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

 




'''삼미 슈퍼스타즈 '''
'''Sammi Superstars '''
'''창단'''
1982년 2월 5일 (42주년)
'''매각'''
1985년 5월 1일 (38주년)
'''모기업'''
삼미그룹
'''연고지'''
인천· 경기· 강원· 이북 5도 (1982~1985)[1]
'''홈구장'''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 (1982~1985)
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 (1982~1985)[2]
'''마지막 경기'''
1985년 6월 21일 VS 롯데 자이언츠
'''후신'''
청보 핀토스 [3]
1. 소개
2. 구단 창단과 매각
2.1. 눈물겨운 기록들
3. 팬덤
4. 마스코트
5. 기타
6. 주요 선수 및 코칭 스태프
7. 역대 성적


1. 소개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한국프로야구 소속 구단으로 최초의 인천 연고 구단이다. 연고지는 인천직할시[4], 경기도, 강원도, 이북5도(당연히 명목상)였다. KBO 리그의 원년 6개 구단 중에서 가장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팀이었고 3시즌 반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를 보내면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초라한 성적으로 기록되지만, 컬트적 인기를 구가했던 구단이기도 하다.[5]
1982년에 창단해서 1985년 여름 풍한방직에 매각되어 이후 청보 핀토스로 팀명이 변경되었다. 참고로 인천을 연고로 하던 팀이지만 홈구장이던 도원야구장의 보수 공사 관계로[6] 1982년 창단 첫 홈경기 개막전도 춘천에서 열렸으며[7], 이후에도 제2 연고지로서 춘천 경기가 계속 있었다.[8] 지금의 군산 야구장, 청주 야구장이나 포항 야구장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모기업 삼미그룹은 무역, 해운, 광업, 특수강 등이 주종목으로 프로야구의 홍보효과를 누릴 만한 소비재 분야 계열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9] 구단 운영을 통해 시너지를 낼 만한 요소가 없었지만, 당시 30대였던 김현철 회장이 스포츠를 좋아했고, 미국 유학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광팬이어서 메이저리그가 미국의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 것과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그 지역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어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걸 목격했으며, 프로야구의 발전 가능성과 당시 KBO 사무총장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야구팀을 창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계에선 인천-경기-강원 지역연고팀으로 강원도가 고향인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에 접근했으나 거부당하였다.[10][11] 이후 급하게 대타를 찾는 와중에 삼미가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것이다. 다른 기업을 낀 창단이 여의치 않아 5개팀으로라도 준비하려는 찰나에 KBO 첫 총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참가의사를 밝혔다.
팀명은 악의 무리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에서 따온 슈퍼스타즈인데 정작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 등장한 것은 치어리더 원더우먼이었다.[12] 당시는 여성이 피켓을 들고 나오는게 상식이었기 때문에 슈퍼맨과 동급 내지는 동료로 인식되는 원더우먼이 대신 참석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 2월 5일 인천 상공회의소 강당에서 23명의 슈퍼맨이 참석한 삼미의 창단식이 열렸다.

