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능익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최능익은 1889년 11월 24일 평안남도 강서군 연곡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1월 미국으로 망명하여 캘리포니아주 윌로스 대학에 재학하다가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 대회에 참석해 단우 60번으로 입단했다. 1920년 4월 지역 대표로 한인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발기인으로 활동했고, 미주 한인 학생들의 친목과 항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장 노백린이 중국내 항일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캘리포니아주 윌로스 지역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다. 이에 최능익은 학생 신분으로 입소했고, 5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둔전병식 군대 교련을 받으면서 비행사로서의 기량을 갈고 닦았다. 또한 1939년 10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변준호 등과 함께 중국 피난민 후원회를 조직했다. 1941년 2월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해 조선의용대를 후원했다.
2009년 4월 14일자 조선일보가 실은 최능익의 아들 하워드 최의 증언에 따르면, 최능익은 항상 대한독립을 소망했고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전략 물자 수출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띠를 두르고 미 연방 정부 건물과 일본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1941년 8월에는 재미한인 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설립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42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했고, 1943년 10월에는 단체 기관지인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흥사단 동료 단우인 변준호와 함께 발행했다.
그러나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4년 8월 두 단체를 중재해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하려 했다. 이에 최능익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서 10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회의에 참여해 주미외교위원부 인선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양측의 대립이 워낙 팽팽해 끝내 중재에 실패했다.
최능익은 광복 후 미국에서 조용히 살다가 1976년 12월 22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능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2009년 최능익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3. 가족
최능익의 동생인 최능진은 최능익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했고, 국내와 미주 등지에서 단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체포되어 8.15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또한 최능익의 아들 하워드 최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에 미 해군에 입대하여 필라델피아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전쟁이 얼마 안가 종결되어서 실제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6.25 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에 미 해군 소속으로 재입대, 인천 앞바다에서 수뢰 탐지 작전에 참여했으며 대원 32명과 함께 한강 하구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6.25 전쟁 종결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우드베리 대학을 졸업했고 가족과 함께 농산물 포장 사업을 도맡았다.
2009년 4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 유해 봉환식에 참석한 하워드 최는 국군의 사열을 받으며 부친의 유해가 안장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최근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골프의 앤서니 김을 보면 한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피는 물보다 진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