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윤치호
尹致昊 | Tchi Ho Yun'''

<colbgcolor=#292929><colcolor=#FFF> {{{#!wiki style="margin: -5px -10px"[image]
'''이름'''
윤치호 (尹致昊, Tchi Ho Yun)
이토 지코 (伊東致昊)
'''출생'''
1865년 1월 23일
(음력 1864년 12월 26일)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1리 신촌
(현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사망'''
1945년 12월 6일 오후 4시경 (향년 80세)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
(현 경기도 개성특별시)
뇌일혈중풍, 노환으로 인한 사망
'''직업'''
교육자, 정치가, 계몽 운동가 등
'''주요 경력'''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제2대 사장
한성부 판윤
외무부 협판
학무부 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292929><colcolor=#fff> '''본관'''
해평 윤씨 (海平)
'''자'''
성흠 (聖欽 / 成欽)
'''호'''
좌옹 (佐翁)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감리회)
'''학력'''
미국 에모리 대학교
'''소속 정당'''

'''작위'''
[박탈]
'''가족관계'''
아버지윤웅렬
어머니 : 전주 이씨
3처 2첩
슬하 6남 9녀 
'''저서'''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교회 소재 초상화'''
1. 개요
2. 상세
4. 저서
5. 어록
5.1. 조선 사회에 대해서
5.2. 유교에 대해서
5.3. 식민지 상태의 조선에 대해서
5.4. 범세계적인 사회 및 민족에 대해서
5.5. 조선 인종과 사회에 대한 비판
5.6. 조선정부에 대한 폄하, 일본정부에 대한 찬양
6. 사상적 측면
6.1. 인종론
6.2. 조선 사회의 문제 제기
6.3. 비관적 합리주의
6.4. 사상적 배경
7. 모순과 비판
8. 주변 관계
9. 기타
9.1. 애국가의 작사자인가?
9.1.1.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아니다.
9.1.2.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맞다.
9.2. 박중양, 이규완과의 차이점
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윤치호(尹致昊, Tchi Ho Yun[1], 1865년 1월 23일[2]~1945년 12월 9일)는 대한제국일제강점기교육자, 정치가, 시민 운동가, 번역가, 기독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2. 상세


자(字)는 성흠(聖欽), 호는 좌옹(佐翁), 본관은 해평.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었다.
초기 시민 단체라고 볼 수 있는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 신민회, 청년 학우회의 창립 주역이자 중요한 일원이었다.
개화파독립신문사의 창립 멤버의 1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 운동, 민권 운동, 의회 설립 운동을 벌였으나 황제에게 불충하는 역적 취급을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되자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본의 미행과 내사 등을 계기로 결국은 친일로 전향하였고 이것이 죽음에도 영향을 줬다.
필립 제이슨, 안창호, 유길준 등의 계몽론자와 맥을 같이하였으나 한국의 무질서와 감성주의, 사농공상, 문존무비 사상에 염증을 느껴 서서히 계몽 운동을 포기하게 된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추원 참의 자리를 회피하거나 사양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비슷한 인물로 박중양이 꼽히지만 한국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박중양과는 다르게 계몽 운동에 힘썼다. 한국의 구습을 혐오하고 자기식 합리주의를 유지하면서 비이성적인 일반 백성들을 비웃으면서도 동정하고 비도덕적이고 부패한 한국 식자층을 혐오하면서도 친분을 쌓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관련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내용과 존재를 누설하지도 않았지만 협조하지도 않았고 미국의 강력한 힘과 일제 식민 통치의 악랄함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백인 혐오에 눈이 멀어서 마지막에는 합리적인 판단을 상실하여 일제에게 협조하였으나 윤치호의 식견과는 달리 일제의 패배와 한국의 광복을 경험하게 된다. 일제의 통치를 꺼리면서도 일제의 위협에는 어느 정도 굴복하고 서구의 합리주의를 찬양하면서도 서구를 적대시하고 독립운동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독립운동가와 교류하고 종국에는 판단력을 상실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버린 자기 모순으로 점철된 소극적인 지식인이였다.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는 인물 중 1명이다. 윤치호 작사설에는 여러 문헌적 근거가 있지만서도 본인의 친일 행적과 자신이 쓴 방대한 양의 일기 중 1번도 애국가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의문점이 있다. 반대로 안창호가 작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안창호 스스로가 애국가 보급에 힘썼다는 점은 있으나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없고 안창호 설은 후대에나 나왔다는 문제가 있다.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면 애국가의 작사가와 작곡가(안익태) 모두가 친일이라는 점에서 정통성 논란이 따라다니는 것에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윤치호의 일제 치하 포지션은 식민지 지도자이다. 영국 치하 아메리카 대륙의 친영 성향의 식민주 지도자들과 유사한 처신을 보이고 있다. 역대 조선 총독들과도 친해 자주 조선총독부에 자문을 하러 출입했으며 민중 계몽 활동에도 매진해 민족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들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독립협회 해산 이후로 민중에게 큰 배신감을 느껴 민중에 대해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번역가로도 활동했는데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본'[3]과 1908년 '걸리버 여행기', 아이소포스의 '이솝 우화'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소개하였다.

