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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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나라의 왕족. 주왕의 삼촌 또는 서형(庶兄)으로 전해진다. 상나라 영토의 북쪽 끝으로서 토방(土方), 귀방(鬼方) 등으로 불릴 정도로 북방 이민족의 세력이 강성하던 곳인 '''기(箕) 땅에 봉해진 자작(子爵)'''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1][2]
본명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상나라의 왕성은 자(子)였고 기 땅에 봉해졌으니 자성 기씨(子姓箕氏)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풀네임은 자서여(子胥餘)/자수유(子須臾) 혹은 기서여(箕胥餘)/기수유(箕須臾)가 된다.
한국인에게는 기자조선설로 유명한 사람. 관련 논쟁으로 인해 기자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춘추전국시대 문헌인 상서(尙書), 주역(周易), 논어(論語) 등에 공통적으로 현인(賢人)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회의적이라도 기자라는 사람이 고대 중국에서 어떤 형태로든 실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 행적
2.1.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기자의 주요 행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기자는 상나라 말기 주왕이 사치를 부리는 것을 보고 주왕에게 간언했으나 주왕은 오히려 기자를 옥에 가두었다.[3] 이때 유명한 '상아 젓가락' 고사가 나온다. 주왕이 매우 귀한 코끼리 상아[4] 로 만든 젓가락을 얻게 되자, 기자는 '상아 젓가락을 쓰면 그릇도 흙으로 만든 그릇이 아니라 뿔이나 옥그릇을 써야 할 것이고, 그 그릇에 담는 음식도 코끼리나 표범의 고기처럼 진귀한 음식을 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고대광실에서 살아야 할 것이니, 젓가락에 맞는 격을 찾다 보면 천하의 재물을 동원해도 모자를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사치를 그만둘 것을 간언했다는 이야기. 이는 한비자[5] 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 역성 혁명으로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면서 무왕(주)이 기자를 풀어주었다.[6] 이 시점 이후 기자는 전설적인 통치의 방법인 홍범 9주를 무왕에게 전해주었다고[7] 하는데, 이는 이전부터 전해지던 현인(賢人)으로서 기자의 모습을 투영한 후대의 술작이라는 설도 있다.
그 외에 입조했다는 설이 『죽서기년』 무왕(주) 편에 짤막하게 보이며,[8] 이후에도 주 무왕이 그를 박해하자 기자가 미친 척을 했다든가 기자가 상서로운 일을 예측했다거나 하는 몇 가지 설이 더 있으나 기자가 현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구절로서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상나라 멸망 후 그 도읍인 은허를 지나며 옛 도성과 궁궐 터가 황폐해진 것을 보며 슬퍼했다는 맥수지탄의 고사는 사기에도 실려있다.
2.2. 기자 동래설, 기자 피봉설
한중 사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구절은 기자 동래설과 기자 피봉설이다. 기원전 3세기의 사료인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풀려난 이후 주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서는 조선으로 몸을 피했으나(기자 동래설), 무왕이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기자 피봉설) 기자가 내조하여 홍범을 전했다고 한다. 반면 『사기』 송미자세가에서는 기자가 주 무왕에게 홍범을 가르친 이후 기자는 동쪽으로 떠났고(기자 동래설), 주 무왕은 이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기자 피봉설) 기자는 주에 입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는 문헌 사료로 볼 때 기자 동래에 관한 기록이 기자 당대보다 800년 이상 이후의 시점에서야 등장하며 그 또한 중국이 조선을 인식하고 복속시키려 한 진 대 · 전한 대임을 들어 후대의 사료 윤색으로 보고 이를 부정하고 있다. 다만 제한적으로 중국계 유이민의 흔적으로서 기자 관련 기록이 부각되었다든가, 『위략』에서 조선이 주를 받들기 위해 연에 맞서 왕을 칭하고 연을 침공하려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이 기자의 후예를 자칭해 정통성을 얻으려 했다는 주장 등은 제한적으로 나온 바 있다. 반면 중국 사학계에서는 '기자명이(箕子明夷)'를 '기자가 이(夷)를 교화했다(明)'는 식으로 『주역』 명이편을 해석하여 이를 중국의 조선 방향 통치로 주장하는 의견도 일각에서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는 괘의 이름에 불과하다.
