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폭우 참사
1. 개요
1998년 7월 31일에서 8월 1일 사이 폭우로 인해 지리산 근처 계곡 및 인근 마을에서 일어난 사고.
'지리산 대참사'라고 불릴 정도로, 지리산의 대표적인 흑역사이다.
2. 상세
1998년 7월 31일 밤과 8월 1일 새벽 전남 구례, 경남 산청, 함양군 일대 지리산권에 100㎜가 넘는 폭우가 내리면서 계곡 등지에서 잠을 자던 야영객과 계곡 인근 마을 주민 등 100여명이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급격히 불어난 계곡 물에 휩쓸려 숨지거나 실종됐으며, 지리산 계곡 뿐만 아니라 진양호까지 이어지는 덕천강 변에서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애초에 지리산에는 피아골과 뱀사골, 대원사계곡등 수많은 계곡이 있고, 해마다 전국에서 수만 명의 피서객들이 몰려들어 매년 기습호우로 실종 또는 조난사고가 발생하는 등 자연으로부터의 경고 메시지가 수차례 있어왔지만, 당국의 안일한 시설 관리와 야영객들의 안전불감증이 결국 큰 화를 불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식으로 퍼부은 이때의 폭우는, '''게릴라성 기습폭우'''라는 용어를 국내에 등장시킨 배경이 되었다. 폭우의 구체적인 원인으로는 중국 양쯔강으로부터 수증기가 밀려와 엘니뇨 현상에 따른 바닷물 변화가 대기를 불안정화시킨 상황에서 수증기 구름이 지리산 줄기에 부딪히며 한꺼번에 폭우로 쏟아진 것이다. 이 한 번의 한밤중 대폭우(대원사계곡 262mm, 피아골 300mm)로 지리산 일대에서만 사망자 68명, 실종자 10명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지리산 계곡과 연결되는 덕천강 일대에서도 저상 교량[1] 을 통해 덕천강을 건너서 대피하려던 일부 야영객 차량들이 순식간에 불어난 강물에 휩쓸리는 바람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인근의 홍수 방지용 댐인 홍문댐이 부실공사로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댐 안에 있던 물들이 희생자들을 덮치는 바람에 35명이 숨졌고, 지리산 인근 마을에서도 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발생하여 주민들이 집에 있다가 그대로 쓸려가거나 매몰되어 숨지는 등 지리산 인근 남부 지방에서도 25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전체 10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여름의 절정기인 7월 말과 8월 초 사이에 국내의 대표적인 피서지로 유명한 지리산 계곡과 그 일대에서 발생한 사고였기에, 사망자들은 계곡에 피서를 온 가족 단위 야영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일가족이 몰살당해 버리거나, 자신은 빠져나왔으나 물에 휩쓸려 죽어가는 가족을 구조하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끔찍하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거기에 근처 댐들이 수위 조절을 위해 일제히 방류한 통에 사망자 시신들 중 일부는 순식간에 덕천강 하류 진양호를 거쳐 남강댐과 사천만을 지나 남해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었거나, 시신이 물속에 가라앉아 찾을 수 없었다가 수개월이 지난 후 진양호에서 떠올라 발견되는 일까지 있었다.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10만 여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수색을 벌였음에도 최종적으로 10명의 실종자들은 결국 시신으로 수습되지 못하고 사망 인정으로 마무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폭우라는 것만 생각하면 단순한 자연재해로 보이는 듯싶지만 이렇게 특정 구역에서 인명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2] 정황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외면한 피서객들의 안전 불감증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안일한 재난 대처, 홍수방지시설의 부실공사, 그리고 낙후된 기상 장비로 인한 기상청의 늑장 예보가 어우러진 총체적 인재였다.
