의 일원이며, 특이하게도 2개의 왕가에서 2명의 왕이 뽑힌다. 따라서 서로를 견제하게되어 참주정으로의 폭주를 막는다. 왕의 권한은 민회에서 뽑히는 다섯명의 집정관(에포로이)에게 견제되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차츰차츰 집정관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원로원은 실질적으로 가장 발언력이 강하던 곳으로, 민회에서 종신직으로 뽑힌 60세 이상의 의원 30명으로 구성된다. 예외는 그 자신부터가 의원인 왕들이다.
민회는 법안을 인준, 거부, 동맹, 전쟁 선포, 조약 체결을 결정하는 곳으로, 원로원 의원을 선출하며, 매년 집정관을 뽑는다.
이렇게 하여 스파르타는 왕정의 요소(왕과 집정관), 귀족정의 요소(원로원), 민주정의 요소(민회)가 혼합되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되어, 인민의 정치참여와 정치적 안정성을 동시에 갖추게 되었다. 물론 아테네에 비하면 인민의 정치참여는 떨어졌지만, 후대의 로마인들도 스파르타와 유사한 혼합정 체제로 '안정성'과 '인민의 정치참여'를 모두 누린 것을 본다면, 스파르타의 체제는 결코 무시당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33] 참고

3.3. 성인들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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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중보병[34]
스파르타 경보병[35]
스파르타 남성들은 20세에 아고게를 졸업하면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해야 했다. 30세가 지나면 가정을 이룰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래도 저녁식사는 꼭 부대에서 해야 했다. 스파르타 남성들은 50세까지 전투에 참가해야 했다.[36]
심지어 결혼조차도 국가에서 정해준 여자와만 할 수 있으며, 결혼 당일날까지 훈련을 받다가 당일날 저녁에야 아내의 집으로 보내져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날 아침부터 또 다시 훈련을 시작하기에 제대로 된 가정생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혼외관계가 금지된 건 아니다. 훌륭한 전사의 피를 받기 위해 '''남편'''이 씨내리[37]를 구해오기도 했다.[38]
그리스 중보병 방진 중 그나마 전술적 기동이 가능했던 군대가 스파르타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39] 전술기동이 가능한 숙련된 병사를 길러내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즉 단순히 평균적으로 뛰어난 전사와 군인을 양성하는 시각보다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을 신체적 정신적 금욕과 고행을 강제하는 교육으로 억제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주변국과의 지속적인 마찰을 버티는 것은 물론, 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노예들을 실질, 정신적 공포 양면으로 끊임없이 억압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대신에 피정복민과의 동화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고립을 유지하며 교육을 천시하던 폐해는 결국 훗날의 몰락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로마군과는 완전히 정반대로서, 로마군이 처음부터 개개인이 다 전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평범한 시민이 간단한 군사훈련을 받은 뒤 군인이 되는 것을 상정하고 작전계획을 짰기에 체계적인 군단제도를 완성한 것은 물론, 전술과 전략도 최대한 연구했으며, 패배하면 그 책임은 적전도주나 명령거부 등 명백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상 지휘관에게 있었으므로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무능력을 병사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로마는 군단병에게 보급을 최대한으로 해주었기 때문에 스파르타군은 트로이 전쟁[40]이나 테르모필레 전투 등에서는 대활약을 했지만 훗날 전술과 전략이 좀 더 발달하면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됐다. 즉, 하나의 도시국가로 남아가기에는 스파르타 정도의 문명도 나름대로는 성립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방식으로 거대한 문명을 일구는 로마와 비교하면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41] 또 하나의 도시국가가 아니라 패권국가를 지향하기에도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체제를 변호해주자면, 국가는 무장한 시민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스파르타인들만의 독특한 생각은 아니다. 아테네에서도 로마에서도 이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개념이다. 때문에 아테네의 자유로운 시민이란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성인남성을 의미하였을 정도이다.[42] 심지어 미국은 지금도 헌법으로 시민의 무장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스파르타가 국가적 단위에서 성인남성 한명한명을 훌륭한 전사로 키워내려고 했던 것 자체는, 틀린 판단이라고 매도하기가 힘들다. 이 개념 자체는 차라리 오늘날의 공교육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스파르타의 교육이 당대기준으로도 가혹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교육에서 문학, 수학, 외국어, 과학, 사회학, 예체능 등등을 가르치는 것은 올바를 수 있지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두들겨패면서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결국 스파르타가 가진 결정적 문제점은, '무엇을 가르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르쳤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3.4. 공동 식사


스파르타인들의 독특한 풍습 가운데 하나가 공동 식사다. 경제적 여건이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43]15명이 한 조(피디티온(Phidition)이라고 한다)를 이루어 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식사조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전투조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결원이 생겨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기존의 조원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밥도 같이 먹고 싸움도 같이 해야 할 테니[44]. 식사의 질은 복불복이었는데, 형편없는 빵과 검은 선지국[45]으로 때울 때가 잦았으나 어떨 때는 괜찮게 먹기도 했다. 피디티온의 각 일원은 매달 납부해야 하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보리가 약 73 kg, 포도주가 약 35 L, 치즈가 3 kg, 무화과가 1.5 kg 등이었기 때문[46] 그리고 식사조에 이런 걸 낸다는 건, 당연히 '''이런 것들을 먹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검은 선지국은 워낙에 맛이 없기로 유명했는데[47][48] 어느 아테네인[49]이 먹어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돼지가 먹는 것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스파르타인이 왜 이리 용감한 줄 알겠다! 이런 걸 먹고 사느니 죽겠다고 싸우지!"'''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스파르타인은 '''"아테네의 돼지도 그 죽을 10년만 먹으면 용감한 군인이 될 것이다!"'''라고 응수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다른 이야기로는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소스가 그 국맛을 보고 역겨워서 뱉어버리자, 요리사가 "이 국을 맛있게 먹으려면 스파르타식으로 운동한 뒤, 에우로타스 강에서 목욕해야만 합니다, 전하."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검은 선지국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식단이었고, 전쟁에 나가게 되면 오히려 살아있는 산양과 닭 등을 끌고 가서 매일 직접 도살해 신선한 고기를 공급해 줬다고 한다. 곧 전장에 나갈 사람의 사기와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한 특식이라고 볼 수 있다.