이 구절을 한국 사학계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주 대에 중국계 청동기가 도착한 한계는 하북 ~ 요서 지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랴오닝 성 카줘 현(객좌현)에서 기(㠱) 명문 그릇이 발굴되어 기자가 요동 진출했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이 그릇 또한 하나의 발굴지에서 다양한 명문의 그릇들이 동시에 발굴되었다는 점[9] , 기(㠱) 명문 그릇이 다른 곳에서도 출토되었다는 점 등으로 인해 기자로 추정되는 '기(㠱)'의 활동 지역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재 한국 사학계는 관련 사료 및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기자 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기자가 이주해 온 것이 분명하다면 정황상 그가 다양한 신 문물을 가져왔어야 할 것인데,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라 문화적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물 측면에서도 딱히 다른 문화의 급격한 유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약점인 것이다. 더군다나 단순히 귀화인이나 다른 나라에서 넘어온 정치 거물 정도도 아니고, 새로 이주해온 땅의 기존 사회 지배 계층으로 유입되었다면 분명히 눈에 띄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현재 고고학적으로 중국계 청동기의 도래는 기자 조선과는 시대가 맞지 않고, 그마저도 굉장히 점진적인데다 도입에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기자가 있었던 지역에 발견되어야 하는 '기후명(㠱侯銘) 청동기'[10] 가 고조선 강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어쨌든 '중국의 현자 기자가 고조선으로 책봉받아 온 것'은 현대적 연구방법이 도입되는 19세기 이전까지는 거의 계속 사실로 믿어져 왔다. 기자에 대한 숭배 기록은 7세기 '''고구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등과 함께 섬겼는데, 정작 중국 측에서는 이를 음사(淫祀), 즉 '중국 중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신들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제사'로 보았다고 한다. 이후 통일신라에 대해 당현종이 '큰 현인(大賢)'의 가르침이 신라에 미쳤다는 말과 함께 보낸 국서가 있는데, 이 '큰 현인'은 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최치원이 당나라에 쓴 '양위표(讓位表)'에서도 기자가 등장한다. 고려 시대에는 11세기 이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이 확립되었으며, 숙종 때에 숭인전(崇仁殿)이라는 이름의 기자 사당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원체 기자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정작 현대 한국인이 고조선의 시조로 여기는 단군과 관련해서는 고려 중기 기록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서 '선인(仙人) 왕검(王儉)'을 언급한 짧은 기록 외에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고려 후기 삼국유사 이후 13세기 후반에 단군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유학자들에게는 기자가 큰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적 토대가 필요한 조선 건국까지는 단군에 대한 인식이 기자에 뒤쳐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단군과 기자에 대한 숭배는 '사대적'이라고 허구헌날 까이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균형이 맞게 된다. 고려 시대에는 기자에게만 제사가 치러졌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야 숭령전을 만들어 단군과 기자를 함께 제사 지내고 '개국'과 '교화'의 두 의미를 함께 부각시킨 것이다. 물론 양측의 의미가 달랐기에 학문적 성향에 따라 어느 한쪽을 띄운 학자들도 있었으나, 국가에서는 양쪽 모두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참고로 고려의 경우 '개국'의 자리를 동명성왕이 먼저 꿰차고 있었기 때문에 단군의 필요성이 떨어졌던 것도 있다.
이는 단순히 모화(慕華)사상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고려에도 모화사상은 존재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거란족의 요나라가 유목민족 출신인 데다 친척인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몹시 경멸했다(만부교 사건). 고려 성종은 유교식 예제와 중국식 율령 체계를 고려에 도입했다. 고려 문종은 요나라와의 단교를 주장할 정도로 북송과의 교류에 관심이 많았고, 그 아들인 숙종 때 기자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는 배경이 된다. 또 송나라에는 고려 사신들의 시 모음집인 소화집(小華集)이 출판되었는데, 소화 자체가 소중화, 즉 작은 중국을 가리킨다.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고려 시대에 없던 단군 사당을 기자 사당 옆에 중건'''한 바 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둘 중 기자를 조금 더 쳐주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차이를 안 두려고 노력했다. 즉 '''단군을 인정하면서 한국의 기원을 요순시대로 끌어올리고, 기자를 인정하면서 중국에 비교해도 한국의 문화가 부족한 것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즉 단군이 조선의 '''독자성'''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기자는 조선의 (당대 중화 문명에 대한) '''보편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것.
