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빌르너브
1. 생애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근교의 중소도시 생장쉬르리슐리에에서 태어나 퀘벡 주 베르티에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모국 캐나다에서 열리는 스노 모빌 레이스를 통해 프로 레이싱에 입문했다. 이후 카레이싱에 도전해 짐 러셀의 레이싱 스쿨에서 레이싱 라이센스를 취득 1976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리는 포뮬러 애틀랜틱에서 우승하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레이싱 경력 초기에 빌르너브는 항상 자금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의 돈벌이는 대부분 젊을 때부터 해오던 스노 모빌 레이스에서 나왔고 스폰서도 이를 통해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도움이 된 것이 눈길을 달리는 스노 모빌 레이스 덕분에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레인 컨디션과 같은 그립을 잡기 힘든 환경에 더욱 익숙했고 훗날 이것이 F1에서 빛을 발했다.
1970년에 연인 조안과 결혼해 아들 자크 빌르너브와 멜라니를 낳았다.
2. 선수 경력
빌르너브가 1976년 포뮬러 애틀랜틱 레이스에서 승승장구할 때 제임스 헌트가 마침 그의 레이스를 보고 맥라렌에 그를 추천하였다. 그래서 맥라렌은 빌르너브에 계약을 제안하여 빌르너브는 꿈에 그리던 F1에 입성하게 된다. 그러나 맥라렌에서 압도적인 퀄리파잉으로 깊은 인상을 찍나 싶더니 피트 전략이 망해 성적은 11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빌르너브는 조디 쉑터가 있는 페라리로 이적해버렸다. 당시 빌르너브와 페라리의 계약은 꽤 파격적인 소식이었다.
2.1. 스쿠데리아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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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남는 질 빌르너브는 페라리를 타고 있을 때의 모습이다. 페라리에서의 그의 드라이빙이 회자되는 이유는 특유의 전투적이고 무모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공격적인 드라이빙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드라이빙 스타일은 빛을 발하여 챔피언이 없는 커리어임에도 F1 역사에 남을 경기를 여러 남기게 했다. 페라리에서의 1979시즌과 1982시즌에는 많은 F1팬들이 회자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그의 드라이빙을 통해 나왔다. 대표적으로 1979년 프랑스 그랑프리가 있는데,
이 당시 질 빌르너브와 르네 아르누스는 2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지금까지도 F1에서 가장 치열했던 휠투휠로 꼽히는 경기이다. 얼마나 유명하냐면 엔초 페라리의 전기 영화에서도 엔초옹이 자택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며 흥분하는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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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의 전투적이고 용감한 모습은 무모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1980년 모나코 그랑프리의 경우 폭우 속에서 열렸는데 당시 상대적으로 성능이 떨어지는 페라리의 스피드를 만회하기 위해 남들 다 레인 타이어 끼우는 와중에 혼자 슬릭 타이어를 끼우는 미친 짓을 감행(...) 다른 드라이버보다 랩당 5초씩 앞서가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짓거리(...)는 나중에 아일톤 세나도 재연한 바 있다.
그 이외에도 1981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막바지에 알란 존스를 추월하며 우승한 것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참고로 이 때 빌르너브의 스타팅 그리드는 16위였다![1]
또한 그의 커리어 최대 명경기로 꼽히는 1981년 스페인 그랑프리는 무려 '''50랩'''동안 4대의 공격을 막으며 우승을 차지하는 진기명기를 보여주었다. 50랩 내내 빌르너비 뒤에 꼭 붙어서 추월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고 파이널 랩에 5대가 줄줄이 체커를 받는 F1에서 보기 힘든 진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 고든 머레이는 자신이 본 최고의 드라이빙이라 하기도 했다.
이미 이때부터 질 빌르너브는 챔피언은 된 적 없지만 당시 필드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는 탑클래스 드라이버였다.
2.2. 사망
그의 죽음을 얘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당시 질 빌르너브의 팀메이트였던 디디에 피로니라는 인물이다. 디디에 피로니는 질 빌르너브 만큼이나 빠른 드라이버로 둘은 같은 페라리를 타며 항상 라이벌전을 펼치곤 했다. 사건의 도화선은 1982년 산 마리노 그랑프리로 당시 빌르너브는 매서운 페이스로 피로니를 따라잡아 추월을 시도하려 했으나 팀에서 팀오더를 내려 피로니가 그대로 우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당연히 빌르너브는 분노가 폭발해 피로니와 격한 말싸움을 했으며 이후 둘의 관계는 완전히 박살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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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뒤에 열린 벨기에 그랑프리까지 그의 마음은 심란했을 것으로 보인다. 최종 예선에서 빌르너브는 피로니보다 0.1초 뒤진 6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꽤 많이 쓰인 타이어를 끼우고 다시 트랙에서 플라잉랩을 돌았으나 느리게 주행하고 있던 요헨 마스의 차와 충돌해 플립, 시속 220km의 속도로 차에서 튕겨져 날아가 안전펜스로 돌진했다. 트랙을 주행하고 있던 동료 드라이버들이 차에서 내려 급하게 그를 구조했고 병원에 이송될 때까지만 해도 호흡이 살아있었으나 결국 심각한 허리뼈 손상으로 그날 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피로니와의 심한 갈등이 그 특유의 무모한 드라이빙을 더욱 더 극단으로 몰고간 것은 아닐까하고 많은 사람들은 추측하곤 한다.[2]
3. 평가
당대 같이 활동했던 현역 드라이버 혹은 F1 전문가들이 항상 꼽는 무관의 레전드이다. 같은 부류의 선배로 스털링 모스가 있는데 이쪽은 최고의 차를 가졌지만 챔피언을 하지 못했던 반면 질 빌르너브는 커리어 내내 챔피언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차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페라리는 그에게 니키 라우다가 타던 312를 수차례 개량해서 태웠고 5번째 개량현인 312 T5까지 타고 나서야 신형인 126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126도 그리 빠른 차는 아니었다 (...) 그리하여 혹자는 빌르너브의 재능을 두고 분노의 승리라고도 했다. 유명한 평가로 탑기어 MC였던 제레미 클락슨이 아일톤 세나 다큐를 만들 때 자기는 항상 질 빌르너브를 최고의 드라이버로 생각했다는 말이 있다.'''그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내가 가장 사랑했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챔피언을 잃었다.'''
'''- 엔초 페라리'''
4. 여담
그의 도전적이고 영웅적인 행보 덕분에 많은 팬이 있었지만 고국 캐나다에서 또한 인기는 굉장했다고 한다. 당장 처음 열린 1978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그의 첫 우승을 하게 되는등 여러모로 각별한 추억이 있기도 했다. 빌르너브의 사망 이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위치한 일 노트르담 서킷은 질 빌르너브 서킷으로 개명되었으며 피니쉬 라인 앞에 Salut Gilles 라 하여 빌르너브를 추모하는 글귀를 적어 놓았다. 이 추모글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의 사망이후 그의 아들 자크 빌르너브가 1997년 윌리엄스 소속으로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아버지의 대의를 아들이 이룬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