3.5. 여성들


남성들만큼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지옥을 경험했다. '''스파르타 여자들은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전사를 낳아 나라에 바치는 것이 의무였다'''. 또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서 남자에 버금가는 신체단련을 했다.[50]
이렇게 운동으로 단련된 덕인지 스파르타 여성들은 미인으로 유명했다.[51]
이렇게 고생하는 대신 고대 그리스 기준으로, 스파르타의 여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남자들은 군에 종속돼 살아가니... 그런데 스파르타에서는 전쟁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아서 어떻게 보면 그저 전사를 낳는 모체[52]를 기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테네는 물론 다른 그리스 국가들의 경우 부인은 물론이고 특히 미혼 여성은 종교 축제일이나 장보기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스파르타에선 여자들이 마음대로 바깥에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도 할 수 있었다. 에드가 드가의 소년들에게 도전하는 소녀들(Petites filles spartiates provoquant des garçons)이 그런 상황을 묘사(상상)한 것.
여성들의 의상(노출이 있으니 후방주의)
이 옷은 그나마 상당히 긴 편이다. 노출이 심한 것은 상단은 가슴, 하단은 허벅지에서 놀 정도로 짧다.
여자아이들이 입는 옷이 거의 하의실종 패션 수준으로 아주 짧았다. 이러한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다녔으니 엉덩이나 넓적다리가 훌렁훌렁 마구 보였다. '페플로스'란 옷인데, 이 옷은 엉덩이를 간신히 덮을 만한 높이에 몸을 한바퀴 두를 수 있는 너비의 장방형 천 한 조각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옷을 입는 방법은 자신의 왼쪽어깨로 팔을 뺀 다음, 오른쪽 어깨부분에 옷 양쪽을 이어서 매듭을 짓고 나머지 부분은 허리띠로 묶어 고정시키는 식이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오른쪽 부분은 가슴부터 허리까지 노출되는 것. 당시 그리스인의 의복은 거의 다 이런 식으로 단순했는데, 페플로스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단순하고 짧았던 것.
아테네인들이 다른 모든 것을 제껴두고 스파르타에서 가장 기겁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테네에서는 여자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꽁꽁 가둬두고 있는데, 스파르타에서는 숫제 거의 다 벗고 길거리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니.[53]
아무래도 사회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편이다 보니 여성의 발언권 자체도 아테네 등 완전히 시궁창인 나라들과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물론 정치적 발언권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남성들은 여성들 사이의 평판에 흠이 갈까 무척 노력했다고. 일부러 잘못한 남성이 있으면 그에 대한 처벌로 여자들 사이에 세워 놓고 수치스러운 놀림을 듣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초적 사회다보니 꽤나 수치스러웠을 것.[54]
하지만 여성들도 16살이 되도록 초경을 못하거나 기준보다 유방이 작거나 불임이면 여자로서의 구실을 못 한다고 살해당하는 등 안 좋은 면도 있었다. 즉, 현대 여성과 비슷한 지위를 보장받은 게 절대 아니다. 정리하면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비슷하게 운동하고 자유로이 외출하며 발언권도 가질 수 있던 것은, '''건강한 모체에서 건강한 아들(=전사)이 태어나므로 여자 역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 란 우생학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일뿐이다. 사실 스파르타의 남성들도 남자 구실을 못하면 배제 당했으니, 스파르타의 인간들은 모두 우생학적 분위기 속에 살았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여자들의 신체 단련은 첫 아이를 얻거나 폐경이 될 때까지만 의무였다. 그 다음엔 자유.
그리고 결혼도 막무가내로 이뤄졌다고 한다. 어두운 방에 결혼 적령기의 여인들을 모아놓고 한창 피가 끓는 남자 청소년이나 청년들을 집어넣으면, 남자는 손에 잡히는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 시대 여성들도 잘생긴 남자에게만 몰리는 것은 똑같았으니 모솔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바꾸는 것은 당연히 불가. 그나마 이 제도가 유지된 일이 끝나면 남자는 다시 군대로 돌아가고, 30세가 되면 집에 갈 수는 있지만 그 뒤에도 밤마다 막사생활을 늙기 직전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된 가정 생활은 불가능, 왕이라도 무조건 왕비 아닌 자기 조원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 단 이 제도는 의외로 스파르타 사회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는데 모태솔로가 거의 없어 노총각 사회문제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사회가 극도로 남성적이면서도 의외로 안정적이었던 이유로 이 제도를 꼽는 사람들도 있다.[55]
덤으로, 나이가 많아 제대로 부인을 상대할 수 없는 전사는 젊고 강한 전사를 씨내리로 삼아 아내와 동침하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도 명목은 튼튼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

3.6. 노예 계급 : 헤일로타이


이러한 극단적인 군국주의적 사회제도는 스파르타의 사회에 기반을 두는데, '''기회만 된다면 들고 일어날 생각을 하는 노예들인 헤일로타이의 숫자가 스파르타 시민들의 몇 배를 넘었다.[56] 다른 지역의 폴리스인들과 만난 헤일로타이들은 "스파르타인들의 살점을 뜯어 먹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스파르타인들을 증오했다.''' 그 사정을 알고보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헤일로타이의 나라 메세니아(Μεσσηνία)[57]는 스파르타 서쪽에 있는 이웃나라였으나, 기원전 7세기에 스파르타에 정복 당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백년 동안 스파르타에게 말도 못 할 학대를 받게 된다. 가장 많은 비중이 메세니아(Messenia)이기 때문에 메세니아만 언급되나 헤일로타이에는 라코니아(Lakonia)라는 도시국가도 포함되어있다.
스파르타는 형식상 메세니아-라코니아를 완전히 멸망시키진 않았으나, 폴리스 전체를 노예로 삼아서 스파르타의 예속 하층민 계급인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헤일로타이들은 토지 생산물의 절반을 세금으로 바쳤으며, 스파르타인들은 이 세금 덕에 농사나 상업 대신 군사 훈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는 그리스 전체를 놓고보더라도 극히 특이한 사례였는데,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노예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었고, 같은 그리스인들은 서로를 노예로 삼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스파르타는 동족을 사실상의 노예로 삼았기 때문.[58][59]
하지만 스파르타에게 점령된 이들의 운명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에만 그치지 않았다.[60]

3.6.1. 인간사냥


심지어 스파르타 청년들의 전투훈련 일환으로 헤일로타이 가운데 힘센 이들을 학살하게 했다. 이런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최고 관직인 에포르는 해마다 취임 시에 헤일로타이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는 전쟁 시의 살육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전공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스파르타의 노예제는 그리스에서 가장 가혹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으나 헤일로타이는 국가의 소유물이었기에 국가에 의해 개개의 주인에게 할당되었으며 주인은 그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특히 다른 폴리스의 경우 노예라 하더라도 때때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으나 헤일로타이에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 김진경 교수 저술)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84쪽.

'형식상으로는' 멸망하지 않았기에 스파르타의 신년 행사는 헤일로타이의 나라 메세니아에 대한 전쟁 선포식이었다. 형식상 전쟁 상태였기 때문에 수시로 스파르타인들이 몰래 들어가서 헤일로타이를 이유없이 쳐죽였다. 소설 1984에서 당이 피지배 계급인 프롤을 관리하는 방식처럼 주로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강인하고 똑똑한 헤일로타이만 골라 죽였다고 한다.
한번은 용기가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2천 명이 넘는 헤일로타이들에게 해방의 상징으로 화관을 씌우고 여러 신전으로 행진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뒤 '''그 헤일로타이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거기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 국가적 위기 상황때[61] "우릴 도와 열심히 싸워주면 메세니아를 독립시켜 주겠다." 약속을 하여 헤일로타이들은 자유를 위해 스파르타를 도와주었으나 정작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전쟁에 큰 활약을 한 헤일로타이 부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등 추잡한 짓을 하였다.[62] 너무 힘이 세다던지, 특출한 리더십을 보여서 반란을 획책할 우려가 있어보이는 헤일로타이를 밤중에 몰래 급습해서 죽여버리는 일도 잦았다. 골 때리는 점은 이러한 '급습'이 보병 양성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일부 스파르타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수월 교육'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3.6.2. 차별대우


스파르타인과 헤일로타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헤일로타이들은 개가죽으로 만든 우습게 생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혼혈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헤일로타이와의 결혼도 엄격히 금지됐다. 이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헤일로타이를 교육에 활용하기도 했는데, 일부러 헤일로타이를 잡아오고 나서 을 잔뜩 먹여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헤일로타이를 놀려댔다고 한다.[63] 그리고 '술을 너무 마시면 이렇게 추악하게 되니 마시지 마라'는 교훈을 얻는 것이다. 또한,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춤과 노래를 강요하는 등 온갖 굴욕을 줬다.그래픽 노블 THREE 에서 나온 모습(위에서 6번째)

