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엽(1938)

 




[image]
실제로 김동엽의 항의 타임은 진짜 항의보다 심판과의 잡담이 주된 내용이었다.
'''본명'''
김동엽(金東燁)
'''출생'''
1938년 10월 26일
'''사망'''
1997년 4월 10일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image] 성균관대학교

제에미, 거 나 참 저 도루가 어드러케[1]

세이프네? 턱무하지[2] 않간?

아니 기보다 이심판, 오늘 껨 끝나고 뭐하네? 거이 노가리에 쏘주나 한잔 하자우야.

머이 어드래? 아니 기럼 노가리 말고 내 삼겹살 한번 사갔서! 거 박심판도 같이 데려 오라우.

어, 어, 기래! 기럼 거 오비(맥주)까지 한번 까자우 기래!

1. 소개
2. 유년시절
3. 현역시절
4. 심판 시절
5. 지도자 시절(아마추어)
6. 지도자 시절(프로)
6.1. 해태 타이거즈 창단감독
6.2. MBC 청룡 감독 1기
6.3. MBC 청룡 감독 2기
7. 야구계를 떠난 이후
8. 불꽃같은 쇼맨십
9. 김성근과의 비교
10. 에피소드
11. 저서


1. 소개


KBO 리그의 지도자 및 야구 해설가. 1971년 건국대학교 감독으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 MBC 청룡 감독에서 물러날 때 까지 무려 '''13번'''의 '''모가지#s-1.1'''를 당한 파란만장한 감독 생활로도 유명했다.
별명은 위 자료사진과 같이 '''빨간 장갑의 마술사'''였다. 또한 1938년에 태어나 전쟁통에 38선을 넘어온 "38 따라지"라는 의미로 등번호는 38번을 애용했다.[3]

2. 유년시절


1938년 10월 26일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4]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싯적에 야구선수로 활약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김동엽과 떨어져 있게 되어 김동엽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가 손자를 끔찍이도 예뻐했다고 한다. 힘이 장사였던 할아버지가 겨울에 직접 노루를 잡아와서는 목을 따서 받은 피를 바가지에 받아 "몸에 좋은거니 전부 마셔야 한다"면서 뜨끈한 노루피를 억지로 먹였는데, 어린 김동엽이 겁에 질려 안먹고 버티자 할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이놈! 어서 먹지 못하갔네?"라고 꾸짖어서 강제로 먹였다고 한다.[5] 그 외 산삼이니 녹용이니 어릴 적부터 몸에 좋다는 건 다 할아버지가 구해와서 손자에게 먹였고, 덕분에 김동엽은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젊은이와의 주먹 다짐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 강골과 완력을 갖게 되었다. 싸움에서는 밀리지 않다 못해 진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문제는 이기는 것 까진 좋은데 상대방이 부상을 입을 만큼 크게 이기는 점이 비일비재 했다는 것이…[6]

3. 현역시절


6.25 전쟁이 터지자 김동엽은 할아버지와 헤어져 부모님을 따라 월남했고, 피난지인 부산의 토성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경복고[7]-성균관대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깨 부상으로 인해 잠시 야구를 그만두고 폭력 조직의 말단 대원으로 뛴 경력이 있는데, 이 당시 싸움판에서 턱과 치아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치아가 좋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
이후 마음을 고쳐먹고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시험을 쳐서[8] 들어갔다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야구 선배의 권유를 받고 다시 야구를 시작하여 2루수로 제법 활약을 보였다.[9] 대학 졸업 후 한국전력에서 선수로 뛰었으나 폭행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963년에 퇴단당했다.[10] 한편으로 폭행사건으로 곤혹을 겪던 김동엽이 경찰에서 풀려난 데에는 한전 코치 어우홍의 형이자 당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어인영[11]이 뒤에서 손을 써준 덕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우홍은 김동엽과 팀내 사제지간이었지만 서로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고, 김동엽을 한전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선 이가 바로 어우홍이었다.
한전에서 잘린 후, 당시 한전 감독이던 김계현의 주선으로 조흥은행에 이적했지만 입단 직전에 조흥은행 광교 본사가 대형 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고, 이 와중에 운동부를 운영할 여력이 없다며 야구부와 여자 농구부를 해체시켜 버리는 바람에[12] 어쩔 수 없이 바로 은퇴하고 말았다.

4. 심판 시절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지도자로 바로 가지 못하고, 대한야구협회 심판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일은 1963년[13] 제5회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 심판으로 출장, 일본팀에 대한 극심한 편파 판정을 하여 한국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대회는 한국·일본·필리핀·대만 4개국이 참가했는데, 당시 한국 야구협회는 홈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꼭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심판들에게 일본팀을 집중적으로 견제하라고 지시했고, 일본전 주심을 맡은 김동엽은 스트라이크/볼을 엉터리로 판정한 끝에 일본팀의 멘탈을 나가게 하여 한국이 우승할 수 있도록 공을 세웠다 카더라.
여기서 또 다른 에피소드로, 당시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이던 '''오도광'''[14] 씨가 김동엽의 편파 판정에 대해 '''"치졸한 애국심"'''이라는 타이틀로 그를 호되게 비판하는 기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당시 오 기자는 김동엽과 친한 것도, 그렇다고 서로 으르렁대던 것도 아닌 그냥 살짝 면식만 있던 정도였고 김동엽에 대한 기사를 올린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후 오 기자의 사위가 "김동엽이란 양반이 쓴 회고록(후술할 '''그래 짤라라 짤라''')에 장인어른 얘기가 있더라"고 전하여 그 책을 읽어 보니 '''"그래도 오도광 기자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비판할 줄 아는 기자 정신의 소유자였다"'''라며 오 기자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오 기자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호의적인 평을 들어서 기분은 흡족했다고 한다.

5. 지도자 시절(아마추어)


이후 대한체육회에서 개설한 '''코치 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1971년 창단한 건국대학교 초대 감독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에 발을 들였다. 건대 감독이 된 그해 겨울 학교 운동장에 비닐하우스 훈련장을 만들어서 선수들에게 엄청난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며 창단 1년만에 학교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당시 에피소드로 김동엽이 학교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관계자가 "이 겨울에 채소라도 키우려고 그러느냐"고 물었고, 김동엽은 "그렇다. 건대를 건강하게 키울 야구 채소다" 라고 답했다는 얘기도 있다. 덕분에 그 해 건국대는 전 해에 비해 입시원서가 3배 넘게 팔리며 학교의 인기가 상한가를 쳤다고 한다.
이후로 성무[15], 실업 롯데,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의 감독을 역임하며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스파르타 식 훈련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집불통에 직설적이고 불같은 '''다혈질'''의 성격이었던 탓에 구단 고위층과의 충돌이 잦았고 선수들과의 마찰도 적지 않아 한 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서두에서와 같이 13번의 해임이란 흑역사를 남기기도 했다. 평소 김동엽은 자신의 의견과 부딪히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선후배는 물론 지위고하도 안가리고 걸직한 황해도 사투리가 섞인 "제-에-미~"로 시작하는 투박하고 직선적인 말투로 마구 따지고 대들었다고 한다.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의 창단감독으로 취임한 1975년 12월, 부산 전지훈련에서 연세대학교와의 연습경기때 선수들이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이자, 이에 격분한 김동엽 감독이 서울까지 전 선수단을 13일간 하루 50km 구보로 복귀시킨 사건은 유명한 일화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신생팀의 홍보 효과를 노리고 사전에 김동엽이 혼자서 구상한 이벤트였다고 한다. 때마침 선수들이 연습경기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김동엽이 기다렸다는 듯 즉흥적인 결정인양 자연스레 준비해 둔 카드를 꺼내든 것. 이때부터 보름간 롯데 선수들은 구간 마라톤 형식으로 서울까지 뛰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이현세 작 '공포의 외인구단'의 지옥훈련의 모티브가 되었다. 당시 롯데 관계자가 펄쩍 뛰면서 한 겨울에 선수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반대하자, 이미 전문의의 협조[16] 하에 안전하게 뛰게할 조언까지 받았다면서 오히려 엄청난 홍보효과가 계획대로 나타날 거라 장담했다. 실제로 롯데 야구단의 구보 복귀 이벤트는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당시 신생팀이던 롯데 자이언트의 인지도는 확 치솟았다. 당시 실업 롯데 소속으로 구보에 참여했던 천보성(삼성), 정현발(삼성), 차영화(해태), 김용희(롯데) 등의 선수들은 대부분 한국프로야구의 원년 창립멤버로 활약했다. 본인은 행군하는 선수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인 것이 아니라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선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17]
이 때 생긴 에피소드로, 부산~서울간 구보 종료 당일 구단에서 선수들을 위해 불고기 회식을 마련 했는데 투수 양한철이 맥주를 원샷했다가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간 일이 있었다. 장거리 구보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알콜이 들어오는 바람에 탈이 난 것인데, 그 일로 양한철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김동엽은 1977년 1월 18일 부터 1월 31일 까지 13일 동안 이른바 '''통일염원의 대행군'''이라는 명목으로 또다시 롯데 선수단을 전남도청에서 임진강 자유의 다리까지 총 480km를 행군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8]
지도자 생활 외에도 특유의 입심을 앞세워 프로야구 출범 이전 TBC, KBS 등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도 맹활약 했다.

