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사건
1. 개요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숨겨진 흑역사.
2. 사건 진행과정
1982년 4월 24일 해태는 삼성 라이온즈의 대구 원정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그날 경기 시작 전 야구 기자들과 관계자들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평소 같았으면 펑고[1] 를 해줬을 조창수 타격코치는 야구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대신 김동엽 감독이 펑고를 치고 있었다. 게다가 유남호 투수코치 마저도 온데간데 없었다. 더 가관인 것은 경기가 시작되자 조창수 코치가 있어야 할 3루 코치박스엔 김동엽 감독이 직접 서 있었고 1루 코치로는 후보선수인 김종윤이 나와 있어 팬들과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경기 후 김동엽 감독은 기자들에게 조창수·유남호 두 코치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고 말했지만 알고보니 두 코치는 후술될 이유로 팀을 이탈한 것이었다.
3. 사건 발생 원인
두 코치가 선수단을 이탈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제과업계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 와의 시즌 개막전이자 창단 첫 경기에서 2대 14로 대패한 해태는 4월 21일 롯데와의 광주 홈 경기를 2대 1로 이기며 개막전의 패배를 설욕했다. 그 전까지 합숙체제로 선수단을 운영하던 김동엽 감독은 이날 승리로 기분이 좋아져 합숙을 풀고 선수들에게 외박을 허용했다. 광주에 거주하는 선수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외지 출신 선수들은 숙소인 광주관광호텔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날 저녁에 서울에 사는 투수 신태중[2] 의 아내가 아이를 업고 숙소로 찾아와 남편과 광주로의 이사 문제에 대해 상의하다 보니 밤늦은 시간이 되었다. 애까지 딸린 아줌마를 숙소 밖으로 보내기도 뭐한지라 결국 조창수 코치가 신태중의 방에서 하룻밤 묵게 했는데 이 사실이 김동엽의 귀에 들어가며 사단이 터졌다. 감독 허락도 없이 선수 숙소에 여자를 들였다는 이유로 김동엽은 조창수 코치를 호되게 질책하였고 조 코치는 김동엽에게 2시간 동안이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 코치가 김동엽에게 2시간이나 빌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 조 코치의 부친이 직접 김동엽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끝까지 손 잡고 갈 수 있도록 말씀해 달라" 고 부탁을 했지만 김동엽은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조 코치를 불러 "무슨 엉뚱한 소리를 했길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시냐" 며 또다시 지나칠 정도의 장시간에 걸친 질책이 이어졌다.
시즌 개막부터 해태 야수진들의 수비 불안이 전부 조창수 코치 탓이라고 몰아세우며 그를 백안시 하던 김동엽은 신태중 건을 계기로 조 코치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고, 조창수 코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유남호 투수 코치까지 세트로 매일 김동엽에게 기합을 받아야 했으며 무엇보다 이 둘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김동엽 감독의 정신적, 육체적 가혹행위였다. 김동엽은 매일 밤 술이 떡이 되어 숙소로 들어와 밤새도록 두 코치를 구타하거나 잠을 안재우는 등 마구 쥐 잡듯이 괴롭혔고, 김동엽의 닥달에 뭐라고 답하면 말대꾸 한다며 때리고,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있으면 감독 말을 씹는다고 때리는 등, 두 코치의 심신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었다.
급기야 4월 23일 밤에는 김동엽이 친구들을 데리고 숙소로 들어와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두 코치를 방으로 불러서는 술판에 같이 있던 술집 여자들에게 큰 절을 시키고 술을 따르게 했다. 졸지에 술시중 드는 신세가 돼버린 두 사람은 김동엽 감독의 만행에 인내심이 폭발하면서 다음 날 새벽 "차라리 야구판을 떠나 포장마차라도 하고 말지, 저 인간 밑에선 더 이상 야구 못하겠다" 라고 의기투합 하여 숙소를 나와버렸다. 이후 조 코치와 유 코치는 각각 광주와 서울 소재의 자택으로 돌아가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다.
4. 여파
이 사건으로 결국 4월 29일, 해태 구단은 김동엽 감독을 총감독으로 물러나게 하고 조창수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선임했다. 말이 총감독이지 사실상 김동엽 감독을 해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4월 30일 김동엽은 사직서를 내고 해태 타이거즈를 떠났다.
이때 김동엽이 남긴 말은 "내가 가장 아낀 코치[3] 인데 '사보타주'를 하다니 정말 섭섭하다. 사전에 내게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면 이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이후 김동엽은 자신의 자서전 '''그래 잘라라 잘라''' 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조창수 코치의 이름을 '''조 모'''로 익명처리 하며 순전히 조창수, 유남호 코치의 잘못이었던 양 얘기를 풀어 놓았다.[4] 그리고 책에는 조창수가 잠시 해태 감독대행으로 있다가 김응용 감독이 영입된 후 해임당했다고 기술했지만, 사실 조창수 코치는 1983년 시즌 '''대행 자리에서 내려와''' 김응용 휘하에서 1984년까지 계속 해태 코치로 일했다.
- 출처 : 홍순일의 야구이야기
[1] 수비 연습을 위해서 공을 쳐서 날려보내는 행위, 혹은 그리하는 사람.[2] 1984년 삼미 슈퍼스타즈로 트레이드 되어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를 거쳐 1988년 시즌 후 은퇴. 유명 선수는 아니였지만, 주로 중간계투로 나서던 투수였다.[3] 특히 조창수 코치에 관해서는 사실이었다. 6개 구단의 감독이 모두 정해지고 코칭스태프를 짜던 단계에서 당시 광주일고 감독이던 조창수는 삼성의 서영무 감독과 해태 김동엽 감독으로부터 동시 콜업을 받게 되었다. 서감독은 경북고 시절 은사였지만 자신이 지도자로서 입지를 세운 광주를 쉽게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김감독의 영입 제의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조창수는 김동엽의 설득을 받아들였지만, 그렇게 공들여 데려온 코치를 그 따위로 대접한 것은 일반 야구팬들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처사일 것이다...[4] 생전에 조 코치가 감독직을 노리고, 자신의 비위 사실을 구단 측에 과장하여 제보했다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