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승우는 1915년 12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하여 유한제약주식회사(柳韓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주오대학 동창인 정문규로부터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충칭 망명을 권유받았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1943년 3월 정문규 등과 함께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4월 초순, 최승우는 경성부 동대문 안암정에 소재한 유해창(柳海昌)의 집에서 정문규와 회합하여 조선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 을 협의하였다. 그들은 동지 6, 70명을 확보한 후 운동조직으로써 수령(首領) 아래 파괴부(破壞部) 및 건설부(建設部)를 두기로 했다.
파괴부는 파괴·암살·선전 의 반을 두어 중요 공장,은행 등의 파괴,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등을 비롯하여 한상룡(韓相龍), 윤치호, 이광수 등 친일 조선인을 처단하고, 폭동을 위한 격문의 작성·살포 등을 담당했다. 그리고 건설부는 법경(法經), 문화(文化), 정법(政法)의 세 반을 설치하여 독립실현 후 건설적 부분을 담당하는 연구 준비를 할 것을 협의하였다.
1944년 7월 초순, 경성부 동대문구 창신정(昌信町)에 소재한 송원무(松原茂)의 약혼자 금전화봉(金田華峰)의 집에서 정문규와 함께 공장 폭파에 사용할 폭탄 제조 방법을 오상흠에게 의뢰하였다. 이후 동년 7월 하순 같은 장소에서 정문규와 함께 "조선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독립 의 때에 유위(有爲)한 청년을 상실하게 되므로 징용반대 격문을 살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동년 8월 하순 경기도 부천(富川) 소사리(素砂里) 정문규의 집에서 동인과 함께 조선총독이 유한제약주식회사(柳韓製藥株式會社) 공장에 시찰을 하기 위해 내방한다는 것을 알고 그때가 암살의 호기라는 의견 을 교환하였다. 동년 9월 상순 정문규의 집에서 정문규와 함께 징용반대 격문 을 작성하여 경성역을 출발하는 열차 내에 그것을 살포하기로 협의하였다.
9월 중순 같은 장소에서 조선총독이 조선총독부에서 관저로 돌아오는 길인 경성 부 종로구(鐘路區) 통의정(通擬町)과 효자정(孝子町)의 중간 전차 도로상에서 그를 처단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는 바람에 1944년 10월 23일 체포되었고, 1945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 구류 7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8.15 광복 후 석방되었으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최승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