2. 구단 창단과 매각


연고지인 인천 팬들의 기대 속에서 대구구장에서 열린 창단 첫 공식 경기에서는 인호봉의 3실점 완투와 양승관의 3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으로 당대 최강팀으로 분류됐던 삼성 라이온즈를 5:3으로 이기며 첫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원년 6개 구단들 중에서 유일하게 국가대표가 없을 정도로 선수층이 양적, 질적으로 빈약했기 때문. 여기에 개막 이후 3개월여 동안 메인 홈구장인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는 점도[13] 성적 하락의 원인이 됐다.
특히 4월 25일 춘천에서 열린 OB전에서는 경기 초반 8대0으로 앞서다가 11대12로 대역전패를 당하며 분위기가 급락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14] 4윌27일 박현식 초대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퇴진했고 이후 이선덕 코치가 감독대행이 되어 팀을 이끌었지만 탈꼴찌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결국 1982년 전기/후기리그에서 거둔 통합 승률 0.188(15승65패)은 프로야구 역대 최저 기록으로 남아 있다.[15]
삼미는 프로야구 출범 당시 유일하게 국가대표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는 자타공인 최약체 팀이었다.[16][17] 매년 꾸준한(?) 성적부진으로 매각될 때까지 1983년을 빼고 6개 구단들 중에서 항상 6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82년 삼미가 원년팀 OB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16전 전패를 기록하는 등 상위권과 하위권의 전력차가 크게 나자 KBO는 결단을 내렸다.
해외동포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한 것. 애초 1985년부터 시행할 방침이었지만 전력균형을 위해 1983년으로 앞당겼다. 이에 삼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91승 84패을 거둔 장명부와 1982년 2군 웨스턴 리그 타율 2위(0.339)에 오른 이영구를 영입했다. 여기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임호균, 김진우, 정구선, 이선웅 등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탄탄해졌다. 또 박현식 초대감독과 함께 인천야구의 대부이며 맹장인 김진영 인하대 감독을 사령탑에 올리는 둥 일련의 움직임은 재창단에 방불케 했다. 다만 이때 너무 많은 선수를 수급한 것의 여파로 해외 전지훈련 비용까지 다 써버려서 비닐 하우스를 지어 국내 전지훈련을 하게 되었다.
예외적으로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 시즌에 '''427이닝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야구 역사상 다시 없을 괴력을 발휘한 장명부와 임호균의 활약으로 전후기 '''2위'''씩 차지하는 등의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에는 전후기 1위 두 팀만 한국시리즈 티켓을 가져가는 제도라 삼미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18] 전기리그에서 시즌의 1/5 가량 남은 무렵 2위 해태에 2.5 경기차로 앞서있어 전기리그 우승이 유력해보였지만 김진영 감독이 청룡과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고 머리로 주심의 배를 들이받고 유니폼 상의를 풀어헤친 채 폭언을 퍼붓고 급기야 백스톱 그물 뒤에서 경기 속개를 종용하는 이기역 경기 감독관의 넥타이를 잡아 끌다가 드롭킥을 선사하는 추태를 벌이다 퇴장당하는 사태로 구속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결국 해태와의 광주 3연전을 모두 패해 2위로 내려간 것이 뼈아팠다.
그리고 다음해부터 장명부가 혹사의 여파로 무너지자 삼미는 다시 부동의 약팀으로 돌아가버렸다. 거기다 장명부는 감독이상으로 팀을 좌지우지 했다. 투수 육성은 그렇다고 해도 트레이드, 전지훈련 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삼미의 장명부가 아니라 장명부의 삼미가 된것이다. 1983년 10월 27일 삼미는 이 해 12승을 올린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고 박정후(투수), 김정수(1루수), 권두조(유격수), 우경하(외야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전력강화를 위해서 센터 라인을 강화해야 한다는 장명부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임호균의 공백은 박정후, 신태중, 정성만으로 메우겠다는 복안이었지만 1984년 시즌에 이들이 거둔 성적은 14승 27패에 그쳤다. 여기에 장명부 또한 전년도 30승에 따른 1억원 보너스롤 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84시즌은 태업성 플레이로 일관하며 13승 20패7세이브로 추락했다. 필드에 나서기도 전에 내부 싸움에 지친 삼미는 전 후기리그 에서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1985년은 더 비참했다. 3월 30일 롯데와 치른 개막전에서 5대1로 승리를 올릴 때만 해도 분위기는 1983년의 돌풍을 재현할 듯했다.[19] 하지만 다음 날인 3월 31일부터 무려 한 달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며 18연패라는 프로아구 사상 최다 연패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20] 설상가상으로 이 기간 동안 삼미전을 승리의 보증수표로 여긴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들이 앞다투어 등판해 삼미의 고전, 연패가 더욱 길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4월 30일에서야 MBC를 상대로 최계훈이 4대0 완봉승을 거두며 기나긴 연패의 악몽에서 겨우 벗어 날 수 있었다. 이날 인천 도원구장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듯 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연패 탈출의 기쁨도 잠시, 5월 1일 결국 전기리그를 끝으로 성적부진과 모기업의 재정난을 이유로 청보식품에 70억원으로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1985년 6월 29일, 구단명은 청보 핀토스로 탈바꿈했고, 운영법인은 '삼미항업'으로 변경하여 사실상 휴면법인 상태로 있다가 1993년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당시 삼미 구단주였던 김현철 회장은 매각 협상이 끝나고 매각서에 사인한 뒤 그날 밤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웠다는 얘기가 있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2.1. 눈물겨운 기록들


