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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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서영무 감독님이야말로 아버지같은, 선수들의 아버지고, 또 경북 야구의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배대웅, 김은식 작가가 서영무 감독에 대해 질문하자.[1]

1. 소개
2. 활동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 그리고 '''1970, 1980년대 대구/경북야구의 중흥기를 이끈 대구야구의 아버지.'''
내야수대구상고경북대를 졸업한 후 공군 등에서 실업 선수 생활을 했지만, 현역 시절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모교인 대구상고의 라이벌 학교인 경북고등학교의 감독으로 명성을 쌓았다.[2] 경북고 야구부는 총 20회 전국대회 우승을 기록했는데, 그 중 11번이 서영무 감독 아래서 이룬 것이다. 임신근, 남우식, 황규봉, 이선희 같은 좋은 선수들을 이끌고 1970년대 경북고등학교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그 때 얻은 별명이 '''그라운드의 제갈공명'''.
잠시 모교인 대구상고로 갔다가 경북고로 복귀했던[3] 1971년에 한국 고교야구사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서영무의 복귀 이후 청룡기 우승, 문교부장관기 대회 우승, 화랑대기 우승[4], 봉황대기[5] 우승, 그리고 황금사자기 우승까지 이루어내며 서영무 감독 복귀 직전 우승에 성공한 대통령배를 포함해 이 해 경북고는 국내 고교야구의 전국 규모 5대 대회(화랑대기는 제외)를 독식하는 천하무적의 성적을 남긴 것이다. 이 해에만 서영무 감독은 무려 6개의 감독상을 휩쓸었을 정도.[6]

2. 활동


그의 제자 출신 선수들은 서영무 감독을 대단히 엄격하고, 야구 성적뿐만 아니라 학생으로서의 기본 소양도 소홀히하지 않도록 독려했던 스승으로 기억한다. 배대웅의 회고에 따르면, 선수들에게 조는 한이 있더라도 수업에는 빠지지 말고, 공책을 사주고는 그 날 배운 내용은 뭐라도 좋으니 꼭 몇 장씩 적어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야구 성적만을 중시하는 요즘의 고교 감독들이나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도 않고 밍기적거리다 마지못해 고교야구 주말리그제를 시행한 높으신 분들이 배워야 할 부분.
그 뒤 한양대학교[7]서울고 감독을 거쳐 프로 출범 직전에는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었다. 대구/경북 연고 구단으로서 삼성의 출범 당시 선수진은 경북고대구상고 출신 선수들의 올스타 팀이었고, 그 결과 대구상고 출신에 경북고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서영무가 자연스럽게 팀의 창단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취임 후 나름 코치 영입을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서영무는 당초 원했던 코치들을 영입하는 데 그만 실패했다.''' 김성근, 조창수, 유백만 등과 접촉했지만, 모두 한 발 먼저 다른 팀들에서 채어갔고 결국 프런트에서 내정한 인물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경북고 야구부 시절 애제자인 임신근대구상고 후배이자 선수 겸 배터리코치로 영입한 우용득이었는데, 이 때부터 갈등의 조짐은 내재되어 있었다.
1982년 프로 원년에 압도적인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에이스 이선희를 혹사시키면서도 OB 베어스에 밀리며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해 구단의 신뢰가 흔들렸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 임신근 코치를 해임하고 재일교포이충남을 조감독으로 영입했는데, 서영무는 이를 자신을 해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 생각하고 이충남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재일교포 출신이자 이충남의 선배인 김호중(당시 서울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8] 그러나 오히려 김호중이 구단과 갈등을 빚으며 1983년 시즌 초반에 해임당했고, 이충남과의 관계도 더욱 불편해지며 1983년 5월 25일에 전격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시진이라는 최고의 에이스를 영입했지만 지난해 15승 트리오인 이선희, 권영호, 황규봉이 나란히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마운드가 붕괴되는 바람에 팀 성적도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었다.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는 대구에 1급 차량 정비공장을 차려 운영하다가 곧 야구계에 복귀했다. 1984년 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가 갈등을 빚을 때[9] 삼성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박용민 OB 단장이 요청하여 서영무를 OB 구단의 관리이사로 영입했다. 임무는 삼성에 대한 전력 분석.
그러나 양 구단 간의 치열한 전쟁 아닌 전쟁 와중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1984년 5월 11일 OB와 삼성의 대구 경기를 앞두고 OB의 원정 숙소인 수성관광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배정해주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졸도하여 경북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식물인간으로 3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자택에서 1987년 5월 26일 오전에 타계했다. 향년 53세.관련 기사
[1]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 25페이지.[2] 대구상고와 경북고는 정기전을 치르기도 한다. [3] 경북고 시절 훈련의 강도가 너무 높아서 일부 선수 및 학부모와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학생들과 화해하고 다시 경북고로 복귀했다.[4] 이 때는 다른 경기와 달리 준결승에서 1차례 패배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재기,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5] 1971년이 초대 대회였다.[6] 이 중 5개가 경북고 감독을 하면서 받은 것이고 1개는 대구상고 감독 시절에 받았다고 한다.[7] 이 때 본의 아니게(?) 김재박을 두 번이나 퇴짜를 놓은 적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김재박 항목 참조.[8] 표면적으로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이충남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라고 했으나 사실 파고들면 이충남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9] 김영덕 감독의 이적 문제를 두고 김성근김영덕의 대립(원래 삼성에서 감독 제안을 처음 받은 것이 김성근이라고 한다. 김영덕이 결과적으로 가로챈 모양새가 되면서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부터 시작된 양 팀의 감정 싸움은 김일융의 영입 문제, 선수들간의 난투극까지 겹치면서 급기야 1984년 후기 리그에서 롯데 자이언츠와 상대하기 위해 져주기 파동에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