사실 기자 숭배를 무조건 사대주의와 연결 짓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민족 의식의 측면에서 기자 존숭 또한 중국에 대한 조선인들의 자존심 표출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11] 기자는 ≪상서≫, ≪주역≫, ≪논어≫ 등의 경전에서 대현인으로 부각되는데, 그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음은 한마디로 공자 이전의 원시 유학이 이미 조선에 유입되어 있었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12] 즉 화이관에 의해 조선을 중화세계의 밖의 오랑캐라고 깔보는 중국인들에게 "우리 조선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나라와 주나라의 태사였던 기자께서 직접 다스리며 교화하신 나라다. 그러니 우리를 깔보는 건 중화세계의 대현인을 욕보이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받아칠 수 있게 되는 것. 더구나 명나라는 초기에 몽골을 쳐바르고 베트남을 밟는 등 비중국인 이민족에 대한 초강경 정책으로 일관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대국의 강압적 외교 정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림파 집권 이전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잘 드러나는데, 실제 원구단 폐지 논쟁 때만 하더라도 명나라는 원구단(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을 없앨 것을 요구했다.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조선이 동방에 있으므로 '동방청제(東方靑帝) 신위'만 받들자는 반칙적 제안도 있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 천 년이 넘도록 하늘에 제사를 받들었으므로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이라고 해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였다.
조선의 예법을 살펴보면 천자국 예법과 제후국 예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신라나 발해, 고려 때에 비해 천자국 예법의 용례가 줄어들고 외왕내제가 약화되긴 했지만 외왕내제적 성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하나의 예로 태조니 세종이니 하는 묘호도 사실 제후국은 사용하지 못하는 용어임에도[13] 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꿋꿋이 썼다. 이건 사실 조선 초기 관학파들의 영향이 남은 것이다. 이들의 성리학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과는 상당히 달랐고, 이는 정도전이 죽은 다음에는 더더욱 그랬다. 고려 시대에는 팔관회적 질서를 통해서 은근히 외왕내제를 이어갔고, 조선 역시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이 영향을 받았다.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는 이런 성향이 약해지게 되는데, 단적으로 조광조는 소격서 폐지를 건의하면서 '''조선 왕이 명나라 천자처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광조가 죽자 중종이 소격서를 복구시켰던 것처럼 조선 왕들이 기존의 전통을 방패 삼아 조선 초기의 흔적을 유지해 나갔다. 이것이 조선의 예법이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대내적으로 오락가락하는 이유이다.
한국의 선우(鮮于)씨, 기(奇)씨, 한(韓)씨는 이 기자를 조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 성씨의 족보에는 기자 조선의 왕계와 더불어 기자의 후손 준이 남하하여 마한의 왕이 되었고, 마한의 8번째 왕의 아들 셋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동하면서 성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모화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고조선 당대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고려 시대에는 이 청주 한씨가 고조선의 후예로 인정되어 기자에 대한 제사를 맡는 관직을 세습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모든 세습 관직이 없어지고 단군과 기자에 대한 제사는 국가의 주도로 행해졌다.[14]
기자 전승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정전제 등 (후에 유교계의 모범이 되는) 상나라의 문화를 도입했다고 전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성리학계에서는 기자 조선을 왕도의 덕치를 이룬 국가라면서 숭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북위 낙양성의 영향을 받아 잘 구획된 고구려의 평양 궁성 유적이 발굴되자 이를 '기자의 정전(井田)'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1607년(선조 40년)에 사대부 한백겸(韓百謙; 1552년 ~ 1615년)이 이 유적을 발견했는데, 그는 이를 보고 '이 땅에 기자가 왔다는 증거가 나타났다.'며 기뻐했고, 조정과 여타 사대부들도 모두 환호했다고 한다. 수천 년 전부터 조선이 당당한 중화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이 실증되었으니 당대인으로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발견이었을 터이다. 이후 간행되는 평양 지도와 풍경화에는 꼬박꼬박 기자 정전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15] 동사강목에도 한백겸의 이 주장을 그대로 실어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16] 및 기자 조선 정통론을 주장하였다.