3. 생애




4. 저서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중 1905년 1월 1일부터 1912년까지의 일기는 105인 사건으로 조선 총독부에 압수된 뒤 실전되었다.
  • 《우스운 소리》[4]
  • 《영어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영어 문법 사전[5][6]
  •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 《유학자취》(幼學字聚)

4.1. 번역서


그는 1908년 번역서로 처음 이솝 우화의 첫 한글 번역판과 걸리버 여행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찬송가를 한글로 번역하여 찬미가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다.
  • 《찬미가》(讚美歌)
  • 《의회통화규칙》 (라버츠 저)
  • 이색우언(伊索寓言)》(한글 번역본) (1908년)
  • 《걸리버 여행기》(한글 번역본) (1908년)

4.2. 윤치호 일기



윤치호는 처음에는 일기를 한문으로 쓰다가, 영어를 배운 직후에는 영어 실력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일기를 영어로 썼다. 워낙에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사람이라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영어 일기를 썼다고 한다(당연한 얘기지만 영어를 abcd부터 배운 사람이 영어 일기를 무리없이 쓰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이후에는 한국어로 영어를 번역해 봤자 비슷한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계속 영어로 일기를 썼다.[7]
죽기 직전까지의 그의 일기는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인간 됨됨이가 어찌되었던 간에 윤치호의 일기는 매우 꼼꼼하고 정확하다. 문제는 그의 일기가 죄다 영어 아니면 한자라는 것. 거기다가 영어로 저술한 부분은 필기체로 날려썼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그의 일기를 수월하게 읽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번역상의 난해함, 그리고 분량 덕분에 윤치호의 일기는 아직도 국내에 완역이 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는 미국 유학 시절(1892년)까지의 일기가 번역 및 출판되어 있다. 여하간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일기를 썼는데 중간중간 수감 생활이라든지, 국내외에서 터진 대형 사건들로 인해 글을 쓸 정황이 아니었던지에 대한 이유로 일기가 끊긴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 시사 이슈, 정치적 사건에 대한 윤치호 본인의 정보 수집 및 의견이 담겨 있어 시대사 연구에 유용하게 쓰인다. 또한 미국 유학시에 쓴 일기는 19세기 말 서양에 건너간 한국인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읽어도 재미있다. 또한 문학 사상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기 일기 중 중요 대목을 발췌 번역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책이 나와 있다.

5. 어록


아래의 어록들에서 윤치호가 갖고 있던 조선 사회에 만개하던 병폐에 대한 비판의식, 조선 독립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5.1. 조선 사회에 대해서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천만의 생령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나라,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사장되며 포부가 실현되지 못하며 애국심이 표현되지 못하는 나라, 지옥같은 전제정치가 수세대의 굴종과 빈곤과 무지를 낳는 나라, 삶 속에서 죽어가고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 도덕적 물질적 부패와 더러움이 해마다 수천의 생명을 앗아가는 나라, 이것이 조선의 현실이다. 이같은 정치적 지옥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내정을 닦지 않으면 외교는 무익한 것이다.

진실과 정의의 원리에 기초한 평화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의 압제와 피지배자의 노예 상태에 의하여 유지되는 평화는..... 조선을 진정한 지옥으로 만든 악덕이다.