6. 지도자 시절(프로)



6.1. 해태 타이거즈 창단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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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3게임 만에 유니폼을 벗은 해태 감독 시절'''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야구계에서 김동엽의 위상은 대단했는데 이는 해태그룹이 KBO 측에 '''감독 김동엽'''을 창단 조건으로 요구한 것에서 드러난다. 다른 기업들이 창단 조건으로 서울을 연고지로 달라거나 실업팀의 소속 선수들에 대한 보유권을 인정해 달라거나[19] 하는 예는 있었지만, 특정 감독의 영입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김동엽의 사례가 유일무이 하다. 김동엽의 인지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는 한데...
사실 인지도라기 보다는 광주라는 연고지 적인 이유가 컸다. 1980년 4월에 방송을 개시한 MBC 라디오 '''홈런출발'''의 구성작가 김광휘씨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행자이던 김동엽(당시 한양대 야구부 감독)의 입을 빌려 '''"지금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지길 바란다"'''는 직설을 내뱉는 사고를 치며 김동엽도 김광휘씨와 같이 신군부 정권의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이런 상황 이었기에 해태그룹은 프로야구 창설 준비팀과 협상하면서 "창단은 하겠지만 대신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 하더라도 양해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김동엽은 MBC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데다가 MBC 프로야구단 창단 작업에도 깊숙히 개입해 있었는 바, 공공연히 '''MBC의 초대 감독은 김동엽'''이라고 사실상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해태는 김동엽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표시했고,[20] 호남 연고팀을 유치하는 데 혈안이 되있던 프로야구 준비팀과 청와대에서 이를 받아 들이면서 해태 타이거즈 창단과 김동엽의 영입이 이루어진 것이다.[21]
해태 구단 창단 후 광주에서 열린 환영회 때 김동엽이 무등구장의 관객석을 꽉 채운 광주 시민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 김동엽이가 호남인 여러분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왔습니다~!!"'''라고 부르짖자 시민들은 불같이 환호했는데, 행사 후 김동엽의 친구인 광주일보 사장 김종태가 "시국이 어느 때인데 그런 발언은 위험하니 자제해 달라"며 충고했다고 한다. 하긴 신군부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집권한지 불과 1~2년 남짓한 시기였으니...
그러나 이런 엄청난 기대를 받으면서 출발한 김동엽의 해태 초대 감독 시절은 시즌 개막 후 13게임 만에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로 인하여 5승 8패의 성적만 남기고 해임 당하면서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김동엽 감독의 과도한 알콜 사랑이 빚어낸 촌극이었는데...[22] 자세한 내용은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사건 항목에 나와있으니 참고 바람. 이 불화사건은 김동엽의 지도자 생활중 가장 큰 흑역사였다.

6.2. MBC 청룡 감독 1기


이후 약 1년 간 MBC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백인천이 시즌 초반 감독직에서 이탈한[23] MBC 청룡의 콜업을 받고 후기리그 부터 감독으로 취임하여 특유의 선수 장악력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MBC를 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1983년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때마침 시리즈 상대는 전해 자신을 자른 해태 타이거즈였고 김동엽 감독은 누구보다도 전의를 불태우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러나 하필 한국시리즈 개막을 며칠 앞둔 10월 9일 아웅산 사태가 터지며 개막이 일주일 정도 연기되었고 그 사이에 보너스 지급 문제가 불거지며 선수단 분위기가 와해되는 바람에 해태에 1무 4패로 속절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해 후기리그 막판, 김동엽 감독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후기 우승시 선수들에게 1인당 5백만원 [24]씩 보너스를 주겠다"라고 발언했고 이에 고무된 선수들이 결국 우승을 실현시켰다.[25] 여기까지는 좋았는데...후기리그 우승 축하연에서 모 고참급 선수가 구단 관계자에게 보너스 지급 여부를 물었다가 무슨 소리냐며 면박만 당했고, 이에 선수들의 사기는 급전직하 하고 말았다. 당황한 김동엽은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주겠다"라고 선수들을 달랬지만, 당시 해태는 우승 시 보너스로 1억원을 푼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26] 기가 죽을대로 죽은 선수들에겐 무소용이었다. 당시 구단주이던 이웅희 MBC 사장이 벼랑 끝에 몰린 5차전 전날 밤 김동엽 감독을 찾아가 "우린 2억원을 풀겠다"고 전하라 했지만, 이미 해태에 1무 3패로 밀리고 있던 상황인지라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기 였다. 결국 한국시리즈 제패에 실패한 김동엽은 준우승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또 '''잘렸다'''.
시리즈 당시 MBC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에 김동엽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나 선수 기용[27]으로 인하여, 항간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큰 광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5공 정권에서 MBC가 해태에게 우승을 양보하도록 압력을 넣은게 아니냐"'''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다. 후일 김동엽은 '''"결전을 앞두고 선수들과 돈 때문에 승강이를 벌여야 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서 승리에 대해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식의 경기 운영은 감독으로서 태업이자 직무유기임에 틀림없다...
이후 약 2년 정도 야인 시절을 보내던 중, 육영재단 산하 어린이회관[28]의 어린이 야구교실 감독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국민학교(현재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상대로도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악명을 떨쳤고, 그 넓은 어린이회관을 몇 바퀴 돌리는 식의 체력훈련을 시켰다고 한다.[29]

6.3. MBC 청룡 감독 2기


1985년 시즌 어우홍이 이끌던 MBC가 전기리그 5위(당시는 6개 구단 체제)로 추락하자, MBC는 어우홍을 감독직에서 중도해임 시키고 후임 감독으로 김동엽을 재영입했다. 이당시 계약 연봉이 3천만원으로, 7개구단 중에서 최고였다는 점에서, 그가 두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그래도 한국 최고의 명감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해 후기리그 부터 사령탑에 오른 김동엽은 흐트러진 팀 분위기를 다잡으려 했지만 MBC는 후기리그 6위로 떨어지며 종합 5위로 당시 기준으로는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30]
하지만 오프 시즌에서 절치부심한 김동엽은 1986년 시즌 혜성같이 떠오른 슈퍼 루키 김건우를 앞세워 전기리그는 4위에 그쳤지만 후기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OB 베어스와 정규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을 벌였다.
시즌 최종전인 9월 17일[31] 해태 타이거즈와의 전주 경기를 9대 4 승리로 이끌고 1983년 한국시리즈 이후 3년 만의 가을야구를 확정짓나 싶었지만, 같은 날 잠실에서 OB 베어스롯데 자이언츠에게 9회초까지 1대 3으로 뒤지다가 9회말 최동원을 상대로 동점 투런홈런을 뽑아낸 김형석과, 3루타를 치고 중견수 홍문종의 송구 실책으로 끝내기 득점까지 올린 신경식의 활약으로 극적인 4대 3 역전승을 거두며 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낚아챘고,[32] MBC는 3위로 미끄러지며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덧붙이자면 이 시즌에 KBO가 부정위 타자 문제로 시비를 걸자 제대로 엿먹인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해 MBC는 자매 구단인 주니치 드래곤즈에 요청하여 일본인 코치 미즈타니 히사노부를 영입했는데, 김동엽과는 야구관이 극단적으로 달랐던 탓에[33]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34] 그러나 MBC 구단 측에서는 김동엽보다 미즈타니를 더 신임했고, 1987년 시즌부터는 김동엽의 투수 기용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수단 운영 권한을 미즈타니에게 부여하였다.[35] 여기에 선수들의 감독 불신임 여론까지 겹치면서 '''결국 김동엽은 그 해 후기리그 개막 직전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감독 불신임을 놓고 공식적으로 투표를 한 건 아니었고, 구단 고위층에서 몇몇 고참급 선수들을 비밀리에 불러 김동엽의 재신임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전부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웠다. 이런 고약한 전통은 1989년 시즌 감독이던 배성서의 퇴진시에도 재연된 바 있다.
'''그것으로 김동엽의 감독 인생은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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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올스타전에서 김응용 감독과 함께.[36] 이것이 그라운드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동엽의 덩치에 주목. 김응용은 190cm를 넘는 장신이지만, 김동엽도 180cm근처는 되어 보인다. 그 나이대의 한국남성 신장 평균이 160cm 후반[37] 정도였으니 그도 상당한 덩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정규시즌은 전후기로 구분하여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각 1위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전후기 1위가 같은 팀이라면 2위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통해 시리즈 진출을 결정하는 형태였는데(2위도 같은 팀이면 그 팀이 한국시리즈 직행), MBC 측에서는 후기리그부터의 분위기 일신을 위해서 올스타 브레이크 도중 김동엽의 해임을 결정했다고.