2.3. 후대의 기록
이후 기자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책봉 기록과 최치원의 양위표 등에 나타나며, 평양을 수복한 고려 대에 들어 숙종 때인 1102년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진 것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와 조선 시대에 크게 숭배받았다. 이때 평양에 조성된 것이 기자묘 · 기자정(井, 우물) · 기자정전(井田) 등의 유적인데, 단군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으로 기자의 사실성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중국 측에서는 양(梁)나라 몽현(蒙縣) 지방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한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단군 신화 중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환웅이 거시기가 거대해서 짝이 없자(...) 곰이 자청해 관계를 가져 단군을 낳고, 그 다음으로 여우와의 관계에서 기자를 낳았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기자 조선설은 기자 조선 - 삼한(준왕) -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중화사상적 정통론으로 수용되어, 소중화 사상적인 입장에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크게 숭앙받았다. 다만 기자가 고조선으로 동래한 후에는 중국왕의 신하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도출된 것을 보면 기자조선설을 보다 자주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 기자에 관한 설이 만선 사관에 입각한 식민사관으로 악용되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여담으로 민족주의 사관의 입장에서 중국에서 온 사람이 한반도 왕조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불편하게 생각해 기록이 날조되었다거나 실은 한반도 계통의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의외로 그 민족주의 사학의 거두로 꼽히는 신채호는 기자를 실재한 적 없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부정하거나 실은 우리나라 사람인데 중국 사람인 것처럼 기록되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그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기자조선의 기록을 일단은 인정한다는 입장이었고, '''"단군과 비슷한 시기에 기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나라에 왔었구나" 정도로만 보면 된다'''는 것으로 조선 시대 학자들과의 차이라면 3천 년 전에 기자라는 사람이 있어서 단군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우리나라에 온 것도 맞지만 그가 우리나라에 왔다고 해서 단군의 조선이 기자의 조선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식의 왕조교체까지는 없었다고 본 정도(출처: 조선사연구초)
이런 기자조선의 잔재는 평양의 지명에도 남았다.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은 기자의 땅이란 뜻의 기성(箕城)으로 불렸으며, 평양에 주재하며 평안도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평안도 관찰사는 기백(箕伯)이라 불렀다. 관찰사의 다른 호칭으로 도백(道伯) 또는 방백이라 불러서 각 지역 관찰사들은 그 지방을 뜻하는 글자를 따서 호칭을 붙였다. 가령 함경도관찰사는 북백(北伯), 전라도관찰사는 완백(完伯)으로 불렀다.
3. 삼한정통론
조선시대에서는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삼한 정통론이 나오는데, 삼한 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후기 국학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없고 적통인 기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17]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또한 위만 조선 이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에 대해서도 기자(箕子)를 봉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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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 할 수 있다.
4. 언어학적 일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고대 한국어로 왕이라는 뜻의 '길지(吉支)'[18] 라는 말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중국의 기자와 혼동되어 기자가 조선왕이 되었다는 식으로 오해된, 일종의 민간어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9] 조선 선조 대에 발간된 광주판 천자문에서 皇자와 帝자에 대해서는 '님금'이라는 훈을 달았으면서 유독 王자에 대해 '긔ᄌᆞ 왕'이라는 훈과 음을 달고 있는 것이 그 증거. 해당 내용은 광주천자문/원문, 어라하 문서 참조 바람.
5. 기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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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기자릉(箕子陵).''' 평양 기림리에 있는 기자의 가묘. 실제로 기자의 유해가 묻힌 것은 아니고, 중국 은나라의 현인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 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 동래설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즉 엄밀히 말하면 가묘라고 할 수 있다.
