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공산당

 


1. 개요
2. 상해파
3. 이르쿠츠크파
4.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알력 싸움
5. 의의
6. 관련항목


1. 개요


1919년과 1920년에 한인이 조직한 2개의 공산주의 정당. 상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그것이다. 이 두 개 공산당은 모두 볼셰비키즘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서로 인적 교류가 거의 없이 서로 독자적으로 세운 정당이었기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상해파, 이르쿠츠크파라는 명칭은 외부에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며, 두 조직 모두 정식 명칭은 단순히 '고려공산당'이었다.
이들은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에 종속되어 지령을 받는 것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했다. 1920년대에 두 단체의 통합 움직임이 있었으나, 서로 별도의 상황에서 생긴 조직이었고, 코민테른 종속 문제 등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통합은 무산되었다.

2. 상해파


이동휘가 주도하여 상하이시에서 조직한 정당으로, 1918년 4월 알렉산드라 김과 이동휘 등이 하바롭스크에서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하고 있다. 여운형, 안병찬, 박헌영 등은 이후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지만 본디 상해파 출신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완전한 하부조직이길 원했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비해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레닌으로부터 자금 지원은 받되 소련 공산당과는 독립된 조직을 유지하길 원했다. 또한 어느정도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동휘같은 일부 활동가들은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지자 고려공산당은 분열되었고, 이동휘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이후 자금 횡령 문제로 인하여 독립운동가들끼리 총살저격이 벌어졌다.[1]

3. 이르쿠츠크파


노령(러시아)파라고도 불린다. 1920년 1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당시 붉은 군대의 지도 아래 대한국민의회 회원들이 창당했다. 처음에는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이라고 했다가 1920년 전로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통합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1921년 전로고려공산당으로 고쳤다. 이 과정에서 상해파에서 이탈한 김만겸, 여운형, 안병찬, 박헌영 등이 가담하여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를 결성한다.

4.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알력 싸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별개의 움직임으로 형성되었고 방향성도 많이 달랐다. 1920년대 자유시로 집결했던 공산주의 성향의 부대도 내부에서 각각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를 등에 업고 통수권을 다투었다.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 때문에 고려 공산당 통합 논의가 있었지만 서로가 코민테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서 정통성을 놓고 알력 싸움이 벌어졌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알력 싸움은 결국 항일무장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1921년에 일어난 자유시 참변이었다. 참변을 진압한 소련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양당을 해체하고 러시아공산당 산하의 고려국으로 격하시켜버렸다. 보통 1국 1당원칙에 따라 고려공산당이 있었지만 코민테른은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인은 자체 혁명역량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5. 의의


이 두 정당은 후에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2대 원류(源流)를 이루었다. 하지만 공산당의 정통성을 두고 두 정당 간 갈등은 매우 심했고, 이 때문에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공산당 분열에 의한 사건은 제1차 자금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23년에 코민테른 고려부가 국내 공산당을 조직할 때까지 고려공산당은 한인 공산당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4년 2월 고려부는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고, 노령파의 한명서, 상해파의 이동휘, 국내대표 정재달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때부터 공산당은 조선에 직접적으로 침투해 활동하기 시작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설립되게 되었다.

6. 관련항목



[1] 김립 피살 사건, 그런데 김립은 러시아에서 받아온 자금을 임시정부에 가져오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김구가 암살했으며, 이 사건은 김구가 후대에 비판을 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