7. 야구계를 떠난 이후


MBC 감독을 끝으로 현장을 떠난 이후 1992년부터 SBS에서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하다가, 1994년 시즌 도중 야구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건드리는 설화를 일으켜 중도 하차하였다. 정확히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군대에 가면 실력이 퇴화하니 군대에 안 가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이건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로 봐도 큰 오버였다.
호불호가 확실하긴 했지만 해설가로서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38] 원래부터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를 맡을 정도로 입담이 출중하기도 했고, 당시에는 감독 출신 해설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 설명 또는 예측이나 데이터 분석, 그리고 야구 전문가만의 지식을 일반 야구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주는 능력이 뛰어났다. 프로 감독으로서의 성과가 그다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김동엽은 빠따로 상징되는 특유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만 있는게 아니라, 나름대로 스포츠 과학이나 야구 이론에 대해 상당 수준의 지식을 보유했다는 면을 그의 해설을 통해 알 수 있었다.[39] 하일성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하는 자신의 해설 스타일을 수립하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김동엽을 꼽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빨간장갑 야구단'''이라는 독립 야구단을 만들어 최근의 고양 원더스처럼 프로야구에서 퇴출된 선수들을 모아 지옥훈련을 통해 다시 재활시킨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정 문제 등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린 일도 있다.
이후 예능 프로의 패널로 나오거나 1995년에는 탤런트로 전업하여 SBS 드라마 <형사5[40]>에 형사반장 김자풍 역으로 출연하는 등, 인생 말년에 상당한 굴곡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그 외에 기업체 강사[41], 방송계에서 리포터 등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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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 15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 때 직관을 온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 이희호 부부와 함께. 경기종료까지 줄곧 옆에서 경기 상황을 해설해 줬다고 한다. 학연이나 지연으로는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92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정계입문 이야기도 나왔으나 결국은...
1995년 말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적립해온 지도자로서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무산되었다(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김재박이 감독으로 취임). 당시 김동엽은 MBC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 출연하여 '''"8년 동안 절치부심 하면서 기다렸다. (그라운드로)꼭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을 남기기도 했다.
1997년 3월 해태 타이거즈의 고문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였고 한편으로 프로야구 정보관련 유료전화 사업을 준비하던 중, 시즌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둔 그해 4월 10일 혼자 기거하던 용산구 한남동의 독신자 아파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42] 마지막까지 세간에 큰 충격을 남기고 향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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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엽의 부고 기사(경향신문 1997년 4월 11일 자)
김동엽은 죽기 몇 해 전부터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이후[43]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지경에 처하는 등 상당히 어려운 말년을 지냈고 후배들에게도 종종 손을 벌리는 등 초라한 몰골을 비추기도 했지만, 그래도 항상 호탕한 웃음을 잃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고 한다. 가끔 호텔 등지에 출입해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손님들에게 입담 퍼레이드를 펼치는데, 얘기가 워낙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일화도 있다. 운동 마치고 나가려는 데 웬 덩치좋은 양반이 카운터에 서 계시면 틀림없이 고인이었다고.

8. 불꽃같은 쇼맨십


생전의 김동엽은 누구보다도 쇼맨십을 즐기던 야구인이었다. 심판 시절 누구보다도 크고 요란한 판정 동작과 아웃당한 주자를 손가락으로 집어내는 듯한 제스쳐로 관중들을 포복절도 시키기도 했고, 감독이 되어서도 경기 때 직접 3루 주루코치로 나가 작전을 구사하거나, 무용을 하는 듯한 현란한 작전지시, ''''여성관중을 위한 팬서비스''''로 엉덩이에 타월을 집어넣고 일부러 두툼하게 만들어 실룩실룩 흔들고 가는 등의 기행을 보였으며, 타자들이 끼는 빨간 배팅용 장갑을 끼고 심판에게 일부러 삿대질을 하는 등의 심한 항의를 하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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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경기 중에 별것 아닌 판정이었는데, 김동엽 감독님이 더그아웃에서부터 2루심이 있는 곳까지 부리나케 달려 나오시더라고요.

그때 2루심이 김옥경 심판이셨는데, 두 분이 친하거든. 그런데 김 감독님이 달려나와서 뒷짐을 지고 배를 막 들이대는데, 김옥경 심판이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아, 왜 나왔어?" 하니까, 김동엽 감독님이 "오늘 중계 있잖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중계가 없는 날이었거든. 그래서 김옥경 심판이 "오늘 중계 없어." 하니까 "아, 그래?" 하시더니 그냥 얌전히 들어가시더라고요.

그분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도 하나의 쇼였어요.

김용수

심지어 경기 전 심판을 만나 "야 오늘은 한 10분 정도 나와 있을테니 준비하고 있으라우"라고 미리 통지하는 경우도 수두룩 했다. 그러고는 경기 중 그라운드로 튀어나와 특유의 빨간 장갑을 낀 현란한 손짓으로 심판에게 다가가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을 해대며 "날씨가 왜 이리 좋아? 안 더워? 오늘 끝나고 뭐해? 한잔 할까?" 이렇게 10분씩 떠들고 내려가곤 했다고...가끔 TV 중계가 있는 날이면 사전 통지 없이 "나랑 5분만 얘기 좀 하자"면서 뜬금없이 그라운드로 나오는 일도 있었고, 그러면 상대 심판은 "형님, 이 선 넘어오지 말고 5분만 떠들다 가쇼. 5분 넘기면 퇴장이유!"라고 경고(?)하면서 홈 플레이트에 발로 금을 그어놓고 김동엽의 대거리를 받아주었다. 지금 같으면 경기지연 행위로 경고를 먹을 만하겠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당시 야구판의 낭만이었는듯 하다.[44]
이렇듯 항의라고 한 것 대부분이 심판과의 '''노가리'''였고 정해놓은 항의 시간은 칼 같이 지켜서 그랬는지, 프로 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안 퇴장은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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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심판들과 항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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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건 부상을 입고도 목발을 짚고 나와서 항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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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루 코치로 나왔다가 주자가 횡사하자 아예 그라운드에 엎어져 대성 통곡을 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거나(일으키려는 사람은 이광은[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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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시즌 중[47] 경기 전 이벤트에서 김용수를 데리고 나와 치어리더와 함께 아쌀하게 거시기한 춤을 추는 등등...[48][49]
이와 같이 많은 팬들을 김동엽 특유의 쇼맨십으로 즐겁게 해주곤 했다.[50][51] 한마디로 스스로 망가지며 권위를 무너뜨린 것인데, 권위주의가 많이 탈피된 현대 시대에는 매우 진보적인 모습으로 보여지지만, 지금과는 달리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시절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김동엽은 이와 같은 스스로를 낮춰가며 권위를 무너뜨린 모습때문에 팬들과 선수단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MBC 감독 말엽에는 아예 프런트가 미즈타니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선수단은 김동엽을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요즘 말로 치자면 김동엽을 기수열외 시켰다는 설도 파다했다. 이점은 아래 비교 대상이 된 김성근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면인데, 김성근은(선수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이만수를 겨냥하여) "선수와 감독이 농담을 하는 것이 훈훈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정도로 권위가 없어지면) 그 팀은 망한다"고 주장한 바 있을 정도로, 감독의 권위를 중시했고 선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창 승승장구하던 SK 시절조차 이겨도 거의 기쁜 모습을 안보였을 정도다. ]
또한 방송계에서도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야구 해설은 물론《홈런출발》, 《김동엽과 함께》 등의 라디오, TV프로 진행자를 맡기도 했고, 각종 연예프로나 드라마 출연에 당시 프로야구 감독으로는 드물게 CF를 여러 편 찍을 정도로 상당한 국민적 인지도를 자랑했다.[52][53]

