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춘

 


'''조선 추존 국왕'''
'''桓祖 | 환조'''

[image]
환조의 능 정릉(定陵)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환조(桓祖)'''
'''시호'''
환왕(桓王) →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
'''본관'''
전주(全州)
'''휘'''
'''고려'''
자춘(子春)
'''몽골'''
울루스부카(吾魯思不花)
'''출생'''
1315년 1월 20일
고려 동북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
'''사망'''
1361년 6월 3일 (음력 4월 30일)
(46년 4개월 14일 / 16,937일)
고려 함경도 영흥
'''능호'''
정릉#s-2.1(定陵)
'''왕비'''
의혜왕후(懿惠王后)
'''부왕'''
도조 공의성도대왕
'''모후'''
경순왕후(敬順王后)
1. 개요
2. 생애
3. 가계
4. 대중 매체
4.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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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조의 추존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아버지이면서 정종(이방과)과 태종(이방원)의 친할아버지.
조선 개국 직후에는 시호 환왕(桓王)만 올렸다가 손자 태종이 1411년에 묘호 '''환조(桓祖)'''를 올리고 시호를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으로 바꿨다.#
몽골식 이름은 울루스부카(吾魯思不花)이다. 추존왕 도조 이춘과 추존왕후 경순왕후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2. 생애


1315년에 태어난 이자춘은 형 이자흥이 일찍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이자 조카인 이천계[1]가 너무 어려 천호(밍간)를 이어받지 못하자 나중에 어른이 되면 돌려주기로 하고 일단 천호직을 임시적으로 물려받았다. 이후에 이자춘은 원나라의 다루가치직도 자연스럽게 세습받았다. 하지만 이천계가 어른이 되어서도 천호직과 다루가치직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천계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곡필로 보인다. 이자춘이 죽자 이천계가 자신이 적장자임을 내세워 이성계를 죽이고 벼슬과 재산을 찾으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천계는 이자춘과 이성계보다도 일찍 고려에 투항해서 관직을 얻었지만 함부로 노비를 죽여 살인 혐의로 사형당했다.
원래 자신의 외손자에게 천호 자리를 잇게 하려던 2대 쌍성총관 조양기[2][3]는 이자춘이 몹시 거슬리게 되었고 이에 쌍성총관부 일대에 있던 백성들을 대상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해서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은 이자춘이 이 지역 고려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원나라가 안으로는 황위 계승권으로 내분이 일어났고 밖으로는 홍건적이 일어나 안과 밖으로 원나라는 몰락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즉위해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고려의 자주권을 찾고 잃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쌍성총관부를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4대 쌍성총관 조소생(조양기의 손자)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이자춘은 1355년 개경으로 가서 몰래 왕을 만나 고려에 투항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힘을 얻은 공민왕은 기씨 일족을 제거하고 유인우에게 군대를 주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도록 했다.
원래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미리 사람을 보내 소부윤 관직을 내리고 자신의 어대를 증표로 주면서 내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왕의 요청에 이자춘은 내응했고 유인우의 군대는 결국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렸다. 이렇게 함경남도 일대는 조휘와 탁청의 반란 이후 99년 만에 고려의 손으로 들어왔고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회복의 공으로 대중대부 사복경으로 올라 개경으로 이사했다. 그 뒤로도 군기감 판사, 천우위상장군 등을 지내다가 1360년에는 영록대부 장작감 판사 벼슬로 삭방도[4] 만호 겸 병마사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1361년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그가 죽자 개경 사람들은 이제 동북면에는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그 아들[5]이지란[6]이 있었다.
아들 이성계가 왕에 오르자 환왕(桓王)으로 추존되었다. 손자인 태종이 환조로 재추존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쓰던 명검인 전어도(傳御刀)를 물려준 사람으로 나온다. 이 검은 이자춘이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대사의 말에 따라 조상 무덤을 옮기다 발굴해낸 것이라고 하는데, 이방원이 제작한 복제품이 실유물로 남아있다. 150cm짜리 괴물검. 이성계는 용의 후손이라 병장기가 안 통해서 못 죽이던 우왕을 이 검으로 손수 베어죽이고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가 동귀어진했고 이것들을 무학대사가 거두어 갔다는 야사가 있다.