아래의 기록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보유한 독보적 기록이다.
  • KBO 리그 단일 시즌 최저 승률: 0.188(1982년 페넌트레이스 15승 65패)[21]
  • KBO 리그 기별 최저 승률: 0.125(1982년 페넌트레이스 후기 리그 5승 35패)
  • KBO 리그 단일 시즌 연패 공동 1위: 18연패(1985년 3월 31일 구덕 롯데 자이언츠 전 ~ 4월 29일 인천 롯데 자이언츠 전)
  • KBO 리그 특정팀 상대 단일 시즌 전패: 1982년 페넌트레이스 OB 베어스(16전 전패)[22]
1982년에는 통합성적 15승 65패(전기리그 10승 30패, 후기리그 5승 35패)를 기록하며 한국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1할 승률(승률 0.188)'''과[23][24] '''유일무이'''한 '''특정 구단 상대 전패'''(OB 베어스전 16전 전패) 기록하기도 했다. 다른 기록은 몰라도 21세기의 KBO 리그 환경에서는 최저 승률 기록을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44경기 체제에서 1할 8푼 8리 미만의 승률을 기록하려면 산술적으로 27승 이하의 승리를 거둬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KBO 리그 구단 사상 시즌 100패를 찍은 팀은 없다.
2018시즌 LG 트윈스가 두산 베어스에게 15전 전패를 하면서 삼미에 이은 두번째 대기록을 달성할 뻔 했지만 마지막 16차전에서 LG가 이기는 바람에 여전히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무려 '''18연패(連敗)'''[25]를 기록, 2020년 6월 12일 한화 이글스가 타이기록을 작성하기까지 무려 '''35년''' 세월 동안 연패 기록의 유일한 전설로 군림했다.
1999년 시즌에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그 기록을 깰 뻔했으나 LG 트윈스에 의해 명예(?)를 안지 못했고, 2002년 시즌에는 롯데 자이언츠가, 2010년 시즌에는 KIA 타이거즈가 16연패로 그 기록에 도전(?)했지만 각각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가 그 기록을 막았다. 그러다가 한화 이글스가 2020년 6월 12일 두산 베어스와의 시즌 1차전 첫 경기에서 대망의 18연패를 달성하면서 KBO 리그 최다 연패 기록과 동률이 되었다.[26]
김은식의 저서에 따르면 선수단 등록에 필요한 최소 엔트리를 못 채워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수단 모집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야구단에 사회인 야구 뛰는 사람들이 '''1군''' 선수로 낙점받았다는 소리. 이는 선수 풀이 좁았던 것도 있지만 운동선수 그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프로와 달리 야구단을 운영할 여건이 되는 수준의 기업 내지는 은행에서 안정적인 직장인 신분으로 선수를 할 수 있는 실업야구가 더 높게 평가 받고 있었던 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야구는 프로 선수가 FA로 수억~수십억을 벌면 그 것으로 퇴직 이 후를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당시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한 직후기 때문에 선수 생활 은퇴 후에도 사원 신분으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고위 임원까지도 노릴 수 있는 실업야구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는 걸러 볼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수 1명이 아쉬운 판에 들어왔던 선수를 내치기도 했다. 심석종고(현 심석고,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야구부 운영)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투수 이하룡이 훈련 태도 불성실을 이유로 원년 시즌 개막 전 퇴출되었을 정도.
암흑기 막장 시절 한화가 이 팀의 기록을 경신한 건 시즌 팀 방어율뿐이었다. 타이 기록도 연패뿐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세운 기록의 비범함을 엿볼 수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한국야구의 전설로 기록되는 선수인 감사용[27]도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다. 뭘 좀 해보려고 했던 박현식 감독도....
1982년의 방어율은 6.23으로 당연히 최하위였으며, 이 팀 평균자책점 기록은 한화 이글스가 2014년에 '''6.35'''를 기록하며 갱신할 때까지 32년간 최악의 기록이었다. 또한 1982년 6월 12일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오대석에게 '''KBO 리그 1호 사이클링 히트'''를, 7월 21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김일권에게 '''KBO 리그 1호 단독 홈스틸'''을 허용했고 1984년 5월 5일에는 해태 타이거즈의 방수원에게 '''KBO 리그 1호 노히트 노런'''의 제물이 되었다.

