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고려)

 



'''고려 제24대 대왕
元宗 順孝大王
원종 순효대왕
'''
'''묘호'''
'''원종(元宗)'''
'''시호'''
고려
순효대왕
(順孝大王)

충경왕
(忠敬王)[1]
'''절일'''
함녕절(咸寧節)[2]
'''성씨'''
왕(王)
''''''
전(倎) → 식(植) → 정(禎)
''''''
일신(日新)
'''왕후'''
순경태후(順敬太后), 경창궁주(慶昌宮主)
'''왕태자'''
왕심(王諶)
'''부왕'''
고종 안효대왕
'''모후'''
안혜태후(安惠太后)
'''능호'''
소릉(韶陵)
'''사망지'''
고려국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3] 제상궁(堤上宮)
'''생몰
연도
'''
음력
1219년 3월 19일 ~ 1274년 6월 18일
양력
1219년 4월 5일 ~ 1274년 7월 23일 (55세)
'''재위
기간
'''
음력
1259년 6월 30일(임인일) ~ 1269년 6월 21일 (1차)[4]
1269년 11월 ~ 1274년 6월 18일 (2차)
양력
1259년 7월 21일 ~ 1274년 7월 23일 (15년 2일)
'''태상왕'''
1269년 6월 21일 ~ 1269년 11월 (5개월)
1. 소개
3. 생애
3.1. 태자 시절
3.2. 재위 기간
4. 원 간섭기의 시작
5. 평가
6. 태묘 악장
7.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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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제24대 임금. 자는 일신(日新). 묘호는 원종(元宗),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이며 원나라가 추증한 시호는 충경왕(忠敬王).
고종안혜태후의 맏아들이며 휘는 정(禎). 원종의 휘에 대해서는 고구려고국원왕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원종이 신하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자신의 휘를 고대 주나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과 같게 바꾸려다가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5]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6] 것을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 묘호, 시호


충렬왕이 올린 묘호는 원종(元宗)으로 고려 최후의 묘호이다. 원종은 고려의 마지막 천자로서 종묘에 안치됐다.[7] 이후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는 원의 제후가 되어 묘호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고 공민왕부터 독자적 시호는 회복했으나[8] 명의 제후가 되면서 묘호는 조선이 건국되고 회복된다. 묘호를 달리 불러 원묘(元廟)라고도 불렸다.
충렬왕이 올린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이며 고려가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이다. 원종 묘호가 격하된 원왕(元王)이라는 시호로 불리기도 했다. 충선왕 대에 원이 추증한 시호는 충경왕(忠敬王).[9] 원 간섭기 내내 이 시호로 불려 충경왕 시호도 유명하다. 보통 원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경순효대왕(忠敬順孝大王)으로 불린다.

3. 생애



3.1. 태자 시절


'''고려의 역대 왕태자'''
왕철

'''왕정'''

왕거(왕태자(왕세자))
여몽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35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1259년에는 기나긴 몽골과의 전쟁 끝에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 신분으로 몽골에 입조해 당시 몽골의 실력자이자 화북 지방의 총독이었던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다. 본래는 사천성 방면에서 원정 중이던 몽케 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는데 몽케 칸이 전쟁 중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위에 공백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중원 화북에 있던 쿠빌라이와 몽골 초원 카라코룸을 지키던 아리크부카 사이에 칸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고 고려 태자 일행은 둘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중차대한 순간에 직면했다. 그리고 어찌보면 고려를 넘어 한반도 역사의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는 이 선택에서 태자는 쿠빌라이 쪽을 택했다. 다만 사료에서는 원종이 쿠빌라이를 선택했다는 명시적인 기록이 없다. 김호동 교수는 태자의 귀국로와 쿠빌라이의 북상로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지니고 온 표문을 바치지 않고 쿠릴타이에도 참석하지 않은 점을 볼 때 단순한 조우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에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고려는 머나먼 나라로 그 옛날 당태종이 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10] 이를 계기로 원종과 쿠빌라이가 친해지게 되면서 쿠빌라이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에게 시집보내기도 한다.[11]