3.6.3. 저항


그리스내 다른 폴리스들도 이러한 속주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였으나 스파르타 사회의 이러한 차별과 인간사냥 등은 도를 넘을 대로 넘은 짓이었다. 이따위 짓을 당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지배를 당하던 메세니아인들도 치를 떨었고 수백 년 동안의 지배에도 끝끝내 굴종하지 않고 몇 번이나 스파르타에 항거했다.[64] 하지만 가난한 노예의 도시국가가 도시의 삶 전체가 전쟁 준비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사실상 주민 전체가 전투 참여가 가능한 인간 병기들인 스파르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고[65][66] 그때마다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코린토스 전쟁에서 테베에게 참패하자, 승리한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국력을 깎아낼 목적으로 메세니아를 스파르타에서 떼어내서 독립시켰고, 마침내 독립한 메세니아는 타 폴리스 지원 아래 스파르타에 대한 모든 식량과 물자 운송을 중지했다.[67]
그동안 메세니아 착취와 군사력에만 신경 쓴 스파르타는 메세니아가 독립하자 본토 농지들도 소수의 귀족들이 독점했고 농사나 기술개발에 무관심한 결과, 식량 생산은 타 폴리스에 비해 형편 없었고 돈이 없다 보니까[68] 무역을 통한 식량 조달도 어려워졌다. 자연히 스파르타는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양극화로 인해 분열과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장점인 강력한 중장보병 양성도 어렵게 됐다. 이는 당연히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고, 그 이후로도 스파르타의 국력은 두 번 다시 코린토스 전쟁 이전의 상태를 넘어서지 못했다.[69]
이후로 자체적인 개혁과 제2계층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국력을 회복했지만 메세네이아와 코란도스가 떨어져나간 이상 한계가 뚜렸했고, 마케도니아와 로마가 각각 그리스 전역을 제패하기 이전까지 수백년간 스파르타는 메세네이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여러번했지만 메세니아의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특히 메세니아는 스파르타에 쌓였던 원한이 워낙 컸던 터라 독립 이후에는 로마에 병합되기 전까지 스파르타가 있는 동맹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았고 스파르타에 적대적이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수천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리스에서는 옛 메세니아 땅인 칼라마타[70]와 스파르타 사이의 지역감정이 극히 좋지 못하다. 다만 스파르타인들도 헤일로타이를 스파르타인으로 만드는 일이 아주 없던건 아니었는데 헤일로타이의 아들 가운데 스파르티아타이가 공식적으로 입양하여 비용을 댄 자는 신트로포스 자격으로 호적에 등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일제 강점기 아래 호의호식했던 친일파처럼 매우 극소수만 혜택을 누리는 것이엇지 보편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3.7. 스파르타식 교육 : 아고게(Agoge)



공교육과 평생교육을 실현한 국가로, '공동 식사' 문단에 소개한 피디티온이 그것. 물론 1차적인 기능은 식사조인 동시에 전투조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기능이 바로 교육수단이었다. 젊은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다. 실제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도 걸러들어야 할 것이 공교육은 공교육이었지만 완전시민들만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고 교육비는 국가의 지원없이 가족들이 전액 부담하는 구조였다. 만약 교육비를 낼 수 없으면 시민자격을 박탈당하는 사실상 세금이나 다름없는 교육이었다, 평생교육도 사실상 노인까지 군인 혹은 예비군으로 부려먹는 과정에서 군사훈련을 시킨것을 평생교육이라고 칭송하는 구조였다. 쉽게 말하자면 군역+세금을 징수당하는 과정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것을 두고 귀족주의자들이 칭송한 것에 불과하다.[71][72]
다만 여성교육은 확실히 선진적인 분야로 여자들을 집 안에만 몰아넣었던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여성들도 예외없이 군사훈련과 체력훈련을 제공했다. 이 시대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선택이었다.[73]
다만, 이런 교육법으로 중점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이 고작(?) 싸우는 방법이었단 게 흠이다. 스파르타는 고대 경제에 필요한 농업과 기술 교육같이 생산적 교육은 소홀히 했기에,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 메세니아가 독립하면서 스파르타는 초라하게 몰락한다. 그리스 폴리스들이 하나같이 선민사상이 강했다지만 스파르타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고, 군사원정을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타지에서 들어오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사실상 우물 안 개구리인 셈.[74]
이런 군사교육도 대부분 개인능력 향상과 오래된 진법 훈련이 전부였기에, 시대가 바뀌면서 개인능력보다는 전술(&쪽수)이 그리고 새로운 진법 전략, 신무기 개발 등이 중시되면서 스파르타의 무장보병전술은 군사적 우위에서도 서서히 몰락해 갔다. 물론 스파르타 전사 개개인의 역량은 당연히 20년 복무한 로마 군단병에 비해서도 크게 앞선다지만, 애초에 로마군은 전사 개인이 아닌 조직 자체가 강하고 숫적으로도 비슷한데다 조직력도 어느 정도 갖춘 게르만족 세력 그리고 중장기병만 몇만 명을 데리고 제국 동부를 수시로 유린한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 일반인들을 군인으로 만든 군대로 수백년을 버텨온 군대다. 숫적으로 압도적 열세에 개개인만 강한 스파르타군이 상대가 될 리 없었고, 결국 로마 제국의 정복 때 그나마 저항한 건 그래도 외부인을 데려와 써먹을 줄 알았던 마케도니아나, 외부 상대로는 폐쇄적이어도 내부적으로는 그럭저럭 수준 안 맞음을 용납해줘 항상 시민의 수가 스파르타의 최소 5~10배였던 아테네 정도지,[75] 정작 스파르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테귀라 전투는 펠로피다스가 무방비 상태의 오르코메누스를 포위하려고 신성 부대와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하다 스파르타 본국에서 대규모의 증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다시 철군하던 중 원래의 오르코메누스 수비대를 만나 벌어진 전투이다. 흔히들 오해하는 것이 스파르타 군대는 전원이 인간병기로 단련된 스파르티아타이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 즈음해서는 정예 병력인 스파르티아타이의 수가 얼마 안 되었고 전쟁의 방식도 페리오이코이 등 일반 병력과 동맹군의 병력으로 전쟁을 운영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군의 수는 1,800명이 아니라 부대 단위를 봤을 때 1,000명에서 1,800명 사이로 추정되는 것이고 보이오티아 도시 오르코메누스를 수비하던 스파르타 수비군이었다. 전투 양상 측면에서도 신성 부대가 용맹성 그 자체보다는 비정상적인 부대 운용을 통해 스파르타의 전선을 깨어버린 게 승인이었다. 테베 군은 종심을 비정상적으로 두텁게 하여 얇은 스파르타 전선을 뚫은 후 양 측면을 기병대와 함께 들이쳐서 스파르타 군은 패주하였다. 테베 군이 추격하였으나 오르코메누스가 가까워 전과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신성 부대 300명이 스파르타 군 1800명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오류이다. 스파르타 군의 구성을 오해하게 한 점, 즉 스파르티아타이가 전멸당했다고 오해하게끔한 왜곡이 있는 점. 사료 부족으로 스파르타 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없는데 근거 없이 1,800명으로 확정한 점. 게다가 오르코메누스가 가까워 테바이 군이 추적했으나 전과가 제한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파르타 군이 전멸당했다고 한 점에서 모든 팩트가 틀렸다. 전투 양상에 관한 점에서 보더라도, 신성 부대가 종심을 뚫은 후 스파르타 수비군에는 없었던 기병대와 함께 측면을 공격한, 뛰어난 전술에 의한 전과를 신성대라는 단일 부대가 특별히 용감해서 다수의 인간병기 스파르타 군을 박살낸 것인 양 전투양상을 단순히 도식화 해버렸다.

레욱트라 전투는 우익의 소수 스파르타 군이 다수의 테베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붕괴된 전투이다. 그리고 스파르타군 전원이 스파르티아타이가 아니다. 일부만이 스파르티아타이였다. 마찬가지로 테바이 군에서 신성대 300만이 스파르타 군과 싸운 게 아니다. 여러 연합체 중 하나가 신성대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료에서는 왕이 전사하기 전까지 소수의 스파르타인이 다수의 테베 인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음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헬레니카 VI.4.10.
여기에 스파르타의 인적 자원 고갈은 심각하긴 했다. 애초에 주로 전쟁에 의존하여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너무 폐쇄적이라 이겨도 1계급 구성원들이 조금만 죽어도 사실상 제 살 깎아 먹기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여자들에 대해 딱히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막상 최고 전사들은 상대적으로 의무를 덜 준수해도 되어서 열심히 자손을 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1계급 숫자가 처음부터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고 폐쇄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어 근교계수에 의해 점진적으로 근친의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주 안전하려면 대체로 1/512가 되어야 가능한 편이라 여기에 생식이 가능한 구성원 숫자 등을 고려하면 생각보다 인구가 상당히 많아야 한다.[76] 까놓고 세계사에서는 스파르타보다 더 숫자가 많았던 사람들도 폐쇄적이면 근친에 의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사실 하층 계급을 제외한 스파르타인들보다 훨씬 숫자가 많았던 유목민들도 근친에 의한 폐해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덧붙여, 아고게 방식이 사실상 구 일본 제국과 같은 똥군기 그 자체라 병사들이 명령복종은 잘해도 스스로의 의사나 사고를 많이 억눌린 나머지 제대로 싸웠을지도 의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아고게의 단면만 보고 사실상 스파르타인들이 무서워보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상 겪어보면 전쟁 판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3.8. 배타적 순혈주의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보았든 플라톤은 '국가'를 저술했는데, 그럼에도 스파르타에 이주하지 않았던 점을 주목해 보세요. 스파르타에는 한계가 있었지요. 이주민을 끌어들이지도, 이들에게 온갖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지도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끼리만 뭉쳤어요. 매우 배타적이었죠.