3. 팬덤


2000년대에는 박민규의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안타깝게도 표절작임이 밝혀졌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처리 투수[28] 감사용의 일화를 각색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인해 팬덤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삼미 시절부터의 팬은 문학성이 끝내주는 경우가 많다. 야구의 추억을 연재한 김은식[29]이나 인천 출신으로 인천 야구에 대한 책을 여러편 적은 고 이종남 기자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 말고도, 인터넷상으로도 삼미에 대해서 글을 써놓은 문서들을 보면 유달리 필력들이 좋다.

4. 마스코트


[image]
좌측부터 호랑이(해태 타이거즈), 곰(OB 베어스), 원더우먼(삼미 슈퍼스타즈), 용(MBC 청룡), 검을 든 거인(롯데 자이언츠), 사자?(삼성 라이온즈).
팀의 심볼로 다른 팀이 동물이나 상징 로고를 그려넣는 것과 달리 삼미는 "배트를 든 슈퍼맨"을 선택했다. 마침 영화 슈퍼맨이 전세계적으로 대흥행할 때라 창단 당시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했었다.[30] 지금보면 난리가 날 일지만, 당시 한국은 세계저작권협약과 베른협약 미가입국이었기 때문에 축구팀 포항제철 돌핀스가 아예 팀 이름을 일본 만화영화 캐릭터 이름에서 따온 아톰즈로 이름을 바꾸는 촌극조차 용인될 정도로 '''저작권에 대해서 무지했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5. 기타


  • 워낙 프로야구사에서 독보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거뒀고 실제 삼미종합특수강 직원 출신이던 감사용의 활약상 등이 알려진 탓인지 일반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아마추어, 직장인 야구팀'이란 식의 인식이 박혀 있지만 삼미 선수단은 엄연히 고교야구, 대학야구, 실업야구에서 활동했던 멀쩡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31] 승률 2할에도 못미쳤던 원년에는 임호균, 김진우 등 인천 출신 국가대표 멤버가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차출돼 입단하지 못했을 뿐이다.
  • 구단이 사라진지 워낙 오래된 팀이라 최근 유입된 야구팬들은 이 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32] 하지만 1980년대 후반생 밑으로 코미디빅리그에 출연하는 개그우먼 3명 트리오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지도... 그러다가 2020년 6월 한화 이글스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이후 무려 21년 만에 17연패(連敗)를 기록하고 삼미의 기록인 18연패 도달 가능성이 높아지자 각종 언론에서 삼미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

  • 그룹의 홍보 광고에서도 슈퍼스타즈의 활약상이 나오는데 장명부금광옥이 등장한다.
  •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 진청색, 하늘색, 붉은색 등을 사용했다.
  • 래퍼 수환 오가 2019년 11월 6일 발표한 힙합 곡 삼미 슈퍼스타즈는 꼴찌 구단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가 한국 야구의 왕조인 현대 유니콘스로 변화하기까지의 연대기를 담아낸 곡이다.
  • 일간스포츠에서 창간특집으로 2020년 9월 28일에 김무관 전 코치의 회고 및 개막전 출전 선수들의 근황도 같이 공개되었다. 이들 중 6번 타자 1루수였고 kt에서 코치를 지냈던 김경남은 2018년에 암 투병 도중 세상을 떠났고, 1번 타자 2루수 이철성과 선발 투수 인호봉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기사가 기재된 날짜를 기준으로 야구계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인물은 5번 타자 좌익수였고 은퇴후 KBO 심판위원장을 거쳐 현재 비디오판독센터장직을 맡고 있는 김호인 뿐이다. #