수치스러운 조선 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정부 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케 된다. 정부는 500여 년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결국 부패한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 소수의 독재 정치로부터 조선 국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 정부와 낡은 체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다. 철저히 썩은 정부를 미봉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강력하고 철저한 혁명은 이 나라 전체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외세의 간섭은 그러한 혁명을 방해하거나 이것을 이 반도의 폴란드화를 위한 적절한 기회로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그러한 폴란드화도 온 국가가 지금 서있는, 아니 잠자고 있는 악취 풍기는 침체보다 더 나을 것이며 적어도 더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에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로부터 조선의 지독한 독재 정치에 이르는 여러 형태의 정치 체제가 존재한다.


5.2. 유교에 대해서


유교의 교훈은 꽤 아름답다. 그러나 유교가 우리 사회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신봉자로 하여금 그 교훈을 실천케끔 하지 못하는 유교라는 종교 체계는 어차피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는 미사여구에 가득 찬 중국 조정의 칙령처럼 똑같이 나쁜 것이다. 실천하려는 자들이 없으면 교훈이 무용지물이 된다. 유교의 기초가 효도 이상으로 되지 않은 고로 유교가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이다.

그 도덕에 신이 존재하지 않고, 그 정치 체제가 민중을 외면하는 유교는 어느 민족이든지 자만스럽고 이기적이며 노예 근성에 빠지게 할 만큼 충분히 야비하다.

유교의 남존여비, 왕명에의 절대 복종 강요, 그리고 그 영원한 복고주의는 유교 부패의 씨앗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유교의 현실주의는 사람을 속물로 만든다. ... (이하 중략)... 유교에서는 젊은이들이 효도의 규율만 잘 지키면 도덕군자가 된다고 생각들 한다. 극히 진부한 효도의 원칙을 최고의 도덕으로 만들어놓고 (효도에 따르는) 모든 죄악 즉 방종, 복수심, 거짓말, 증오심, 대단한 위선 등을 덮어둔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 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든다.


5.3. 식민지 상태의 조선에 대해서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

현재와 같은 정부라면 독립은 국가에 구원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한편 더 좋은 정부, 즉 인민의 복지에 애국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익을 가져다줄 정부를 가진다면 종속도 진정한 불행은 아니다. 더욱이 건실하고 번영한 민족은 어느 때엔가는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그런데 빈약하고 무식하며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인 정부에 의하여 가난하고 무식하며 연약하게 된 국민, 그러한 국민에게 독립이 뭐 나을 것이 있겠는가?

오후에 집에 있었다. 3시 20분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며 조선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 가버렸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식민지인 조선 문제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 중 어느 나라도 조선 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어떠한 학교의 설립을 원한다면, 그것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노동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과, 조선의 장래는 노동에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노동이 무엇인지를 산 진리로 배울 수 있는 실업학교여야 한다.[8]

흑인이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기에 앞서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야 했듯이, 조선인도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기에 앞서 경제적 평등에 도달해야 한다.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서는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는 조선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


5.4. 범세계적인 사회 및 민족에 대해서


고도의 저항력을 가진 민족은 결코 열등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높은 의미의 투쟁 정신이다.

우리는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보다 도덕 및 종교와 정치에서 거의 항상 더 낫거나 덜 부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다소의 예외는 있겠지만 정의는 인종간에 있어서도 힘이다.

펜과 칼은 각기 정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배제할 정도로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양자는 인간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며, 결코 인간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하나의 민족이 하나, 단 하나만을 숭상해야 한다면 그것은 칼이어야 한다. 왜냐면 칼은 투쟁정신 또는 저항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약자는 과연 선량한가?

황제가 역적이라 하니 제손으로 뽑았던 의원을 역적이라고 믿는다. 그런 바보 국민이라면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선 상공업을 발달시켜야 한다. 세상만사가 돈 없이 되는 일이 없고, 먼저 육체의 생활을 유지 못하면 도덕도 지킬 수 없으니 상공업을 진흥시켜 실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교육 없이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으며, 더 많은 교육은 더 많은 독립을 가져온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하고 있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국가적 수치와 굴욕을 생각할 때,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 행로에서 국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모습과 언행을 생각할 때, 인생이 지겹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이나 앞으로도 죽음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당장 내앞에 자연스럽게 찾아온다면 강한 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나 냉담한 이 세상과 하직하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를 실제로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가 아니고 힘이다. 힘은 정의라는 것이 이 세계의 신이다.


