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난성

 


[image] '''중화인민공화국
湖南省(Húnán Shěng'''
후난성 | Hunan Province

[image]

'''성정부 소재지'''
창사시 톈신구 샹푸시로 8
(长沙市 天新区 湘府西路 3)
'''지역'''
중난
'''면적'''
211,829km²
'''하위 행정구역'''
13지급시 1자치주 35구 17현급시 63현 17자치현
'''인구'''
6,860만명
'''인구밀도'''
319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두자하오(杜家毫)
'''성장'''
쉬다저(许达哲)
'''HDI'''
0.744 (2017)
'''GRDP'''
$5,594억 7,924만 (2019)
'''1인당 GRDP'''
$8,341 (2019)
'''행정구역 약칭'''
'''湘'''
'''ISO 3166-2'''
'''CN-HN'''
홈페이지
1. 개요
2. 지형 및 기후
3. 산업과 교통
4. 역사
5. 교육
7. 출신 인물
7.1. 고대
7.2. 중세
7.3. 근대
7.4. 현대
7.4.1. 정계
7.4.2. 연예인


1. 개요


후난성(호남성, 湖南省)은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이다. 면적은 211,800km²로 한반도보다 약간 작고,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약 68,800,000명이다.[1] 성도(省都)는 창사(长沙)다. 양쯔강(장강)과 동정호의 남안 방면이며 호남성이라는 명칭도 동정호 남쪽에 있어 호남성이다. 동쪽으로는 장시성, 서쪽으로는 구이저우성, 남서쪽으로는 광시 좡족 자치구, 남쪽으로는 광둥성, 북쪽으로는 후베이성과 인접한다.
2014년 기준 67,370,000명의 인구가 있다. 한족이 90%지만, 소수민족도 적지 않게 존재하여 묘족(3%), 투자족(4%) 등의 남방계 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사천과 더불어 매운 요리로 유명하다.[2] 자세한 것은 호남 요리 문서 참고.
성의 약자는 상(湘, Xiāng)으로 이 지역 중심부를 흐르는 샹장 강(湘江, 상강)에서 유래했다. 초나라에서 비롯된 '''초(楚)'''로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아울러서 말하기도 하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후베이성을 가리킬 때 쓰인다. 후베이성은 형초(荆楚), 후난 성은 상초(湘楚)라고 부른다.

2. 지형 및 기후


[image]
지도 위쪽에 강이 모이는 복잡한 곳이 바로 동정호이다.
중국 내의 대표적인 아열대 지역이다. 1월의 평균기온은 5~9°C이며, 7월의 평균기온은 27~30°C, 연평균기온은 16~19°C이다. 연간 평균 강수량은 1,200~1,700 mm. 장강의 남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면에는 산맥과 구릉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로부터 동정호(둥팅호)가 매우 유명한데. 양쯔강의 지류인 샹강, 쯔강, 위안강, 리쉐이강이 동정호에서 만난다. 이 호수는 엄청나게 큰데, '''서울시 4.5배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3]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했고, 이전에는 더 컸으나 마오쩌둥 시절 대약진 운동 때 농지를 늘린답시고 실시한 무분별한 간척사업 때문에 더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경관이 상당히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매우 크고 아름답다.

