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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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蔡鍔
간체
蔡锷
한국식 독음
채악
영문
Cai E
생몰년도
1882년 12월 19일 ~ 1916년 11월 8일

송파(松坡)
1. 개요
2. 생애


1. 개요


'''싫어하는 것에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애통해하겠는가?'''

- 량치차오

청말민초의 군인이자 혁명가. 초명은 건인(艮寅)이다. 자는 쑹포(松坡)다.

2. 생애


호남성 바오칭(지금의 사오양시) 출생.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6살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13살에 과기시험에 응시하다가 감독관의 인정을 받아 현학(縣校)의 학생이 되었다가 이후 16살에 시무학당에서 중국 최고의 지식인중 한명인 량치차오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량치차오가 망명하자 그 역시 1899년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1년정도 공부를 하다가 탕차이창의 자립군 봉기에 참가하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이름도 차이어로 개명한다. 이후 량치차오의 후원으로 1903년 육군사관학교의 초급단계인 세이조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하고 1904년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 기병과 3기를 졸업하게 된다. 이후 광시성으로 돌아와 여러 군사직을 맡다가 1911년 윈난총독 리징시의 초빙을 받아 운남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된다. 이때 주더와 스승과 제자 관계로 처음 만나게 된다.
이후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봉기에 호응해 주페이더, 주더, 양시민 등 제자들을 이끌고 진윈펑이 지휘하는 운남군을 격퇴하여 윈난지방을 장악하고 치안을 안정시키고 사천으로 진격, 4개월 가량 전투를 벌여 사천을 해방시킨다. 1912년 청조가 몰락하고 위안스카이가 임시 대총통이 된 이후 차이어는 운남성 총독으로 취임하고 윈난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고 군대를 정예병으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차이어가 자신에 대한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1913년 차이어를 육군편역처 부총재로 초빙하겠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으로 소환한다. 만일 명령을 거부하면 위안스카이의 군대에 운남성이 짓밟힐꺼라 예상했던 그는 건강을 염려하는 주변을 뒤로 하고 운남도독 자리를 탕지야오에게 물려준 후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으나 차이어는 위안스카이의 고위관직을 모두 거부하고 경계국 독판이라는 한직만을 담당했다.
1915년 8월 3일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오를려고 하자 스승인 량치차오와 상의해 위안스카이를 타도하기로 결의한다. 이후 겉으로는 량치차오를 비웃고 황제제에 동의하는듯한 행동을 취하다가 인후염을 빌미로[1], 12월 2일 휴가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한 국민당 지도자들을 만난뒤에 일본제국령 타이완, 하노이를 거쳐 운남성으로 귀환한다. 차이어는 사람을 보내 주더에게 믿을수 있을만한 장교들을 모아 자신이 있는곳으로 오라고 지시하였고 주더가 공화파 장교들을 모아오자 차이어는 전국적인 봉기계획을 설명하였다.
먼저 운남군을 호국군(護國軍)으로 개명하고, 차이어는 사천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호국군 제1군을 이끌고 위안스카이의 군단이 버티고 있는 사천으로 진격, 동시에 다른 사단들은 광서성과 광시성, 귀주성으로 진격하고 호국군이 버티는동안 공화파 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몸이 심각하게 악화된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만류했었지만 기왕 죽을 목숨이라면 중국의 공화제를 위해 바치겠다며 원정에 참여한다.
이후 차이어는 탕지야오, 리례쥔, 량치차오 등을 규합, 탕지야오의 명의로 제제 취소와 량스이, 돤즈구이를 비롯한 제제파 처벌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위안스카이에게 보내고 위안스카이가 이를 묵살하자 2급 사병 3~5천명만을 이끌고 쓰촨성 류저우시에서 8만명의 북양군과 대치하였다. 상황이 너무 열약해 수면은 3시간도 취하지 못하고 밥은 모래가 섞인 것이었지만 끝까지 밀려나지 않았다. 결국 3개월을 버티는 동안 량치차오가 광시성의 독립을 선언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상황을 반전시켜 호국전쟁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후 위안스카이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이 남중국 전역에서 발생. 버티지 못한 위안스카이는 결국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했다.
위안스카이가 죽고난후 얼마 있지 않아 북양정부는 1916년 7월 21일 차이어에게 사천총독과 지사의 직책을 받았지만 8월 5일 자리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요양가게 된다. 일본으로 요양가면서도 주더에게

"일본으로 가는건 쓸데없는 짓이오. 내가 두려운건 죽는게 아니라 중국의 장래로, 나는 사천성을 공화파의 든든한 기지로 만들고, 또 호국군을 화남 일대의 쑨원과 제휴하여 북양군벌에 대항할수 있기를 바라오."

라고 말하며 중국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결국 일본으로 요양간뒤 2개월 후인 11월 8일, 차이어는 일본 후쿠오카의과대학병원에서 34세의 일기로 사망하였고 중화민국 최초로 국장으로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
한편 그의 죽음을 슬퍼한 량치차오는 그의 이름을 딴 쑹포도서관을 건립했다. 쑹포도서관은 1949년 베이핑도서관에 흡수되어 현재 중국국가도서관의 전신이 되었다.

[1] 사실 정말로 앓던 병이었기에 위안스카이도 베이징에서 나가는걸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