5.5. 조선 인종과 사회에 대한 비판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본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그런 성명서를 발표하면 시위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역효과를 낼 것이다.

조선인들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조선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고집부리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체면, 자존심이 선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조선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듣자니 조선 사람들이 민주 정부 출범에 관해 거론한다는데 내겐 마치 6세 어린이가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을 거론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 못하는 자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 일으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이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 된다.


5.6. 조선정부에 대한 폄하, 일본정부에 대한 찬양


무능하고 가렴주구를 행하는 조선인 정부와 유능한 일본인 정부 중에서 택하라면, 나는 일본인 정부를 택할 것이다.[9]


6. 사상적 측면



6.1. 인종론


그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대전을 백인종 대 황인종의 인종 전쟁으로 봤고, 황인종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보다도 미국이나 유럽 유학을 다녀온 친미파나 친유럽파를 더 혐오스럽게 보았다. 좀 더 자세히는 이 사람이 한 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인종관이 형성된 것은 미국 유학 시절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지역인 조지아 주에서 수학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그의 일기를 보면 미국을 인정은 하고 있으나 백인들에게만 좋은 나라라며 미국의 인종 차별을 까는 내용이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론은 윤치호 생애의 최대 병크인 '''부일 협력'''을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6.2. 조선 사회의 문제 제기


윤치호는 노론 벽파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도 다산 정약용을 혐오하여, 정약용의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또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서북파, 기호파 파벌을 나누거나 출신 신분을 두고 갈등하는 것을 비판하며, 지역 감정 하나만 봐도 독립할 자격도 없다고 비판했다.
중국을 다녀온 지인을 통해 들은 상하이 내 7개의 파벌이 있다는 것을 두고도 독립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된다.
조선인의 결혼식, 장례식에 사치를 부리는 것도 윤치호의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1920년대, 1930년대 당시 결혼 비용과 장례식 비용으로 파산하거나, 이혼하거나, 가정 파탄이 나는 집안들을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대차게 깠다. 그는 조선의 관혼상제의 특징으로 슬픔없는 눈물과 허례허식을 지적했고, 사촌들의 사치스러운 결혼식, 고모 장례식에서의 허례허식 역시 비판하였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이 애국심, 개혁을 말하다가 관직에 올라서는 자리 보존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디스했다. 그는 당시 조정의 양반, 고관들이 글도 못읽는 무식한 사람들이 많다고 비판했다. 양심이 없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글을 모르는 무식한 고위직에 대한 비판에서는 자기 삼촌인 윤영렬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몸이 뚱뚱하면서도 걷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 영선군은 양돼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 디스했다.
나혜석의 이혼과 박인덕의 이혼을 옹호했다. 남자가 이혼하고, 아내를 내보내고, 첩을 여러 명 두거나 하면서 여자가 이혼하는 것을 비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나혜석, 박인덕의 이혼을 계속 옹호했지만, 박인덕이 신흥우와 가깝게 지내면서 박인덕에 대한 옹호는 거뒀다. 그는 첩을 두지 않아도,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인이 가난하여 굶고 있는데도, 동창생 구영숙이 자기 부인이 모피코트를 사주는 것을 야속하게 생각했다. 구영숙을 야속하게 생각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가난과 기근으로 고생하는데도, 구영숙의 부인이 모피코트를 선물받은 것을 보고 부러워한 셋째 후처 백매려 때문. 윤치호는 백매려가 하녀들, 하인들을 괴롭히고 구박하는 것, 자기는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하녀에게 팔다리 주무르게 하거나, 일하다 조는 하녀를 소년 하인들을 시켜서 꼬집게 하는 것을 비판했다. 결국 윤치호는 셋째 후처 백매려에 대해 "내 자식들을 낳아 준 여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산다"는 하소연을 일기장에 남기게 된다.
시부모가 며느리 괴롭히는 것, 남편이 아내 괴롭히는 것, 어머니가 자녀들 괴롭히는 것, 주인이 머슴들, 하인들, 노예들 괴롭히는 것도 그대로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결국 윤치호는 '''"남자, 여자, 노인, 청년, 인종을 떠나 모든 인간은 사악하다. 다만 힘과 돈과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된 윤치호는 1930년대에 가서는 심각한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외로움과 허탈감에 빠진 윤치호는 독서에 탐닉했고, 불면증을 그는 독서로 달랬다. 1930년대 이후 커피가 시중에 보편화되면서 그의 독서량은 더욱 늘었다.

