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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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조의 추존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의 조부.
조선 개국 직후에는 시호 도왕(度王)만 올렸다가 증손자 태종이 1411년에 묘호 '''도조(度祖)'''를 올리고 시호를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으로 바꿨다.#
이름은 이춘, 아명은 선래(善來), 몽골식 이름은 이바얀테무르(李孛顔帖木兒)이다. 묘호 도조(度祖)의 '度'자는 '(헤아릴) 탁'이라는 음도 있기 때문에[1] '탁조'라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익조 이행리와 정숙왕후 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번째 아들로 전체에서는 네 번째 아들이다. 익조가 죽자 천호 벼슬과 다루가치직을 세습하여 물려 받았다. 아이가 안 생겨서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낙산 관음굴에 가서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리니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익조의 벼슬이 정실의 큰 아들인 함녕대군 이규수에게 세습되지 않고 측실의 아들인 이춘이 세습한 것은 세력 형성에 최씨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원래 터전에서 밀려난 익조는 안변의 호족이자 장인인 최기열의 힘에 의해 세력을 재건했고 그 힘을 기반으로 천호 벼슬을 다시 찾았기 때문에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춘을 후계자로 삼았다.[2] 이춘은 별 기록은 없으나, 늙어 중풍에 걸려 1342년 7월 24일에 죽었다. 죽기 전에 중풍으로 천호 벼슬을 수행할 수 없어서 정실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이자흥[3] 에게 넘겨줄려고 했지만 측실인 조씨는 자기 소생에게 넘겨주기를 바랬다. 그 일로 이자흥과 조씨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이자흥은 원나라에 직접 가서 자신이 적장자임을 밝히고 천호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2달도 채 안되어 9월에 죽어버렸다. 이자흥에게는 이교주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너무 어렸다. 이에 조씨는 자기 소생에게 물려주길 바랬는데 사실 조씨는 당시 쌍성총관부의 수장인 총관 조양기의 딸이었기에[4] 빽으로 밀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자흥의 친동생인 이자춘이 물려받는다.
화살 하나로 '''흑룡(黒龍)'''을 잡았다고 한다. #
3. 가계
- 아버지: 추존국왕 익조 이행리
- 어머니: 추존왕후 정숙왕후 최씨
- 추존국왕 도조 이춘
- 아내: 추존왕후 경순왕후 박씨
- 완창대군(完昌大君) 이자흥(李子興) / 이타스부카(李塔思不花)[5]
-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 이울루스부카(李吾魯思不花)
- 계실: 한양 조씨 - 쌍성총관 조양기(趙良琪)의 딸
도조는 영녕군 함흥 동쪽 운전사 주변에 마련된 의릉(義陵)에 안장되었다.
[1] 구한말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재무부)에 해당되는 부서를 '탁지부(度支部)'라 하였다. 또한 삼국지의 유도의 이름도 劉'''度'''라서 유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어째서 최씨의 장남인 이송이 아니라 이춘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송이 고려 숭록대부였다는 기록을 보면 이행리가 충렬왕을 알현한 이후에 이송이 고려 조정에 출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3] 조선에서 내린 군호는 완창대군.[4] 참고로 이 조씨는 조광조의 가문인 한양 조씨이다. 위에서 나온 것처럼 천호 벼슬 계승 문제로 이성계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찌 어찌해서 후손 중 하나인 조돈이 환조를 돕게 되고 그 와중에 그의 후손만 대가 이어지게 되면서 개국공신 집안이 된다. 조양기의 손자인 조소생은 공민왕과 이성계에 대항하다 멸족당하고 반역자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5] 뒤에 있는 이름은 몽골식 이름이다.[6] 완천대군은 나중에 외가인 조씨 가문을 믿고 이춘의 뒤를 이어 천호직을 계승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이자춘에 의해서 제압되었다.[7] 여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