칼 갈린스키 텍사스대 고전학 교수 "강대국의 비밀 1부 로마 시민권"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

로마 정치인 키케로

스파르타의 인적 자원 고갈 문제는 줄곧 지적되는 문제인데 앞에서 설명한 이유외에도 스파르타의 외국인에 대한 배척과 적대적 태도에도 그 원인이 있다. 다만 이점은 스파르타보도는 조금은 더 낫다고 해도 아테네등 수많은 그리스 폴리스들의 고질적인 모습이였다.

3.9. 종교


스파르타인들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다신교 사회였음에도 종교에 집착하는 것이 거의 '광신적'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특히, 신탁을 중시해 어떤 일이 있어도 신탁을 받은 것은 반드시 지켰다. 심지어 전투나 원정을 나가기 직전에 점을 쳐서 길흉을 알아보면서 나쁜 결과가 나오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파르타에서 역시 주된 숭배 대상은 제우스였다. 또한, 헤라클레스가 중시됐는데 이는 헤라클레스가 스파르타 왕가의 조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케네 문명 시절의 스파르타의 지배자로 전해지는 메넬라오스헬레네도 부부 신으로서 신격화됐다.

3.10. 기타


  • 섬세한 수사학을 발달시키고, 웅변 교육까지 실시한 아테네인 등 여타 폴리스 출신자들과 달리, 스파르타인들은 과묵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가끔 시큰둥하게 내뱉는 말 하나하나는 촌철살인이었다고. 이러한 화술을 라코닉(laconic)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일화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만약에 내가 스파르타를 정복하면, 역사에서 스파르타의 흔적을 지워 버리겠다"는 투로 협박했지만 스파르타에스는 "만약에"라고 한 마디로 대꾸했을 뿐이다. 이는 '네가 만약에라고 한대로 말로만 떠들지 말고 진입할테면 해봐라!' 또는 '너희의 말은 단지 만약(if)일 뿐이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한 것. 필리포스 2세는 이후 스파르타를 정복할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사실 필리포스가 스파르타에 대한 공격을 단념한 것은 그 때 즈음에 스파르타가 이미 몰락할대로 몰락한지라 굳이 힘을 들여서 굴복시킨들 별 이득이 될 만한 것이 없는 깡촌에 불과했던 탓도 있다. 실제 이 주장은 친 스파르타적인 플루타르코스의 주장이고 아리아노스는 필리포스 사후에 전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드는 상황에서 스파르타를 두고 (반란에 동참도 못하고) 조용히 분개하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결국 '만약에' 같은 무슨 패기 넘치는 상황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반란에 동참도 못하고 찌그러져 있던게 당시 스파르타의 현실이었다.
이런 면모가 만화 300에서도 멋들어지게 묘사된다. 아테네인들이 테르모필레 전투를 위해 레오니다스 왕과 합류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인원을 동원한 그를 야속하게 여긴다. 왜 겨우 300명밖에 오지 않았냐는 질문에 레오니다스 왕은 아테네에서 징발돼 온 병사들 중 몇 명의 직업을 묻는다. 조각가, 농부, 목수 따위의 대답이 돌아오자 이번엔 자신이 데려온 스파르타 군인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의 직업은 무엇인가?" 그들은 일제히 통일된 기합을 외침으로써 답을 대신한다. 레오니다스 왕이 덧붙인다. "당신들보다 많은 군인을 데려왔소." 밈화됨으로써 잘 알려진 300의 "This is Sparta!" 또한 그 어조와는 별개로 라코닉의 내용적 성격과 동일한 대사로 볼 수 있겠다. 패기가 강조되도록 각색된 영화에서의 그것에 대조되는, 페르시아 사신의 장광설에 차분하고 차갑게 "This is Sparta." 한 마디로 답하고 까마득한 구덩이로 차 버리는 원작의 연출은 라코닉의 전형이며 밈화된 것과는 또다른 맛을 전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스파르타인들은 사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전투에 뛰어난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전투 외에 다른 분야에는 어두운 척 하지만, 일단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은 짧은 언명으로 그대의 지식이 어린애 수준이라는 것을 폭로시켜 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적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 스파르타인들은 군사 원정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극도로 꺼렸는데, 그 와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오니아 반란 당시 이오니아인들은 아테네나 다른 폴리스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에도 구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이오니아 사절은 스파르타의 왕에게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치면 막대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씨도 안 먹혔다. 그러자 사절은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쳐서 당신네들의 용맹을 증명해보라." 라고 은근히 도발했다. 페르시아인들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들은 스파르타인들은 귀가 솔깃해졌고 왕은 이오니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사신은 솔직히 "배를 타고 한 달 정도 가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파르타 왕 曰 "저 자를 내쫓아라! 스파르타인을 배타고 한 달이나 걸리는 외국으로 내보내려 하다니!" 다른 폴리스들도 그랬지만 스파르타는 나라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걷는데 하루, 이틀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작은 폴리스였다. 식민지 비스무리하게 확보한 영토는 그리스 내에서 가장 넓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부 1/3 정도.[77] 물론, 진짜 이유는 군사 원정 간 사이에 노예들이 반란 일으키니까. 이 때문에 해외교역은 대부분 제 2계급 몫이었다.
  • 전쟁은 막대한 물자와 돈을 소비하는 사회활동이고 비록 메시니아 착취로 평등한 경제평등은 이룩했으나 장거리 원정이나 전쟁이 길어질 경우 스파르타는, 그리스 부자들을 왕의 이름으로 초대를 빙자한 납치로 몸값을 받아내 전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 의외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널리 퍼져있던 팡크라티온이나 권투는 스파르타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면 당시의 판크라티온이나 권투는 1명이 죽거나 패배를 인정해야 시합이 끝났는데 스파르타인은 패배를 인정하면 안됐기 때문이다. 훈련으로는 행해졌지만 시합에 참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던 듯.
  • 스파르타 전사들은 각각 소년 하나씩을 데리고 다니며 전사 훈련을 시켰는데, 이것이 후세가 '동성애 관계'로 오해하면서 확대해석됐다. 또한, 여성들에게도 유사한 관계가 있어서 성인 여성이 소녀 하나씩을 데리고 당대 여성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 가르쳐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그리스인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과 붉은 옷을 입는 것을 게으름과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인들은 단 하나의 예외 폴리스만 빼고 모두 머리를 짧게 깎고 붉은 옷가지보단 흰 색이나 푸른 색, 자주색 옷을 선호했지만, 그 단 하나의 예외 폴리스가 바로 스파르타. 우리는 머리 기르고 빨간 옷 입어도 이렇게 근면하고 강인하다라는 상징이었다나 뭐라나. 그래서 스파르타인이 페르시아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리스의 관습을 알고 있던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에 대해 게으르고 나약한 놈들이란 편견을 가졌다고 한다. 또 머리를 기르면 미남은 더 잘생겨 보이고, 추남은 무서워 보일거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스파르타 병사들은 전투 직전에 머리를 빗어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 전설과 역사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널리 퍼뜨린 인물은 아테네인이 아니라 스파르타 출신의 리쿠르고스였다. 이에 대해선 아래 각주로 소개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 참고.[78]
  • 스파르타의 어머니가 전장으로 나가는 아들에게 방패를 건네주며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방패를 들고 돌아오거나, 들려 돌아오거라.(ἢ τὰν ἢ ἐπὶ τᾶς)"[79] 당시의 방패는 무거웠기 때문에 싸움터에서 달아나려면 방패를 버려야만 했다. 또한, 전사자의 시체는 방패에 눕혀서 가져오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어머니의 말은 싸움에서 자랑스럽게 이기거나 싸우다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이야기다. 이 격언은 로마시대 이후로도 스파르타를 포함한 라코니아 지방 전역에서 계속 구전되었고, 19세기 그리스 독립전쟁 시기에도 마니 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독립군 깃발을 만들면서 "승리 아니면 죽음"이란 구호와 같이 써넣기도 했다.

