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룡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채성룡은 1892년생으로 알려졌지만 출생지는 알 수 없다. 그는 1920년 중엽 옴스크 한인공산당이 지역 국민회와의 협력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었을 때 더 이상 국민회와 협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 청년 반대파에 속해서 기존 간부들과 대립했다. 이후 1920년 7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인공산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 방청인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가 결성된 후 8월 1일 중앙총회 중앙위원으로 조직과 직원에 선임되었지만, 한 달 만에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국 총무부 서기로 옮겼다. 또한 중앙총회 당 학교 설립위원단 설립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0년 10월 재러시아 한인들의 대표 기관을 설치하기 위해 한인사회당 주도로 소집된 제1회 전로고려인대회에 참석하여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의 입장을 대변했고, 전로고려인대회를 통해 설립된 고려인중앙선전의회 중앙위원회에 김철훈, 박승만[1] , 남만춘 등과 함께 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가 준비하는 전한공산당 창립 당 대회 준비위원에 이성, 박승만, 김철훈과 함께 선정되어, 1920년 12월 10일경 러시아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와 중국 북간도를 목적지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했다. 12월 14일 러시아 아무르주 치타에 도착한 채성룡 등 네 명의 전권 위원들은 극동국 한인부의 방해로 목적지로 향하지 못하였으며, 극동국 한인부 서무부장 박애가 극동공화국 경찰에 이들의 체포를 요청하면서 일시적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1921년 3월 한인 빨치산 부대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심화되면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설립한 임시군정의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참여하였다. 1926년 5월 중국 북경에서 북풍회 공산주의 그룹의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이 되었다. 이후 1928년 1월 국내 공작을 위해 신의주에 잠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0년 4월 20일 출옥 직후 폐병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채성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