6.3. 비관적 합리주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이 깨우쳐 일제를 몰아내는 것 자체를 허황된 공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갑신정변은 둘째치고, 독립협회나 만민 공동회에서 민중 참정권을 주장한 것과, 유럽의 의회제를 도입, 의회를 설치하자는 견해를 고종, 순종에게 불충하는 역적 행위로 매도당한데 대한 실망과, 민중의 맹목적인 보수성에 대한 결론이었다.
비록 개인적 양심으로 독립 운동에 대한 소극적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나 그것 역시 자신에게 해를 부르지 않는 한도였고 적극적인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신에게 독립 자금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 한답시고 외국에 나가 편하게 운동하면서 국내에 있는 자기한테 돈 빌려 달라고 하는건 상당히 무책임한 처사라고 일갈한 사람이 윤치호였다. 윤치호의 이런 행동은 그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예리한 관측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실례로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제일 먼저 예측했던 사람도 윤치호였고 예상이 맞은 것도 윤치호였다. 대다수 독립 운동가들은 순진하게도 저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또한 윤치호는 사람들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10] 윤치호의 이같은 행동은 식민지 조선의 장래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 뒤엉켜져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다가 나중에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조선일본의 생명선이며, 군사적 힘으로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 한, 후자(일본)는 전자(조선)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 혹은 영국이 불쌍하고 작은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일본과 전쟁을 하려고 하겠는가? 상상할 수조차 없다!'''

-

-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28일.

게다가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합리주의도 점점 마비되어 갔는데 당장 적백 내전 이후 험악해져 가는 미국과 일본의 구도에서 일본 측을 부당한 피해자 운운한 것[11]은 물론 한국의 독립 가능성을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았고 미국의 국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커다란 우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어리석다고 비웃던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 번진 전쟁에서 일본은 지고 조선은 독립한다는 유언비어가 전쟁이 끝난 이후 현실화가 된 것과 더욱 대비된다.
게다가 그의 '합리주의'는 '이상적인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론상의 국가를 억지로 현실에 끼어맞춘 것이라 그나마 일본이 겉으로나마 합리적인 행세를 하던 문화 통치기 초반까지야 합리적으로 돌아가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파시즘이 대두하고 추축국과 연합국의 대결 구도로 돌아가면서 그가 주장한 국제 질서 모델은 완전히 붕괴했음에도 여전히 과거 모델에 집착해 일기에서 '''"왜 일본같은 훌륭한 나라가 히틀러 같은 건달이랑 손을 잡는 거지?", "무솔리니는 대단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는데 히틀러 같은 건달에게 나라를 내주다니 실망이다."'''라는 뻘글을 쓰기에 이른다.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초반부에는 제국주의나 일부 일본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40년대 이후 부터는 자신이 비난하던 제국주의와 자신이 찬양하던 일본의 모습을 결합시키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그가 백인종에게 가지고 있던 깊은 원한과 세상에 대한 회의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보여진다.