6. 주요 선수 및 코칭 스태프




7.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팀이름'''
'''경기수'''
''''''
''''''
''''''
'''승률'''
1982
6위/6팀[33]
<colbgcolor=#0066b3> 6위
'''삼미 슈퍼스타즈'''
80
15
65
0
'''0.188'''
1983
3위/6팀[34][35]
3위
100
52
47
1
0.525
1984
6위/6팀[36]
6위
100
38
59
3
0.392
1985
6위/6팀[37]
6위
55
15
40
0
0.273
이후 역사는 청보 핀토스로.
[1] 당시에는 광역 연고제였다.[2] 제2 홈구장이었으나 창단 첫 시즌 초기는 제1 홈구장 역할을 했다. 이 팀의 역사적인 첫 홈경기가 열렸기 때문. 현재의 KBS춘천방송총국춘천 센트럴타워 푸르지오 아파트 자리에 있었으며, 의암야구장과는 다른 곳이다.[3] 후신구단이기에 역사까지 승계[4] 삼미 구단이 있던 시절 인천의 행정구역명은 직할시였다. 인천이 광역시로 개칭된 것은 삼미의 손자뻘 팀인 태평양 돌핀스가 마지막 시즌을 시작하기 직전인 1995년 3월이다.[5] 비인기 구단은 결코 아니었다. 김용희김인식 등 KBO 리그 초창기에 활약했던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삼미 홈경기가 열린 도원야구장에는 형편 없는 구단 성적과 무관하게 늘 홈 관중 수가 많았다. 비록 성적은 끔찍했지만, 부산과 함께 '구도'(야구의 도시)를 자부하는 항구도시 인천의 야구 열기를 반영한 모습.[6] 당시 도원야구장은 1982년 9월 한국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 경기장으로 쓰였다. 이 때문에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도원야구장에서 첫 홈경기를 치른 것은 그 해 7월 17일이었다.[7] 4월 4일 롯데 자이언츠 전.[8]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의 제2홈구장이던 수원 야구장은 1989년에 개장했다. 고로 1988년까지 인천 연고팀의 제2홈구장은 춘천이었다.[9] 1982년 부산의 대명목재를 인수하면서 대명목재 소유의 유나백화점도 인수해 유통업에도 진출하긴 했다. 본사였던 서울 삼일빌딩 지하에도 매장을 운영했지만 결국 지방 향토 백화점 브랜드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를 해결하려 이태원동에 세웠던 비바백화점은 슈퍼스타즈 야구단을 매각하고도 한참 뒤인 1991년에야 문을 열었으나, 1994년에 백화점 건물을 삼성 방계기업 (주)보광(현 휘닉스중앙)으로 넘겨 사업을 접었다. 해당 건물은 보광그룹 때 사무용으로 개조된 후 1999년에 제일기획이 샀다.[10] 당시 정주영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을 겸하고 있었고, 자연히 모든 현대그룹 계열사는 1988 서울 올림픽 의 준비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부담을 표시하며 자연스럽게 발을 뺀 것.[11] 정주영 회장은 스포츠를 좋아 했으나 야구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룹 전체가 야구와 인연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실업야구 시절 제일은행과 한일은행 야구단을 사들여 현대건설 야구단을 창단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무산됐고, 현대 피닉스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4년 뒤 현대그룹은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팀을 운영하게 되었다. [12] 지금 생각한다면 저작권 무단 도용과 베른 협약 위반으로 DC 코믹스로부터 고소를 먹어도 충분할 일이지만 이 당시는 대한민국에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슈퍼맨과 원더우먼을 막 써먹을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프로축구에는 일본 만화 주인공 아톰을 마스코트로 내세운 포항제철 아톰즈라는 축구팀도 있었으나 1996년 베른 협약 가입 이후 여러 문제에 휘말려 오늘날의 포항 스틸러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13]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구장으로 인천구장이 결정되면서 야간 조명탑 공사 등을 위해 보수 작업이 이뤄지면서 인천에서 홈경기를 치르지 못했다.[14] 하필이면 이 경기를 김현철 구단주가 춘천에서 직관했고 크게 낙심한 김 구단주가 박 감독의 퇴진 문제를 거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5] 더 심각한 기록도 있는데 후기리그 성적이 심각하게 처참했다. 1982년 후기리그 삼미의 성적은 무려 5승 35패(...) 승률 0.125다. 이는 기별 승률 중에서 단연 최저 기록이다.[16] 창단식 당시 박현식 감독이 "우리 팀은 모두가 슈퍼스타입니다."라는 변명을 한 적이 있다(...). 단 이땐 하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때문에 난다 긴다,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죄다 국가대표 합숙으로 프로에 입단이 힘들었고, 그 국대출신들은 1983년에 입단하게 된다. 삼미도 당시 인천출신 국대스타였던 투수 임호균, 포수 김진우를 어떻게 해서든 데려오려고 갖은 수를 썼지만 끝내 실패했다. 