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더
1. 소개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실질적인 창건자. 마오쩌둥 못지 않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2. 생애
2.1. 초기
원래는 한학을 공부하던 신사였고 향시에도 급제한 거인이었으나, 서양학문에 동경을 품고 청두사범학교에서 공부해 체육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정세가 심상치 않자 운남의 쿤밍강무학당[1] 에 들어가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군인이 되었다.[2] 이후 신해혁명이 터지자 차이어[3] 휘하의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차이어 휘하로 호국군에 참가해 그 능력을 인정받아 운남군 소장까지 진급한다.
주더는 당시의 많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편중독에다가 많은 첩을 거느린 구시대적 인물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참혹한 농민의 처지에 동정심을 느껴 다른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이후 아편도 끊고 모든 지위와 재산을 버린 채 공부를 하기 위해 1922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독일의 괴팅겐에서 유학하며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으며 황포군관학교 교육장 덩옌다 등과도 교류했으나 1925년 중국인 유학생들의 소요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저우언라이의 추천을 받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독일에서 추방된 후 소련에 가서 군사학을 잠시 공부하다가 1926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주더의 귀국 전인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면서, 주더는 국민혁명군의 지휘관이 되어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하였다.
2.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1927년 1월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를 배제한 채 우한(무창)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1927년 4월 국민혁명군의 상하이 점령 직후 장제스는 국민당내의 공산당원을 학살하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벌여 국공합작의 붕괴를 선언했다. 주더도 체포되었으나 요리사를 가장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4] 이때 임신 중이던 아내 오약란(伍若兰)이 국민당 정부군에게 붙잡혀 사형당한다. 1927년 국공결렬이 일어나고 중국 공산당이 취추바이 노선에 따라 무장폭동을 준비하자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에 참여했지만 패주했다. 이후 유격전을 벌이면서 1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1927년 11월, 마오쩌둥이 정강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고 휘하의 마오쩌탄을 파견하여 마오쩌둥과 접촉하였다.
1928년 4월,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서 마오쩌둥이 추수폭동 이후에 점거한 정강산(井岡山)[5] 해방구에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합류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공산당군은 주마오준(朱毛軍)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오는 이론적인 전략전술론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공산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주더가 맡았다[6] . 그의 지휘가 탁월했기 때문에 "축지법을 한다", "도술을 부린다"라는 소문도 생겨났다고. 그리하여 4차례에 걸친 국민당군의 토벌에 대해 번번히 대승리하고, 주마오준은 15만까지 성장하였다.
이후 정강산 소비에트는 홍군이 대군이 되어 장기적 항전을 하기엔 좁았으므로 주마오준은 루이진으로 근거지를 옮겨 강서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중앙 소비에트라고도 불린 이 강서 소비에트는 창사 폭동 이후 국민정부의 토벌대상이 되었으나 1930년 12월 제1차 초공작전의 격퇴를 시작으로 1931년 제2차 초공작전, 제3차 초공작전도 격퇴하여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혁명의 노선 문제를 놓고 공세적인 중심 도시 공세 전략을 주장한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상하이 임시 당중앙 및 코민테른 고문 오토 브라운과 유격전을 주장한 마오쩌둥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결국 마오쩌둥은 루이진으로 이동한 당중앙에게 숙청당했다. 당중앙은 주더를 총사령관으로, 저우언라이를 총정치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오토 브라운이 잡고 있었다. 제4차 초공작전까지는 열하사변의 발생 덕분에 넘길 수 있었으나 외부 사정이 정리된 후 한스 폰 젝트를 비롯한 독일 고문들의 지도를 받은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결국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이 때문에 공산군은 중국을 반 바퀴 돌아 서북쪽의 오지로 도피하였고, 이를 대장정이라고 한다. 이 대장정 기간 중인 1935년 공산당 지도부들이 모두 참여한 '''준의 전원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주도권을 회복하였다. 주더는 대장정 중 장궈타오를 따라가기도 하였으나[7] 결국 마오쩌둥과 합류한다.
한편 주더는 전처를 잃은 후 대장정 중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여성 당원 캉커칭(康克淸)과 재혼하여, 1976년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둘째 부인 캉커칭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2.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이후 주더는 이미 나이가 60대였기 때문에 일선 야전지휘는 하지 않았지만, 공산당군을 총지휘하면서 항일전쟁의 유격전이나 제2차 국공내전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1955년 인민해방군에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10대 개국원수 중 서열이 1위였다(2위가 펑더화이, 3위가 린뱌오).