9. 김성근과의 비교


김동엽 특유의 강압적인 과도한 훈련 및 스포츠 과학 은 안중에도 없는 근성 강조, 프런트와의 잦은 마찰 등은 바로 김성근의 특징이기도 하다.[54] 1970년대 아마야구 시절 명장 소리를 들었던 그가 1982년 이후 프로에서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도 그의 야구관이 197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도 볼 수 있다.
다만 김동엽은 김성근보다 언플이 서툴렀고, 지나치게 술을 좋아한 데다가 다혈질인 인격상의 문제도 있어서 김성근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못했으며, 야구계에서 자신만의 사람들, 이른바 사단을 형성하는 데도 서툴렀다. 사실 김동엽을 따르는 야구인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특유의 성격 탓에 그만큼 적(敵)도 많았다. 김동엽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도 50대 50 정도였다.
더구나 김동엽은 해태의 초대 감독 시절 조창수, 유남호 코치와 마찰을 일으킨 끝에 13경기 만에 경질당했고, MBC 청룡을 지휘할 때에도 코치를 구타하는 사건 등으로 인심을 잃은 통에 팀내 고참급 선수들이 노골적으로 항명하는 모습을 보인 데다가 MBC의 프런트마저 김동엽의 재신임에 대해 고참 선수들의 의견을 참고했을 정도였다[55]. 반면 김성근의 경우 프런트와의 사이가 매끄럽지 못한 건 마찬가지 였지만 적어도 김동엽보다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고, 2002년 시즌 후 LG 트윈스 감독직에서 해임될 시엔 대부분의 LG 선수들이 프런트에 항의를 표시할 정도로 제자들은 잘 챙겨주는 면도 있었다. 사실 김동엽과 같이 술고래에 다혈질이고 자기 관리가 안되는 인물이 비단 야구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 내의 그 어느 분야에서도 아랫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힘든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김성근만큼 프로야구계에서 장수하는 데 실패하면서 1987년 시즌 도중 MBC 청룡 감독 직에서 떨려난 이후 어떤 구단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동엽식 야구는 1980년대를 끝으로 더 이상 볼 일이 없었고, 결국 김동엽은 파란만장한 삶만 남긴 채 59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성근의 경우, 프로 감독이 되어서도 아마야구 시절 자신만의 야구 스타일을 계속 고집했고, 1990~2000년대 초반까지는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킨 것 외에는 특출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며 김동엽처럼 여러 구단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나 김성근은 언론계 인맥을 잘 구축했고, 이런 인맥을 활용하여 언론을 통해 가끔씩 야구팬을 포함한 대중에게 감동을 줄 만한 어록을 푸는 등, 언플 능력 하나 만큼은 탁월했다. 또한 프런트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어도 소속 팀 구단주를 비롯한 최고위층과의 관계는 원만했던 데다가[56] 다시 사령탑에 오를 기회를 잡는 실력은 김동엽보다 훨씬 우월했다. 김성근이 설령 프런트와의 마찰로 인하여 유니폼을 벗더라도 앞서 서술한 특유의 언플 능력으로 자신은 프런트의 전횡에 당한 것 뿐이고, 모든 잘못은 프런트에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잘 포장하곤 했다. 이 때문에 2010년대까지 계속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SK 와이번스를 지휘한 5시즌 동안 우승 3회에 모든 시즌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끌어 냈으니, 김성근을 아주 무능한 감독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겠지만, 1970~1980년대식의 야구 스타일로 2010년대 까지 버틸 수는 없던 노릇이었고, 결국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김성근 야구의 폐단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김동엽처럼 영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논란이 많았던 인물이긴 해도 김성근의 생애 마지막 장면까지 김동엽처럼 비극적이어선 절대로 안될 일이지만, 김성근은 고양 원더스 감독 재임 시절 틈틈히 김동엽처럼 기업체 강사로 나서곤 했는데, 그 당시 납부한 연간 소득세만 '''3억원'''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강사료만 거의 10억원 가까이 번 셈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동안 지도자 생활로 벌어놓은 것까지 감안하면 재력 만큼은 건재할 것이며, 게다가 70대 노인같지 않은 체력과 몸매, 그리고 60대 부터 장족의 발전을 보인 패션 감각으로 미뤄볼 때 자신의 이미지와 실제 몸관리 하나는 철저한 양반이기 때문에 김성근은 김동엽처럼 독거노인[57]으로 쓸쓸한 말년을 보낼 일은 없을 듯 싶다. 경질 이후에도 간간이 얼굴을 비추다가 소프트뱅크의 코치 스카우터로 뽑혀가는 것을 보면 확실히 재취업 능력은 있는 듯하다.
이에 반해 김동엽은 물론 자신의 귀책 사유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본인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책임을 굳이 피하려 들지 않고 사표를 내던지는 일이 부지기수 였다. 아마야구 시절에도 종종 그랬었고, 특히 1983년 한국시리즈 당시 MBC 청룡해태 타이거즈에게 1무 4패로 무기력하게 참패하며 취임 6개월만에 해고 당했을 때에도, 구단 수뇌부가 보너스 지급 거부로 인하여 시리즈 직전 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모든 책임을 지휘부실이란 명목으로 김동엽에게 전부 뒤집어 씌웠다. 사실 어떤 일에 대해 변명하거나 돌려 말하는 건 질색을 하던 김동엽 특유의 직설적인 성격 탓도 있겠지만... 게다가 1987년 당시 김동엽은 MBC 프런트에 의해 일본인 투수 코치 미즈타니 히사노부에게 투수 기용권을 포함하여 상당한 선수단 운영 권한을 넘긴 상태였음에도 프런트는 전적으로 성적 부진에 대하여 김동엽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김동엽과 미즈타니의 능력 유무는 차치하더라도, 이렇듯 지휘권을 반으로 갈라 놓은 팀이 잘 돌아갈 리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미즈타니가 일본에서의 선수 시절 인지도는 높지 않았지만 당시 한국보다 훨씬 높은 일본의 야구 수준을 바탕으로 한 코칭 스킬이나 경기운용 능력 만큼은 한국인 지도자들 보다 한 수 위였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휘권이 이토록 이원화되어있고 프런트의 노골적인 불신임을 받던 김동엽이 제대로 된 리더쉽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1987년 전기 리그의 성적 부진의 책임을 전부 김동엽에게 물은 것은 분명 프런트의 무리수였다. 김동엽이 중도해임 당하고 그 해 후기리그 부터 수석 코치이던 유백만이 감독 권한대행으로 선수단을 이끌었지만, 여전히 미즈타니는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유지했고 김동엽에 비하면 훨씬 유한 성격인 유백만은 미즈타니에 대해 딱히 불만 없이 어느 정도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며 MBC는 후기리그 초반 2위까지 오르는 등 성과를 올리는 듯 했으나 이후 다시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4위로 후기리그를 마감하며 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MBC가 차라리 당시 김동엽을 1986년 시즌 후에 해임하고 미즈타니를 감독으로 세웠으면 이런 어색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아래에 설명한,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김영덕 영입을 걷어차버린 탓도 있긴 하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현재도 좋지 않지만) 지금보다도 극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롯데 자이언츠도위창조차도 실업 롯데 시절부터 헌신적으로 코치직을 수행했고, 강병철, 김진영 감독이 해임된 이후 여러번 감독 물망에도 올랐지만 국민 감정상, 그리고 국내 야구인들의 반발로 인하여 도저히 불가능 했다. 사실 미즈타니에 대한 디스도 대체로 국내야구인발이었다. 신용균 같은 재일교포 지도자들도 일부 국내 야구인들은 상당히 안좋게 보곤 했다. 비슷한 케이스인 재일교포였던 김성근, 김영덕은 완전 귀국했고, 한국에서 가정을 꾸리는 등, 한국 야구인들에게 여러모로 거부감이 덜했지만, 신용균은 가족이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설도 있다.)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재직할시에도 스포츠신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기사가 도배했고, 결과적으로 1년만에 감독직을 사임하고 그 이후로 프로팀 1군 감독에 나서지 못했다. 만약 당시 김동엽이 김성근 같은 성격이었다면, 언론을 이용하여 미즈타니와 프런트의 전횡[58],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폭로하며 희생양이 되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실제로 김성근은 2011년 시즌 도중 SK 와이번스 감독 직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 SK 프런트가 후임 감독으로 내정해 둔 이만수패륜아로 매도하는 투로 발언했고, 이에 야구팬들은 김성근을 '''인천 예수'''로, 이만수를 '''이스카리옷 유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김성근 또한 김동엽처럼 1980년대에 퇴출되었어야 할 야구관을 가졌지만, 갖은 언플 및 무리수에 의하여 2010년대 중후반까지 커리어를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이런 철권통치 스타일의 감독들은 이제 더 이상 프로야구계에 발붙이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이 1960~1980년대와 같은 군사정권에 의한 강압적인 분위기도 아니고 민주주의적 사회에서 성장한 선수들을 이러한 식으로 장악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설령 장악한 듯 싶더라도 강압적이고 타율적인 플레이로는 좋은 성적을 거둘래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빙그레 이글스 창단 감독과 MBC 청룡의 감독을 역임한 배성서도 아마야구 시절의 스파르타 식으로 팀을 지휘하다가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야 했고, 근래에 들어서는 이광은이 2000~2001년 시즌 초반까지 LG 트윈스를 김동엽 식으로 이끌면서 2000년엔 플레이오프 진출로 나름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이듬해 바로 부작용이 터지면서 시즌 초반 '''9승 25패'''로 성적만 폭망하고 해임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근데 이광은의 후임 감독이 김성근이었다는게 함정이다. 하지만 김성근의 LG 감독 시절은 이상훈의 헤어 스타일 관련 담판 일화로 알 수 있듯, 이광은이나 이순철 시절보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선수들의 자율권을 존중해 주던 상황이었다. 김응룡처럼 엄격하긴 했으나 의외로 야구를 잘하는 선수라면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일지도. 프로야구 선수들은 성인이고, 고교 시절, 길게는 대학 시절을 거치며 지도자로부터 배울 만한 기술은 거의 다 배웠다고 봐야 한다. 즉, 더 이상의 성장은 스승의 가르침이나 강제가 아니라 본인의 의지나 창의성, 그리고 각성에 달려 있는 것. 프로의 명 감독은 프런트로부터 주어진 전력을 최적으로 조합하고 활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지, 아마에서처럼 선수들을 가르쳐 성장시키거나 혹은 포텐을 터트려 주는게 아니다. 김성근처럼 이미 기술적으로 완성이 끝난 선수들을 살인 펑고, 지옥 특타, 특투로 굴려봤자 체력만 방전될 뿐 기술적으로 더 나아질 리 없고 본 게임에서 집중력 저하만 부를 뿐이다. 이는 한화 시절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명백히 드러나 버렸고, 후임 지도자들이 죄없이 고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사람 좋으면 꼴찌''' 라는 야구계 격언도 이제는 서서히 옛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것은 김동엽-김성근의 문제뿐만 아니라 당대 스포츠인들, 더 나아가 그 당시를 살아온 대부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그런식이었다. 당시 명감독, 명코치라고 추앙받던 사람들, 즉 축구의 박종환, 농구의 최희암, 여자배구의 김철용, 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인 임춘애를 키워낸 김번일 등등은 욕설과 빠따질, 그리고 근성을 극한으로 강조하는 지옥훈련으로 선수들을 자기 생각은 전혀 없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운동기계로 만들어서 좋은 성적을 낸 것이다. 선수들 자신들도 타율에 길들여져 있어서 자유를 주면 방종으로 흘렀기 때문에, 저런식의 지도가 더 먹혀들어간 면도 있었다. 유재학 모비스 감독의 청테이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분위기는 현재도 스포츠계에 만연해 있는게 현실이다. 그나마 프로야구는 대중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에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여타 종목들 특히 올림픽/아시안게임 금메달에만 의존하는 소위 비인기종목[59]들은 아직도 198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바람직하다고 간주되던 방식이었고, 효과도 상당히 있었던 검증된 방식이었다. 김성근-김동엽을 비판하기 전에 당대의 그런 현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밑에서 다시 하술하겠지만 공통분모가 많았던 만큼 김동엽과 김성근은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10. 에피소드