3. 산업과 교통


한국의 호남과 마찬가지로 곡창지대다. 전통적으로 곡물, 면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여러 기호식품도 많이 생산되었는데 대황, 사향, 꿀, 담배, 모시 등이 재배되었다. 동정호의 어업도 유명했다. 중국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곳도 공업화가 진행되어 철강, 기계, 전자류의 산업이 육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경제가 발달한 연해지구보다는 소득이 떨어지는 편. 연간 총 GDP는 2,961달러로 중국 평균보다 적다.
대한민국에서는 인천 - 창사 직항이 있다. 장자제로 가는 비행기편은 주로 지방공항 쪽에 있으며, 정기편이 다니는 김해국제공항 외에는 모두 차터다.
중국 전체적으로 경제력과 인구, 위상에 비해 성급 미디어 기업인 후난 방송영상 그룹의 후난위성TV가 매우 유명하다. 후난성보다 인구나 경제 규모가 훨씬 큰 저장, 장쑤, 베이징, 산둥, 상하이 TV보다 더 인기가 많거나 1~2위를 항상 겨루는 수준. 후난 성의 성도인 창사의 인구가 중국에선 중급 도시인 700만명 규모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적이다. 후난위성TV가 보유한 MANGOTV라는 IPTV는 중국 내 5대 IPTV로 분류 되는데, 다른 IPTV 보유사들이 인터넷 기업들인 텐센트, 알리바바, 바이두, LE ECO인걸 감안한다면 놀라운 성과다. 2000년대 부터 한류 컨텐츠 수입에 가장 열성적인 방송사 였으며, 성省 정부에서 성 단위 산업으로 방송정책을 육성하고 지원해서 제작문화나 검열에서 매우 자유로운 편이다. 실제 후난위성 TV 방송을 보면 중국 TV 특유의 교육적이거나 계도적 분위기, 감동 쥐어 짜내기보다는 시청자가 느끼는 재미에 초점을 맞추고, 중국에서 금기시할 법한 소재들도 거리낌 없이 다루는 편이다. 쌀집아저씨로 유명한 김영희 PD도 이곳에서 예능프로를 만들고 있고 성과가 좋다고. 관련 기사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등이 후난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만큼 관련 유적지들이 많기 때문에 매년 수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후난 성 일대에 관광하러 떠나기도 하며 따라서 관광산업으로 벌어먹는 곳도 상당수 있다. 그래서 마오쩌둥을 재물신으로 섬기는 경우도 있다고. [4] 또한 한국인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가는 장가계가 후난성에 있다. 장가계나 창사 시의 관광코스에서 아예 한국 원화가 거리낌없이 사용될 정도.