3. 가계


  • 왕비: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
    • 조선 제1대 국왕 태조 고황제 이성계(太祖 李成桂)
    • 정화공주(貞和公主) 이씨 -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하가.[7]
  • 이씨 - 본명은 내은장(內隱藏). 실록에서는 이씨가 이자춘의 여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 이원계를 낳은 이씨가 정부인이고 이성계를 낳은 최씨가 둘째부인이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8]
    •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 - 이성계의 이복형. 이성계의 형답게 무장으로서 능력이 매우 뛰어나 왜구를 무찌르는 등의 활약을 했다. 하지만 고려에 충의를 가졌기 때문에 고려를 무너뜨리려는 이성계와는 길이 갈려 결국 자살하였다. 다만 형제간에 우애는 매우 좋았다고 하며 동생 이성계가 형인 이원계를 잘 따랐다고 한다. 이원계는 자기 아들들에게는 (고려의 신하인) 자신과 상황이 다르니 숙부 이성계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라고 하였다.
  • 후궁: 정빈 김씨(定嬪 金氏) - 본래는 이자춘의 여종. 본명은 고음가(곰가(古音加)). 이자춘이 죽자 이성계는 그녀를 개경으로 데려와 극진히 모셨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이복 형이 그렇게 아꼈지만 뒷날 이복 형을 배신하고 조카에게 붙어 정승까지 올랐다. 이에 대해서는 사병을 혁파하고 종친들의 힘을 꺾어나가던 태조와 정도전의 정책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함흥 동쪽 귀주동에 있는 정릉(定陵)에 묻혔고, 그의 부인 의혜왕후 최씨도 정릉과 같은 산에 묻혔는데 능호는 화릉(和陵)이다.


4. 대중 매체



4.1. 드라마


  • 2005년~2006년 MBC 드라마 《신돈》 - 전병옥: 기철 일파의 농간에 넘어가는 조소생과는 달리, 고려의 정세를 한 눈에 파악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줬다. 죽기 전 이성계한테 “오로지 우리 가문이 살 길은 고려에 충성하는 것 뿐.”이란 유언을 남겼다.
  • 2015년~2016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이순재: 단 1회 뿐이지만 원로배우 이순재가 특별출연하여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낸다. [9] 조소생의 난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아들 이성계에게 대의와 가문의 미래를 위해 조소생을 배신하고 고려를 위해 싸울 것을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이성계가 조소생을 배신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 하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이천계라는 인물이 이자흥의 아들인 이교주와 다른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에 따르면 이천계는 이성계의 배다른 형제 중 한 명(이성계의 이복형)이며, 이자흥의 아들 이교주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양자로 보내주었다는 견해이다.[2] 참고로 이 사람은 쌍성총관부가 설치되게 된 원인인 조휘탁청의 반란의 중심인물인 조휘의 아들로 조광조의 가문인 한양 조씨이다. 천호 벼슬 문제로 이성계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찌어찌해서 방계후손 중 하나인 조돈이 이자춘을 돕게 되고 그 와중에 급기야 이자춘의 딸인 정화공주와 혼인하면서 조선 개국공신 집안이 된다.[3] 조양기의 딸이 이춘과 혼인(이춘 입장에서는 재혼)하면서 3남 3녀를 낳았고 조양기는 이 중 하나로(관례로 보면 둘째 아들인 나해로 보인다.) 천호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 같다.[4] 지금의 강원도 북부 7군(철원, 화천, 고성, 인제, 강릉, 양구, 속초) 지역.[5] 큰 아들은 부친이 사망한 해인 1361년에는 아직 20대의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그 해 가문의 사병과 함께 개경을 침공한 홍건적을 털어 버리고 다음 해엔 고려의 변방을 집적대던 원나라 장수 나하추를 털어 버렸다.[6] 원래 퉁두란이란 이름으로 불린 여진족 사람으로, 여진의 군대로 이자춘을 죽이려 달려들었으나 이자춘을 비롯한 군사들에게 잡혀 투항하고 이후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으며 이지란으로 개명하며 귀화했다.[7] 판도판서 조돈의 아들이며, 의정부 찬성사로 초대 쌍성총관을 지낸 조휘의 증손자이다. 아버지가 방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쌍성총관 자리는 잇지 못했다. 나중에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고 그의 아들 조온도 출세했다. 쌍성총관의 직계 후손들은(4대 쌍성총관 조소생)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대항하다 털렸고, 이후 대가 끊겼다.[8] 후술하는 서자 이화와 달리 이원계가 이름에 돌림자를 쓰고 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9] 이는 같은 작가가 집필한 선덕여왕에서 역시 이순재가 연기한 진흥왕에게도 나타난 문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