  • 생전의 김동엽은 화끈한 성격과 함께 야구계의 대표적 주당인 것도 유명했다. 한번은 만취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운전 중 신호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리자 차에서 내린 후 도로 한복판에서 다짜고짜 큰절을 하면서 벙 쪄있는 경찰을 뒤로 하고 차를 몰고 유유히 사라진 적도 있다. 그리고 또 걸리자 차에서 내리더니 아무 말 없이 자기 차를 부수기 시작, 문짝 하나가 걸레가 될 지경이 되자 황당해 하던 경찰들이 "감독님 참으세요"라고 말렸대나 뭐래나.
  • 50대 중반에 길거리에서 일반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부사관급 군인 두명을 간단히 제압한 뒤 두 사람의 요대를 붙잡고 도망 못가게 한 다음 "여러분! 문민시대에 이런 군인들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확실하게 혼을 내준 훈훈한 일화도 있다.[60]
  • 건국대학교 감독 시절 친분이 깊던 원로 야구인 풍규명의 주선으로, 그의 사위이자 당시 고교야구 최고의 1번 타자로 각광받던 선린상고이해창을 영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해창이 고등학교 선배들의 강권에 못이겨 중앙대학교로 진로를 선회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동엽은 단박에 중앙대로 쳐들어가 선배인 김진영 감독에게 "우리 선수 건들면 선배고 뭐고 없다. 이해창 당장 내놓으라"며 대놓고 한바탕 깽판을 쳤다.[61] 그 기세에 질린 김진영은 김동엽에게 사과하며 이해창 영입을 철회했고 그렇게 이해창은 건국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 실업야구 롯데 감독이던 1977년, 실업연맹전 결승에서 라이벌 한국화장품을 꺾고 우승했을 때 김동엽이 구단의 높으신 분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높으신 분이 김동엽에게 우승축하 인사를 건네며 그 공을 치하하자 김동엽은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우승보너스 지급을 요구했다.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로선 상당한 금액으로 추정되는데, 높으신 분이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우리 회사 여공들이 밤 새워 을 만들어 팔아야 벌 수 있는 돈이다"[62]라고 난색을 표시했다. 이에 다혈질인 김동엽은 걸직한 황해도 방언으로 "제에미! 기럼 여공들 데꾸와서 야구 하시라우요!!!"라고 버럭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동엽이 그날 이후 어떻게 되었을 지는 안 봐도 뻔할 것이다. 그렇다. 모가지 당했다.
  • 성균관대학교 감독으로 재임하던 1978년 대통령기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연세대학교와 맞붙었는데, 상대 선발 최동원은 전날 동아대학교와의 준결승에서 임호균과 대결하여 연장 14회까지 0대 0으로 맞서다가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중단되었고 다음 날 속개된 경기에서 18회까지 또 던지며 김봉연의 끝내기 홈런으로 같이 18이닝을 던진 임호균을 꺾고 간신히 승리한 상태였다. 그러고도 바로 이어진 성균관대와의 결승전 또한 9이닝을 완투하며 이틀 동안 무려 27이닝에 투구수 375개, 12피안타, 33탈삼진에 겨우 2실점에 그치는 경악스러운 맹투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적장이던 김동엽은 그날 패배했음에도 경기가 끝난 후 마운드로 올라가 최동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말 잘 던졌다고 격려했다. 이날 만큼은 쇼맨십이 아닌 투혼을 발휘한 야구 후배에 대해 정중하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 해설가로 활동 중이던 어느 날,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동엽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이보라우, 앞으로 나한테 해설자(解說者)가 아니라 해설가(解說家)라고 해야 돼. 해설 못하는 놈들은 해설자고 해설을 잘 하는 사람은 해설가라고 하는거야"
그래놓고 조금 쑥쓰러웠던지 다시 이런 드립을 덧붙였다. "당신(기자)들도 구분을 해야 돼. 기사 못 쓰는 사람이 기자(記者)고, 기사를 아주 잘 쓰면 기가(記家) 라고 불러야지" 이 얘기를 들은 기자들은 그저 피식피식 웃을 뿐이었다.
  • MBC 감독 시절, 김동엽 자신이 직접 저지른 해프닝은 아니지만 코미디 같은 일화에 엮인 적도 있다. 1985년 8월 20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잠실경기 때 2대 2로 맞선 8회말 1사 후에 김재박이 괴물신인이라 불리던 선동열을 두들겨 3루타로 출루하며 만든 찬스에서 송영운[63]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선동열이 타자 앞에 공을 패대기치며 포수 뒷쪽으로 빠지는 폭투를 저질렀고 3루에 있던 김재박은 얼씨구나 하고 홈으로 뛰어들었는데, 타자인 송영운이 발목을 부여잡고 뒹굴며 주심에게 몸에 맞았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주심은 하는 수 없이 송영운에게 출루를 지시했고, 기껏 홈을 밟은 김재박은 3루로 복귀... 당연하게도 폭투 또는 패스트볼이면 인플레이 상황으로 3루 주자의 득점이 인정되지만, 타자가 공에 맞았다면 볼데드 상황이 되므로 주자가 홈을 백번 밟아봤자 득점은 될 리 없다. 결국 그날 경기는 11회 연장 끝에 2대 2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사단은 경기 후 선수단이 단골로 이용하던 강남의 사우나에서 터졌는데,[64] 송영운이 목욕탕에서 동료와 샤워를 하면서 "아까 그거 안맞은건데 쇼한거임. 나 연기 좀 짱인듯?"이라고 실토하며 키득대던 중, 밖에서 얘기를 들은 김동엽이 벌컥 목욕탕으로 뛰어들어 와서는 "이 멍청한 놈, 그걸 자랑이라고 하냐!"라고 노발대발 하며 송영운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팼다고 한다.
그런데 고 이종남 기자의 저서 사람 좋으면 꼴찌에 기재된 내용은 좀 다르다. 당시 사구로 1루에 출루한 송영운이 1루 코치로 나와있던 김동엽에게 "감독님 저 사실은 안맞았어요 히히히"라고 귀띔하자 김동엽은 순간 혀를 콱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경기 종료 후 사우나에서 김동엽이 송영운을 불러 말하기를,
>김동엽: 이보라우, 타자가 투구에 맞으면 볼데드야 인플레이야?
>송영운: 볼데드죠.
>김동엽: 기럼 투구가 뒤로 빠지면?
>송영운: 당연히 인플레이죠.
>김동엽: 알긴 아는구만! 기러믄 말이네, 아까 (3루 주자)김재박이 들어올 수 있간 없간?
>송영운 : …???
김동엽의 핀잔에 고개를 갸우뚱 하던 송영운은 30분 후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던 중 "아하, 그랬구나!!"라며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 차렸대나 뭐래나. 아무튼 이후 송영운의 출장 기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송영운은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빨과 독한 성격 등 공통분모가 많아서인지 김성근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다만 얼굴만 마주치면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만담 수준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김성근이 츳코미 포지션? 둘의 만담은 1985~87년 시즌 중반까지 서울 라이벌인 OBMBC 감독으로 맞서면서 한층 더 독해졌는데 1987년 5월경 전기리그 막판 상대와의 경기를 앞두고 잠실야구장 구내식당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식당에서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김동엽 자리에 김성근이 합석하였다.
>
>김성근: 이기지도 못하면서 비싼 것만 드시누만.
>김동엽: 그러지 말라우야. 잘 먹어야 이길거 아니가서?
>김성근: 고기 먹어봤자 소화도 안될텐데 뭐?
>김동엽: 닥치라우, 우린 오늘부터 10연승이야.
>김성근: 10연승 좋아하시네. 오늘 내일 우리한테 다 지면 어쩌시려고?
>김동엽: 그러면 8연승이지.
>김성근: 8연승 같은 소리하지 마쇼. 모가지#s-1.1에요 모가지!
>김동엽: 모가지좀 또 떨어지면 어때. 내레 땅에 떨어진 모가지 주워서 붙이는데 선수잖네. (옆에서 밥먹고 있던 강병철을 가리키며) 는 모가지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리 서툴겠지만 나야 뭐 수도 없이 붙여보지 않았어? 모래가 묻으면 좀 따끔따끔 하겠지만...
>김성근: 그러다 모가지가 거꾸로 붙으면 어쩌려고 그러슈?
>김동엽: 더 좋지. 뒤까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김성근: 좋기도 하겠수. 그럼 MBC가 아니고 CBM 이유.
>
이 대화가 있은지 두 달 만에 김동엽은 실제로 모가지가 달아났다. 김성근은 2017년 5월 23일 자로 한화 이글스 감독에서 물러날 때 까지 현장에 남아 있었다.[65]. 참고로 저 대화에서 얘라고 불린 강병철 감독은 당시 현장을 떠나 야인으로 지내던 중이었다.[66]
