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 핀토스
1. 소개
지금은 사라진 KBO 리그 옛 구단이며, 삼미 슈퍼스타즈에 이어 인천광역시 연고의 2번째 프로야구단이었다. 단, 운영법인은 삼미 슈퍼스타즈와 다른 곳이다.
2. 역사
2.1. 삼미를 계승한 꼴찌
1985년 전기리그를 끝으로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의 역사를 이어 받아 조랑말을 마스코트로 앞세워 1985년 후기리그부터 리그에 참여했다. 그러나 삼미의 짧은 영광을 이끌었던 장명부도 거듭된 혹사의 후폭풍으로 인해 슬슬 삽질을 시작할 때였고 장명부 이외 선수들의 기량도 삼미 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팀의 성적은 최하위권. 팀의 상징색은 빨강색이다.
투수교체시에 살아있는 말이 직접 끄는 마차를 타고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불펜 마차'도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이동 속도가 워낙 느렸고 관중들의 함성에 놀란 말들이 그라운드에 똥을 싸는(...) 실례를 하는 일도 있는데다 '핀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두 말 중의 한 마리가 새끼를 낳다가 죽는 바람에 마차 세레모니는 중단됐다고 전해진다.[5]
청보 핀토스의 모회사는 당시 중견 섬유업체였던 풍한방직이었다. 풍한방직이 식품산업에 진출하면서 "청보"라는 상표명을 썼는데 마침 풍한방직 사장 김정우 씨가 '''경기고 후배'''인 삼미 슈퍼스타즈 구단주 김현철 회장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되어 후배의 어려움을 돕고 무엇보다 새로 시작한 식품사업도 홍보할 겸 전격적으로 프로야구에 참여한 것이다. 이 당시 삼미 구단의 매각대금은 60억원[6] 이었지만 현금을 지불하지 않고 삼미의 부채를 청보가 대신 떠안는 형태로[7] 삼미 구단을 인수했다. 정작 풍한방적은 대전광역시에 본사를 둔 회사로[8] 실향민 출신 김영귀가 창업했다고 한다. 상세한 사항은 청보식품 문서 참조. 다만 야구단 창단 직전에 대전에 있던 공장을 팔았다고 한다. 대전 오류동의 삼성아파트 일대가 예전에는 풍한방적의 공장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청보식품은 갑툭튀에 가까운 과정으로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나온 기업이었기에 루머가 굉장히 많았다. 군납업체에 선정되어 대량의 라면 납품권을 손에 넣은것을 두고 집권하고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의 영부인 이순자의 소유라는 루머가 그럴듯 하게 퍼져 있었다. 당시에는 청보가 '''청'''와대의 '''보'''물의 줄임말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또는 여의도순복음교회나 통일교의 투자라는 루머도 꽤 돌았다. 그러나 군납업체 선정 건은 청보식품 사장이던 장기하가[9] 예비역 장성에 하나회 출신으로 군 쪽엔 파워가 남아있던 양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뒷 이야기도 있다.
원래 청보 야구단의 팀명은 '청보 팬더스'로 정해질 뻔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청보식품의 로고가 팬더였기 때문에 팀명을 팬더스라고 하려고 했으나 OB 베어스와 이미지가 중복되고 약한 이미지라고 판단해서 다른 동물로 바꾸게 된다. 팀의 상징 동물은 북미산 조랑말로 결정됐고 조랑말을 뜻하는 핀토스(Pintos)로 팀명이 결정됐다. 팀의 마스코트를 말로 정한 것은 김정우 구단주의 아이디어였는데 당시 김정우 구단주는 당시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아무튼 모기업인 청보식품이 '''존재감이 없는''' 식품회사였던지라 당시 청보 핀토스는 인천과 춘천에서 열린 홈경기 때마다 자사 제품인 곱배기 라면과 영라면을 관중들에게 나눠줬는데 성적도 안 나오는데다 라면은 맛없기까지 하니까 뜯지도 않은 라면이 숭의야구장과 춘천야구장 내에 버려진 채로 엄청나게 굴러다녔다고 한다.
당시 야구장에서 청보 라면을 받고 집에서 이를 끓여먹은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야구도 못 하는 것들이 라면이라고 잘 만들리가 있나!"''' 혹은 '''"라면도 못 만드는 것들이 야구라고 잘 할리가 있나!"'''라는 욕을 들어먹었다.
덧붙여 청보의 모회사인 풍한방직은 "핀토스"라는 이름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청바지 브랜드에도 활용했다. 감독 시절의 허구연이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1985년 후기리그 부터 리그에 뛰어든 청보는 그 해 후기 4위로 나름 선전했다. 시즌이 끝난 후 청보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코치진을 비롯한 선수단에 변화를 줬다. 삼미 시절부터 팀을 이끌었던 김진영 감독이 물러나고 허구연 MBC 해설위원이 새롭게 감독이 되었다. 당시 나이 34세 7개월로 역대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 기록이다. 아울러 힘을 잃은 장명부를 방출하고 또 다른 재일동포 투수였던 김기태를 영입했다. 아울러 롯데 자이언츠에 정구선(2루수), 정성만(투수), 우경하(외야수)를 내주고 임호균, 배경환, 이진우, 양상문(이하 투수), 김진근(내야수)을 받아오는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켜 마운드 보강에 힘썼다.