1949년 중공정권이 창립되었을 때 이미 60대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정치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다.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마오쩌둥에 순순히 따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펑더화이, 린뱌오, 허룽과 같은 다른 원수들보다 험한 꼴은 덜 보았지만 1959년 루산회의에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를 비판한 펑더화이가 실각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언제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들이라고 믿겠느냐."라고 하는 등 마오쩌둥의 매서운 숙청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치자 주더와 같은 명망높은 원로조차 무사하지 못했다. 조반파 홍위병들은 주더의 과거 전력을 들먹이며 그를 군벌 찌끄러기라고 마구 욕하였고 1967년 공안부장 셰푸즈가 주도한 대규모 조사는 주더가 1927년 난창 폭동 실패 이후 국민당에 투항한 반역자라고 고발했으며 주더가 2월 역류로 실각한 원수들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한 것을 트집잡아 마구 비난하며 "일관되게 마오 주석을 반대한 야심가이자 황제를 꿈꾸는 자"라고 공격했다. 심지어 정강산 투쟁 당시의 주더의 역할을 삭제하고 사실 이것을 린뱌오가 한 것이라고 하는 역사왜곡이 자행되기도 했다. 그나마 주더를 반역자로 몰려는 시도는 마오쩌둥조차 황당한 소리라 여겨 불발되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베이징 위수사령관 푸충비로부터 주더를 타도하자는 대자보가 붙어있다는 말을 듣고 주더와 자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면서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1974년 펑더화이가 끝내 숨지고 그가 죽기 전 마오쩌둥과 주더에게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주더는 "너희들은 왜 내가 펑라오쭝을 보지 못하게 했느냐? 죽어가는 사람이 무엇을 하겠느냐? 무엇이 두려웠느냐?"라고 울부짖었다.
그나마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에게 정책 철회를 요구하다 실각당해 조리돌림당해 죽은 펑더화이나 허룽, 마오쩌둥 암살을 계획하다 실패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은 린뱌오보다야 말할 것도 없고 2월 역류로 고생한 천이,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보다 곱게 살았고 1976년 마오가 사망하기 두 달 전에 사망했다. 향년 91세. 사망 직전, 저우언라이의 시신 앞에 오만불손하게 구는 장칭을 보고 참다 못해서 "당신은 인간도 아니다!"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3. 기타
중국 통일을 위한 패권전쟁에서 군사 부문의 실질적인 지휘를 담당했고, 통일 이후에도 다른 개국공신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숙청을 겪지 않고 원만히 살았다는 점에서 초한대전 및 전한시대의 조참과 종종 비교된다.
펑더화이를 동생처럼 아끼고 친한 사이었지만 그의 힘으론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받는 펑더화이를 숙청의 손아귀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의 아들(즉, 주더에게는 외손자)인 주청후(朱成虎. 할아버지의 성을 따라 개명)도 군인이 되어 인민해방군 소장까지 진급했고, 인민해방군국방대학 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중국 군부 내에서 강경파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며, "미국이 대만 분쟁에 무력개입하면 중국은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4. 주요 경력
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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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에 등장한다. 배우 왕우푸(王伍福)가 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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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후난성 전투로 개봉한 영화 건군대업에도 등장한다. 배우 황지충(黃志忠)이 분했다.
호이4에서 '''중화민국 군사장관'''으로 등장한다. 공격력 10%를 높혀주는데 사진도 고증에 안맞고 해괴한 사진을 쓴다. 그나마 1.5패치 이후 고증에 맞는 초상화도 받았고 홍군 지휘관에도 주더가 추가되긴 했는데 중화민국 군사장관진의 주더는 그대로다.(...) 그리고 중화민국 쪽 사진은 수정도 안돼서 여전히 해괴한 사진을 쓴다.
[1] 훗날의 운남육군강무당.[2] 동기로 주페이더가 있다.[3] 신해혁명 당시 동맹회의 총사령관이자 공화파 군인. 운남과 사천지방을 해방하였고 이후 황위에 오른 원세개에 대해 휘하의 운남군을 호국군으로 개명하고 제 3혁명을 일으켜 원세개를 몰아내지만 본인도 제 3혁명이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핵으로 사망. 주더는 인생의 상반기는 차이어에게, 하반기는 모택동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4] 이때 붙은 별명이 "주방장"(...).[5] 여담으로 이문열은 정강산(징강산)이 수호전의 양산박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대장정 당시에도 수호전을 가지고 다니며 읽었을만큼 수호지가 표상하는 민중의 반항에 자기가 이끄는 홍군 세력의 항쟁을 투영하고 있었다.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양산박으로 민중들에게 각인되기를 바란 것.[6] 공적으로도 마오쩌둥은 정치위원 역할을 맡았지만, 사적으로도 이때 마오쩌둥은 홍군 전사 출신이던 허쯔쩐과 연애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군내에서 '주 군장(军长)은 군량을 나르기에 열심이고, 마오 위원(委员)은 연애에 열심이네' 같은 풍자적인 노래가 불렸다고도 한다. 중국군에서는 정치장교를 정치위원라고 하며 줄여서 위원이다.[7] 장궈타오를 지지해서 따라간 것이 아니다. 주더가 장궈타오의 부대로 전속해 있었을 당시, 마오와 장은 전략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는데, 병력이 많았던 장은 마오의 부대를 기습해서 체포-처형하려 했다. 이 계획을 안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에 알리지 않고 먼저 섬서성을 향해 출발했고, 이 과정은 비밀리에 실행되었기 때문에 장궈타오 아래로 전속해 있던 주더는 계속 장궈타오와 함께 행동했다. 하지만 장궈타오 부대는 국민당의 집중공격을 받아 붕괴되고 주더와 류보청이 지속적으로 장궈타오에게 마오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하여, 장궈타오의 부대도 결국 마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장궈타오는 장정 중에 병력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옌안에서는 더이상 마오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8] 1968년 10월 31일국가주석직 폐지 및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이 1982년 헌법 개정으로 1983년 6월 18일에 리셴녠이 국가주석자리에 오를때까지 국가원수 대행.[9] 1958년 5월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