인천야구 골수팬들은 이 둘만 데려왔어도 삼미의 원년 굴욕은 있지도 않았을꺼라고 지금도 얘기하고 다닌다.[17] 의외로 삼미가 원년에 압도적으로 밀린 팀들은 OB, 삼성, MBC 뿐이었고 롯데와 해태에게는 각각 5승, 6승을 거두고 삼성과 MBC에게는 각각 2승씩 거두었다.[18] 2위가 해태였는데 마지막 3연전 2.5경기차에서 3연패하며 전기리그 준우승[19] 심지어 개막전 상대팀 롯데의 선발투수는 바로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으로 롯데를 우승시킨 슈퍼 에이스 최동원이었다. 그 최동원을 꺾었기에 기세가 대단했을 것이다.[20] 후술하겠지만 삼미의 18연패 기록은 2020년 6월 12일 한화 이글스가 동일 기록을 만들때까지 거의 35년간 깨지지 않았다.[21] KBO 리그 역사상 최저 승률이다.[22] 2003년 롯데가 KIA전 상대 18연패, 2018년 LG가 두산전 상대 17연패를 당하면서 특정팀 상대 최다 연패 기록은 갱신됐다.*LG는 시즌 전패를 달성 할 뻔 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차우찬의 134구 투혼으로 17연패를 끊어냈다 하지만 단일 시즌 전패는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23] 이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저승률은 1999년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0할대 승률로 경신한다. 당시 시즌 승률은 0.067. 물론 0할 0푼 0리 승률을 기록한 팀도 프로 스포츠에서 나왔으나 부정 행각에 대한 징계 차원으로 준 것이라 기록에는 집계되지 않는다.[24] 1899년에 메이저리그에서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라는팀이 '''20승 134패(승률 .130)'''로 최하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단, 이때는 한 구단주가 두 구단을 운영할 수있는 신디게이트 방식이 허용되던 때라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를 같이 운영하던 구단주가 우승가능성이 더 많아보이던 세인트루이스에다 클리블랜드의 주축선수들을 다 넘겨버린거라 가능했다. 이 당시 사이 영도 세인트루이스로 이적. 그리고 이 시즌이 끝나고 신디게이트 경영은 금지되었고,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는 해체를 했다. 그 외에도 메이저리그 기록으로 인정되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 팀 루이빌 커널스가 승률 1889년에 27승 111패로 승률 .196을 기록한 적이 있다.[25] 이 국내 프로스포츠 최장 연패 역시 1999년에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두 배 가까이 되는 32연패를 기록하며 갈아치웠다. 이후 2008~2009년 V리그에서 수원 KEPCO 45가 지난 시즌 포함 시 27연패로 삼미의 기록을 3위로 끌어내렸다.[26] 물론 프로야구 출범 초창기 인프라가 전무하다시피했던 1985년의 18연패와 프로야구의 역사가 40년에 가깝게 쌓이면서 리그의 운영체계, 선수들의 기량과 육성 규모 등이 월등히 발전한 2020년의 18연패는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27] 사실 감사용은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영향 때문에 일반인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엄연히 전문 선수였다. 전문대 졸업 후 실업팀의 콜을 받지 못해 직장인 야구팀(오늘날의 사회인 야구)에 몸담았을 뿐. 축구로 치면 무리뉴와 빌라스-보아스가 비선수 출신 감독으로 오해받는 것과 마찬가지다.[28] 물론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었던 프로야구 초창기엔 패전처리 투수는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았다. 인원이 적었던데다가 선발, 중간, 마무리라는 분업 체계가 희박했던 시절이었으니.[29] 유년 시절 인천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 덕에 KBS N 스포츠에서 제작한 스포츠 다큐 인천야구의 추억에서 스토리 텔러의 역할을 맡았다.[30] 게다가 삼미의 여성 마스코트는 원더우먼이었다. 이벤트가 열리면 다른 팀들은 동물옷을 입고 나오는데 삼미만 늘씬한 미인 언니가 나와서 주목을 받았다. [31] 팀 전체로 보면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허술한 전력을 갖췄지만 일부 선수 중에는 개개인의 능력이 매우 출중한 선수도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고교와 대학 시절 최고타자 소리를 들었던 양승관.[32] 그나마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덕분에 인지도가 그나마 있는 편이다. 삼미보다 역사가 더 짧고 성적도 처참했던 청보 핀토스는 그야말로 인지도 수준이 안습(...). 삼미, 청보보다는 후신인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인천 연고지를 이어받은 SK 와이번스가 유명하다.[33] 전기 6위, 후기 6위[34] 전기 2위, 후기 공동 2위[35] 물론 다들 알다시피 한 선수가 거의 다 만들었다.[36] 전기 6위, 후기 6위[37] 전기 6위, 후기부터는 청보 핀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