유홍준의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1998년)에 따르면 기자묘자리 근처를 지나던 중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의 마지막 장면을[20] 기억해 낸 유홍준이 안내인들에게 기자묘에 대해 물었을 때 지금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금수대라는 정자가 들어 섰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경도된 북한 정권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기자에 대해 남한 이상으로 부정적 입장이었기에, 1959년 김일성의 지시로 파헤쳐졌다.[21][22]
6. 기자와 기자조선의 왕들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 목록
7. 같이보기
8. 둘러보기
[1] 이와 달리 공자, 맹자에 붙은 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부자(夫子)의 약자로, 작위가 아니다.[2] 자작에 봉해지는 자들은 사실 이민족 우두머리라는 뜻에 가깝다.[3] 『논어』 미자편, 『죽서기년』 신제편, 『순자』의병·정론편.[4] 상주 시대에는 코끼리가 중원 지역에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를 잡는 것 자체는 여전히 어려우니 당시에도 상아 젓가락이 비싼 사치품이란 것은 큰 차이가 없다.[5] 한비자 제22편 설림(상).[6] 『상서』 주서 무성편, 『순자』 대략편.[7] 『상서』 주서 홍범편.[8] 『주역』 명이 편에 기자명이(箕子明夷)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기자가 때에 맞춰 몸을 피한 것이 『주역』 명이괘와 같다는 뜻이지 문장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다.[9] 즉 한 집안에서 제사를 지낸 흔적이라고 보기보다도 모종의 이유로 여러 지방의 청동기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10] 기후(㠱候)라는 글자가 적힌 청동기. 㠱=箕.[11] 따지고 보면 서양권의 경우를 보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같은 직접적인 로망스어권은 물론이오, 지정학적으론 연결성도 훨씬 약했던 영국, 독일 같은 나라들도 '로마의 후예' 운운하며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세웠지만 이걸 두고 '사대주의' 운운하며 폄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 한국의 역사 인식에서 모화 사상에 대한 비판은 비역사적이며, 이는 전근대 시절의 사대를 외세 의존이라며 저주했던 일제시대 민족주의의 영향과, 전근대 시대의 문화적 영향력은 상실한 채 하드파워만 강한 현대 중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는 현실의 요소가 가장 크다.[12] 그리스나 로마의 유명 철학자인 플라톤이나 세네카 같은 인물들을 떠올리면 된다.[13] 그래서 중국(명나라, 청나라)과의 외교 문서에서는 중국에서 내린 xx왕 칭호를 썼다.[14] 다만 평양에 세워진 사당을 지키는 참봉은 태원 선우씨가 대대로 세습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5] 강응천, <단군 대 기자, 우리 역사의 상징을 둘러싼 경쟁>, 《(청소년을 위한) 라이벌 한국사》, 그린비, 2010년[16] 기자가 한반도에 와서 단군 조선에 이어 기자 조선을 세우고 왕 노릇을 했다는 설.[17]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 위략을 인용해 “기준을 따라 남쪽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조선에 남은 기준의 일족이 한씨를 모성(성씨를 바꿔 자칭)했다고 나온다.[18] 일본의 기록으로는 키시(きし).[19] 그렇다면 고구려의 기자는 정치 지도자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20] 형이 자신의 부인과의 불륜을 의심해 내쫓아버렸던(물론 그것은 형 자신의 오해였다) 동생의 배따라기 노래 부르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려오는 느낌에 동생을 찾아 모란봉을 뛰어다니고 을밀대를 뛰어다니고 기자묘를 뛰어다니며 동생을 찾아다니는 장면.[21] 반면 위 사진상의 기자묘와 비슷한 형태와 규모로 평양에서 숭배장소로 전해지던 단군릉은 북한 정권이 무지막지하게 확장해 거대 피라미드로, 그들 표현으로 '개건'했다.[22] 다만 고려 충숙왕 때에 처음 지은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은 한국전쟁 뒤에 다시 짓고 1977년에 숭령전 옆으로 옮겨서 용케 철거를 면했다. 무덤은 필요없어도 사당은 상관없다고 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