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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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영어
조지 루이
(George Louis)
독일어
게오르크 루트비히
(Georg Ludwig)
'''출생'''
1660년 5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하노버
'''사망'''
1727년 6월 11일 (67세)
오스나브뤼크 오스나브뤼크 성
'''장례식'''
1727년 8월 4일
하노버 라이네 궁전
'''재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왕
1714년 8월 1일 ~ 1727년 6월 11일
하노버의 선제후
1698년 1월 23일 ~ 1727년 6월 11일
'''배우자'''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1682년 결혼 / 1694년 이혼)
'''자녀'''
조지 2세, 조피 도로테아 등
'''아버지'''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어머니'''
팔츠의 조피
'''형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막시밀리안 빌헬름, 조피 샤를로테, 칼 필립, 크리스티안 헨리,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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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
2.2. 영국의 국왕
3. 평가
4. 가족 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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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노버 왕국의 군주(게오르크 1세)이자 영국의 국왕(조지 1세).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 그의 외할머니가 바로 제임스 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이며, 이를 통해 스튜어트 왕조제임스 1세와 이어진다. 이에 따라 왕위 계승법이 만들어진 이후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원래 앤 여왕 사후 후사가 없으면 '''제임스 1세의 외손녀 소피아 내지는 그녀의 상속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있었으나 소피아가 앤 여왕이 죽기 불과 2개월 전에 죽는 바람에 그녀의 아들인 조지 1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한다.

2. 생애



2.1.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


하노버 선제후국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국 중 하나였다. 독일의 여러 영방국가들의 군주는 기본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기 때문에 제후라 불리웠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독립국가의 군주로 인정받았고 외교적으로도 각국의 국왕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선제후는 황제를 뽑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특권적인 제후로, 성직선제후를 제외하면 신성 로마 제국 전체에서 5명에 불과했는데, 프로이센 왕, 보헤미아 왕, 바이에른 선제후, 작센 선제후, 그리고 하노버 선제후가 그들이었다.
게오르크 1세는 선제후 즉위 전부터 여러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대 투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빈 전투에서 싸우기도 했다.
1698년 게오르크 1세는 38세의 나이로 하노버 선제후에 즉위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을 이끌고 영국군과 동맹하여 참전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장군 프린츠 오이겐(사부아 공자 외젠), 영국의 말보로 공작 존 처칠과 안면이 있었다. 전쟁 중기부터 존 처칠이 영국 내부의 정치적 분쟁에서 져서 위태롭게 되자 여러차례 신뢰의 편지를 보내 존 처칠의 지위를 지키려 했으며, 결국 존 처칠이 실각해 군사령관의 직책에서 해임되고 영국의 향후 방침이 전쟁에 적극 참전하지 않고 현상유지로 행동하자 심히 분개하였다.[1]

2.2. 영국의 국왕


1714년 6월 8일 앤 여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법에 따라 영국 왕으로 추대되어 54세의 나이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2] 사실 조지 1세는 왕위 계승 서열이 50위가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으나, 그보다 계승 서열이 앞서는 이는 모두 다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 영국 왕위계승법상 가톨릭교도는 계승권이 없으며 오직 성공회 신자거나 개신교신자만이 왕이 될 수 있기에 가장 가까운 개신교, 정확히는 루터교회 신자로서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3]
영국의 국왕임에도 조지 1세는 영어에는 서툴렀지만 모국어인 독일어 이외에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 조지 1세는 주로 프랑스어를 이용해서 영국인 장관들과 소통했으나, 영국의 국내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토리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휘그당과 로버트 월폴 등의 정치가에게 영국의 정치를 맡겼다. 애초에 영국에 머물렀던 시기가 별로 길지 않았고, 영국보다 고향인 하노버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조지 1세는 유럽 대륙에서의 하노버의 이권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대북방전쟁에서 반 스웨덴 측에 참가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브레멘 등을 할양받아 하노버 선제후국은 북해로의 출구를 확보하게 된다.