  • 1986년 전기리그를 5위로 마치고 후기리그에 올인하게 된 김동엽은 선수단을 모아놓고 일장훈시를 하며 "이기는 야구는 내가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맡은 임무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분위기를 추스르고자 했는데, 이 당시 기자들에게 물야구론이란 어록을 남겼다. "MBC는 앞으로 물야구를 하겠다. 물이란 약한 듯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강하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파고들어 큰 바위를 부수지 않는가" 듣기에는 굉장히 그럴 듯 했지만 MBC는 그해 후기리그에서도 3위에 머무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김동엽의 물야구는 말 그대로 물먹었다.
  • 1986년 시즌 종료 후 MBC는 김동엽의 감독 재신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시즌 중 코치 구타사건으로 구설수를 일으키고 헬스클럽에서 역기를 들고 운동을 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67]을 입은 것을 자기관리 소홀로 간주하여 김동엽의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친 상태였는데, 때마침 삼성 감독이던 김영덕이 계약 만료가 되자 김영덕을 영입하기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고 김영덕도 서울팀 감독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지라 김영덕의 영입, 동시의 김동엽의 불신임은 거의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런데 김영덕이 모 언론지 기자를 다리삼아 MBC 감독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식을 들은 MBC 구단의 높으신 분이 "기자한테 기대서 감독으로 오려는 사람은 필요없다"며 김영덕에 대한 영입의사를 철회, 대안을 상실한 MBC는 결국 김동엽의 감독직을 유지 시키기로 했다.
  • 이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로, 김동엽의 재신임 결정 당일 구단 사무실을 찾아온 김동엽에게 프런트 직원이 장난으로 "참 안되셨습니다"라고 위로하는 시늉을 하자, 김동엽은 고개를 떨구며 "내 그럴줄 알았다"라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고, 더 이상 놀렸다간 곤란할것 같아서 직원은 태도를 바꿔 "농담이었고요, 사실 방금전에 스테이(stay, 유임)로 결정났습니다"라고 실토하자 김동엽은 잠시 눈물을 비추는 듯 하더니 표정을 바꾸어 "이번에 잘리면 열 세번째 모가지다. 하도 많이 잘려서 아무렇지도 않았어"라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MBC 프런트 직원과 점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김동엽은 "MBC가 나와 재계약 한것은 MBC를 1류 구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1류 감독답게 MBC를 강팀으로 만들 것이다"라면서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회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간신히 허락받은 감독직은 위의 김성근과의 에피소드와 같이 중도해임으로 마무리 되었으니…
  • 김동엽은 평소 술자리에서 레몬 꼭지를 따서 주물러 짜낸 레몬즙을 맥주잔의 3분의 1쯤 채우고 나머지 3분의 2에 소주를 부어 섞어 만든 레몬소주를 즐겨 마셨는데, 멋모르고 같이 쭉쭉 들이키다 요단강 익스프레스 탑승 직전까지 간 이들도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연예계의 주당으로 꼽히던 탤런트 한진희. 방송을 마치고 여의도의 단골 일식집에서 한잔 기울이던 김동엽과 우연히 합석했다가 멋도 모르고 김동엽에게 술내기를 제의했는데, 김동엽은 "나는 술이 약하니 레몬소주로 하겠다"라고 한발 빼는 척을 했고 이에 낚인 한진희는 김동엽이 만들어준 레몬소주를 받아 마시고 "이게 술이냐 주스냐"라고 비아냥 댔지만, 결과는 한진희의 실신 TKO패. 이후 며칠간 입원까지 하며 후유증으로 죽어난 한진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김동엽 저 괴물같은 인간이 주는 레몬소주는 절대 마시지 말라"라고 신신당부 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고 한다.
  • 해태 타이거즈 전성시절 타팀들에게 공포의 아이콘이었던 빨간색 상의에 검정색 하의 스타일 원정 유니폼(속칭 검빨 유니폼)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는 주당 김동엽답게 술병 라벨에서 따온건데, 팀 창단을 앞두고 유니폼 디자인을 본 김동엽은 "홈경기 유니폼은 괜찮은데 원정 유니폼이 영 아니다"라고 투덜대던 중 평소 즐겨 마시던 런던 드라이진 라벨에 그려져 있는 영국 근위병의 제복을 보고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고, 이렇게 탄생한 해태의 원정 유니폼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선수들은 햇빛과 열기를 고스란히 저장하는 유니폼 때문에 한여름 내내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 유니폼은 2001년 시즌 도중 해태가 KIA 타이거즈로 넘어가며 팬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2011년 7월 26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광주경기 에서 올드 유니폼 이벤트로 다시 부활하며 올드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 김동엽이 생전에 농반 진반으로 말하길 "내가 죽거든 딴 것은 다 필요 없다. 관 속에 화투와 카드 한 모씩만 넣어달라." 술과 함께 도박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오죽하면 부친상을 당했을때 상주가 빈소는 안지키고 화투판을 들락거렸다 하니
  • 김동엽은 항상 깔끔한 스포츠형 머리를 고수하고 다녔다. 방송 출연 시 그 이유를 묻자 시원하고 깨끗해서 그런 스타일을 유지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의 머리를 만져주는 단골 이발소가 정해져 있었다고. 김성근과 김동엽의 머리스타일이 같은 이유도 그 단골 이발소가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 김동엽이 MBC 청룡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1986년에 신인으로 입단한 성균관대 후배 김태원을 가리키며 "우리 팀에 선동열과 맞먹는 신인이 들어왔다"며 그 해 우승을 장담했다. 하지만 김태원은 MBC에 입단한 이후 경험 부족과 마운드에만 올라가면 벌벌 떠는 새가슴 때문에 김동엽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고, 김동엽 체제 아래서 계속 기회를 부여 받았지만 죽만 쑤었다.[68] 김동엽이 MBC에서 퇴단한 후에도 김태원은 계속 부진의 늪을 헤메다가 입단 4년 뒤인 1990년, MBC의 구단 매각으로 간판을 바꾸어 단 LG 트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 해 드디어 포텐이 터지면서 18승을 거두었고, LG의 초대 감독 백인천[69]은 김태원의 맹활약에 힘입어 LG의 창단 첫해 우승이자 자신의 감독 커리어 유일한 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김동엽의 예언은 4년 지난 뒤에야 이루어진 셈이지만, 만약 김태원이 김동엽 시절에 조금 일찍 각성했더라면 김동엽도 좀 더 오래 MBC의 감독으로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1985년 MBC 청룡에 입단한 재일교포 내야수 유고웅[70]이 김동엽을 특히 무서워했다고 한다. 사실 빠따질과 구타의 원조는 일본인데도, 김동엽식의 스파르타 식 지도법은 일본 출신 유고웅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듯.
  • 1987년 5월 10일자에 손석희가 진행하는 MBC 뉴스데스크의 한 코너에서 당시 신인 유격수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던 류중일과 이미 대스타였던 김재박을 비교하는 보도를 했다. 이 코너에서 당시 박영길 삼성 감독은 류중일을 더 나은 유격수로 꼽은 반면, 당시 청룡 감독이던 김동엽은 "지금 당장 비교하라면 역시 어린애하고 어른하고의 비교가 되기 때문에 비교를 안하려 합니다."고 말했다.# 평가를 유보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기팀인 김재박을 어른으로 비교하면서 간접적으로 높여준 것. 이후 김재박, 류중일이 김동엽의 후배 감독으로 청룡의 후신인 LG 트윈스 감독을 맡은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셋의 행보도 비슷했는데, MBC-LG 감독이 되기 전에는 리그를 대표하는 명장이었지만 MBC-LG에서는 영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71]