충렬왕하고 사돈을 맺는데, 이게 놀라운 것이 그때 충렬왕의 부인이 되는 사람이 제국대장공주잖아요.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막내딸이에요. 몽골 황족은 황금씨족이라고 해서 자기들끼리 결혼을 하는 부족이 정해져 있었어요. 몽골 내에서도 징기스칸과 특별한 관계, 정말 의리로 뭉친 그런 몇 안되는 가문들과 통혼하지 절대 외부랑 통혼을 안하는데 황금씨족 딸을 충렬왕하고 결혼 시킨거에요. (중략)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후에 원나라 사람들이 와서 제문을 쓰는데 이런 말을 써요. "막내딸이다. 황제에게 자식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래도 막내딸은 특별히 귀여운 법이다. 이 딸을 고려 왕과 결혼시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리고 그 후로 고려가 계속 몽골 황실과 결혼하지만 황금씨족과는 결혼하지 않아요.[12]

그만큼 쿠빌라이가 (원종의 제안에) 흥분했다는 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몽골전쟁 2 中'''

쿠빌라이는 자신에게 온 태자를 크게 환대하고 강화를 논의했다. 때마침 고종이 승하해 고려 국왕도 공석이 되자 쿠빌라이는 원종을 국왕으로 책봉해 고려로 보냈다. 그리고 향후 고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1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바로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습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약속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불리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쿠빌라이(세조)의 유훈이라서 후대의 칸들도 건드릴 수 없었다. 동양 왕조,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선대 군주의 제도나 유훈은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특히 태조나 세조처럼 왕조에서 중요한 임금들의 유훈은 거의 불문법 역할을 했다.
덕분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에서도 고유한 정체성 유지가 가능했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사용된 건 아닌데 권문세족의 기득권 유지 명분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모수사패와 압량위천을 통한 농장의 확대와 양인의 수 감소가 심각했는데 노비제 개혁을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활리길사라는 관료를 파견했을 때 권문세족이 노비제 개혁을 저지시킨 명분이 바로 세조구제였다. 노비제는 동국(고려)의 고유한 습속이니 세조의 유훈에 따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결국 제대로 된 개혁 목소리가 나온 건 공민왕 시기가 되어서였다. 참조.

3.2. 재위 기간


'''등극한 고종 안효대왕(高宗 安孝大王)의 아들'''
'''24대'''
'''강제 등극'''
'''원종 순효대왕'''
안경공
원종이 즉위할 무렵은 그 길었던 무신정권의 황혼기로 60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수장 최의가 살해되고 새로운 실권자인 김준이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원종이 몽골에 입조하고 있을 때 고종이 붕어하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위험할 뻔했다. 바로 김준이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기 때문. 하지만 고종의 유언(兪造)에 의해 고려에 남아 있던 태손 왕심(王諶)[13]이 임시로 왕위를 대신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에 몽골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정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은 강안전(康安殿)[14]

에서 즉위했다. 관정(灌頂)[15]한 뒤 경령전(慶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강안전에 가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후에 황의(黃衣)[16]

를 입고 남쪽을 바라보며 용상(龍床)에 앉았다. 속리대(束里大)와 파투(波透)[17]는 강안전에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태손(太孫)[18], 공(公), 후(侯), 백(伯)[19], 재추(宰樞)[20]와 고위 문무양반(文武兩班)은 강안전 앞뜰에 순서대로 들어왔고, 하위 양반은 강안전문 밖에 서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만세(萬歲)를 외쳤다.

- 고려사 원종 순효대왕 세가 재위 원년(1260년) 4월 중.

1268년 임연과 함께 공모하여 당시 권신 김준의 목숨을 빼앗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년 후인 1269년에는 태자 심을 몽골로 입조토록 하여 친몽 정책과 개경 환도를 시도하다가 김준을 제거하고 무신정권 집정자가 된 임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되었다. 이때 잠시 즉위한 것이 이전에도 왕위에 거론이 되었던 안경공 왕창. 안경공 문서 참조.
밀려나버린 원종은 안경공을 앞세운 임연에 의해 태상왕(太上王)으로 올려지고 강화도에 있는 별궁 용암궁(龍岩宮) 명화전 숭녕부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마침 귀국 중이었던 태자 심이 이 소식을 듣고 몽골로 다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결국 쿠빌라이 칸의 압력으로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로 가서 직접 쿠빌라이와 만나서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게 되고 동시에 몽골의 황족과 세자 심과의 혼인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개경 환도를 시도하게 되는데, 때마침 임연이 병으로 죽고 새롭게 집정자가 된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그의 측근인 홍문계, 송송례를 회유하여 결국 죽이게 하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100년간이나 지독하게 고려를 좀먹었던 무신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 후 귀국과 동시에 개경 환도를 하게 된다.
다시 왕위를 되찾았을 때 원종은 자줏빛 옷을 입고 있다가 노랑색 곤룡포를 입고 고려 정궁서 신하들에게 하례 받았다 한다.
하지만 서경[21]에서는 최탄 등이 1269년에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성을 들어 원나라[22]에 투항하고 말았는데, 이때 원은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할 통치하기에 이른다. 원종은 이를 돌려달라고 계속 쿠빌라이에게 요구했으나 쿠빌라이는 이를 듣지 않아 결국 원종이 죽을 때까지 이 영토를 돌려받지 못한다. 이 지역은 1290년 충렬왕 시대에 돌려받는다.
어쨌든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근본적으로 무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고려 정부의 친원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로 계속 근거지를 옮겨가며 원나라와 고려 왕실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에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원나라의 홍다구와 고려의 김방경을 위시한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이 외에도 일본 공격 방침을 세운 원 세조의 요구로 고려는 일본 원정을 위한 함대를 만드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또 '결혼도감'을 설치에 원나라로 가는 공녀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극에 달했다.