  • 트로이 전쟁의 중심이었던 절세 미녀 헬레네는 스파르타인이었다.

4. 전체주의 떡밥


제2차 세계 대전부터 냉전 시기를 경험한 현대인들은 아테네의 민주정만을 현대 정치 이론 및 체제의 모태로 보며,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모습이 강조되는 스파르타는 철저한 반면교사가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각으로 스파르타를 바라본 결과이다.
당장 고대 그리스 시기만 한정짓고 보더라도 아테네 내부에서조차 소크라테스플라톤처럼 스파르타의 체제가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는데 최적이라고 보며 흠모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80][81] 게다가 로마 공화정의 몰락 이후 17세기 중후반 계몽주의가 대두되기 전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부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역사 속에서 잊혀진 정치 체제는 스파르타의 과두정이 아닌 아테네의 민주정이었다. 군국주의적인 문화와 별개로 스파르타의 정치/사회 체제는 유럽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 과두정이 바로 스파르타를 롤모델로 한것이었으며 영국의 입헌군주제 역시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스파르타 체제를 당대 영국 사회의 현실에 맞게 손질한 결과였다.
이튼과 같은 영국의 명문 사립 학교들의 커리큘럼 역시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모방하고 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영국 사립 학교들의 이런 커리큘럼이 대차게 까이고 있긴 하다. 어쨌든 19세기 당시 학교 측에는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모방한 것은, 당대 사회가 스파르타식 교육을 올바르고 건전한 시민을 육성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는 방증이다. 또한 계몽주의 사상가들 역시 스파르타의 공평한 토지 분배, 시민군, 공동체 생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당연히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 내에서도(특히 생 쥐스트) 스파르타를 가장 이상적인 평등주의 사회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스파르타가 제대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생전에 고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사회로 칭송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82] 그 반작용으로 스파르타 사회는 파시즘의 원조인 것처럼 취급된 것이다. 게다가 냉전 시기에 이르러서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를 페르시아 전쟁 ~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사이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관계에 일치시켜버리는 도식까지 성립되면서 스파르타는 철저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초기 시오니즘을 주장한 유대인들중에서도 스파르타 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인 키부츠도 스파르타 모델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83] 실제로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에 오히려 급격히 몰락했다는 사실 또한 비교적 현대에 재조명되어 널리 알려진 부분이 있다. 20세기 초에 발간된 역사 서적들만 해도 스파르타의 어이없는 몰락에 대해선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

