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무어하우스

 

'''조지 무어하우스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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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톰 플로리
(1930)

'''조지 무어하우스'''
'''(1934)'''

존 듀비엔니
(1937)

[image]
이름
조지 무어하우스
(George Moorhouse)
생년월일
1901년 4월 4일
사망년월일
1943년 10월 12일
국적
미국
출신지
잉글랜드 리버풀
포지션
레프트 풀백
신체조건
불명
등번호
-[1]
소속팀
트랜미어 로버스 (1921-1923)
몬트리올 CPR (1923)
브루클린 원더러스 (1923)
뉴욕 자이언츠[2] (1923-1930)
뉴욕 사커 클럽 (1930)
뉴욕 양키스[3] (1931)
뉴욕 아메리칸스 (1931-1937)
국가대표
7경기 / 0골 (1926-1934)
'''월드컵에 참가한 최초의 잉글랜드인'''[4]
1. 생애
1.1. 클럽
1.3. 사망
2. 뒷이야기
3. 수상
3.1. 클럽
3.2. 국가대표
3.3. 개인


1. 생애



1.1. 클럽


잉글랜드 리버풀 출신이던 무어하우스는 1차 대전 시절 상선 해병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무어하우스는 축구에 매력을 느꼈고 여러 팀에 테스트를 거친 후 트랜미어 로버스라는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로버스에서는 주로 리저브 팀에서 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3년, 캐나다로 이민 간 무어하우스는 몇 달간 몬트리올 CPR에 소속되어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브루클린 원더러스에서 뛰었다. 그 이후 뉴욕 자이언츠에서 7년간 200경기가 넘는 출전 횟수를 기록하였다. 뉴욕 자이언츠는 새로운 구단주에게 팔려 뉴욕 사커 클럽으로 팀 이름이 바뀌었고, 버트 파테노드의 소속팀으로 알려진 폴 리버 마크스맨과 합병하여 뉴욕 양키스라는 팀으로 새로 태어났다.
1931년, 무어하우스는 뉴욕 아메리칸스 팀으로 옮겼고 여러 차례 우승과 준우승을 맛보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1.2. 국가대표


무어하우스의 첫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은 1926년 캐나다와의 시합이다. 초대 월드컵에 참가한 무어하우스는 당시 미국 대표팀의 3경기에 모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월드컵에 참가한 최초의 잉글랜드인이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준결승이던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몬티를 필두로 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크게 고전하였다. 결국 후반에 들어 기세가 꺾였고 미국은 6대1로 패배하였다.
미국은 이후 A매치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가 급하게 다음 월드컵에 참가하였고, 로마에서 열린 최종예선에서 멕시코를 4대2로 꺾었다. 하지만 호스트 이탈리아에게 7대1로 대패하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무어하우스는 2번의 월드컵을 포함 총 7회의 A매치 출전 기록을 남겼다.

1.3. 사망


무어하우스가 처음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때 무어하우스는 1982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졌었다. 하지만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서 기록을 담당하던 콜린 호세가 무어하우스는 1943년 10월 12일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미국 축구를 연구하던 데이브 리터러라는 사람이 1930년대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무어하우스가 사망하여 ASL의 은퇴 선수들이 슬픔에 잠겼다고 쓰인 1943년 자료를 발굴. 공식적으로 1943년 사망으로 기록되었다.

2. 뒷이야기


  • 무어하우스는 자이언츠 팀이 잠시 ASL에서 쫓겨나 임시 리그에서 뛸 동안에도 팀에 남는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3. 수상



3.1. 클럽


  • ASL 우승 1회: 1935-36(뉴욕 자이언츠)
  • ASL 준우승 1회: 1933-34, 1934-35(뉴욕 자이언츠)
  • 내셔널 챌린지 컵 우승 2회: 1931(뉴욕 양키스), 1937(뉴욕 자이언츠)

3.2. 국가대표


  • 월드컵 3위 1회: 1930

3.3. 개인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1986년 헌액.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흔히 알고 있는 메이저리그뉴욕 자이언츠와는 다르다.[3] 이 팀 역시 흔히 알고 있는 메이저리그 팀 뉴욕 양키스와는 다르다.[4] 당시 미국 대표팀 멤버들의 출신지를 보면 미국 출신의 선수들과 짐 브라운을 대표로 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수들이 주를 이루었다. 무어하우스는 당시 유일한 잉글랜드 출신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