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전쟁
1. 개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두 헬레니즘 제국의 거성인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코엘레-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6차례의 전쟁.
2. 배경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지원으로 바빌론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가 가지고 있던 동방 영토를 차지하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함께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를 공격하여 기원전 285년에 데메트리오스 1세를 생포했다. 기원전 282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죽자 그의 차남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가 파라오에 즉위하고, 딸이자 트라키아의 왕자비였던 리산드라가 셀레우코스 1세에게 투항하여 남편 아가토클레스(리시마코스의 아들)를 죽인 리시마코스를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이를 받아들인 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전 281년에 벌어진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전사시켰으나 리시마코스가 죽자 셀레우코스 1세를 암살한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마케도니아 왕좌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케라우노스는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로 이주하는 켈트족에게 살해되고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장남인 안티오코스 1세가 갈라티아를 격퇴한 데 이어 그리스에서 근근히 버티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켈트족을 격퇴하면서 안티고노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는 3왕국 체제가 성립된다.
3. 제1차 시리아 전쟁(BC.274 ~ BC.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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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우세하의 무승부'''
셀레우코스 제국의 세력 확장을 도모한 안티오코스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지배하고 있는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안티오코스 1세가 빼앗은 영토를 모두 되찾았고 오히려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시리아에 가있는 동안 키레나이카의 마가스 왕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안티오코스 1세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간에 휴전이 성사된다.
4. 제2차 시리아 전쟁(BC.260 ~ BC.253)
'''셀레우코스 왕조의 우세하의 무승부'''
기원전 261년,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BC.324 ~ BC.261)가 사망하면서 그의 차남인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BC.284 ~ BC.246)가 즉위했다.[1]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에게 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안티오코스 2세에게 함대를 지원하였으며, 마케도니아 해군이 기원전 261년의 '''코스 해전'''에서 이집트 함대를 괴멸시키자 해군력을 상실한 이집트는 팜필리아와 이오니아 지방을 잃게 되었고, 안티오코스 2세는 밀레토스와 에페소스를 점령했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코린토스와 칼키스를 선동하여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고,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그리스로 철수하자 기원전 253년에 이집트와 강화를 체결한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인 베레니케와 결혼하였다.
5. 제3차 시리아 전쟁(BC.246 ~ BC.24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결정적 승리'''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와 결혼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는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게 된다. 기원전 246년,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는 겨우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안티오코스 2세와 함께 에페소스에 있던 라오디케 1세[2] 가 안티오코스 2세 사후 안티오키아에 있던 베레니케와 베레니케의 아들인 안티오코스를 살해했다.
같은 해,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죽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즉위하였다. 안티오키아로 와서 안티오코스를 왕위에 앉히게 도와달라는 베레니케의 요청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여동생인 베레니케가 라오디케 1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와 라오디케 1세 사이의 장남인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를 고용하여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의 셀레우코스 세력을 공격하였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키아까지 함락시킨 기세를 몰아 바빌론까지 진격했지만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해군과 벌인 '''안드로스 해전'''(BC.246)에서 키클라데스 제도를 빼앗겼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셀레우코스 2세에게 절망적이었는데 정작 제3차 시리아 전쟁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라오디케 1세가 셀레우코스 2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를 앞세워 아나톨리아에서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결국 기원전 241년의 강화 조약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키아의 외항 셀레우키아를 비롯한 시리아 북부 지역을 차지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2세는 이집트와의 종전 이후 어머니 라오디케 1세와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를 상대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3]
6. 제4차 시리아 전쟁(BC.219 ~ BC.217)
'''셀레우코스 왕조 우세하의 무승부'''
기원전 235년에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형 셀레우코스 2세에게 승리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아나톨리아 영토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29년에 '''하르파소스 전투'''에서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1세에게 패전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도주한 트라키아에서 살해되었고, 셀레우코스 2세 또한 2년 뒤인 기원전 225년에 사망했다. 셀레우코스 2세가 죽자 그의 장남인 알렉산드로스는 즉위 후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로 이름을 개명하고,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를 정벌하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진군했으나 기원전 223년에 암살되면서 마침내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3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동쪽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반란을 진압한 안티오코스 3세는 간신 헤르미아스를 죽인 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사후(BC.222) 파라오가 된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의 등장으로 시리아를 되찾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달리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불신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간신 소시비오스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탓에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왕권은 미약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시리아로 진군한 안티오코스 3세는 제3차 시리아 전쟁에서 상실한 영토를 탈환한 뒤 이집트를 침공하였으나 '''라피아 전투'''에서 의외로 선전한 이집트군에게 패전하면서 이집트의 영웅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강화를 맺었다.
