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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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梁啓超
간체
梁启超
독음(韓)
양계초
영문
Liang Qichao
국적
[image] 청나라[image] 중화민국
생몰년도
1873년 2월 23일 ~ 1929년 1월 19일
1. 개요
2. 생애
3. 일화
4. 기타


1. 개요


청말민초의 중국의 언론인, 정치가, 저술가. 한국식 독음은 양계초다. 그의 고향말인 광둥어로는 룅카이치우(Lèuhng Kái-chīu).[1]

2. 생애


1873년 광둥성에서 태어났다. 수재(秀才)를 거쳐 15살에 향시(鄉試)에 합격, 거인(擧人)이 된다. 이때 베이징에서 내려온 감독관이 그의 총명함을 알고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주는데, 베이징의 처가는 량치차오가 훗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때 당장 의사소통부터 도움이 되었는데, 량치차오는 광동어가 심해서 북경에서 음식점에서 주문도 못할 정도였다.
량치차오는 향시에 합격한 이후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가 된다. 1898년 캉유웨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한다. 당시 겨우 25세이었다. (광서제 항목 참조). 그러나 서태후 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이후 1912년까지 14년 동안 중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망명 이후 강력한 서구식 근대화를 주장하며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蠻報)> 등 잡지를 발행했는데 특히 신민총보는 3만부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당대 중국의 최고 판매량을 갱신하기도 했다.
한편 1900년도 즈음에는 역시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쑨원과 만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두 거물 망명객이 힘을 합쳐 중국을 변화시키기를 바랬고 량치차오도 이에 긍정적이었지만 두 사람의 합작은 결국 실패했다. 캉유웨이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한데다가 량치차오는 1903년경부터 폭력적인 혁명이 중국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2] 일반적인 입헌군주제보다 좀 더 보수적인 개명전제(開明專制) 및 청조 주도의 헌법 제정을 주장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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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당시의 량치차오 사진과 당시 일본 사회에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담론을 편집한 『음빙실문집』(1903)
신해혁명(청나라 멸망) 후에 40대로 인생의 리즈시절을 맞아 의회운동의 당수, 사법총장, 재무총장 등을 맡으며 잠시 위안스카이와 연정하여 진보당을 이끌며 국회 내부의 정치를 이끌었다. 하지만 1913년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을 연이어 일으키자 점점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1914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저지르고 1915년에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차이어, 탕지야오, 리례쥔 등과 합세하여 호국전쟁을 주도했다.
이후에는 돤치루이와 연합해 장훈복벽도 반대했고 재정총장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예측하고 로비를 통해 연합국 줄서기를 이루어냈으며, 결국 그 덕분에 파리 강화 회의에도 중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여행과정에서 유럽의 참상과 모순을 목격하고 오랫동안 신뢰해오던 사회진화론과 결별한다.
그러나 량치차오는 군벌의 난립으로 무력화된 중앙정부를 보고 회의를 느껴 결국 정계를 은퇴한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유럽 여행 도중 그는 총리 돤치루이가 중국 남방 정벌을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에 칭다오산둥의 이권을 넘겨주려 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의 폭로는 5.4운동으로 이어져 북양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귀국 이후 정계를 은퇴한 량치차오는 저서 《구유심영록(歐游心影錄)》에서 과학만능주의의 파산을 선언하며 "자연의 파괴보다 인간의 파괴가 더 심하고, 야만인의 파괴보다 문명인의 파괴가 더욱 더 심하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그가 사회진화론적 사상과 세계관과 결별했음을 의미한다. 은퇴 후 베이징, 톈진 일대에서 저술, 교육활동을 하다가 1929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1942년 중화민국 건국 및 호국전쟁에 참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서 표창이 내려졌다.
주요 저서로 《신민설(新民說, 1902~1906)》,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1920)》 등이 있다.

3. 일화


1899년 대한제국독립신문에 그의 '애국론'이 실리는 등, 비슷한 시기에 독립협회 등에 참여했던 조선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박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의 '주자' 수준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이태리 건국 삼걸[3]전(意太利建國三傑傳)》, 《월남망국사》 등의 책들은 신채호가 번역했고, 훗날 일제가 금서 처분했다. 참고로 일제가 태웠다는 20만권 역사서 떡밥의 금서들에 이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약 1300만자에 달하는데 그중 10% 정도는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들이라고 한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기에 사망 직후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예상대로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보신적인 태도로 평가받아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사관의 비판을 강하게 받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을 가리지 않고 중국의 군주제 혁파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에서이다. 공화파로 대세가 기울자 공화정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긴 했지만 대세에 따르는 것 정도로 보아야 한다.

4. 기타


당대의 그는 한국에서 '''양계초'''라고 널리 알려졌고, 이후의 교과서에도 양계초로 자주 등장한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가 (적어도 국사책에서는) 신해혁명 이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는 신해혁명 이후에 태어나거나 신해혁명 이후에도 생존한 중국인들의 인명을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옮기는 관례가 있기 때문에 량치차오로 표기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
참고로 '음빙실문집'이라는 저서에서 한국인의 민족성을 엄청 혹독하게 비판한 걸로도 유명하다.

조선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한번 모욕을 받으면 곧 팔을 걷어올리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 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곧 이미 '''죽은 뱀'''처럼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조선 사람은 미래의 관념에 대하여 매우 박약하다. 소민(小民)은 한번 배부르면 서로 두셋이서 짝을 지어 차(茶)를 다리며 나무 그늘에 쉬면서 한담(閑談)으로 날을 보낸다. 다시 내일은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 하는 생계문제를 계획하지 않고 유유하게 고대(古代) 태평시대의 사람과도 같다.


[1] [lœ̏ːŋ kʰɐ̌i.tsʰíːu\][2] 이런 태도는 후에 지나치게 온건한 태도로 평가받아 중국국민당 측의 비판을 사게 된다.[3]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