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룬제 군사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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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룬제 군사대학

Военная академия им. М. В. Фрунзе / Frunze Military Academy
1. 개요
2. 역사
3. 특이점
5. 기타


1. 개요


1918년에 설립된 소련군, 러시아군공군공수부대, 전략로켓군 등 전 군의 대위, 소령장교의 3년제 고등 교육기관으로 현재는 러시아 합동군사지휘참모대학교[1]로 명칭이 변경되었다.(직역 시 러시아 군사 종합 아카데미(Общевойсковая академия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2. 역사


적백내전때 소련군의 총사령관이자 소련군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미하일 프룬제의 이름을 땄다. 소련의 합동군사대학으로 생각하면 된다. 엄밀히 말해서는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32년에 개교했지만 공산혁명 이후 붙여진 다섯 번째 이름인 프룬제가 제일 잘 알려져 있다.
1998년에 말리놉스키 기갑 군사학교와 통합되어 러시아 군사 종합 아카데미(Общевойсковая академия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로 개편되었다.

3. 특이점


소련 시절 북한을 비롯한 소련의 우방국이나 위성국의 장교들도 유학이 가능하며, 북한 정계와 군부의 중요 인물 중에는 프룬제 출신이 적잖이 있다. 오극렬이 바로 프룬제 대학 출신으로, 여기에 유학을 갔다 온 북한 군인들은 엘리트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공산주의 소련 붕괴와 자본주의 러시아 연방의 등장으로 현재는 흐지부지되고 있다.
정부가 러시아로 바뀌고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지휘참모대학교로 변경되면서 CIS국가와 몽골, 시리아, 인도 같은 러시아의 우방국 뿐만아니라 타 국가에도 위탁교육 프로그램을 개방했다. 그래서 현재는 북한군이 아니라 한국군 장교들이 가서 연수를 받고 있다. 한국군 장교들은 가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방공 분야 만점 졸업 사례 1사례2 잠수함 분야 최우수 졸업 사례
독소전쟁에 관한 귀중한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제까지는 재학중인 장교들과 교관들만 열람할 수 있었지만 소련 붕괴 후 차차 자료를 공개해 학자들의 군침을 흘리게 하고 있다.

4.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1991년에 이 프룬제 출신 북한 장교들이 김일성김정일을 사열식에서 땅크로 날려버리려 시도했다는 썰이 있다. 해외유학경험을 통해서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던 프룬제 출신 엘리트 장교그룹[2]이 구 소련과 중국,동구권의 개혁개방을 보고서 우리도 변해야 한다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는데, 이후 이 사건을 빌미로 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든 프룬제 출신자들이 대규모로 숙청되기도 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해당 프룬제 관련자들을 대한 대대적인 숙청 이후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군 인사권까지 거머쥐는 동시에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올라서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
다만 이 쿠데타썰 자체가 김정일이 군을 장악하기 위해서 과대포장, 조작한 것이란 썰도 있었다. 그러나 전 로동당 간부 김일철(가명)이 탈북하면서 그동안 한국 내에서 소문만 무성하던 프룬제파 장교들의 쿠데타가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북한 쿠데타 모의 ‘프룬제 사건’ 실체 최초공개
해당 쿠데타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북한 내에 제 2의 소련파를 육성하기 위하여 소련에 있는 이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KGB의 공작과[3] 김일성이 내준 장학금[4]과 유학생들의 장사로 인해 소련에서 유복한 삶을 살던 엘리트 유학파 장교들은, 북한에 돌아와 매우 열악한 처우를 받게 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어 1950~60년대 소련에서 유학했던 1세대 유학생들 및 같은 유학생들끼리 똘똘 뭉쳐 러시아말로 대화하는 등 이너 서클을 구성했다. 그리고 1991년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 직을 물려주자 이에 크게 반발한 이들은, 1993년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일본의 천황과 같은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에 주체사상으로 왜곡된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한 후 '''남한을 침공할 계획이었다 한다.''' 프룬제 유학파들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남한에선 이들이 개혁개방을 지지하지 않겠냐는 피상적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엔 이들도 김씨왕조만큼이나 쓰레기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버린 셈이다.
그런데 소련이 붕괴되면서 KGB 간부들이 북한에 이들 친소파 장교들의 정보를 넘겨버리면서 김정일이 이들의 이너서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보위부에게 수사를 명령하여 쿠데타 전모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쿠데타 거사일을 뒤로 미룬 상태였던 이들 친소파 장교들은 1993년 기습적인 체포작전으로 줄줄이 끌려갔고, 200명의 유학파 장교들이 총살되었다. 한때 군의 40%를 장악하였던 소련 유학파 장교세력은 삽시간에 일소되었다. 이후 북한은 단 한번도 해외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았다.

5. 기타



[1] 국군에서는 지휘참모대학으로 부른다.#[2] 당시 소련으로 해외유학을 간 군 간부들은 그야말로 혁명 유가족으로 취급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장 주모자 그룹을 보더라도 최룡해의 매부라든지 김일성의 외가친척이 있기도 했었다.[3] 이들에게 KGB 소속의 백인 미녀들과 술을 연일 제공하며 구슬렀다고 한다.[4] 앞서 말했듯 이들은 북한에서는 엘리트 집안 사람들이고 이들에 대한 김일성의 관심이 남달라서 지원 수준이 꽤 좋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