7. 제5차 시리아 전쟁(BC.202 ~ BC.195)
'''셀레우코스 왕조의 승리'''
라피아 전투 이후 소아시아에 남아있는 반란자 아카이오스[4] 를 죽이고 '''동방 원정'''(아나바시스)을 감행한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 사후 다시 내분에 빠진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어 이집트 이외의 영토를 정복하고 공유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요르단 강 인근의 '''파니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에 개입하기 시작한 로마가 필리포스 5세와 안티오코스 3세에게 이집트 자체를 침공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로마가 이집트에서 많은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딱히 이집트 본국을 침공할 생각이 없던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의 요구를 받아들인 뒤 이집트가 점령한 카리아와 킬리키아 해안으로 군사를 돌린다. 내분으로 혼란을 겪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가 코엘레-시리아를 차지하고,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8. 제6차 시리아 전쟁(BC.170 ~ BC.168)
'''셀레우코스 왕조의 승리, 로마의 간섭으로 무용지물'''
안티오코스 3세가 '''마그네시아 전투'''의 패전으로 아나톨리아 영토를 상실한 뒤, 그가 안정시킨 동방 영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섭정인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셀레우코스 4세(BC.218 ~ BC.175) 사후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6세가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정작 안티오코스 4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군이 키프로스 섬과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까지 진격하는 기염을 토하자 이집트인들은 전쟁을 일으킨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를 전복하고, 새로운 섭정으로 코마누스와 키네아스를 선출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그의 조카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로 하여금 이집트를 속국화하려고 했으나 이에 반발한 이집트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통치자로 선포했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한 안티오코스 4세는 겨울이 되자 군사를 물렸다. 안티오코스 4세가 물러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서로 화친하였고, 이렇게 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꼭두각시로 삼아 이집트를 통제하에 두고자 했던 안티오코스 4세는 다시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러자 이집트는 동맹국인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원로원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외교 사절로 파견했다. 그런데 라이나스는 안티오코스 4세에게 즉시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철수하라며 모래 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원을 그릴 때 까지 철수할 것인지 로마와 전쟁을 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였고, 로마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안티오코스 4세는 울분을 삼키며 결국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토해내고 물러나야만 했다.
9. 이후
제6차 시리아 전쟁을 마지막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간의 전쟁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이집트는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유대의 마카베오 전쟁 이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난 안티오코스 4세가 죽자 셀레우코스 왕조는 기나긴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를 탈환한 안티오코스 7세의 죽음을 끝으로 완전히 몰락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주변국들의 완충지대가 되어 명맥을 이어가다가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면서 멸망하고 만다.
10. 기타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에서 "남쪽 나라의 왕이 북쪽 나라의 왕과 세상의 마지막 때에 모든 군대를 이끌고 처참한 대규모의 전쟁을 벌인다."라는 내용은 바로 이 시리아 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쪽 나라의 왕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고, 북쪽 나라의 왕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이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그는 하늘 군대 사령관까지 업신여기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고, 성소의 터까지 파헤쳤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욕을 퍼부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을 못살게 굴 것이다. 축제일과 법마저 바꿀 셈으로 한 해하고 두 해에다 반 년 동안이나 그들을 한 손에 넣고 휘두를 것이다."라고 맹렬하게 저주한 인물은 바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국왕인 안티오코스 4세이다. 왜 안티오코스 4세가 다니엘서에서 저주의 대상이 되었느냐 하면, 실제로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한테 그들이 숭배했던 유대교의 율법을 버리고 그리스인들이 섬기던 제우스 신앙을 숭배하라고 강요하는[5] 등 유대교를 심하게 핍박했기 때문이다.[6][7]
그런데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는 개신교 성직자들과 신흥 종교의 교주들은 저 다니엘서의 구절을 가지고 "이건 장차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전쟁이며,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알리는 예언이다! 그러니 머지않아 다니엘서의 내용대로 세상의 종말이 일어난다!"라고 선전하며 신도들을 겁주는데 쓰고 있다.[8][9]
[1] 안티오코스 1세의 장남인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67년에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2]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차남이자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의 동생인 아카이오스의 딸[3] 라오디케 1세는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4]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차남인 아카이오스의 손자.[5]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말한 "가장 흉측한 유다의 우상"은 바로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에 강제로 세우도록 명령했던 제우스 신상이다. 이 제우스 신상은 유대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상대로 벌인 독립전쟁인 마카베오 전쟁에서 승리한 후, 분노한 유대인들에 의해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철거되었다. 그런데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는 개신교 성직자들은 저 "가장 흉측한 유다의 우상"이란 구절을 가지고 미래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우상이라며 왜곡하고 있다.[6] 다만 다니엘서의 저자(예언자 다니엘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사칭한 기원전 2세기의 어느 유대인)는 안티오코스 4세가 지중해로 떠났다가 죽었다고 기록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안티오코스 4세는 지중해와 정반대 방향인 페르시아 쪽으로 떠났다가 죽었다. 이를 두고 류상태 목사는 다니엘서의 저자가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다니엘서를 적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예언이라고 적어놓았다가 틀린 셈...[7] 참고로 다니엘서를 쓴 저자가 기원전 2세기 시리아 전쟁을 목격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정황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으나, 자신이 산 시대보다 약 3세기 전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일은 잘 모르기 때문에 키루스 2세가 유대인들을 돌려보내는 과정에서는 오류가 굉장히 많다. 물론 이 사실 역시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교에서 가르치지만, 성서무오설이 주류인 한국 기독교에서는 아직까지 목사들이 이 사실을 신도들한테 제대로 안 가르치고, 다니엘이 마치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서 자신이 살았던 시대보다 약 3세기 후인 시리아 전쟁의 상황을 신통방통하게 다 맞췄다고 왜곡해서 가르친다...[8] 특히나 휴거 같은 시한부 종말론 소동이 판을 치며 세기말의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했던 1990년대 초반에는 상당수의 개신교 성직자나 지식인들이 저 다니엘서의 구절을 가지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주장들을 마구 늘어놓았다.[9] 사실 웬만한 신학교에서 다니엘서의 내용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쟁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가르치는데도 그들이 신도들한테 다니엘서의 내용을 가지고 시한부 종말론과 연관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유는 그래야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돈을 바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