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

 


朝報
1. 개요
2. 상세
3. 현대책으로 발행
4. 기타


1. 개요


조선시대신문으로 폭은 35cm에 길이가 일정치 않은 낱장의 종이초서체로 쓰인다.[1] 조보에 대한 기록은 중종 15년(1520년)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으니 적어도 중종대부터 발행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에서 조보와 비슷한 매체를 일찍히 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2. 상세


조선왕조실톡에서 만화로 그린 조보에 대한 내용 보다시피 '기별'이라고도 한다.
현대적인 신문의 조건인 날짜 기록, 정기적인 정보전달, 날씨부터 다양한 기사들을 기록할 것 등등 현대 신문의 조건을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기자, 제목 이런 건 없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 승정원에서 제작 유포되었으며 임금에게 올라간 상소문이나 조정의 인사이동, 중국일본의 소식 등 다양한 기사들이 올라갔으며 매일 아침 이렇게 작성된 조보는 임금에서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볼 수 있었으며 조보의 내용을 베껴 쓴 [2] 관보는 고위 관료와 양반계층에 한해 배달이 되었다. 관보는 먼 지방에 있는 관료나 귀양 간 선비들에게도 일주일, 한 달치 등이 모아져서 전달되기도 했으며 중요한 정보전달매체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이미 목제 활자와 금속활자가 존재했음에도 손으로 베껴 쓴 이유는 정보의 대량 유통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조정의 소식이 외부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활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3]
어쨌거나 이러한 조보가 초서체이고 활판인쇄도 되지 않다 보니 초서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선조대인 1577년에 민간업자들이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민간 조보가 목판 인쇄되어 상업 발행되었는데 사대부나 글 좀 아는 백성들 사이에서 가독성이 좋은 데다가 누구나 면포 조각이나 곡물을 낸다면 [4]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선조가 조보의 발매가 민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국가기밀의 유출을 우려, 크게 분노하며 해당 민간업자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고 민간 조보 발행을 허가 낸 관료들도 좌천시키며, 민간에서의 신문제작은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율곡 이이가 윗대가리들은 죄다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하면서 아랫놈들만 고생한다고 대차게 깠던 적이 있었다.
조보는 근대적 신문의 최초이자 원류로 불리는 독일의 렐라치온, 아비소보다 무려 30년 먼저 앞서 발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7년 4월, 조선 시대의 민간 조보가 현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 조보는 1577년 인쇄물로 세계 최초의 상업 일간지이자 활자신문으로 경북 영천 용화사의 지봉 스님이 경매 사이트에서 입수하였다.(#1, #2)
원칙적으로는 위에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었지만 몰래몰래 빼가다보니 심지어 오사카에서 조선의 과거시험 합격자를 알아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3. 현대책으로 발행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8년에 조보 일부분을 모아 원문을 한국사료총서 제52집 세권으로 발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
1859년(철종 10)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약 33년 간에 걸쳐 발행된 조보들로 약 1,350편이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 소장본만 모아 발행한 것으로 타기관이나 기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조보들은 편철하지 못한 것이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해제 항목을 참조.

4. 기타




조선 중종 때부터 시작하여 수백여년간 계속 신문을 제작해왔기 때문에 여러 황당한 에피소드도 많다고 한다. 글씨를 너무 못 써서(...) 탄핵까지 당한 기자(1600년(선조 33년) 이형원), 국가기밀 누설방지를 위해 이 부분은 빼라고 오프 더 레코드를 걸어놓은 기사를 몰래 게재해버린 기자(1597년(선조 30년), 1632년(인조 10년)), 중국 요동 지방이나 일본 지역까지 신문을 배달해댄 일, 정치인들의 여색 관련 문제들만 미친듯이 파헤치던 기자(1612년(광해군 4년)), 임금만 볼 수 있던 탄핵상소문을 전국에 속보로 올려버린 기자(1621년(광해군 13년)), 신문기사로 이조판서까지 낙마시켜버린 기자(1569년 이조판서 박충원) 등등이 있다고 한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보도지침' '오프더레코드'를 어긴 조선의 기자

[1] 1890년5월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의 기록[2] 많은 양을 베껴 쓰느라 글씨를 빠르게 쓰게 되어 글씨를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3] 다만 중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조보를 발간했는데 이때는 활자를 이용해서 인쇄했다고 한다.[4] 당시에는 쌀이나 면포가 화폐의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