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토 5세
1. 개요
227대 교황.
질서를 회복시키고 잃었던 교황령을 되찾아 재정을 튼튼히 했다. 교황청의 정비를 완료하여 15개 성성(聖省)으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등 많은 제도 혁신을 단행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원개와 오벨리스크, 수많은 궁전과 수도 등을 건설함으로써 로마의 근대화에도 힘썼다.
2. 생애
2.1. 교황이 되기 전까지
1520년 12월 13일 안코나의 마르케에 있는 그로탐마레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회 수사였던 삼촌 아래서 수학했고, 12세 때 몬탈토 인근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했다. 1547년 시에나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548년 페르모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설교가 명성을 얻은 그는 1552년 프란치스코회의 보호자인 카르피 추기경의 주선으로 로마에 가서 사순시기 강론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 금욕적인 수사를 눈여겨 본 바오로 4세 교황은 1556년 교회개혁위원회에 그의 이름을 올렸고, 이듬해에 그를 베네치아의 이단심문관으로 임명했다. 너무 가혹한 처사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마찰을 빚자 비오 4세 교황은 그를 소환했으나, 1560년에 그를 재임명했다. 비오 5세 교황은 이단심문관으로 활약하던 그를 높이 평가하여, 1566년 프란치스코회의 총대리 겸 산타가타 데이 고티의 주교로 임명했고, 1570년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571년부터 1577년까지 페르모 교구장으로 복직했다.
2.2. 교황이 되다
1565년 스페인의 선교 활동 문제로 그레고리오 13세 교황과 충돌을 빚어 그의 눈 밖에 났고,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자기 저택에서 성 암브로시오에 관한 책 집필을 준비하면서 오랜 기간을 보냈다. 사실상 은퇴하여 조용히 지내던 이 기간 동안 그는 친한 몇몇 인사와만 교류하며 권력 다툼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레고리오 13세의 사망에 따른 교황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출신인 식스토 4세를 존경하는 뜻에서 식스토라는 이름을 택했다.
타고난 지도력의 소유자이며 정력적이고 강직한 식스토 5세는 그레고리오 13세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폭동을 진압하여 교황령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2년 동안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해 폭동을 잠재웠다. 폭도 수천 명이 공개 처형되었고, 은신해 있던 귀족들은 무자비한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식품 가격을 통제하고, 간척 사업과 농업, 양모, 비단 산업을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했다. 그레고리오가 탕진한 교황청 재정을 극적으로 다시 회복했다. 공공사업 부분의 막대한 투자에도 프란치스코회 출신답게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신규 세수를 확충하고, 채권을 발행하여 4백만 스쿠도가 넘는 금액을 (대부분 금으로) 산탄젤로 성에 축적했다. 이로써 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전례 없는 재정적 독립을 보장받았다.
2.3. 개혁 교황
교황으로서 교회의 중앙행정기관을 지속적으로 재조직한 것은 그의 가장 놀라운 성과로 꼽힌다. 1586년 12월 3일 그는 추기경 수를 최대 70명으로 제한했다. 이 인원 수는 교황 요한 23세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또한 국무원을 개편하여, 추기경을 장관으로 하는 15개의 성을 신설했는데, 그중 6개 성은 세속 행정을 감독하고 나머지는 영적 문제들을 지도하게 했다. 이 조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조직 개편은 추기경단의 권력을 축소함으로써 교황과 공동 통치하려는 추기경들의 요구를 약화시켰다. 식스토는 이 조직을 성직매매와 성직 겸임 금지를 효과적으로 시행하는데 활용했다. 가톨릭 개혁의 전환점은 1585년 12월 20일 주교들이 정기적으로 로마를 방문하고 교구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교황청 정기 방문 규정을 다시 제정한 것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라 그는 불가타 성경 교정 위원회를 설립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주도해 1590년 5월 2일 교정 작업을 완료했다. 그러나 오류가 많아 식스토 사망 후 교정 작업이 다시 이루어졌다. 그는 예수회에 냉랭했던 반면 프란치스코회에는 관대하여,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성 보나벤투라를 교회학자로 선포했다.
식스토는 국제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에 그리스도교 국가를 세울 꿈을 꾸었다. 보다 실질적으로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는 막대한 원조를 약속하며 잉글랜드 침공을 부추겼다. 그러나 무적함대가 패전하자 원조를 거부했다. 그는 스페인 세력을 견제하며 가톨릭 강대국들 간에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1585년에는 파문당한 위그노와 나바라의 앙리에 맞서 펠리페를 원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황 임종 전에 앙리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펠리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일본, 청나라, 필리핀, 남아메리카 선교 활동을 장려했다.
식스토는 '강철 교황'이라고 불렸고, 가톨릭 재건을 위해 건축과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건축 사업을 통해 로마는 웅장한 바로크식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7대 순례 성당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주요 장소에 십자가를 꽂은 오벨리스크를 설치해 이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와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상수도 공사도 단행했으며, 라테라노 궁전을 재건축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지붕을 완성했다. 또한 바티칸 도서관을 확장하고, 바티칸 인쇄소를 설립하여, 1587년에 칠십인역 성경을 출간했다.
3. 사망
말라리아로 병중에 있던 그는 프랑스 왕위 문제로 스페인 대사와 격렬하게 대립하다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