그러나 기대는 금새 실망으로 바뀌었다. 1986년 개막과 함께 7연패에 빠지는 등[10] 삼미 시절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하위권으로 떨어졌고, 그나마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의 기초공사(?) 덕분에 최하위는 면했다.[11] 신생팀 덕에 1986년 시즌 꼴찌는 면했지만 이듬해인 1987년 기어이 최하위로 떨어지며(...) 모기업에 대한 심각한 역홍보효과를 우려할 수준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기업인 풍한방직과 청보식품이 자금난에 휘말리면서 1987년 시즌 중반부터 야구단의 제3자 매각이 추진된다.
2.2. 구단 매각
앞서 서술했듯 청보식품의 라면 사업이 생각보다 확장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후반 섬유업계의 구조적 불황까지 겹치며 야구단 운영은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 결국 1987년 시즌 후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에 50억원에 구단을 매각하여[12] 태평양 돌핀스로 바뀌었다.[13] 이에 따라 동명의 기존 운영법인은 의류 제조업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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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30일 MBC전에서 홈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으며 동년 10월 04일 빙그레와의 대전 원정이 청보 핀토스라는 이름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성적은 '''667'''. 뒤에서 '''121'''이다. 1986년의 6위 역시 이 해부터 리그에 참가한 신생 제7구단 빙그레 이글스가 최하위를 깔아줬기 때문에 기존 6개 구단 중에서는 꼴찌였다. 쉽게 말해 3년 내내 꼴찌 근처만 헤맨 셈. 더구나 '''창단→667→인수''' 라는 점이다. 이 당시 청보의 매각대금은 50억원[14] 이었는데 삼미 인수때와 마찬가지로 청보의 부채 50억원을 태평양이 떠안고, 대신 그 부채를 8년 거치-7년 분할상환 한다는 조건으로 구단을 인수하였다. 기가 막히게도 거치기간이 종료된 1996년에 태평양은 현대그룹에 야구단을 매각했는데 당초 청보로부터 인수한 부채 50억원에 8년간 붙은 이자 포함하여 총 70억원을 현대에 넘기고 별도 매각대금 으로 무려 400억원(!)을 받았다. 말하자면 태평양은 8시즌 동안 거의 현금 한푼 안들인 채 인수한 야구단을 운영하며 회계상으로는 적자였겠지만 막대한 홍보효과를 얻었고, 게다가 거액을 받고 구단을 팔았으니 태평양으로선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이후 풍한방직은 풍한산업을 거쳐 풍안방직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김정우 구단주는 홈 경기때 매일 야구장을 찾을 정도로 야구광 이었는데, 야구단을 매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하며,[15] 인천 시내의 한 호텔에서 선수단과 송별회 겸 해단식까지 마련해 줬다고 한다. 이런저런 말이 많아도 그의 야구단 운영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이후 김정우 구단주는 폐암 투병 중에 비교적 젊은 나이인 2005년 7월 13일 61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대재벌 그룹이 아닌 중견회사의 자회사였던 만큼 야구 역사에서도 가장 적은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는데, 전신인 삼미가 워낙 임팩트있는 불명예 진기록(한 시즌 최저승률, 최다연패, 특정구단 상대 전패, 장명부의 427이닝 혹사 등)들을 많이 남기는 바람에 삼미는 한국 야구계에서 최악의 팀의 대명사격으로 현재까지 야구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형편없는 성적을 냈음에도[16] 삼미와의 인지도는 천지차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청보가 2시즌 반 동안 거둔 성적은 271경기 97승 169패 5무 승률 0.365, 전신인 삼미가 3년 반 동안 거둔 335경기 120승 211패 4무(.365)와 별로 다르지 않다.(...)
역대 KBO 구단들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팀이다. 없어진지 오래되었고 만년 꼴찌라는 점에서 비슷한 경우인 삼미는 프로야구 원년팀이라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장명부의 30승 원맨쇼, 전년도 압도적인 꼴찌에서 전후기 2위를 기록하는 꼴찌팀의 반짝 돌풍, 최저 승률, 최다 연패, 단일시즌 특정팀 상대 전패등 어떤 의미로든간에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팀이 사라진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컬트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반면, 청보는 딱히 내세울만한 스타도, 성적도 만년 꼴찌이지만 그렇다고 주목할만한 꼴찌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진 실정이다.