5. 이야깃거리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300은 스파르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스파르타 시민군이 협곡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를 침략하는 페르시아 제국과 전투를 벌이는 내용. 그것이 테르모필레 전투이다. 도중에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에게 "우리는 무자비한 전체주의 제국이라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거요. 그리고 역사는 웬 폭군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외세와 맞서싸운 집단'''이 있었음을 기억해 줄 거요."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상영 내내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양국이 대치하는 구도를 보아 동서의 대립이 배경인 듯하다. 그러나 현실의 스파르타는 독재국가이면서 노예들을 부려먹는 국가이고 무자비한 전체주의 국가였다. 오히려 문화력으로 따진다면 동시대의 페르시아가 문화적으로 더 발달된 국가였다. 원작을 더 뒤틀어 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지독한 서구우월주의와 마계 수준으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장애인 비하로 점철된 페르시아 진형 묘사는 두고두고 까인다. 앨런 무어는 300을 "동성애 공포증인종차별과 멍청한 마초 작품"이라고 깔 정도.
무한도전하하가 해당 영화를 패러디한 특집에서 스파르탄 옷을 입고 미션을 수행할 때 "스파르타!"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를 우려먹다가 소집해제한 후엔 안 쓰지만.
게임 갓 오브 워 시리즈의 주인공 크레토스가 바로 이 스파르타의 장군이었다.[84]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르타에 대한 이미지보다는 신 살해자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악무도한 주인공'''이다. 이명으로 스파르탄이나 스파르타의 망령이라고도 불린다. 갓 오브 워 3에서는 망명의 블레이드를 이용해서 마법, 스파르타의 분노를 사용할 수 있다. 공중에서 밀집방진을 한 망령들이 나타나 방패로 방어를 한 뒤 창으로 찌른다. 다만 그리스의 멸망 이후 북유럽의 시간대로 넘어가서는 본인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예전의 잔혹한 성격을 전부 버리며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인간이 되었다.[85] 막판에 아트레우스(갓 오브 워 시리즈)에게 스파르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보아, 스파르타에 대한 자부심은 남아있는 걸로 보인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배경인 만큼 아테네와 함께 양대 세력으로 등장하며, 그리스 전역을 아테네와 양분하여 전면전을 치루고 있다. 주인공 미스티오스도 일단 스파르타 출신이고 대중적 의미의 스파르타적 색채가 강하지만, 스파르타군 소속은 아니다.게임 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스파르타 도시가 구현되어있는데, 현존하는 건물과 기록이 꽤나 남아있는 아테네와는 달리 전적으로 상상에 의존해 구현되어 있기에 판타지적인 느낌이 없지않아 존재한다.
강현준의 만화 캣에 나온 개 이름이 스파르타이다. 주인인 H가 허세를 부리고자 멋지게 지은 이름인데 정작 개는 똥개. 하지만 똥개임을 부정하고 가혹한 훈련을 하며 명견이라고 자랑하는 주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다. 대조적으로 널럴한 주인 K를 가진 고양이 K를 부러워할 듯. 외전에서 거대화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크면서도 주인 말을 잘 듣는 멋진 개라고 부러워할 뻔했으나 역시나 거대하게 나온 고양이 K 때문에 똥개임이 드러나자, 인간들에게 외면당하면서 굳어버렸다. 사실 순종이란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에 가깝고, 흔히 잡종이라 불리는 동물들이 훨씬 건강하고 유전적으로 결함이 없다. 무엇보다 좋은 개가 되고 말고는 주인 역량에 달린 일이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스파르타인레오나디스가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1] 라케다이몬, 라케다이모니아는 고전식 발음. 라케대몬, 라케대모니아는 코이네식 발음.[2] 트로이 전쟁 당시 등장하는 스파르타가 이때의 스파르타. 다만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조선만큼 차이가 있으며 현재 잘 알려져있는 스파르타는 기원전 8세기 이후의 스파르타다.[3] 다만, 이건 그 당시에 스파르타가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비해 그만큼 내정이 불안했다는 반박도 된다. 메세니아와 여러 노예 계층이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스파르타의 불평등한 차별 때문이었다. 다른 영토 확장을 한 국가들은 행정력을 확대하고 정복지의 주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서 그나마 그럭저럭 살았지만, 스파르타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마라톤 전투같이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이기는 등 선전했는데도 지원군을 섣불리 보낼 수 없었다. 당시 치안까지 담당하던 1계층 사람들이 국내에 줄어들면, 메세니아와 같은 나라가 계속 저항하므로 자칫 스파르타의 멸망을 초래하기 때문이다.[4] 전투보다는 당시 아테네를 휩쓸었던 전염병이 더 큰 문제였다. 이로 인해 아테네의 수장이었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면서 아테네에서는 고만고만한 자들이 하는 중우정치화하였고 결국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였다. 다만, 스파르타도 이겼다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웠었다. 그리스에 퍼진 하층민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동경했고, 귀족층들은 과두정을 선호했다. 결국에는 모든 국가가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의 과격한 과두정에 치를 떨어서 겨우 1년도 안 되어 민주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5]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 당시 때, 아테네 제국이라며 깠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상은 달랐다. 각 도시 국가들의 귀족층들이 스파르타의 과두정을 지지했어도, 그 밑의 중산층과 하층민들은 아테네가 만든 민주정을 흠모했다. 이는 현대 사람들이 포퓰리즘의 원조라고 까는 페리클레스가 하층민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기에 지지층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거기다 비록 아테네가 패배했어도 아테네가 남긴 민주정은 중하층민들에게는 여전히 흠모의 정치체계였다.[6]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해버렸다.[7] 그나마도 핵을 이루는 스파르타 완전 시민의 숫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3천 명, 레욱트라 전투 당시에는 1천 명 정도만 남았다. 나머지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편입시킨 여타 계급.[8] 스파르타 제1계급의 10배 가까운 노예가 있는 데다가, 이들 노예들은 온갖 학대와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스파르타를 증오하여 기회만 되면 들고 일어나려 했다. 더욱이 이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자유를 약속해놓고 뒤통수를 쳤으니 헤일로타이들이 스파르타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9] 후술하겠지만 스파르타는 희생이 요구되는 일은 주로 동맹군에 맡겼다.[10] 전성기 아테네의 인구는 30만~35만이었다.[11] 전성기 아테네는 '''단독으로''' 함대를 최대 200여 척 이상, 또는 중보병 2~3만을 움직일 수 있었다.[12] 그나마도 이 군사력조차 지속적으로 수가 줄어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단독으로 1만여 명을 동원할 수 있다던 중보병 중에서도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은 이 무렵엔 3천 명 이하로 떨어졌다.[13] 당시는 정예병력을 우익에, 일반병력을 중앙과 좌익에 배치하기가 상식이었다. 자신들을 좌익에 배치하면 적의 정예를 상대하게 되므로 손해가 아닐까 싶지만, 주 전력을 우익에 두는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만큼 전투의 양상도 ‘(정예인) 우익은 밀면서 공격하고, 좌익은 막거나 뒤로 슬슬 빠지면서 버틴다.’는 정형화된 패턴이었다.[14] 용감보다는 스파르타에서 패배자는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 죽기살기로 싸우기는 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사형이거나 죽을 때가지 싸워야 할 운명이었다. 그리스식 결투 훈련도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1계급 사람들은 패배(죽음)를 인정하면 안 되기 때문. 대신 놀이라는 핑계로 결투 훈련을 했다.[15] 운동경기로 유명했지만 원래 목적은 제우스에게 바치는 종교행사다.[16] 출처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7] 300여명 정도의 소수 정예 부대였는데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인권따윈 나몰라라 수준의 아고게와 달리 이쪽은 부대 병사들끼리 연인 겸 사제관계를 유지해서 군부대 내의 전우애 이상의 강력한 결속력을 얻는 것을 노렸다. 물론 이쪽도 소수정예부대인만큼 전력을 단련시키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못해도 스파르타식 아고게만큼 비인도적이고 무쓸모한 희생강요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18] 사실 신성부대의 파워 외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테베군이 무식하게 그 당시 정공법으로 덤비던 스파르타의 전술을 역이용한 전법을 썼다는 것이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중보병들을 12겹으로 평평하게 배치하는 매우 일반적인 진형을 썼는데, 이때 정예를 우익에 놓는 역시 이 시대의 일반적인 배치를 짰는데 테베군은 이걸 타파하기 위해 '''좌익을 50겹으로 짜고 신성부대에 기병까지 곁들여 우익으로 갈수록 뒤쪽으로 기울어진 사선대형을 짜버렸다'''. 스파르타의 정예병력이 모여있는 우익을 뚫기 위해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발상까지 뒤집었던 것. 이것이 혁신적인 전술인지, 아니면 당시 전술을 잘 활용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어쨌든 테베의 전술적인 시도는 성공적으로 먹혔다. 테베 신성부대를 포함한 '''스파르타의 우익을 깨기 위한 의도로 몰빵된''' 강력한 좌익이 스파르타의 우익을 먼저 해치워버리자 상대적으로 약한 중앙과 스파르타의 좌익도 함께 우수수 무너져내려버렸다.[19] 원래 사선대형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 한쪽에 병력을 몰빵한 것이다. 사선대형임을 간파당하지 않았을 때는 강한 진영을 통해서 상대의 한쪽 진영을 박살내고 약한 진영과 협공해 적을 무찌를 수 있지만, 간파당하면 오히려 적이 테베가 했던 방식대로 해서 사선대형으로 이기려고 했다가 사선대형 때문에 지는 꼴이 될 수 있다.[20] 의외로 테베도 자신들을 용에서 나온 전사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여 군사적인 면이 있었고, 아테네도 강력한 해군과 해적질, 식민지로 이름 높았다.