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초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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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 안셀모 주세페 마리아 페라리'''
Enzo Anselmo Giuseppe Maria Ferrari
'''국적'''
이탈리아 [image]
'''출생'''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 왕국 모데나
'''사망'''
1988년 8월 14일, 이탈리아 마라넬로
'''직업'''
카레이서, 기업인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Enzo Ferrari (1898년 2월 18일 ~ 1988년 8월 14일) 향년 91세.
이탈리아의 슈퍼카 제조사 페라리의 창업자.

2. 생애


1898년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태어났다. 11살때인 1908년 볼로냐에서 자동차 경주를 처음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14세때부터 운전을 했으며 스포츠에 상당한 재능을 보여 16세때 스포츠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해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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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엔초 페라리 [1]
1915년 자신이 소속된 신문의 기사에서 이탈리아인 디 파르마가 미국 최대 레이싱 대회인 인디아나 폴리스에서 우승했다는 것을 보고 과거 자신의 꿈인 레이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21세에 꿈을 이루기위해 자동차 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취직한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 중 한 명인 페리체 나지로를 만나 그의 소개로 스포츠카 메이커인 CMN사로 직장을 옮기고 운전실력을 인정받아 레이싱에 대뷔하게 된다.
첫 출전한 레이싱은 50km 산길 달리기 경주로 종합 11위를 기록한다.
1920년대 알파로메오의 레이서였으나 1929년 자신만의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만들었고 이것을 보통 페라리의 시작으로 본다. 오늘날 페라리 엠블럼의 SF는 이 이름의 약자이다. '''그리고 이 팀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레이싱 팀이 되었다'''.
1939년 알파로메오 측에서 자신의 레이싱팀 스쿠데리아를 흡수하고 자신을 내쫓으려는 의도를 알아챈 페라리는 알파와 결별하고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첫 생산차량은 1940년에 나온 Tipo 815.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파로메오와의 계약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를 생산할 수 없었다. 1947년에는 드디어 페라리의 진가가 그랑프리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이후 1988년까지 무려 '''5,000번의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막강한 팀으로 성장하게 된다.
1988년 8월 14일, 페라리는 91세의 일기로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3. 여담


아들인 알프레도 페라리를 끔찍히 아껴 차량을 만드는데 수많은 의견교환을 나눴으며, 후에 지병으로 알프레도가 죽자 그 이후 생산된 모든 페라리 V6 차량에 아들의 별명인 디노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 디노는 페라리가 아니다. 이유는 페라리 엔진이 아닌 피아트사의 엔진을 탑재하고 출시되었기 때문에 페라리 이름으로 팔지않았기 때문. 그런데 이것도 애매한 게 디노 308모델의 경우 후기형부터는 페라리 마크를 붙여서 팔았다. 때문에 디노는 엄밀히는 페라리는 아니지만 사실상 페라리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엔초 페라리는 다른 의미로서의 슈퍼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의 회사 페라리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그 자신의 성격이 아주 불같아서 가는 곳마다 안티를 양산했기 때문. 한때 포드와 협력할 때 페라리는 레이싱에 집중하고 양산차 판매는 포드에게 맡긴다는 조항을 걸었으나 포드가 레이싱에 조금 개입하겠다는 말에[2] 조항을 깨버리고 미국인 주제에 무슨 슈퍼카를 만든다고 대놓고 디스를 하는 바람에 포드가 빡쳐서 결국 걸작 포드 GT가 태어난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일화가 2019년 영화 포드 V 페라리의 배경이다.
또한 트랙터 등 농업기계로 명성이 높았던 람보르기니의 대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에게는 트랙터나 만드는 주제에 하면서 무시하는 바람에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놓게 되었다. 람보르기니와 아주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60년대를 풍미했던 ISO(이소)[3]라는 같은 이탈리아 슈퍼카 회사가 설립된 계기 역시 제공했다.
따지고 보면 람보르기니의 걸작 슈퍼카들도 엔초의 영향으로 태어났고 슈퍼카 시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애초에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이는 슈퍼카 시장에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지 엔초의 어그로 덕분에 커졌다고 하는 건 선후관계가 바뀐 이야기다. 아무리 언플해봐야 슈퍼카의 수요가 없다면 람보르기니가 경쟁을 하든 말든 세간에서는 그들만의 리그 취급하고 말 것이다. 즉 수요가 있으니 어그로가 부각받는 거지 어그로 때문에 수요가 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엔초의 어그로가 없었더라도 수요가 늘어나면 그에 맞게 경쟁 브랜드도 자연히 나오는 법이다.
어쨌든 이런 일화가 여럿 있을 정도로 성격이 불같았고 오만해서 그의 언행이 경쟁사들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엔초 페라리의 말들이 시작점이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경쟁사들이 "저놈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라는 생각을 가지게끔 만든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서명은 항상 보라색 잉크를 채운 만년필로만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며,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줘 신비감과 위압감을 조성하기 위해서인지 본사에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을 무조건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또한 자가용 페라리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러 페라리 본사에 찾아갔을 때 이런 식으로 몇 시간동안 기다려서 그를 겨우 만나자마자 바로 심한 모욕을 듣고는 그대로 내쫒겼다고 한다.

[1] 실제로 외질은 엔초 페라리가 사망한 해에 태어났기에 우스갯소리로 외질의 전생이 아니냐는 말도있다.[2] 포드가 반대하면 해당 레이스에 못 나간다는 조항이 있는데, 사실상 본체를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레이싱 장인에게는 엄청난 모욕이나 다름없다. 페라리가 피꺼솟하는 게 당연하다.[3] 이 회사가 만든 대표적인 차종중에 하나가 BMW가 라이선스 생산했던 이세타라는 자동차다. BMW 이세타는 이소가 개발하여 3년 정도 판매했었지만, 정작 창업자인 렌조 리볼타가 직접 타보고는 못써먹을 쓰레기 같은 자동차라는 이유로 BMW에 이세타에 관련된 모든것들을 싹다 털어 넘겨 버린다. 이후로는 페라리를 위해 차를 개발하던 기술자가 이직하자 그 기술력과 쉐보레 V8엔진을 조합한 새 GT카를 만들었고, 이세타는 다들 잘 알다시피 BMW가 10년동안 신나게 팔아먹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