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기원전 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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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조선의 왕으로, 시호와 휘, 재위기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기자조선설을 따르면 기자조선의 국왕이며 기자조선을 부정하면 토착 고조선 왕계(단군조선)의 왕이다. 기자 자서여의 후손인 칭왕한 조선후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칭왕한 조선후가 연역왕과 동세대의 사람이고, 조선왕이 소양왕과 동세대의 사람이므로, 둘은 조손 관계로 추정되고 사이에 한 명의 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략에서도 조선후(전국시대 시기)의 아들을 거쳐 손자 시대에 가서 연(춘추전국시대)의 침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상세
이 당시 고조선은 요녕성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를 통치하는 나름대로 세가 강한 나라가 된 듯하며 기원전 4세기 무렵 전국칠웅 중 하나인 연과 대립하였으며 당시의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한 오랑캐라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상태였다. 그러나 명군인 연소왕 이후 강성해진 연은 BC 3세기 조선왕이 재위하고 있을 때 진개가 이끄는 군대를 중심으로 원정해 들어왔으며, 조선 및 요서 지역의 제 민족은 (기록에 따르면)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을 연과의 경계선으로 삼았다.
이 때를 기준으로 심양 및 요양 지역에서 고조선의 문화가 사라지며 이후 알수 없는 경로를 통해 한반도 북부, 정확히는 평양 및 평안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선이 재탄생한다.
청주 한씨 족보와 속기자지[2] 에 따르면 진개의 침입[3] 이 있었던 기원전 281년의 고조선(기자조선)의 군주의 시호는 현문왕(顯文王) 휘는 석(釋)이라 하나 '''근거는 전무하다'''.
3. 문헌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 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그 뒤에 연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 동호)에 인질로 갔는데 호가 그를 지극히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깨뜨려, 동호가 1000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찔러 죽이려 한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다. 연은 또 장성을 쌓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으며,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고 동호를 막았다. - 《사기》 흉노 열전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그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조선왕)''',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에 조선이 약해졌다. - 《위략》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연의 전성기 때부터 일찍이 진번 · 조선을 공략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 《사기》 조선 열전
[1] 다만 당시에 성씨가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가 없다. 기씨나 한씨로 표현하는 것은 대개 후대에 족보를 만들거나 유교적 관점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져다 붙였을 것이다. 특히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는 마당에 기씨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기로 한다.[2] 윤두수등에 의해 1580년에 편찬된 기자와 기자조선에 관한 야사 자료집인 기자지를 재정비 한 것으로 1879년에 편찬되었으며 18세기때 야사로서 언급되던 기자조선과 마한의 왕계보도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였다.[3] 정작 속기자지에 따르면 실제 진개의 침입보다 약 100년전대의 기원전 4세기의 설문왕(說文王) 하(賀) 재위기때 진개가 요서에 침입하였고 실제 역사와 다르게 반대로 병사 3만 명을 매복시켜 연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한다. 아마도 설문왕(說文王)과 현문왕(顯文王)의 시호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속기자지 기록 당시 오류가 있었거나, 숭조 작업의 일환으로 의도적으로 한 세대를 끌어올려서 패배의 기록을 와전 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