3. 평가


결론적으로는 영국 국왕은 자리만 맡아줬을 뿐, 그의 정체성은 영국의 왕이라기보단 하노버의 선제후에 가까웠다.[4]
영국사 관점에서 조지 1세를 순 허당으로 묘사하는 역사 만화도 있으며, 국내 역덕후들에게도 '영어도 못하는 영국 왕' 정도로 취급돼서 순 허당 취급 받는 편이다.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아예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난 영어도 모르고 영국 사정도 잘 모르니 니들끼리 의회에서 수상 뽑고 국정 알아서 해라. 난 가만히 있을란다.'라고 떠넘겨 버리는 모습으로 나온다.[5]
하지만 늘그막에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영국의 국내 정치에 비교적 무관심 했던 것 뿐이며, 하노버 공국의 군주로서의 게오르크 1세는 명민함과 군사적 용맹함을 아울러 갖춘 뛰어난 군주였다. 게오르크 1세는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브레멘 일대를 병합하고 나아가 숙원이었던 북해로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하노버의 뿌리이자 중세 시절 유럽을 호령했던 하인리히 사자공 시절의 작센[6]의 영광을 재현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방국가 중 하나였던 하노버 선제후국의 역사보다야 영국의 역사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잘 알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상 '영어를 못한다'는 점이 인물 평가를 낮추는데 매우 크게 작용하는 셈인데, 영국 왕이면서 영어를 못하는게 좀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군주로서의 업적은 그렇게 낮게 평가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실제로 당시 상류층의 기본 소양이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신하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하면서 의사소통에 별 지장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의 국제 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영어가 국제 공용어가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이후라서 의외로 역사가 짧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교양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의회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여 위임한 것이었다. 사실 의회에 나가봤자 영어로 진행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노릇이다. 궁정에 신하들이 출근해서 딸랑이질을 하는 독일권 왕정식 통치 방법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의회로 행차해서 신하들을 만나러 가는 이상한 제도(?)를 가진 나라에 왕이 되어 반평생 안 하던 짓을 하려니 그랬던 것이다. 하노버에서는 절대군주로서 국가 중대사를 모두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영국은 의회가 중대사를 결정했고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이런 이상한 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영국 통치에 흥미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조지 1세의 통치가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바로 왕이 의회에 통치를 위임하면서 '''영국식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법학,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지 1세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만든 업적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헌법상으로 규정된 상징적 국가원수이기도 하다.[7]
영국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외침의 우려가 거의 없었던 반면에 내륙국인 하노버 공국은 유럽 대륙 복판에서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시로 영토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당시 군사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호전적인 프로이센 왕국과 동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달했으면서도 대양으로의 직접적인 출구인 서북 독일로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며 때문에 이에 하노버 공국을 끊임없이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후대에 1795년 잠시나마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합병한 전적이 있으며 끝내 1866년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완전합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오르크 1세의 군사적 진출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지속된 하노버 왕국 영토의 근간을 확립했다.

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조지 1세
(George I)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빌헬름
(William, Duke of Brunswick-Lüneburg)
덴마크의 도로테아
(Dorothea of Denmark)[8]
헤센-다름슈타트의 앤 엘레노어
(Anne Eleonor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백작 루트비히 5세
(Louis V, Landgrave of Hesse-Darmstadt)
브란덴부르크의 마그달린
(Magdalene of Brandenburg)
라인 팔츠의 공녀 조피
(Sophia, Princess Palatine of the Rhine)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9]
(Frederick V, Elector Palatine)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Frederick IV, Elector Palatine)
오라녜-나사우의 루이제 율리아나
(Louise Juliana of Orange-Nassau)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제임스 6세 & 1세
(James VI & I)
덴마크의 앤
(Anne of Denmark)[10]

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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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조피 도로테아 (1666년 9월 15일 ~ 1726년 11월 13일)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조지 2세
(George II)
1683년 10월 30일
1760년 10월 25일
안스바흐의 캐롤라인
슬하 3남 5녀
1녀
프로이센의 왕비
조피 도로테아
(Sophia Dorothea, Queen in Prussia)
1687년 3월 16일
1757년 6월 28일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슬하 7남 7녀
아내 조피 도로테아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가족관계가 엉망이었다. 아내 조피 도로테아의 신분이 자신보다 쳐지는 터라 계속 미워하다가 결국엔 강제로 이혼하고 하노버의 성에 유폐시켰다. 그녀는 같은 가문의 사촌이었는데 귀천상혼으로 태어나서 신분이 한단계 낮게 취급되었다. 결혼을 하게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그녀의 아버지인 칼렌베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이 원래는 독신이어서 영지가 조지 1세에게 상속될 예정이었으나[11] 프랑스 귀족과 늦바람이 나서 결혼하는 바람에 계승권이 크게 꼬일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조지 1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태어난 자식이 여자인 조피 도로테아였기 때문에 삼촌의 영지를 물려받지 못할 염려는 없었으나, 늦둥이 외동딸에게 좋은 혼사를 마련해주고 싶었던 삼촌과 계승 문제가 꼬일 가능성을 막으려는 아버지의 강요로 강제로 결혼했던 것이다. 결국 결혼 12년만인 1694년에 불륜 혐의를 뒤집어 씌워 이혼했고 남은 평생동안 유폐시켰다. 조지 1세가 영국 왕이 된 뒤에도 그녀는 이미 이혼당한 처지라서 왕비도 되지 못했고 영국 구경도 못했다. 어머니를 박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는 왕세자(후의 조지 2세)와도 사이가 나빴고, 애인들에게 보석을 선물하느라 왕실의 보물을 탕진하여 정작 조지 2세의 대관식에서는 조지 2세의 왕비는 보석이 없어서 빌려다 써야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의 딸중에 조피 도로테아가 있는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결혼했고 자식중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있다. 딸도 어머니처럼 남편탓에 결혼생활이 매우 안좋았다.