실제 사고 당시 입산과 야영이 금지된 지역에 일부 피서객들이 몰래 들어가는 등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데다, 폭우가 내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바로 대피 조치 및 구조활동을 벌이지 않고 1~2시간 후에 겨우 대피 방송을 시작하는 등 국립공원관리공단측의 대응책 또한 매우 허술하고 수동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작 중요했던 경보장치들이 고장이 나는 등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바람에,[3] 결국 인명피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또한 하필 당시 시간이 밤/새벽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경보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폭우가 내렸다는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자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가 변을 당했다.[4]
참사 이후 기상청은 '집중호우 직전 중앙재해대책본부에 3차례 전화해서 집중호우 가능성을 통보'했다고 하고 중앙재해대책본부는 '전화 통지는 공식 주의 촉구가 아니며, 참사 지역을 특정한 것도 아니었다'며 책임을 서로 떠넘겼다. 야영객들을 관리해야 할 지리산 관리공단도 책임을 인정하기보다 일부계곡을 통제해 피해를 줄였다며 자화자찬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관리공단의 무사안일한 늑장 대응과는 상반되게 지리산 현지 주민들은 현지 생활 경험으로 터득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사고 1~2시간 전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여[5] 마을 인근 계곡에서 텐트 치고 잠든 야영객들을 일일이 깨워서 대피시킨 덕분에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를 억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다. 하지만 야영객을 대피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현지 주민들이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려 숨을 거둔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대한민국 기상청의 낙후된 장비와 늑장 예보도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대한민국 기상청은 7월 31일 밤 10시 30분을 기해 전남 내륙과 전북 지방에 호우주의보를 발령했었지만, 순천시와 지리산 등 전남 동부 내륙 지방에는 이미 40분 전인 밤 9시 50분부터 1시간 동안 145㎜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기상청이 국지성 호우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첨단 기상장비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기상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고 분석의 신속성을 기하기 위해 슈퍼컴퓨터의 도입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사고 발생 후에 사망자 유족들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었고, 이에 대해 서울지방법원은 공단이 대피 방송도 하지 않는 등 피서객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유족들에게 11억 3,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00여 명의 피서객들이 위험한 지역에서 야영을 하는데도 관리공단이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책임을 근거로 판결한 것이며, 불가피한 자연재해라 할지라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공공 기관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경보기만 2개 있었던 대원사 계곡에는 자동 음향 경보 시스템이 65개로 증설되었고, 지형에 따라 강우량이 14에서 22mm를 넘으면 무선으로 연결된 자동경보장치가 작동하게 된다. 사고 당시 경보 시스템이 전혀 없었던 피아골에도 우량계 13개와 자동경보계 20개가 설치됐다. 덕분인지 2011년 여름에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지리산 일대에 다시 한번 300mm 급의 대폭우가 쏟아졌지만 산사태 등으로 건물과 도로들이 유실되긴 했어도 철저한 재해경보 태세(와 스마트폰)로 입산금지와 대피령이 발 빠르게 이루어져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없었다.
3. 여담
2015년에 표절 의혹이 제기된 신경숙의 단편소설 '작별 인사'(1998년 가을 발표)의 한 배경이 이 사고이다. 주인공(화자) M은 직장동료와 3년간 맺었던 불륜 관계를 정리하고자 칠레에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새 출발을 하려는 의미에서 지리산에 홀로 여행을 갔다가 폭우로 인한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고 찾아간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1] 일반 교량과 달리 강물이 불어나면 잠겨버리는 잠수교식의 교량이다.[2] 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태풍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 때 집계되는 사망자 수는 평균적으로 전국 기준 100명 안팎의 규모다. 자연재해로 인한 전국 인명피해의 평균치와 맞먹는 인명피해가 지리산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자연재해의 피해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그 규모가 컸다.[3] 당시 스피커가 작동 안 되는 경우 방송이 안 나왔으며, 배터리의 경우도 수명이 있기 때문에 그걸 제대로 교체를 안 해 주어 안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4] 이걸 각주를 작성한 위키러의 어머니가 지리산 폭우 참사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데, 당시 그녀의 아버지(작성자의 외할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갔다가 밤에 발 부분이 축축한게 뭔가 이상해서 잠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깨어나서 텐트 밖으로 나가자 그대로 텐트가 물에 쓸려나갔다고.''' 텐트가 기적적으로 사람의 무게 덕분에 버틴 것이다. 그분은 또한 당시 '''사람이 아직도 잠들어있는 몇몇 텐트가 그대로 계곡에 떠내려'''가는 끔찍한 광경도 목격하셨다고 진술하셨다.[5] 이는 지리산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으레 전해지던 것으로, 대원사계곡이 폐쇄되기 전 어느 주민이 바위를 가리키며 "풀이 있는 곳 밑까지는 전부 물이 들어찬다고 생각하라"라고 경고했는데, 그 바위라는 게 사람 키 세 배쯤 되는 거대한 공룡알 같은 크기였고 그 꼭대기에 풀과 잡목이 드문드문 나 있는 수준이었으니 수량이 얼마나 크게 불어나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