[21] 이미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 남은 시민이 3000명, 이 수준이니 100명의 목을 쳐도 전 시민의 3%의 목을 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한다.[22] 스파르타 역사상 스파르타 시민권을 얻은 외국인은 고작 5명에 불과했다(...)[23] 흔히들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이 식민지들의 부를 수탈하여 경제를 유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의 자체적인 역량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이는 현재 대부분의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의 대다수가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대다수는 힘이 약해져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선진국들에다 아직도 세계에서 주름잡는 강대국은 많다.[24] 이 당시의 폴리스들 중 현대 그리스 공화국에서 한국으로 따지면 읍 단위로까지 떨어진 사례들 중에 테베와 스파르타가 있다. 그런데 도중에 외교적 일탈 행위 때문에 도시 자체가 흔적도 없이 파괴당한 테베와 달리 스파르타는 동로마 제국 시절까지도 도시 체계가 유지는 되었다. 급작스런 파괴가 아닌 유령마을 테크를 탄 것인데, 살기가 계속 나빠졌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25] 비용이 꽤 되긴 했어도 헤일로타이들이 농사를 지어 그 절반을 바쳐야 했기에 경제적인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26]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를 기점으로 보면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고작 전 시민의 3% 정도였다는 소리다.[27] 이전에는 스파르타인들이 저출산으로 인해 스파르타 인구가 급감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피임 개념도 없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스파르타 시민권을 취득한 외국인 수가 5명 정도밖에 안되었고 나중에는 도망자 처형 법률도 시행하지 않을 정도로 도망자들이 많았다는 점들을 보면 스파르타인들이 말기에도 아이를 많이 낳긴 했으나 그들 대부분이 스파르타 시민권을 포기하고 주변 국가들로 도망가서 그런 참극이 벌어졌다고 봐야 옳다.[28] 물론, 스파르타도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신자나 만혼자를 처벌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다. 그나마 완전시민 수가 1000명까지 줄었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 완전시민들이 장교단과 친위대를 맡고, 나머지는 페리오이코이들로 구성하여 버텼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 항쟁 과정에서는 여군도 동원됐다. 그만큼 군인 신분을 1계급 층에게만 나누어주다가 군인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구 감소가 문제였다. 인구 감소는 곧 그 나라 국력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29] 왜 그랬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정복군주들이 소위 생각하는 굳이 정복해보았자 나오는 게 없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스파르타는 군사들이 정예병이었다는 것만 빼고는 지나치게 검소한 생활만 추구한 나머지 문화적으로도 후진적이었고, 농업을 메시니아에게 의존해버린 탓에 그들이 독립한 뒤에는 농업기술도 형편이 없었다. 거기다 스파르타를 정복해서 군사로 쓴다고 한들 이미 인구 수가 적은 데다가 개개인의 전투력은 뛰어나도 집단으로 움직이는 훈련도 부족했다. 알렉산더와 필리포스 2세와 같은 정복 군주 입장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먹어보았자 나오는 게 없고 그냥 냅두자.'는 식이었을 것이다. 굳이 병사들을 희생해 가면서 볼품 없는 땅을 빼앗아 보았자 헛수고인 셈이니...[30] 얄궃은 사실은 라코니아는 사실 고대에만 해도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던 지역 즉 메세니아와 비슷한 신세에 있던 지역이었다. 2000년 뒤엔 역전(?)된 셈[31] 위에 보면 알겠지만 스파르타인은 사치를 멀리하였다. 이러니 대규모 건축물에 돈을 쓸 리가 없다.[32] 2계급은 주변국에 용병으로도 많이 활약했는데 아마도 간접적으로 경험한 스파르타의 군사훈련과 삶에서 나오는 유연한 사고가 그들의 명성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1차 포에니 전쟁 때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지휘관도 스파르타 출신 크산티포스였다.[33] 당장에 그리스권만 벗어나면 닥치고 복종이었다.[34] 이들 구성이 바로 완전시민 계급이다.[35] 주로 2계급 시민들이었던 페리오이코이가 주축을 이루었다.[36] 다만 이 시기 스파르타처럼 무조건 50세까지 병영생활을 할 의무가 있지 않았을 뿐, 신체 노화가 본격화되는 50세 이전까지는 지적장애나 중증 정신질환, 신체적 결손 혹은 암이나 심각한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이 없는 모든 일반 남성에게 전시 병역의무가 주어진 건 폴리스 대부분이 똑같았다. 당장 소크라테스만 해도 40대 중반의 나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끌려간 바 있으며, 이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아테네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37] 잘 쓰지 않는 말이긴 하나 아이를 낳는 입장인 여성은 씨'받이' 씨를 주는 입장인 남성은 씨'내리'라고 한다[38] 현대 기준으로 보면 조금 충격적인 문화지만 여러 이유로 남편이 주선해서 자신의 아내와 다른 남성의 육체적 관계를 이어주는 문화권은 은근히 있었다. 이런 문화권의 특징은 태어나는 아이의 수를 생각하는 것 조차도 사치라 여성 한명의 임신 가능성을 높이는 것에 더 집중한다는 것으로, 인구밀도가 너무 희박해 부족을 잇기 위해서는 외부인의 피까지도 가릴 처지가 안 됐던 유목민 환경이거나 스파르타같이 극단적인 교육제도로 가정생활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인 경우에 성행했다.[39] 저 위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경우, 스파르타군이 방진을 흐트러뜨리고 뒤로 도망치는 척 했다가 순식간에 방진을 다시 짜고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만티네아 전투의 경우, 방진을 현장에서 재배치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참고로 전장에서 한번 흩어진 방진을 다시 수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적이 보고만 있을 리 없으니까.[40]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가 바로 스파르타의 왕이다. 그런데 일리아드의 시대엔 스파르타가 도리아인의 나라도, 어딘가 맛이 간 군사국가도 아니었다. 이때의 스파르타는 미케네 계열, 쉽게 말해 아테네와 비슷한 성격의 그리스 국가다. 다만, 미케네 문명 시기는 청동기로 무장한 이륜전차 전사들이 중심이었으므로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고전기 그리스 문명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르다.[41] 그래도 개인차는 좀 있어서,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용장 레굴루스를 쳐부순 카르타고군 지휘관이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푸스였다. 다만 이쪽은 어디까지나 용병대장이었고 지휘관으로서 싸운 것일 뿐 지휘한 부대는 카르타고에서 고용한 용병들이었다.[42] 이 개념은 의외로 20세기 중반까지 그 영향력이 남아있었는데, 서구에서 유색인종 참정권보다 여성 참정권이 더 늦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쟁에 참여를 못하는 사람은 국가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 여성 참정권 운동이 사회적으로 크게 불붙은 것도 2차대전 시 여성들이 후방 보급 맡아 전쟁에 참여했고, 그것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43] 스파르타의 왕일지라도 일반 시민들과 똑같은 식사를 했다.[44] 노예가 빈 냄비를 들고 돌아다니면, 조원들이 빵 조각을 넣어 의사를 표시했다. 제대로 넣으면 승인, 찌그러뜨려 넣으면 반대라는 뜻.[45] 그리스어로 멜라스 조모스(μέλας ζωμός) 영어로 Black Soup, 혹은 Black Broth라 불리며, 돼지의 다리, 돼지의 피와 식초, 소금을 넣고 푹 우려서 만들었다. 영문 위키에 따르면 식초를 첨가한 이유는 유화제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고 쓰여 있다.[46] 이걸 못 내면, 시민권 박탈. 다만 정상적인 시민이라면 다 헤일로타이가 경작해주는 농경지가 있었으므로, 어지간해선 못 낼 일이 없었다.[47] 뭐, 그래도 많은 스파르타인들은 그냥 먹었는데 학생 때 식사로 먹었지만 그마저도 마음껏 먹질 못해서 성인이 되면 먹을 만했다는 듯[48] 만들어지는 걸 보면 맛이 없을 만하다. 일반적으로 돼지피는 굉장히 비린데 그 스파르타에서 향료를 첨가해 감추려고 할리가 없고, 간도 소금에다가 "식초"였다. 이러면 맛도 지사고 굉장히 비리고 시큼한 괴악한 요리가 튀어나온다.[49] 다른 판본엔 향락으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인 시바리스의 사람이라고도 한다.[50] 스파르타 여성을 묘사한 청동상을 보면, 남자 운동선수같은 전라#s-2가 아니라, 짧은 치마 차림이다. 사실, 그리스어 γυμνός는 한국어의 '벌거벗은'이나 영어의 naked보다 의미범위가 넓다.[51] 우락부락 하지 않을까 하면 오산이다. 여성은 남성의 그 우락부락함이 나오려면 극히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남성보다 더한 노력을 해야 가능하므로 그냥 몸짱이었다는 것.[52] 열등하지 않은 전사들은 마음에 드는 여성을 거의 마음대로 임신시킬 수 있었으며 우수한 전사라면 이는 남편에게도 영광이었다.[53] 플라톤의 《국가론》에도 '여자도 운동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기야 하지만, 여자가 허벅지를 드러내고 남자들과 함께 운동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럽기는 하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당대 아테네인들의 여성의 노출에 대한 사회통념을 반영하는 발언일 것이다. 그나마 플라톤은 여성 교육을 주장하는 등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관념의 소유자였는데도 이러하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안 봐도 뻔할 것이다.[54] 여담으로 인간과 공동조상에서 갈라진 침팬지도 수컷이 우두머리에 오르는 집단을 가지긴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우두머리 수컷은 암컷들에게 평판이 좋지 못하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55] 일부일처제가 많은 문명권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는 방식인 이유가 번식의 기회를 얻지 못한 남성이 집단에 많으면 사회 불안을 초래할수 있어서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도 보면 결혼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56] 앞에 나온 스파르타이아이들은 전 스파르타 인구의 5~10%였다.[57] 현대식 발음으로는 메'''시'''니아이다.[58] 뭐 엄밀히 따지자면 헤일로타이들의 조상들은 도리아인들이 침공해오기 이전의 원주민이고 스파르타는 도리아인들이 세운 국가이니 완전히 같은 민족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기원전 5세기에는 '그런거 상관없이 우리는 같은 그리스인이다'라는 인식이 뿌리내린 상황이었다. 단, 메세니아 역시 그리스 기록으로는 도리아인들이 지배하던 땅이었다. 