2.3. 역대 감독
- 김진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말년이던 1985년 전기리그 도중 18연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됐다가 팀이 청보로 바뀌면서 다시 돌아와 후기리그에서부터 지휘봉을 다시 잡았다. 그러나 1985년 시즌이 끝나면서 또 다시 해임됐다.
- 허구연: 김진영 감독의 후임으로 1986년 딱 한 시즌 감독을 맡았는데 이 당시 나이가 불과 35세다. 그것도 코치 경험 없이 임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1986년 한 시즌을 다 채우지 못하고 후기리그 중도에 사임. 청보에서의 감독 생활은 그의 야구 인생 중 유일한 감독 경험이다. 15승 2무 40패의 매우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해임되었다. 당시 타 구단들은 허구연의 청보를 상대로 더 기를 쓰고 이기려고 했는데, 이는 '약체팀의 승수 자판기화'라는 점 외에도, "코치 경험도 없는 감독에게 지면 망신"이라는 인식도 한몫했기 때문이라고.[출처]
3. 소속 선수
3.1. 주요 선수
삼미로 전반기를 뛴 85년 포함, 세 시즌 중 한 시즌이라도 규정타석 혹은 정규이닝의 70% 가깝게 소화한 선수
- 권두조
- 금광옥
- 김기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김기태와는 동명이인. 재일교포 투수였다.
- 김동기
- 김바위
- 김봉근
- 김신부
- 김우근
- 김윤환
- 김진우
- 배경환
- 신태중
- 양상문
- 양승관
- 오문현
- 우경하
- 이선웅
- 이영구
- 임호균
- 이해창
- 조병천
- 장명부
- 정구선
- 정성만
- 정진호
- 정은배
- 정현발
- 최계훈
3.2. 비주전 선수
4. 역대 성적
[1] 삼미가 지긋지긋한 18연패를 최계훈의 혼신의 역투로 끊어낸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단 전기리그까지는 삼미그룹과 구단을 공동으로 운영하다가 후기리그부터 '청보 핀토스'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2] 역사까지 승계[3] 제2 홈구장. 현재의 의암 야구장과는 다른 곳이다. 청보 2대 감독이었던 허구연의 감독 데뷔 첫 승리도 춘천에서 만들어졌다. 위치는 현 KBS춘천방송총국 자리에 있었다[4] 후신구단이기에 역사까지 승계[5] 말 한필의 가격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비싼 축이다. 한 필에 거의 집 한채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재정이 그리 좋지 않은 청보 핀토스에서 대체마(馬)를 새로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것이다.[6] 당초 언론 보도엔 70억원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60억원 이었다고 한다.[7] 이 부채는 청보의 후신인 태평양 돌핀스까지 넘어 갔다가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 과정에서 완전히 해소된다.[8] 공교롭게도 OB 베어스의 마지막 대전 홈경기(1985년 8월 18일~8월 20일) 상대가 청보였다. 물론 OB가 위닝 시리즈를 가져갔다.[9] 가수 장기하와는 동명이인. 이쪽은 이름의 한자와 성씨부터가 다르다.[10] 7연패 후 첫 승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보는 1986년 4월 6일 춘천 빙그레전에서 8회초까지 신생팀 빙그레에 3:8로 뒤지고 있다가 8회말에 3점을 얻고 9회말에 터진 양승관의 끝내기 쓰리런에 힘입어 9:8 대역전승을 이뤘다. 이 경기가 끝나자 감독 데뷔 첫 승을 거둔 허구연 감독이 엉엉 울었다고 한다.[11] 이 당시 소년중앙에서 허구연 감독과 빙그레 배성서감독의 대담을 성사시키는 환상적인 일도 있었다.[12] 정확히는 운영사 청보핀토스의 자산을 신규법인 (주)태평양돌핀스로 넘겼다.[13] 풍한방직은 야구단은 매각했지만 야구와 완전히 발을 끊은 것은 아니어서 당시 유일한 야구전문지였던 '주간야구'를 계속 후원하였다. 그러나 기업이 회생 기미를 보이지 않은 데 이어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1993년 11월말 지원을 끊었고 주간야구는 발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주간야구는 2006년 2월 복간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복간 6주만에 다시 폐간되고만다.[14] 청보가 삼미를 인수한 금액보다 10억원이나 더 싸다![15] 바로 1985년 여름에 삼미가 청보로 매각될때도 삼미 김현철 구단주는 아쉬움에 눈물로 밤을 보냈었다. 역사는 반복된셈..[16] 두 팀은 똑같이 3시즌 동안 존재했는데 삼미는 1983년 전,후기 2위의 성적을 내긴 했다. 삼미의 전설적인 투수 장명부의 원맨쇼에 힘입은 기록.[출처] 스포츠서울의 이종남 전 기자가 쓴 프로야구 비화집 <사람 좋으면 꼴찌>(1992).[17] 전기리그에서는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으로 활동.[18] 전기 6위, 후기 6위[19] 전기 6위, 후기 7위[20] 전기 7위, 후기 6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