돤즈구이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안휘군벌의 일원이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69년 안휘성 합비에서 태어났다. 1886년 천진무비학당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일본 제국에 유학을 가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1892년 겨울에 귀국하여 신건육군에 참여, 위안스카이가 설립한 육군 강무당 교관을 지냈는데 아첨에 능하여 위안스카이의 총애를 받아 도원이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명에 따라 쉬스창과 아이신기오로 짜이전을 접대하여 위안스카이를 동북삼성 총독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서태후가 반대하여 쉬스창이 동북삼성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돤즈구이는 총리대신인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에게 무려 10만원의 뇌물을 바쳐 흑룡강순무 대리가 되었다. 이때의 인사는 위안스카이의 심복 탕사오이가 봉천순무가 되는 등 위안스카이 파벌의 약진이 눈에 띄어 논란이 된 인사였는데 특히 논란이 된 것은 돤즈구이였다. 일개 도원에서 몇단계를 넘어 순무가 되는 것은 파격적인 승진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반대가 많았으나 서태후는 경친왕의 의견대로 4월 20일 돤즈구이를 흑룡강순무로 삼았다. 하지만 천춘쉬안이 돤즈구이가 조정에 많은 뇌물을 뿌렸던 것을 폭로하여 얼마 안가 해임당하고 정덕전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신임은 유지되었기 때문에 관대, 협통, 북양육군독판공소참모, 참모처총판, 육군제3진 통제를 역임했고 위안스카이가 해임된 이후 왕스전, 돤치루이, 장쉰, 육건장, 차오쿤, 뇌진춘, 장사옥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를 방문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위안스카이가 호광총독으로 복직되자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이 된 이후 무위우군우익익장, 호광총독서리가 되었다. 1912년 공위군 총사령, 차하얼 도통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 호북성 군무사 부장 장전우를 체포하여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에 일조했다.
1913년 육군상장에 승진하여 육군 제1군단장을 지냈다. 같은해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1군단장 겸 강서선무사, 안휘선무사가 되어 혁명군을 진압했다. 계축전쟁 진압 이후 뇌진춘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즉위 의사가 없는지를 계속 떠보았다.
2.2. 홍헌제제와 호국전쟁
1914년 창무 상장군에 임명되었고 호북군무 서리를 맡았다. 뇌진춘, 양사기, 장진방, 원내관, 하수전 등과 함께 지속적으로 제제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장석란이 호북군무가 되자 1915년 8월 진무 상장군 겸 봉천 순안사에 임명되어 동북삼성을 총괄하게 되었다. 돤즈구이는 란동에 수행원들을 두고 소수의 인원만 두고 봉천에 부임했다. 당시 봉천에서는 훗날 만주를 지배하게 되는 장쭤린이 27사단장을 지내고 있었는데 돤즈구이는 장쭤린의 27사단 사령부에 기거하며 장쭤린에 대한 신임을 표했다. 헌데 야심이 많은 장쭤린은 봉천장군이 되고 싶어 하고 있었고 전임 장군 장석란을 압박하여 퇴출시킨 것도 사실 장쭤린의 소행이었다. 하지만 장쭤린은 돤즈구이가 북양군벌의 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돤즈구이에 거스르지 않고 돤즈구이를 극진히 모시며 귀한 골동품을 구해 돤즈구이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등 충성을 바치는 것처럼 행동했다. 돤즈구이는 학정을 일삼아 많은 재물을 수탈했다.
그러던 중 1915년 말엽부터 위안스카이가 제제운동을 벌이며 황제 자리에 야욕을 부렸다. 돤즈구이는 각성의 지방관들을 부추겨 제제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봉천에서 위안스카이의 제제를 지원했는데 장쭤린은 이에 호응하여 봉천 국민 대표대회를 열어 국체 문제를 표결에 부쳤고 군대를 동원한 부정선거로 군주제 찬성을 만장일치로 끌어냈다. 1916년 1월 8일, 돤즈구이가 광동의 용제광 등 24명의 장군들과 연명으로 위안스카이의 즉위를 촉구하는 밀서를 바칠 때 장쭤린 역시 끼어들어 부추겼다. 이에 고무된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했다. 이때 돤즈구이는 1등 공작에 봉해졌다.
