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레스티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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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대 그레고리오 9세

'''제79대 첼레스티노 4세'''

제180대 인노첸시오 4세
  • 생몰년: ? ~ 1241년 11월 10일
  • 재위기간: 1241년 10월 25일 ~ 1241년 11월 10일
본명은 고프레도 카스티글리오네(Gaufrid Castilglione)로,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이다. 사비나(Sabina) 교구의 주교급 추기경이었으며,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조카이기도 했다. 첼레스티노 4세는 1241년 10월 25일 선출되어 11월 10일, 즉위식을 치르기도 전에 불과 16일 -혹은 17일- 만에 선종했는데(역대 3번째 단명 교황), 이렇게 된 데에는 원인이 있다.
1241년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날카롭게 대립했던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선종했다. 당시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추기경은 모두 12명이었는데, 그 중 2명은 황제에게 붙잡혀 감금되어 있었다. 나머지 10명은 따로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교황 선거를 준비했는데, 당시 로마 시의 참사위원(Senator)[1]이자 오르시니(Orsini) 가문의 선조이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친구이기도 했던 마테오 로소(Matteo Rosso)는 황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빨리 새 교황을 선출하려 했다. 이런 목적에서 로소는 로마에 모여 있던 추기경들을 지금은 소실된 셉티조니움(Septizonium)[2]이라는 황폐화된 건물에 감금시키고 새 교황의 선출을 독려하며 위협했다.
당시 붙잡혀 감금된 추기경들은 빨리 교황을 뽑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2달 동안의 감금 기간 동안 '''추기경 한 사람이 사망'''했고, 나머지 추기경들의 건강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2개월 만에 살아남은 추기경들은 가까스로 의견 일치를 보아 교황을 선출하니 그가 첼레스티노 4세였다. 로소는 새 교황이 선출된 것에 만족해 남은 추기경들을 풀어주었는데, 그들은 다른 사단이 나기 전에 잽싸게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감금 기간 중 심신이 크게 쇠약해진 첼레스티노 4세는 결국 악화된 병세로 인해 즉위하고 20일도 채 못되어 선종하고 말았다.
이에 로소는 추기경들에게 다시 로마로 돌아와 선거를 치르라고 요청했으나, 2달 동안 감금당한 채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경험이 생생했던 추기경들은 로마에서 '봉쇄 선거'를 치르길 단호히 거부했다. 덕분에 2년 동안, 교황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야 했다.[3]
이 문서는 호르스트 푸어만의 『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77~80쪽과 루돌프 피셔-볼페르트의 『교황 사전』 103~104쪽을 참조해 썼다.

[1] 이 칭호는 로마 제국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이 칭호이기도 했다.[2] 로마 제국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건설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팔라티누스 언덕 동편에 위치했었지만, 교황 식스토 5세가 새로운 건물 공사를 위해 헐어버렸다.[3] 당시 추기경들이 남긴 서한을 보면, 끌려가면서 손발이 묶인 채 두들겨 맞았고, 감금 장소인 지하 감옥 위에서 보초들이 소변을 보면 그것이 갈라진 틈새로 스며들어와 악취를 풍겼으며, 빗물이 새어들어와 몸을 떨어야 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죽은 추기경을 보초들이 들것에 싣고 가며 조롱하는 어조로 장송곡을 부르고 심지어 석궁(石弓)으로 시신을 훼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흠좀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