5. 여담


  • 영국 역사상 최악의 주식사태인 남해거품사건이 조지 1세의 재위기에 일어났다. 로버트 월폴이 어찌어찌 사태를 무마했고, 세계 최초의 공인회계사회계감사의 개념이 영국에서 탄생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의 묘한 인연이 있다. 헨델은 본래 하노버 왕실의 악장 직을 하고 있었다. 조지 1세의 허락을 받아서 영국에 간 뒤 크게 성공한 뒤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영국에 귀화해 버렸다. 그런데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에 즉위하게 된 것.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헨델은 궁리 끝에 유명한 '수상음악'을 작곡해서 조지 1세가 뱃놀이를 할 때 수상음악을 연주했다. 헨델에겐 다행히 음악에 만족한 조지 1세는 헨델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헨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 선대부터 하노버 공가를 섬겨 온 라이프니츠에겐 조지 1세의 영국 왕 즉위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재앙이었다. 영국의 우상 뉴턴과 싸운 라이프니츠를 영국 왕이 고용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라이프니츠는 하노버 왕가에서 해고된 후 마침 나이도 많았는지라 불우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1] 존 처칠은 실각후 2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했고 앤 여왕의 사망직후 영국 본토로 귀환했는데 새 왕이 된 조지 1세는 당연히 그를 환영하고 복권시켰다.[2] 앤 여왕은 자녀가 있었으나 거의 모두 사산되거나 유산되었다. 살아남은 아들 윌리엄도 1700년 11세의 나이에 죽었다. 유산아나 사산아까지 합치면 무려 '''17명'''. 앤 여왕과 조지 1세는 6촌 지간이며 조지 1세의 외할머니제임스 1세의 딸이다.[3] 영국에 머물 때는 왕을 위해 독일인 루터교회 목사가 따라왔고, 죽을 때까지 루터교회 신자로 있었다. 그러나 루터교회와 성공회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고 생각하여 성공회를 인정했고, 자신이 성공회 국가의 수장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조지 2세도 루터교회 교도였으며, 잉글랜드에서 영어로 교육받은 조지 3세부터 성공회를 받아들인다.[4] 외할머니쪽이 앤 여왕의 증조할아버지 제임스 1세의 딸이었으나 독일인의 피가 주로 흐르는 잉글랜드 쿼터였다.[5] 사실 그럴만도 한게 고향에서 급작스레 타국으로 오게 되면서 영어도 몰라 영국의 신하들과는 프랑스어로만 대화가 가능했다. 이때문에 국정과 관련된 중요한 대화는 일일이 통역이 필요한 상황이였다. 적응기간도 거치지 못한 채 조건이 맞단 이유로 덜컥 왕이 되었으니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였을 것이다.[6] 오늘날의 니더작센홀슈타인 일대. 오늘날 영국의 뿌리가 된 앵글로-색슨족 중 색슨족이 이 곳 출신이며 원래 작센을 가리키던 이 곳이었다. 오늘날의 작센인 오버작센은 사자공 시절에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새로이 확보한 지역으로 사자공의 영지가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공중분해된 후 영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사자공의 가문이었던 벨프 가문이 작센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오버작센의 영지 일부를 분봉받은 아슈카니아 가문이 작센이라는 이름을 쓰면서 오버작센이 그 이름을 이어가게 되었다.[7] 이전에도 중세 일본의 천황이나 피렌체 공화국 등 국가원수가 상징에 불과했던 사례가 여럿 있었지만 구조가 그렇거나 특정한 사정이 있는 등이였지 법으로 규정이된 것은 아니였고 시기에 따라 실권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8] 크리스티안 3세의 차녀이다.[9] 30년 전쟁의 시작인 보헤미아-팔츠 전쟁 당시의 팔츠 선제후이자 보헤미아 왕이 된 그 프리드리히 5세이다.[10] 프레데리크 2세의 차녀이다.[11] 원래 조지 1세의 어머니인 소피아(아내와는 동명이인이다)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후에 하노버 선제후국)을 형에게서 상속받아 다스려야 했지만, 결혼도 하기 싫고 통치도 하기 싫어서 작위를 동생들에게 넘겨주고 유유자적하게 즐기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조지 1세는 그런 게오르크 빌헬름의 막내동생의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