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휘

 


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


여몽전쟁 시기 고려의 무장. 생몰년 미상.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의 독자(獨子)이다. 쌍성총관부의 초대 총관이다

2. 생애


조휘는 본래 한양부(漢陽府) 출신이었으나 뒤에 용진현(龍津縣)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고종 45년(1258년) 몽골군이 대거 침입하자, 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장주(長州)·의주(宜州)·문주(文州) 등 15주의 사람들이 저도(猪島)로 들어가 지켰다.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저도에 설치된 성이 크지만 사람 수가 적어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판단하여 15주의 사람들을 죽도(竹島)로 옮기도록 했다. 그러나 죽도가 협소하고 험악하며 우물이 없어서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신집평은 강제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니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고 들어간 사람은 열에 한두 명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축한 식량이 떨어지자, 신집평은 별초를 파견해 조정에 곡식을 요청하는 한편 다른 지역에도 조운(漕運)을 재촉하니 점차 수비가 느슨해졌다.
이때 죽도로 옮겨 살고 있던 조휘는 민심이 험악한 것을 읽고 정주 사람 탁청(卓靑)과 등주, 문주의 여러 성 사람들과 논의해 몽골군을 끌어들이고 빈틈을 노려 신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고성을 공격하여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후 조휘 등은 화주 이북의 영역을 몽골에 바쳤고, 몽골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장으로 임명했다.
이듬해(1259년), 조휘 휘하 부하들이 스스로를 관료로 자칭하며 몽골군을 이끌고 와서 한계성(寒溪城)을 공격했다. 이에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나와 공격하여 그들을 섬멸했다. 또한 고종이 낭장 김기성(金器成)과 별장 곽정유(夜別抄)를 몽골군이 주둔한 곳에 파견해 예물을 바치고 그들을 위로하게 했는데, 김기성 등이 문주에 도착했을 때 조휘 일당이 습격하여 김기성 및 수행원 13명을 죽이고 예물을 노략질한 뒤 달아나버렸다. 이후 조휘 일당은 동하[1]의 병사를 이끌고 춘주 천곡촌(泉谷村)에 주둔했다. 이때 스스로를 몽골 장군 차라대(車羅大, 쟈릴타이)의 사신으로 자칭하는 자가 신의군(神義軍) 5명을 이끌고 와서 그들을 꾸짖었다.

너는 활과 칼을 풀고 원수의 명령을 들어라. 고려의 태자가 장차 입조하려고 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고려 사신을 죽이고 예물을 빼앗았느냐?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이에 조휘 일당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벌벌 떨었고, 사칭꾼은 채찍을 휘두르며 별초를 불러 사방에서 공격해 남김없이 죽인 후 예물과 김기성의 옷, 물건을 되찾아서 돌아갔다.
원종 12년(1271년), 양주 백성 장세(張世)와 김세(金世) 등은 몽골이 자신들을 국문할 것을 우려해 수령과 아전들을 살해한 뒤 멀리 달아날 것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조리 주살되었다. 이때 이들과 한 패였던 천서(天瑞) 등 8인이 몰래 화주의 조휘에게 투항해 자신들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조휘가 400명의 병사를 지원해주자, 천서 등은 이를 이끌고 양주에 돌입해 지주사를 사로잡은 뒤 백성들을 강제로 화주로 옮기려 했다. 이에 원종이 다루가치에게 요청해 사람을 보내어 효유했지만, 천서는 듣지 않고 지주(知州)와 이민 1,000여 인을 포획해 강제로 화주로 데리고 갔다. 이에 원종이 원나라에 아뢰어 천서의 죄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하자, 쿠빌라이 칸은 지필가(只必哥, 지비케)를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때 지필가는 몽골에 갔다가 돌아와 지필가를 만나서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제가 황제께 아뢰기를, '양주 사람들은 사실은 스스로 원[上朝]에 복종한 것이지, 제가 그들을 강제로 몰아온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께서 즉시 저에게 조서를 내려주셔서 문죄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지필가는 더이상 죄를 묻지 않고, 다만 죄를 짓고 서경으로 달아난 이들을 조사해 고려로 보내줬다.

3. 사후


조휘 사후 아들 조양기(趙良琪)가 총관 직을 세습했으며, 이후로도 쌍성총관부는 조휘 집안이 4대 99년 동안 대대로 다스렸다. 그러다가 조휘의 증손인 조소생 대에 공민왕이자춘, 이성계 부자와 힘을 합쳐 쌍성총관부를 수복했고, 조소생은 달아나다가 여진족에게 살해되었다. 조소생의 숙부 조돈은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예빈경(禮賓卿)에 봉해졌고, 이후로도 공민왕을 모시며 여러 전공을 세웠다.
참고로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도조 이춘은 부인 박씨가 죽자 쌍성총관 조양기의 딸 조씨와 결혼해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완자불화(完者不花)이고, 다음 아들은 나해(那海)이다. 조씨는 남편이 죽은 뒤 자신의 소생에게 후계를 물려주려 했지만 환조 이자춘에게 밀려 실패했다.
[1] 동진국(東眞國)이라고도 하는 몽골제국의 여진족 괴뢰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