짐(朕)[23]

이 박한 덕으로 종조(宗祧)를 지킨지가 15년이 되었다. 그러나 부담이 막중하여 병에 걸리니,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르건데 대보(大寶)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내(予) 원자(元子)는 원랑의 덕성으로 인망을 얻으니 명철한 품성은 타고난 것이다.

지금 상조(上朝)에 있어 직접 명(命)을 받지 못했지만, 무릇 너희 신민(臣民)은 사왕(嗣王)의 명을 받들어 전령(前寧)의 위대함을 잃지 말라.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해 3일안에 끝내라. 산릉(山陵)의 제도는 검약하게 해야할 것이다. 번(藩)[24]

, 진(鎭), 주(州), 목(牧)은 자기 영역을 넘어오지 말고 조정(朝廷)의 지시를 따르라. 과거, 혼인 등은 멈추지 말고 그대로 하라.

아! 너희 보상대신(輔相大臣)과 월궐서사(越厥庶士)[25]

들은 지나치게 슬퍼하다 다치지 말고 모든 심력(心力)을 다해 방가(邦家)를 보호하고 안정시켜라.

- 고려사 원종 세가 중, 원종의 유조(遺詔). 고려의 마지막 유조(詔)이다. 이후 충렬왕부턴 유교(敎)라 해서 제후의 제도를 따른다.

실로 안습으로 향하던 시기로, 이를 지켜보다가 1274년 향년 5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고려의 정식 묘호인 '종'을 쓴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이후 아들인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모두 '충(忠)'자를 붙이게 되었다. 고종, 원종은 처음엔 원의 시호를 안받고 자국 시호만 올렸지만 이후 충선왕 2년 때 원이 충경왕(忠敬王)'[26] 시호를 보냈고 그의 아버지 고종도 '충헌왕(忠憲王)'' 시호를 추가로 보내 상하 관계를 확실화 하려했다. 원이 시호와 더불어 추증한 관작은 단성봉화보경량절강제좌리공신(端誠奉化保慶亮節康濟佐理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이다.
또 '태자'가 '세자'로 바뀐 것도 원종 때가 시작으로, 다수의 왕실 예법이 격하된 시대가 바로 이 때다. 이렇게 제후국으로 격하된 칭호들은 이후 600년이 지난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에 와서야 되돌려진다. 왕실의 칭호 뿐만 아니라 귀족의 작위도 오등작을 썼었고, 관직명, 국가 기관 명칭등 내정제도 전반을 황제국급으로 썼었지만 원종 이후로 전부 왕국급 혹은 그 이하로 격하된다.[27]