11. 저서


  • MBC 라디오 홈런출발 김동엽입니다 - 자유문학사. 1981.
  • 그림으로 보는 야구(전 5권, 옮긴이) - 우아당. 1982.
[image]
  • 그래 짤라라 짤라: 열세번 목 잘린 사나이의 오기 한평생 - 한샘출판사. 1995.

[1] 어떻게의 황해도 방언.[2] 터무니없다, 말도 안된다의 황해도 방언.[3] 삼성 라이온즈 에서 뛰고 있는 동명이인의 손자뻘 김동엽도 특별한 인연은 없는것 같은데 이 등번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부친도 프로야구선수였는데, 막상 부친은 2번을 사용했다.[4]북한 황해북도(이북5도 기준 황해도) 사리원시.[5] 그러나 살아있는 생물의 피를 섭취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 살아있는 생물의 혈액에는 영양분 외에도 기생충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슴피를 섭취한 임산부가 기생충 감염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례도 있다. 아마 김동엽은 운이 좋게도 기생충이 적거나 혹은 없던 노루의 피였던 듯.[6] 후술하겠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것도 주먹싸움이 화근이었다. 워낙 성격이 다혈질이었던데다, 조폭경력도 있어서 싸움을 하면 당연히 일반인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다.[7] 처음으로 프로 감독을 맡았던 해태 타이거즈 구단주 박건배 회장이 경복고 후배였다.[8] 체육특기생이 아니라 공부를 해서 들어간 것이다. 김동엽이 대입을 준비하던 시절은 본고사 세대라 지금보다 대학 진학률도 떨어졌고 입시정보도 활발하게 공유되지 않았던 시기인데다 그 본고사가 지금의 수능따윈 울고갈 정도로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셈.[9] 다시 야구를 해보라는 말에 김동엽은 다친 어깨 때문에 자신이 없다고 하자 선배는 "임마 지금 너만큼 쎄칸(세컨드, 2루수) 보는 놈도 없다"라고 설득했다.[10] 이유는 휴가를 받아 저녁에 동료와 외출을 나갔다가 폭력배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완력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김동엽이 완승을 거두었으나 상대방 중 한명이 쇄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는 바람에 쇠고랑을 찰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결국 어찌어찌 회사에서 무마를 시켰지만 그 대가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11] 훗날 경남신문 편집국장 역임.[12] 그러나 조흥은행은 1967년에 해체된 호남비료 농구단을 인수하여 다시 여자농구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1970년대 중~후반부터 성적이 하위권으로 주저앉으며 1984년만년필 제조업체로 유명한 빠이롯트에 팀을 매각하고 여자농구와의 인연을 끊었다. 흥미로운 점은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조흥은행을 흡수합병한 신한은행이 현재 WKBL 신한은행 에스버드 구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전신은 '''현대산업개발 농구단'''이다.[13] 이 일화를 소개한 중앙일보 1992년 4월 3일자 기사에는 1966년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63년이 맞다.# 66년에는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일본은 프로 선발이 아니라 사회인 팀을 내보냈으며(이때는 모든 야구 국제 대회는 아마추어 대회였다.), 이해에 시도대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세키스이 화학공업(積水化学工業)을 보냈다고.[14] 1937~2012. 1958년 한국일보 공채 수습기자 1기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1995년 정년퇴직 할 때 까지 스포츠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의 체육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고 대한체육회 이사로도 일했다. 2012년 10월 지병으로 별세.[15] 상무의 오타가 아니라 공군이 운영하던 스포츠단 이름이었다. 김동엽은 1974년 성무 야구단 창단 감독을 지냈다. 이때는 각 종목별로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공군, 대한민국 해병대 등이 서로 경쟁하던 시대였다. 당시 성무뿐만 아니라 육군중앙경리단(약칭 경리단)도 야구단을 운영하여 선수들이 병역과 야구를 병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육군의 경우는 종목별로 운영 부대가 달랐다.). 차범근분데스리가 진출 직전 성무 축구단에서 병역의무를 마쳤다. 군팀이 전부 상무로 통합된 것은 5공 때인 1984년의 일이다.[16] 실제로 겨울에 선수들이 장거리 구보를 하면 어떤 영향이 있을 지 친분이 있던 의사에게 문의를 했고, 그 의사 또한 처음엔 말도 안된다고 말리려 했지만 김동엽의 계획을 듣고는 그럴싸 하다고 생각하여 "겨울 바람에 선수들 내장이 상할 수도 있으니 구보 시에는 비닐 복대를 차게 하라"고 권유했다 한다.[17] 당시 30대 중후반이었기 때문에, 선수와 같이 뛰기는 무리였을 듯 하다. 당시 실업야구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이 은퇴시점이었다. 실업선수들은 현재보다 약 10년 먼저 은퇴하곤 했다. 실업선수들은 대체로 은퇴하면 본사에 입사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특히 은행팀), 굳이 월급도 일반 직장인과 비슷한 선수생활을 오래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18] 그리고 27년이 지난 뒤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게 된다. 2004년 1월 KIA 타이거즈가 당시 감독이던 김성한의 주도로 군산 월명야구장에서 광주 무등야구장까지 걸어서 종주하는 행군 행사를 진행했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이어오던 타이거즈 정신을 강화하겠다며 강행한 행사였는데 결국 이 행군으로 인해 주축 투수였던 김진우의 무릎이 아작나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김진우의 커리어는 나락으로 떨어져 완전히 2003년같은 좋은 모습을 더는 보여주지 못했다.[19]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화장품'''이었다. 현대그룹, 대한항공 등 유수한 기업들이 고사한 인천 및 경기·강원 연고지의 사례였다. 한국화장품 오너 '''임광정''' 사장은 경기도 개성 출신이었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통천 출신이었으며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은 서울 태생이지만 사업을 인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맡아달라 요청했지만 모종의 사유로 모두 거부했다. 특히 당시 대한야구협회 회장으로 '''1982년 서울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 주력하던 임광정 사장으로서는 프로야구의 출범이 상당히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건 조건이 서울 연고에 한국화장품 선수단을 그대로 프로에서도 끌고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봉연, 김재박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만 모인 거의 국가대표급 라인업을 자랑하던 한국화장품 이었기에 질러 볼 만한 조건이었지만 프로야구 준비팀 측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당연히 거절했다. 그랬던 한국화장품은 1995년 초에 선수 스카웃까지 해 놓고 팀을 해체하면서 야구인들의 분노를 샀다.[20] 추가로 해태는 프로야구 팀을 운영하기에는 자금 상황이 빡빡하다는 이유로 재무부의 특별 금융지원도 요구했다. 청와대에선 이것도 흔쾌히 받아 들였다.[21] 당시 청와대에선 지역연고제로 가는 마당에 호남만 빠지면 프로야구를 하는 의미가 없다고 우려했다. 호남만 빼고 다른 지역들만 프로야구로 들썩이면 호남 홀대론, 호남 차별론이 불거져서 오히려 민심 이반이 심각해진다는 정치적 판단이었다. 이때문에 호남 연고팀을 유치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22] 감독이란 자가 매일 밤 코치들을 때리거나 괴롭히는데, 계속 버티고 있는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23] 간통사건 직후 불명예 퇴진하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 겸 타격코치로 이적했다.[24] 지금이야 500만원이 거금이라고 볼 수 있는 금액이 아니지만,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 초봉이 30만원이었다. 500만원이면 대기업 대리급 연봉과 맞먹는 월급이었던것이다. [25] 참고로 그 당시 짜장면 한 그릇에 5백원~6백원이었고,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약 30만원 정도였으며, 5백만원이면 웬만한 선수 반 년치 연봉에 맞먹는 거금이었다.[26] 단 이 1억원이 1인당 1억원이 아니라, 감독+코치+선수+프런트 전체 명의로 1억원을 받고 그 1억원을 n분의 1로 다같이 나눠가지던 것이었다. 결국 MBC에 이어 해태도 돈 문제 때문에 홍역을 치르게 된다. 우승 보너스 문제에 다음 시즌인 1984년 선수단에 대한 처우가 오히려 악화되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흉흉했는데 이 때 터진 사건이 바로 유명한 불고기 화형식이다.[27] 예컨대 1차전 5회까지 0대 7로 난타당하는 데도 오영일을 계속 마운드에서 버티게 했고, 2차전에선 1대 5에서 4대 5까지 따라 붙었지만 선발 유종겸으로 계속 밀어붙이다 4대 8로 패배한 점이나 1무 3패로 몰린 5차전 선발투수로 그 해 정규시즌 1승 1패에 불과한 이원국을 올린 점 등등 미심쩍은 점이 너무 많았다.[28]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그곳이 맞다.[29] 프로선수도 아닌, 아직 성장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프로에 맞먹는 훈련을 했는데, 아까 말했듯 어린이회관을 중심으로 기본 열 바퀴씩 돌리고, 어린이들에겐 아직 어려운 훈련인 펑고를 시켜서 자기 만족 기준에 못 미치는 아이들을 오리걸음을 시키는 등 아이들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굴렸다(...) 투수를 하고 싶다는 아이에게 한 번 공 원없이 던져보라며 제구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100구 이상씩 던지게 했던건 덤.[30] MBC는 1990년 LG 트윈스로 바뀐 후 2006년까지 정규시즌 꼴찌를 기록한 역사가 없다.[31] 그 해 9월 20일 개최된 서울 아시안 게임 일정에 쫓겨 정규시즌 일정을 평소보다 한달 가까이 앞당겨 마쳐야 했다.[32] 만약 이날 롯데가 승리했다면 MBC의 플옵을 제쳐두고, 최동원이 '''3년 연속 20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선동열도 이루지 못했던 꿈의 기록이다. 반면에 이날 OB의 선발 투수였던 최일언은 팀이 역전승하면서 패전이 아닌 승패없음으로 기록된 덕분에(이날 승리투수는 9회초 구원 등판한 박노준이었다.) 19승 4패를 유지하여 승률 0.826로 한국 데뷔 후 첫 타이틀을 따낼 수 있었다. 한편 24승에 평균자책 0.99로 투수 3관왕을 바라보던 해태의 선동열은 승률(0.800)에서 최일언에게 밀리며 2관왕에 만족해야 했지만, 그해 MVP를 차지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89년에 승률까지 포함한 투수 부문 3관왕을, 원년의 박철순 이후 처음으로 차지했다.[33] 미즈타니는 그 당시 아시아 야구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한계투구수''' 개념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김용수를 전업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키는 등 미국식 투수분업제도를 신봉했다.[34] 같은 잠실팀 OB 베어스의 경우, 감독 김성근과 코치 이광환이 야구관 차이로 인하여 의견 충돌이 잦아지자 두 사람 모두를 아끼려 한 구단 측에서 이광환이 사표를 내고 해외 연수를 가는데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고 연수 종료 후 이광환을 2군 감독으로 취임시키는 식으로 교통정리를 해 주었다. 이 당시 OB는 2군에서 아무리 잘해도 1군으로 콜업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는 김성근과 이광환 사이의 보이지 않는 파워 게임 탓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김성근과 이광환의 사이는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35] 그 해 김동엽은 경기 시작 30분 전에야 헐레벌떡 운동장에 도착해서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식사를 하며 주변의 기자들에게 무심결에 '''"오늘 우리 선발투수 누구래?"'''라면서 물어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36] 김응용 감독과는 인연이 남다르다. 