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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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조재복은 1897년 10월 8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월지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월지마을)에서 아버지 조계환(曺啓煥)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천군 신촌면 입석동(현 영천시 화북면 입석리)에 살던 홍종현은 지곡면 오산동 조주생(曺周生)[4] 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영천면 장날인 4월 1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전날인 11일 홍종현은 마을 상점에서 붉은 목면(木棉)을 사들고 같은 마을에 사는 조병진을 찾아가 깃발로 만세를 부를 것이니 태극무늬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였고 조병진은 홍종현의 계획에 찬동하며 깃발에 태극무늬를 그려주었다. 이어 홍종현은 조주생의 집에서 역시 같은 마을에 살던 그를 찾아와 동일하게 만세를 부를 것이라며 「대한독립만세 군위 양곡(良谷) 홍종현」이라고 깃발에 써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이때 조재복 또한 홍종현의 계획에 찬동하며 글씨를 써주었다.#
거사 당일인 12일 오후 3시 30분경, 1천여명의 상인과 주민들이 모이자, 조재복은 홍종현·조병진·조주생 등과 함께 영천면 창구동 영천공립보통학교[5] 교문 앞 시장에서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호응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마침 이곳을 순찰중이던 순사보 김배석(金拜石)에게 체포되었다.
조재복은 그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 90도를 받고# 불구의 몸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지역의 후학들에게 독립 사상 및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1952년 4월 14일 별세하였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