4. 원 간섭기의 시작


원종 치세는 치욕이라면 치욕일 수도 있는 '원 간섭기'를 연 시대이다.
그런데 정작 이후 고려 말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평가를 보면 원종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것을 넘어 상당히 호의적이다. '무신정권을 수습한 군주이고, 당시 몽골제국의 세력이 강했는데 원종은 치욕을 감수하고 나라의 보전을 꾀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냐'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 사실 악평이고 호평이고 뭐고 전부 무신정권의 종료라는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사대부들은 위로는 고려 초기 문벌귀족, 뒤로는 권문세족과도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무신정권 시기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고 이를 무너뜨린 군주는 고평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래 나오는 혹평도 자력으로 무신정권 막내리지 못하고 몽골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 문제라는 식이 된다. 몽골에 항복한 부분이 커버되는 것도, 이게 결국 무신정권이 붕괴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소 의외인 대목일 수도 있지만 당대 세계 최강국인 몽골과 장기전을 벌였음에도 직할 통치를 면한 점 자체는 나름 인정해 줘야 할 부분이다. 쿠빌라이 칸이 약속한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고려는 고유 풍속을 유지하고, 자치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세조의 유지를 이후의 몽골 칸들도 바꾸지 못하였다.[28] 원종 또한 치욕임을 알았으면서도 더 이상의 전란으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하기보다는 외교적 협상을 통해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몽골에 복속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29]
사실 무신정권 주도 하에 벌어진 대몽항쟁은 말이 좋아 대몽항쟁이라고 불러줄 뿐이지, 그 실상은 무신정권은 안전한 강화도에 앉아서 조세나 강탈해가고 본토의 백성들은 조세는 조세대로 뜯기고 몽골이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학살당하는 게 일이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강화를 맺는 게 확실히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30][31] 하다못해 쿠빌라이 칸 대신 다른 계승자인 아리크 부카를 지지했다면 작게는 고려 왕실, 크게는 한반도 자체의 존망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운이 따라준 감은 있지만 그의 이런 줄서기는 결코 그냥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또한 원종은 그 나름대로 고려를 원형대로 유지하려 애썼다. 고려사 원종 세가에 따르면 원나라의 압박이 거세지는데도 황포를 입고 구묘제 태묘(太廟)를[32] 재설치하고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고 신하들에게 표문을 받는 등 현상 유지에 노력했다. 친원파 세력들이 "왕세자를 본받아 우리도 몽골풍 옷을 입읍시다!"[33]라고 하자 왕은 "난 절대 조가(朝家)의 풍속을 못바꾸겠으니 나 죽고 나면 해보든지 그래"라고 거절하기도 했다.[34]

5. 평가


태자 시절은 고려소현세자였고, 왕에 오를 때는 고려판 조선의 현종이었다.[35] 다만 왕이 되지 못한 소현세자와 달리,[36] 이쪽은 왕이 되어 100년의 무신정권을 끝내고 원과의 협상을 통해 어떻게든 자신의 재위도 유지했다.
동국통감에선 원나라와의 화친은 그런대로 높이 샀으나, '''나라를 위협하는 권신을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에선 비판했다. 실권이 없었다는 변명만 하기도 뭐한게, 아버지 고종의 경우는 무오정변을 통해 원나라의 입김과 상관없이 권신 최의를 제거하며 최씨 정권을 없애버렸다.[37] 때문에 비교되어 무오정변이 터지고 난 이후에 남아있는 무신정권 잔당들을 삼별초의 난 이전에 없애지 못하였고 원나라의 편에 기대어 제거했다며 비판을 받았다. 쉽게 말해 '''외정에서는 높은 평을 받으나 내정에서는 고려 고종보다 못 미친다는 평'''이다.[38]
원 간섭기 관련해선, 상기되어있듯 결과적으로 원에 항복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자치권만은 지켜내며 고려의 위상을 세우려 자기딴엔 노력한 임금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인지 이후 조선의 세종은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은 백성에게 공덕 있는 왕들이니 종전대로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기도 했다.

6. 태묘 악장


원종의 4대손인 공민왕[39]은 재위 12년차에 새롭게 태묘 악장을 제정했다. 원종의 악장은 제목이 없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밝고 밝으신 아조(我祖)여,

덕이 건곤(乾坤)과 맞먹습니다.

바로 그 커다란 덕이,

후곤(後昆)[40]

을 돌봐주십니다.

향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니,

사직이 아름다워질 뿐입니다.

즐기시고 흠향하시고,

영원히 강녕(康寧)하도록 보호해주십시오.