우선 실향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둘 다 6.25 전쟁 당시 피난 온 부산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김동엽 감독이 잘린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 이가 김응용이었다. 특히 이 두 사람은 MBC 감독과 해태 감독으로서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바 있다. 김응용은 김동엽이 작고한 후 '''"그 형님, 참 대단한 양반이었죠"'''라고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회고한 바 있다.[37] 160대 초반이라는 서술이 있었으나, 그건 일제시대 조선인 평균이었던 164cm보다도 작은 키다. 80년대 한국 남성 평균키는 168cm~170cm는 되었다. 21세기부터가 173cm로 고정되어 있다.[38] 이 문서에 예시로 나온 김동엽의 말투가 대부분 황해도 방언인지라 김동엽의 방송활동을 접해보지 못한 19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위키러들에게 오해를 줄 수도 있겠지만 김동엽은 일상과는 다르게 방송에서는 정확한 표준어를 썼다.[39] 예를 들어 김동엽은 경기전 식사의 양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영양학적이고 스포츠 생리학적인 설명을 해준 적이 있었다. 탄수화물 및 열량에 대한 여러가지 배경지식을 늘어놓은 가운데 그가 내린 결론은 경기전 과식은 절대 안좋다는 것. 이는 대학 체육학과를 나온 사람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이다. 김성근 같은 경우는 경기전에 두둑히 먹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던데, 김동엽은 오히려 이 점에 대해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아마도 감독시절 선수들의 경기전 과식을 강력히 제지했을 것이다. 김동엽이 학창시절에 야구를 하다 그만두고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특기생이 아닌 '''시험 쳐서''' 들어갔던 걸로 보자면, 기본적으로 머리는 좋았던 사람이다.[40] 1994년부터 방영했던 <두 형사>의 시즌2격인 작품. 당시 주연 배우는 전영록, 김의성, 임현식, 이훈이었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 저조로 인해 종영됐는데, 당시 상대 프로그램이 KBS2의 '퍼즐특급열차'가 엄청난 인기를 끈 바람에 쓸쓸히 종영됐다.[41]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 하며, 자기처럼 잘리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고...[42] 나중에 사인은 난로의 불완전 연소로 발생한 일산화탄소 중독사로 밝혀졌다.[43] 1991년부터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고(이혼은 안했다.) 자식들과도 거의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평소 워낙 "음주"와 + "도박"을 좋아한 탓에(...해태 감독시절 조창수, 유남호 코치가 잠적한 일도 저 2사람의 항명하는 태도만이 아닌, 고인의 다혈질 모습 역시 원인제공을 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감독생활 동안 벌어놓은 돈을 탕진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김동엽은 1980년대 초반 가족과 함께 자주 어린이 대상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가정의 화목함을 과시하기도 했는데...[44] 당시 프로야구는 실업야구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일종의 쇼맨쉽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퇴장 당한 감독이나 선수들이 일부러 억울해 하는 리액션을 취해 관중들을 웃겼다는 증언들이 이를 반증한다. 참고로 당시 선수 중에는 이만수김인식 등이 오버액션 컨셉으로 이름 높았다. 이전판에는 심판들이 보호장구 대신 양복을 입었다고 기술했으나 보호장구는 양복안에 입었다. 그리고 당시는 한, 미, 일 프로야구 심판들이 여름빼곤 다 양복입던 시절이었다.[45] 무엇보다 심판들이 김동엽의 노가리에 잘 반응해준것도 컸다. 무시하거나 퇴장으로 일갈하지않고 김동엽의 노가리에 그런대로 받아주었고, 팬들 역시 이런 노가리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46] 이광은은 MBC시절 김동엽의 스파르타식 야구는 못따르겠다며 프런트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는 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시즌 LG 감독에 취임한 이광은은 김동엽 처럼 스파르타 식으로 팀을 운영하려다 반발을 산 선수들의 반 태업으로 이듬해 시즌 도중 김성근 감독대행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유니폼을 벗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은 좀 의미심장하다.[47] 이전 버전에는 이 사진이 어린이날5월 5일에 찍혔다고 서술됐지만, 실제로 1986년 어린이날 잠실야구장에서는 삼성 라이온즈MBC 청룡이 맞붙은 적이 없다. 삼성이 잠실에서 경기를 치른 것은 맞지만 홈팀이자 상대팀은 MBC가 아니라 OB 베어스였다. 이 사진은 1986년 6월 14일 경기 전 장면이다.[48] 김영덕 감독이 이만수의 기록 달성을 위해 일부러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많은 1번 타자로 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이 사진을 남긴 1986년 시즌에 이만수김봉연과 함께 KBO 통산 최초의 개인 통산 100호 홈런 기록 달성을 두고 경쟁 중이었다. 한 번이라도 홈런 칠 기회를 더 주려고 김영덕이 일부러 상위 타선에 배치한 것. 이처럼 당시에는 기록을 위해 스타 플레이어를 상위 타순에 배치하는 일이 흔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백인천이 본인이 감독인 것을 악용해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라인업을 조작한 것.[49] 자세히 보면 김성래가 유격수로 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2루수로 주로 각인되어 있는 김성래는 3루수를 포함, 제 2의 전성기를 열었던 1루수까지 프로 생활 동안 많이 보았다. 그리고 2루수로 뛰던 프로 초창기에는 가끔씩 유격수 대타도 봤다. 당장 93년도의 1루는 그 양준혁과 경쟁했으니. 어쩌면 이러한 김성래의 유틸리티성이 그의 확실한 이미지를 심기에는 애로사항으로 적용한 것도 없지않아 있는 부분이다.[50] 한편으로 실업야구 롯데 감독 시절에 불 같은 성격을 못이기고 경기 도중 자신을 야유하는 관중과 삿대질을 하며 대판 싸우다 징계를 먹은 흑역사도 있다.[51] 다만 이런 쇼맨십이 관중에게는 어필했을지 몰라도 선수단에 대한 리더십이나 프런트의 신임에는 그다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에 술고래로 여러 야구인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던 김동엽이 저렇게 그라운드에서 조차 진지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선수들에게 체면도 깎아먹고 프런트의 불신임을 받는 상황을 스스로 자초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52] 1981년 해태주조의 '''나폴레온''', 1985년에는 세정의 스포츠웨어 브랜드 '''인디안''', 동화약품의 '''활명수''' CF 등에 출연했다.[53] MBC 청룡감독 겸 선수이던 백인천이 1982년 유한양행의 영양제 '''게브랄티''' CF 모델로 활동했지만, 이듬해 간통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이후 CF와는 인연 없이 1990년 LG 트윈스 감독으로 선임될 때까지 야인으로 지냈다. 이밖에도 김성한, 이순철, 김재박이 퇴임후 상조 CF를 찍은 바 있다.[54] 다만 투수 혹사의 경우 당시 두텁지 못한 선수층의 특성 상 대부분의 감독들이 안고 있던 문제점이었기 때문에, 딱히 김동엽과 김성근만 탓할 수는 없다. 그런데 김성근은 2010년대에 들어와서도 1980년대와 별반 차이없는 투수진 운용을 보였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55] 물론 선수들 모두 부정적 의사를 밝힌 건 당연지사였다.[56] 대표적인 예가 OB 베어스의 구단주이던 박용곤 회장 이라던가...[57] 김성근은 1남 2녀를 두고 있지만 아들만 결혼을 했고, 두 딸은 독신선언을 하여 중년이 되어서도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부인뿐만 아니라 딸들과 계속 같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나중에 동거를 하지 않는다 해도 김성근이 바빴던 딸들의 유년기와 달리 청년기부터 중년기까지 부모와 살아와서 함께 한 시간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에 계속 교류를 많이 할 가능성이 크다.[58] 더구나 미즈타니에 대해 당시 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못하기도 했고, 반일감정의 앙금이 지금보다 심해 미즈타니에 대해 팬들이나 선수들이나 호의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59]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여기면서도 올림픽에서의 성과로 동계올림픽 직후까지 무풍지대로 남아있던 빙상연맹의 만행들을 상기해보라.[60] 지금도 그렇지만 군인은 계급을 막론하고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군 헌병대에 신고되면 대단히 골치아프다. 그래서 되도록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고성을 지르거나 보기 민망한 행동을 하여 민폐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생기게 된다. 병사일 경우 부대 복귀 후 바로 군기교육대에 입소할 수 있고 심할 경우 피아노를 열심히 치거나 구속될 수도 있다. 부사관의 경우는 근신이나 감봉 등의 징계를 받을 수 있으며, 징계 여부를 떠나 부사관 사이에는 선임과 후임간의 군기가 엄해서 당시 BEQ(부사관 독신자 간부 숙소)에서는 구타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절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민간인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61] 이건 그나마 순화된 표현이고 실제로는 김진영 앞에서 니가 선배냐면서 온갖 육두문자를 시전했다.[62] 껌은 생산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여공을 데리고 만드는 것이 아니긴 한데 라인 중간중간엔 사람이 서 있어야 하고 시대상을 생각하면 아마 이 사람들을 여공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제과업계인 해태 타이거즈도 우승 보너스를 요구하는 선수들에게 이런식으로 윽박질렀다고 한다.[63] 마구마구에서는 본명이 아닌 ‘송지운’이라는 가명의 선수카드가 있다.[64] 당시 야구장엔 라커룸 시설이 미비해서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은 야구장 근처의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65] 김성근이 김동엽 사후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등번호 38을 달았다는 말이 있으나 프로 원년 코치 시절부터 38번이었음을 감안하면 김동엽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66] 강병철은 1986년 시즌을 마치고 이른바 까자값 사건(상세 내용은 강병철 항목 참조)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 재계약에 실패한 후, 1988년 빙그레 이글스의 코치로 입단하기 전까지 야인으로 지내며 스포츠서울 객원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김동엽의 말대로 강병철은 롯데 감독에서 물러나기 전 까지는 잘려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1978년 동아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83년 롯데 자이언츠 타격 코치로 영입되어 이듬해 감독으로 승격될 때 까지 자신의 의지 또는 다른 팀의 회유에 의해 자리를 옮긴 적은 있지만 강제로 잘려서 백수가 된 적은 없다는 의미다.[67] 그래서 김동엽은 부상기간 동안 목발을 짚고 그라운드로 절뚝대며 나와 심판에게 목발을 들이대며 항의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였다. 역시 쇼맨십의 달인이다.[68] 1986년 시즌에 107이닝을 던졌지만 2승 6패의 부진한 성적만 남겼다.[69] 물론 MBC 청룡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다...[70] 일본프로야구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 에서 뛰었고 1985~1988년까지 MBC 소속으로 플레이 했다.[71] 실업감독으로서는 날았던 김동엽이 청룡에서 흑역사를 썼고, 김재박도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명감독이었지만 LG에서는 DTD를 막지 못했다. 류중일도 삼성 감독의 영광을 LG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류중일은 LG를 2년 연속으로 가을야구로 인도하긴 했으니 앞에 둘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구단의 기대치를 충족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