허나 운남성에서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등이 거병하여 돤즈구이, 량스이, 뇌진춘, 장진방, 원내관 등 제제파를 처벌하고 공화국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며 호국전쟁을 일으켰다. 돤즈구이는 장쉰, 펑궈장, 리춘, 니쓰충, 용제광, 루룽팅 등과 연명하여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으나 장쭤린이 그의 뒤통수를 갈길 준비를 해놓은 것은 모르고 있었다. 호국군의 기세가 자꾸 강성해지자 위안스카이는 봉천의 장쭤린에게 출병을 명했는데 장쭤린은 출병을 핑계로 군 장비를 거두어들인 후 태도를 바꾸어 봉인치봉을 내걸고 출병하지 않았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했으나 각성이 독립을 선포하고 위안스카이의 하야를 요구하여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장쭤린은 이 틈을 노려 돤즈구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28사단장 펑더린과 결탁하여 돤즈구이를 몰아내기로 했다.
장쭤린은 병사들을 배치하여 공포를 쏘게 했고 돤즈구이에게 펑더린이 황제제도를 옹호한 괴수 돤즈구이를 처단하겠다고 거병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렸다. 놀라 돤즈구이에게 장쭤린이 피하라고 권하자 돤즈구이는 공금과 군장비를 가지고 텐진으로 달아났다. 장쭤린은 돤즈구이가 자신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54여단장 손열신에게 1개 부대를 인솔해 그를 호위하게 했고 동시에 28사단 소속 급금순 여단에게 구방자 역에서 돤즈구이가 탄 열차를 정차시키도록 했다. 부대장 구은영이 열차에 올라타 돤즈구이에게 봉천 인민 명의의 전문을 읽어주며 위협했다.풍:"돤즈구이는 청조의 마지막 남은 관리입니다. 그가 탐관오리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동삼성에서 황제 제도를 옹호하는 무리들의 괴수입니다. 여전히 봉천인의 머리 위에 있으니 마땅히 몰아내야 합니다."
장:"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풍:"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28사단에서 악역을 맡고 그와 정면으로 부딪히겠습니다. 그러면 27사단은 도와주는 척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가 으근히 그의 죄상을 들춰내어 그가 스스로 놀라 도망가도록 하면 됩니다. 이런 연극은 병사 하나 다치는 것 없으니 얼마나 멋진 꾀입니까?"
장:"이 기회에 모든 사람들한테 우리 봉천인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에 겁에 질린 돤즈구이는 돈과 장비를 모두 구은영에게 주고 자신의 몸만 가지고 달아나야 했다. 이 모든 것이 펑더린의 소행으로 여긴 돤즈구이는 위안스카이에게 장쭤린을 추천하였고 위안스카이는 1916년 4월 22일 장쭤린을 봉천 성무 장군 겸 봉천순안사로 임명하여 봉천의 최고 실력자로 만들어주었다.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죽을 때 임종을 지켰다.
2.3. 안직전쟁과 말년
이후 돤즈구이는 안휘군벌에 참여하여 돤치루이의 심복이 되었고 1917년 부원지쟁을 조정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아온 장쉰을 수행하여 베이징에 들어갔으나 장쉰이 난데없이 선통제를 복위하고 장훈복벽을 선포하자 돤치루이의 토역군에 참여하여 장쉰의 변자군을 진압했다. 1917년 12월, 왕스전 내각 하에서 육군총장에 임명되었으며 돤치루이 내각이 복귀하자 육군총장직을 유임했다. 1919년 1월, 경기위수총사령에 임명되면서 육군총장직을 진윈펑에게 물려주고 하야했다. 1920년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돤치루이는 정국군을 조직, 7월 8일 돤즈구이를 경사계엄총사령(京師戒嚴總司令)에 임명했다.
돤즈구이는 취퉁펑과 함께 서로군을 지휘, 정국군 전적 총지휘관으로 직예파에 저항했으나 장쭤린의 봉천군이 관내로 진출한 이후 우페이푸가 7월 17일 환군 1사단을 격파하고 15사단의 항복을 받아내자 2로군 총사령관 취퉁펑이 포로가 되었고 돤즈구이는 베이징으로 달아나 일본 공사관에 몸을 의탁했다. 이로써 취퉁펑이 육성했던 변방군 서로군 3개 사단이 모조리 궤멸당했다. 돤치루이 하야 이후 체포령이 하달되었으나 1922년 량스이 내각에 의해 사면되었다.
1924년 11월 돤치루이 임시집정 내각이 출범하고 1925년 2월부터 선후회의가 개최되는 와중에 1925년 3월 12일 톈진에서 병사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베이징에서 쑨원이 간암으로 별세했다.
3.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
4. 관련 문서
- 신해혁명
-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안직전쟁
- 1차 직봉전쟁
- 회선 사건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북경정변
- 핍궁사건
- 제노전쟁
- 선후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