7. 대중 매체에서


[image]
드라마 무신에서 배우 백승우강성민이 맡아 출연했다. 처음에는 왕실을 되찾고 사직을 위해 열일하는 인물로 나오나, 김준이 집권한 이후부턴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몽골에 붙어 고려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인물로 표현된다.
  • 게임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정치 57, 전투 56, 지모 34로 안습하다. 다만 전란에 빠진 고려를 외교로 구한 걸 감안해서인지 외교 특기가 있다. 그런데 외교에 필요한 능력치가 지모라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치 배분이 영 엉망이다. 징기스칸 4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2에서 고려의 군주로 나오는데 부하로는 김통정, 김방경만 있을 뿐. 단, 국내 정발판에서는 정안이 추가되었다. PK 시나리오 3에서는 고종의 나이 어린 왕족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 자식이 없는 다른 시나리오의 고려에 비하면 왕위 계승이 편하다.
[1] 시호를 올릴때 없었으며 사후 36년 뒤인 1310년에 원이 추가함.[2] 절일의 이름이 예종과 같다.[3] 경(京)은 천자국의 제도이기 때문에 '개경 개성부'는 충렬왕 재위 34년에 '개성부(開城府) 개성현(開城縣)'으로 격하된다. 즉 원종은 경(京)에서 죽은 마지막 임금이다.[4] 당시 무인 집권자였던 임연이 정치적 갈등 끝에 원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이었던 안경공 창을 영종으로 옹립시켰다. 그러나 원나라의 개입으로 5개월만에 복위된다.[5] 고려사절요에 실제로 사용된 표현(不得其死)이다.[6] 釗. 원래 뜻은 "멀 조"이며 고국원왕의 이름은 "쇠"라고 읽는데 이는 우리나라식 국훈이다.[7] 원종의 왕후이자 충렬왕의 모후인 순경태후 또한 고려 고유의 시법을 지킨 마지막 왕후로 종묘에 안치됐다.[8] 아들 우왕과 손자 창왕은 왕씨가 아닌 신씨로 몰려 폐위되어 왕이 된 역사 자체가 부정되어 시호를 당연히 못 받았으며 공양왕은 폐위되었지만 조선 태종에 의해 시호를 받았다.[9] 충경왕으로도 이 문서에 들어올 수 있다. 조선 시대 때도 묘호를 받은 다른 고려 임금들은 묘호로 불리지만 원종은 충경왕이나 원왕으로 많이 불린다.[10]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다. 그리고 당대 고려의 역사관은 고씨가 세운 고려를 그대로 왕씨의 고려가 이어받은 것이었다. 고려인에게 고구려와 고려 두 나라는 별개의 나라가 아니었고 중국인들도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이 고려도경 등에서 확인된다.(비슷한 예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있다.)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고려 태자의 방문을 반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칸위를 놓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수십 년간 전쟁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고려가 스스로 자신의 진영을 찾아와 제후국을 청하면서 명분에서 크게 앞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조.[11] 이 와중에 고려의 혼인 제안을 한 차례 퇴짜를 놓기도 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원종 자체가 아닌 삼별초의 대몽 항쟁 때문이었다.[12] 다만 정확하게 말하면 원성공주/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막내 딸이지만, 옹기라트 부족 여인의 소생이 아니기에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최고위급은 아니다. 왜냐하면 에케 몽골 울루스/대원제국의 카안은 징기스칸의 부계 혈통과 보르테 우진의 부족이던 옹기라트부 출신의 여성 사이에서 출생되어야 했기 때문. (몽골의 풍습은 같은 부족 며느리에게 재산을 물려준다.) 하지만 쿠빌라이 사후 손자인 성종 테무르가 즉위하면서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되는 충선왕과의 위치에서 분란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다음부터는 '비교적' 가까운 황족 일원에서 시집보냈는데, 이들 역시 모두 소위 '황금씨족'에 속한다.[13] 권신 최우의 피(충렬왕의 외할머니가 최우의 딸이다.)를 받은 왕심은 원종 사후 충렬왕으로 즉위한다.[14]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있던 본궐의 편전.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15] 밀교의 세례식이다.[16] 치황의나 자황포 중 하나로 보인다.[17]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파견한 관리들.[18] 당시 태손은 충렬왕이다. 아직 태자로 승급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태손으로 불렸다.[19] 고려의 봉작제는 이분화되어있었다. 신하의 오등작, 왕족의 삼등작인데 여기선 왕족의 삼등작을 지칭한 것이다.[20] 고려 양대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을 지칭한다.[21] 지금의 평양.[22]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라는 국호를 쓴 것은 1270년이다.