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후이먼

 


Chu Huy Mân
1913-2006
朱輝珉(주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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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베트남 및 베트남 인민군의 고위 지휘관이다. 보응우옌잡 사령관이나 반띠엔중 총참모장에 가렸지만, 베트남 인민군의 정치장교 총지휘관, 즉 군의 3인자로서, 압도적인 미군과 싸우는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의 사기와 전의를 유지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위 워 솔저스의 배경인 이아드랑 전투를 지휘하여 뒤늦게 알려졌다. 최종계급은 대장이며, 베트남 인민군의 총정치주임 및 정부 부주석을 맡았다.

2. 생애



2.1. 독립운동가


본명은 쭈반디우 (Chu Văn Điều) ). 쭈후이먼은 가명이며, 이외에도 독립운동을 위해 여러 가명을 썼다. 응에안 성 출신 1930년대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했고, 항불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당에서도 계속 승진하여 현급 지도자가 되었다.
이렇게 독립운동에 앞장선 결과 프랑스 식민정부에 4차례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43년 탈옥해서 계속 인도차이나 공산당일과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2.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5년 일제가 패방하자, 쭈후이먼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의 무장병력에 입대하여 본격적으로 군인이 되었다. (베트민과 공산당은 조금 다르다. 베트민은 공산당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비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있었다.) 쭈후이먼은 정치장교로서 군의 사상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1]
그는 사단급의 정치장교로 디엔비엔푸 전투에도 참가하여 프랑스 식민지배를 끝장내는데 공을 세웠다.

2.3. 라오스 혁명 지원


프랑스 식민당시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후에 독립된 국가별로 분당되었지만, 사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도차이나의 맏형격인 베트남 공산당은 라오스의 공산당에도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쭈후이먼은 라오스에 파견되어 라오스 혁명세력의 조직화를 원조했다.
1957년에는 소련의 프룬제 군사대학에 파견되어 1년간 연수를 받기도 했다. 1958년 베트남 인민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장성의 반열에 들었다. 당에서도 계속 승진하여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다시 1960년대 라오스에 다시 파견되어 라오스의 혁명세력인 빠텟 라오를 계속 원조했다.
1961년에는 제4 군관구 사령관 및 정치위원(정치장교)이 된다. 즉 지휘관과 정치위원을 겸임한 것.

2.4. 미국과의 대결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자, 정치장교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군관구 사령관을 맡아 미국과 대결하였다. 1965년 8월 B3지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이 되어 이아드랑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는 미국 및 북베트남 모두 승리를 주장하고 있고, 미국측은 2000년 자신들의 주장을 근거로 영화 위 워 솔저스를 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도 계속 승진하여 1974년에는 상장(계급)까지 이르렀다. 당시 북베트남군은 대장이 단 두명이었기 때문에, 그는 최고위급 지휘관 중의 한명이었다. 군 서열상 3위였다.
그는 주로 북베트남 정규군을 맡아서 국경지대에서 남베트남군을 견제해 묶어두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 틈에 베트콩 세력은 베트남 공화국을 전복하고, 결국 베트남은 통일된다.

2.5. 전후


베트남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기 때문에 전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77년 정치장교 최고위직인 총정치국 주임에 올랐고, 198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1년 국무위원회 부주석에 올라서 1986년까지 재임했으며 당내 서열 8위였다.
호치민 사후 이후 베트남 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던 레주언이 1986년 7월 사망하면서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쭈후이먼도 밀려나게 되었다. 베트남 인민군 당지부에서 당에 파견할 군대표 선거에서 낙선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원에서 해임되었고, 결국 1987년 총정치국 주임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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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쭈후이먼 대장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6년 사망했다.

3. 평가


일부 밀덕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지만, 공산국가에서 정치장교는 단순히 지휘관을 감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적에 대한 심리전을 실시할 뿐만 아니라 민정업무, 거기에 병사들의 전의고취 (즉, 혁명정신 주입) 사기유지까지 신경써야 하는 등, 여러가지 업무에 신경써야 하는데, 그는 군3인자로서 이런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베트남의 승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여기에 야전사령관으로도 재능이 있어서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미군과 정규전으로 맞붙기도 했다.
퇴역후 이아드랑 전투의 적장이었던 할 무어와 옛전장에서 만나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도 한다.

[1] 베트남이나 중국같은 경우 지휘관들도 대부분 공산주의자 혹은 그 동조자였기 때문에, 이들 나라의 정치장교들은 소련의 정치장교처럼 비당원을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사상 지도 및 병사들의 사기 유지의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