도리아인의 조상인 헤라클리드(Heraclid)의 왕조가 그리스를 정복한 후 정복지를 왕자들에게 분배하였는데, 스파르타나 메세니아나 똑같은 정복지로 차이가 없었다. [59] 고대의 그리스인들도 지금처럼 하나의 민족이 아닌 여러 민족들이 있었는데, 서로 다르다고 여긴 민족들은 서로 노예로 삼기도 했다. 근데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민족들이 보기에도 같은 동족인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면서 노예로 삼은 것이다. 뭐, 자신들끼리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서 내로남불은 아니긴 했다. 아테네만 해도 멜로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멜로스에 쳐들어가 성인 남자들은 다 죽이고 성인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60] 단순한 경제적 착취는 어차피 전근대에서 많이 벌어지던 아니 심지어 근대나 현대에서도 지구 어디에서는 자행되는 일이다. 그나마 현대에서는 이를 명백히 비인도적으로 보고 있어 줄었을 뿐[61] 그 중에서도 용맹한 스파르타 전사들의 장렬한 최후라며 그리스에서 징하게 우려먹는 그 테르모필레 전투였다.[62] 영화 300이 비난 당하는 이유 중 하나가 마치 스파르타인 300명만 싸우다 전멸 한 것으로 아는데 이때 2천명의 헤일로타이도 메세니아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3] 그 외에도 술취한 여성과 노예를 잡아다 거리를 끌고다니며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64] 그리스에서 여러 전쟁이 일어날 때도 아테네가 다른 도시들에게서 지원을 요청할 때 군사력 최강인 스파르타가 매번 지원을 못한 적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메세니아 사람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군사들을 돌려야 해서였다. 스파르타가 왜 군사들이 뛰어난데도 정복 활동을 많이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며, 그만큼 정치 체계가 아테네보다 못했다는 소리다(...).[65] 특히 메세니아인들의 무기 소지와 군사 훈련 자체가 금지였다. 게다가 메세니아인들은 절대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장갑으로 제대로 무장하고 전투 훈련에 이골이 난 스파르타군을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실전 경험도 부족하며 열악한 무기로 무장한 메세니아인들이 이길 리가 없었다.[66] 여러모로 고트족과 비교하긴 하지만, 사실은 그 당시 고트족을 지배한 로마는 수탈만 했지 그들이 무기를 감추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이들을 볼모지 땅에 살도록 내버렸기에 그냥 넘어갔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들을 계속 경계해서 무기를 가질 수 없도록 철저하게 탄압했기에 메세니아인들이 무기를 들고 봉기할 때도 대부분이 농기구나 바위와 같은 걸로 싸워야 했다고 한다. 거기다 로마는 원래 타민족에게 어느 정도 자비로운 정도였지만, 하필이면 고트족을 담당하던 로마 귀족이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으로 찌든 인물인지라 이로 인해 고트족에게 강한 반발을 사서 그랬지, 로마는 타국가에 비해서 이민족들이 로마에 충성하면 잘 대해주던 편이었다. 사실 로마의 정책은 의외로 현대 사회에서도 그럭저럭 납득이 갈 수준으로 관대한 케이스가 꽤 있다.[67] 그리고 메세니아는 스파르타의 침입에 대비해 국경선에 요새와 성을 쌓았고 스파르타는 다시 되찾으려고 맹공을 퍼붓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68] 화폐가 철막대기 따위니 제대로 된 화폐가치가 있을 리가 없다.[69] 사실 제 아무리 군사훈련에만 몰두하는 인간흉기들이 모인 국가라 해도 도시국가인 이상 농촌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더군다나 고대니깐 말이다. 그렇다고 무역과 해운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메세네이가 스파르타 경제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스파트라가 메세니아를 상실한 이상 아무리 제2계급의 위상을 끌여올린다 해도 한계가 뚜렷했다.[70] 메시니아의 주도이며 올리브로 유명한 그곳 맞다.[71] '노인들이 '한때 우리는 용맹을 날리는 건장한 청년이었지' 라고 노래하면 청년들이 '우리가 지금 그러하니, 원한다면 직접 와서 보시지' 라고 화답하고, 그러면 소년들은 '우리 곧 누구보다도 훨씬 강건하게 되리니’ 라고 받아서 합창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72]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연령 집단을 섞어놓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기들보다 더 경험이 많은 연장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공동식사를 할 때에는 시내에서 행해진 고귀한 행동들이 거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거기에는 무례함이나 폭음, 사악함이나 음담패설 같은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이 식사하는 관습은 더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30세가 넘은 사람들은 집으로 걸어갈 때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밤길을 헤매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밤중에도 낮처럼 걸어야 했으며, 60세 이하의 병역의무가 있는 자는 횃불조차 밝힐 수 없었다.', 크세노폰, 『라케다이몬인의 국가제도』[73] '리쿠르고스는 여성에게 훈련을 가하였다. 경주, 씨름, 쇠고리, 창던지기 따위로 처녀들의 몸을 단련하여 튼튼한 모체에서 자녀들이 나며, 또 순산하게 되기를 도모하였다. 여자들이 부자연스럽게 안방에 숨어 있는 풍습을 버리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노출시키고 행렬 속에 끼며, 제례를 드릴 때는 남자들이 있어도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게 하였다. 남자들의 행동이 바르지 않을 때에 여자들의 야유는 질책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 장한 일을 해 여자로부터 칭찬받는 남자는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물러갔으며, 여자들의 농과 야유에는 심각한 꾸중의 칼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소에는 연장자뿐만 아니라 왕과 원로들도 임석해 있었다. 처녀들이 이와 같이 나체를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추잡하지 않고 점잖으며 순박한 기질을 양성하고 건강의 가치를 가르쳐 주며, 남자 못지않게 영예와 용기를 사랑하기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74] 사실 진짜 우물 안 개구리인 거 같기도 하다. 리디아 왕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그리스의 가장 강한 도시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신탁을 받았는데, 스파르타는 그 가장 강한 도시가 자신들을 뜻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리디아는 결국 페르시아에게 망했고 스파르타는 이에 분개하여 사신을 보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오니아 지방을 건드리지 말 것이며 이오니아를 건드릴 시 스파르타에 해명해야 할 것' 이라 주장했다. 문제는 이를 들은 페르시아 왕이 이오니아인 시종에게 '''"스파르타가 어디 있는 나라냐?"'''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 왕은 알면서 모른척 한 게 아니라, '''진짜로 몰라서였다.''' 분명 당시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국 반열에 있었다. 하지만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영토가 걸쳐 있고 당시 서아시아에서 일어났던 국가 중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한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스파르타란 한없이 작은 국가였다. 게다가 그때 페르시아 왕은 그 유명한 키루스 2세였다.[75] 당장 아테네의 시민들을 보면 상당수는 스파르타에서는 제2계급으로나 있을 이들이 많았다.[76]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 뛰어난 혈통의 후손이 조상들과는 달리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가 의외로 그런 부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뛰어난 사람들의 후손인 유럽 왕가면 해도 시간이 좀 흐르자 죄다 서로 어느 정도는 연관되어 있었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귀족들끼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경우도 흔했다. [77] 다만,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했다던 이탈리아의 타란토는 이런 사고 방식이 확립된 리쿠르고스 체제 이전에 건설된 경우라 위의 예시에 대한 반례로 상관없는 듯하다.[78] '이 곳에서 그는 크레오필로스의 후손들이 보존해온 것으로 보이는 호메로스의 시들을 처음으로 보고… 열심히 이것을 베끼고 정리하였다. 그것이 스파르타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국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호메로스의 이 서사시들은 이미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다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시를 일부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시를 최초로 만천하에 알려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리쿠르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리디아』[79] Plutarch, Lacaenarum Apophthegmata(스파르타 여인들의 격언들), 241f. 영어로 직역하면 "Either this or upon this,"라는 뜻. 300(그래픽 노블)에서는 레오니다스 1세의 왕비 고르고가 이 대사를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이 발언을 한 사람은 무명의 여인이라고.[80]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친 스파르타적인 인물은 아니었는데, 제자 플라톤으로 인해서 친 스파르타적인 이미지가 덧칠해졌다는 견해가 오늘날 들어와서는 대두되고 있다. 진정으로 스파르타를 흠모한 인물은 플라톤이라는게 일반적인 평가.[81]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스파르타 사회제도의 군국주의적인 요소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82]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이론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러시아인을 헤일로타이처럼 취급했다는 것.(근거)[83] 《The Making of Israeli Militarism》 By Uri Ben-Eliezer, Indiana University Press, 1998[84] 사실 크레토스는 스파르타로 유입된 이민자이므로 실제 스파르타의 사회 구조상 장군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85] 크레토스는 잠깐 신이 되었지 제우스가 신의 힘을 빼앗아 그를 인간으로 만들고 가이아도 크레토스를 인간으로 부활시킨터라 신이 아니다. 물론 신은 아니지만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자 반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