[23] 원종 때까진 아직 외왕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24] 제후의 땅을 번(藩)이라고 한다. 원종은 스스로를 (朕)이라 하고 제후의 번(藩)을 통솔하고 자신의 유언을 (詔)라 하여 천자(天子)로서 사망했다.[25] 나라 밖의 선비들. 즉 몽골 출신 관료들을 말한다.[26] 공교롭게도 수백년 후 조선의 철종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역시 충경(忠敬)이다. 다만 이쪽은 대한제국 황제로 추존되면서 폐지했다.[27] 칭호와 관제 등은 공민왕 때 다시 복권되고 이후 조선 초기에 조율을 통해 다시 하락되기도 한다. 오등작도 복원됐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없앴고, 묘호도 조선 내부에서 폐지론이 자주 나왔지만 그것만은 계속 썼다.[28] 다만 한국 학계에서 몽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바꾸지 못한' 게 아니라 '바꾸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몽골 제국고려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그 지방의 풍습을 대체로 인정해주었으며, 일 칸국 같은 경우는 아예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즉, 왕조의 입장을 제하고 나면, 고려가 엄청난 특별 대우까지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 물론 그 왕조를 살려둬서 이후 고려국왕이 쿠릴타이 회의에 원 황실의 일원으로 참가까지 한 것은 제법 큰 대우긴 하다만. 덕분에 초창기 횡포를 부리던 다루가치들도 이후엔 부마국이 된 고려왕에게 큰 소리를 못내게 된다.[29] 만약 고려가 계속 몽골에 항쟁했더라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었다. 몽골군이 중동을 쓸어버릴 당시 바그다드를 점령할 때 바그다드 시민들은 '''말 그대로 학살당했다.''' 거기에 몽골이 휘저었던 동유럽에 살던 유럽인들이 세대가 지나도 당시 몽골을 코즈믹 호러급 괴물들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계속 항쟁했다가 고려도 그 꼴이 났을 수도 있었다.[30] 물론 대몽항쟁 시기에 무신정권이 전쟁에 대해 손을 놨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칭기즈 칸 이후로 몽골 제국은 자기들에게 반항하는 나라는 완전히 개발살을 내버렸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수뇌부들 역시 몽골군에게 나라가 점령당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화도로 도망간 뒤에 탱자탱자 놀았어도 동시에 몽골군을 영격하는데 골몰하는 등, 자기 할 일은 했다. 물론 그럼에도 상황이 워낙 중과부적이라서 끝내 몽골 제국에게 패했지만, 어쨌든 무신정권도 마냥 손을 놓지는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31]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씨정권의 만행이 비호되지는 못한다. 애초에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짱박혀 군대를 보내거나 산성이나 섬으로 피신하라고 전하는 등 직접적인 움직임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본토에서는 국민들이 몽골군에 의해 잔혹히 죽임을 당하고 영토가 초토화되는 그 순간에도 최씨 정권의 수뇌부들은 향락을 즐기기에 바빴다.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던 것이 몽골의 1차 침입때 중앙군이 몽골의 전초부대의 기습에 붕괴되었기 때문에, 전투를 하고 싶어도 할 병력이 없긴 했다. 있는 거라곤 최씨가문 사병들 뿐인데 사병 운용해 몽골에 저항하다 반대 세력의 뒤통수 맞고 싶진 않았던 모양.[32] 종묘엔 두가지가 있는데 오묘제와 칠묘제(구묘제)가 있다. 오묘제는 묘호가 없는 제후식 종묘고 칠묘제는 묘호를 올리는 천자식 종묘다. 왜 원종이 묘호를 받았겠는가? 적어도 자신 대까지만은 고려의 종묘 예법을 지키고자 한것이다.[33] 충렬왕은 원과 고려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몽골풍 옷을 착용했고, 이를 본 많은 고려 사람들은 울면서 한탄했다고 한다.[34] 고려사 충렬왕 세가 즉위년 기록.[35] 단, 다사다난한 재위는 고려의 열성조 중 하나인 고려 현종과도 다소 비슷했다. 그래도 고려의 현종은 암살 위협이나 여요전쟁을 극복하고 예종 대까지 백여 년의 전성기를 개막해냈지만.[36] 원종의 아버지인 고려 고종은 조선 인조와 달리 아들을 아꼈고, 고종 역시 애초에 주화파였기 때문에 원종이 왕이 될 수 있었다.[37] 사실 이것도 고종의 역할은 거의 없었고 무신들끼리 거진 내란을 벌인 끝에 김준이 자신의 일파와 함께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고종이 김준에게 최씨 정권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이를 방증한다.[38] 사실 이 점은 소현세자도 비평론자들에게 비슷한 평을 받기도 하니 재미있는 부분. 이렇게 보면, 안경공의 경우 폐위되어 그렇지 만약 원종 대신 쭉 치세를 유지했다면 북벌론을 주창한 강경파 효종처럼 됐을 확률도 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고, 효종 역시 입지를 위한 그야말로 말로만 북벌론을 외쳤던 것에 가까웠지만.[39] 족보가 원종 →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순이다.[40] 후손, 자손의 다른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