4. 역사


춘추전국시대 때까지는 정통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다. 원래는 여러 남방 민족의 영역으로 묘족, 투자족, 둥족, 야오족도 여기 살았다. 후베이성 지역에서 발원한 초나라가 이곳을 병탄하면서 중국 초나라 영역으로 들어왔다. 사실 후베이도 관중, 중원에 비하면 변방 취급이었고 초나라 사람도 반쯤 중국인 반쯤 남만 취급이었지만 여기는 초나라 땅 안에서도 더욱더 변방 취급이었다. 하지만 장강 이남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곳은 남북조시대까지도 거의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남방영역이었다. 항우초의제를 쫓아낼 때도 이곳으로 유배보내듯 보내버렸다.
삼국시대에는 형주 남부에 속했다. 적벽대전이후, 형주 공방전에서 유비군이 금선, 한현, 조범, 유도 4태수를 토벌하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남형주 4군 장사, 영령, 무릉, 계양은 모두 이곳에 있거나 혹은 이곳을 포함한 곳이다. 그리고 삼국지에서 사마가가 왕으로 나오는 무릉만 같은 남방 야만족들이 바로 이곳을 거점으로 했다.
남북조시대에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장강 북방을 점유하자 이곳에 피난온 한족들에 의해 이곳도 중국화가 점점 진행되기 시작했다. 당나라 멸망후 5대10국시절에 남초(또는 마초(馬楚))국이 이곳을 중심으로 세워졌다가 단명하였다.
원나라 시절에 성(省)이 설치되면서 이곳은 지금의 후베이성, 광시 좡족 자치구 등과 합쳐 호광성이라고 했고, 명나라 대에 광시성이 분리되어 후베이성-후난성 일대로 축소되었고, 1723년 후광성이 후베이성과 후난성으로 분리되었다.
남북조시대 이래 한족이 주류가 되었으나, 남방계 민족과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명나라와 청나라시대에 대대적인 묘족의 반란이 있었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특히 명나라 시기에서는 포로로 잡힌 묘족 남자아이들 수천~수만명을 거세하여 내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난 시절에서는 이곳의 의병으로 구성된 상군이 태평천국 진압에서 대활약을 하고, 이곳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증국번, 좌종당이 청나라의 실세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탄옌카이가 정권을 잡았으나 계축전쟁호국전쟁, 호법전쟁을 계기로 토착 군벌인 상계군벌을 빼고도 북양군벌, 계계군벌, 월계군벌 등이 모두 개입하여 깽판을 치다가 1921년에 우페이푸 휘하의 자오헝티가 정권을 잡았다. 1923년 탄옌카이자오헝티 사이에 호남성의 패권을 두고 담조전쟁이 일어났으나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은 자오헝티가 승리했다. 이때 담조전쟁에서 활약하여 세력을 키운 탕성즈가 1926년 자오헝티를 몰아내고 후난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섭개흠의 반격으로 축출되었다. 탕성즈는 중국 국민당에 합류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8군 사령관 겸 전선 총지휘로 임명된 탕성즈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북벌군을 거느리고 호남을 점령해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이후 우한 국민정부의 거점이 되었다가 영한합작 이후 난징 국민정부가 지배했다. 탕성즈는 안하무인으로 나대다가 국민정부에게 토벌되었고 이후 호남군벌 허젠 등이 이곳에서 실력자로 군림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탕성즈를 토벌했던 계계군벌이 위세를 떨쳤으나 장제스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루디핑, 담도원 등 상계군벌들을 지원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계계군벌이 호남 사건을 일으키면서 1차 장계전쟁이 터지게 된다.
마오쩌둥의 고향이자 1927년 9월 9일 마오쩌둥추수폭동을 일으켜 최초로 봉기한 곳이기 때문에 공산당 입장에서도 중요하다. 마오쩌둥은 봉기 후 참패했지만[5], 패잔병을 이끌고 산악지대인 후난성-장시성 경계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고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호남성 바로 아래인 장시성의 루이진(서금)에 본부를 둔 마오쩌둥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갈수록 성장하였으나,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에 패해 공산군은 중국을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면서 산시 성으로 도피하였고, 이것이 대장정이다. 당연하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로는 관광지화가 진행되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고, 개혁개방 이후로는 아예 마오쩌둥 기념품이나 요리를 파는 식당들도 많이 생겨나서 샤오산이나 징강산 일대에서 관광업으로 벌어먹고 살 정도이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일본군이 만주에서 버마까지 보급로를 뚫으려는 대륙 타통 작전을 실시하여 창더(상덕)가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국공내전 중에는 호남성 정부주석 청첸 등 상계군벌들이 장사기의를 일으켜 호남을 마오쩌둥에게 바치면서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5. 교육


호남대학교라고 있다. 한국에도 동명의 대학이 있지만, 이쪽은 Hunan이고 한국은 Honam이다.

6. 요리




7. 출신 인물



7.1. 고대



  • 마은- 5대 10국 중 하나인 남초의 건국자

7.2. 중세



7.3. 근대



7.4. 현대



7.4.1. 정계



7.4.2. 연예인



[1] 면적 242,4950km²에 인구 66,600,000명인 영국과 비슷한 규모이다.[2] 후난성 출신인 마오쩌둥도 집권 후에도 고향음식을 자주 먹었던 만큼 평소에 고추나 매운 요리를 자주 즐겨먹었다고 한다.[3] 둥팅호의 면적은 약 2800km2.[4] 그런데 사실 마오쩌둥은 공산화 초기에는 중국대륙을 떠나지 않고 남은 자본가들에게 공산당을 지지하면 일단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어느정도 편의를 봐주었고 그래서 남은 자본가 대다수가 공산당에 협력하면서 경영권을 유지했다. 나중에 문화대혁명으로 자본가 상당수가 홍위병들에게 반동이라며 때려잡혔을 뿐이지(...) 여하간 이러한 자본가 계층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나중에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때 이들이 가장 먼저 개혁개방의 수혜계층이 되었다.[5] 애초에 러시아 혁명의 전훈에 집착하여 도시 공격에 집착한 취추바이 노선의 실패라고 보는 것이 맞다.[6] 어머니도 장가계 출신이라고 하며, 아버지는 장가계 옆의 샹시 출신이라고 한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