6.4. 사상적 배경


윤치호의 합리주의와 인종주의가 이상하게 뒤틀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윤치호의 사상이 자신이 독자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치호의 사상은 그가 일본 유학시기에 신학문을 배웠던 인물인 동시에 흑화된 제국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김옥균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아시아주의자이자 일본 극우파의 사상적 배경인 도야마 미츠루의 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한 것이다. 문제는 저 두 사람부터가 모순이 넘쳐흐르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는 사람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느냐를 잘 보여준 인물인 동시에 윤치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우민멸시, 일본에 대한 긍정적 모습, 인종주의, 애매한 합리주의 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윤치호는 서구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 체제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유림들의 권위 의식을 비판했으나 정작 윤치호는 독립 운동가나 지식인, 학생들 중 자신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거나 어긋나는 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비웃는 꼰대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일기에서 윤치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한 조선인이라고 기준을 두고 만사를 평가했고 그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이들은 어리석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정작 그가 비판한 '나약하고 어리석은 조선인' 관은 윤치호 본인의 행적에 빗대어 보면 윤치호 자신과 일본 제국도 그 '나약하고 어리석은 조선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가 서구에서 배워 온 인종론은 시대상으로 보아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로 직행하기 딱 좋은 사상이었고 윤치호도 정도가 약할 정도일 뿐이지 전체주의자처럼 변해 갔다. 게다가 윤치호는 과학과 기술을 배워 오고 기독교를 전도하는 것을 권장하기는 했으나 정치학, 철학, 경제학 같은 사회 과학이나 인문학 쪽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싸움만 일삼게 만드는 학문'''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일기에는 수많은 일제 시기 당시를 추측할 수 있는 여러 정황자료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조선의 문제점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이전에 조선인의 게으름, 편협성, 배타성, 나약하고 어리석은 민족성을 먼저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 보았다. 이 점에서는 안창호와 거의 비슷한 시국관을 지니고 있었다. 웃기게도 이런 모습은 서구의 철학과 행정, 사상을 도입하는 것을 등한시해 양무 운동에 실패했던 청나라의 모습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원래는 유자였으나 청나라 망명 생활 중 개신교를 접해 개종한다. 그는 민중들에 대한 실망과 계속된 좌절로 방탕해지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때 개신교의 구원론과 성악설[12]이 그에게 큰 충격을 줘 개신교로 전향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계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 윤치호를 띄워주고 있는데 사실 윤치호의 종교관은 개종했음에도 유교적인 사상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기독교 계열 종교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후 심판 등의 요소가 빠져 있는 상태라서 신앙심이 깊었다고는 하나 그가 개신교 교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7. 모순과 비판


중국인들을 혐오했지만[13] 중국인 아내이자 신여성이었던 마애방은 끔찍이 아꼈다. 1905년 마애방과 사별한 후에도 '사랑하는 부인이여'라는 시를 읊을 정도.
특히 윤치호는 자기 자신의 일기에서 조선인들의 구습과 어리석음, 이기심을 비난했지만 정작 그의 일기에는 그 자신이 묘사한 '조선인의 잘못된 인습에 기반한' 행위를 본인 스스로가 매우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었고, 그것마저도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기 보다는 대의를 위해 와신상담하는 모습이라고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윤치호의 조선 민족 비판은 자기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투영해 조선 민족을 바라본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8. 주변 관계


그는 이완용을 혐오하였는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함께 하던 이완용[14]은 다른 을사오적과 함께 한일 합방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그는 이완용을 혐오하다 못해 경멸했다.
윤치호는 그밖에 유길준, 필립 제이슨, 안창호, 이상재, 이승만 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나 유길준과 이상재는 일찍 사망했고, 필립 제이슨과 안창호, 이승만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려 그는 일제 시대의 조선에 혼자 남게 되었다. 특히나 안창호와 각별했다고 추정되는데, 윤치호 일기에 안창호가 여러번 지역감정을 드러낸 기록 등 사사로운 담화의 기록이 많이 남겨져있고, 30년대 안창호가 중국서 체포되어 강제송환 및 감옥에 수용되자 안창호 구명운동에 매우 힘썼고 끈질긴 노력 끝에 병보석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행동에 대해서 김활란 등 친일파들은 윤치호를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보석 이후에도 안창호의 완치를 위해 병원비를 지원하고, 투병 끝에 안창호가 사망하자 그의 가족들이 미국에 있어 장례를 치룰 사람이 없자 본인이 돈을 들여 안창호의 장례를 치루어주고 수일간 통곡하는 등 오랜 친구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을미사변 당시 그는 유길준의 초대를 받아 파티장에 가서 만찬을 했다. 그러나 유길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뒤에 윤치호는 명성 황후 암살의 배후에 조선인 협력자가 있음을 폭로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 중 거물급 인사로 자신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유길준을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명성 황후가 암살당하던 날 유길준이 자신을 초대했던건 명성 황후를 암살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움직이지 못하도록 일부러 자신을 만찬에 초대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자뻑이다. 김구가 죽인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죽인 낭인들 중 하나였다라는 것과 다름없는 '''썰'''이다.
고종 독살설도 처음에는 불신하였으나 먼 친척이기도 한 윤덕영의 양심없는 행동들[15]을 보면서 고종 독살설에 윤덕영의 가담 여부를 다소 모호하게 기록, 그러나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그는 나혜석과 박인덕의 이혼을 공개적으로 변호할만큼 초기에는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성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딸과 주변 여성들의 행실을 보고 여자에게 교육이 필요한가 하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이복 동생 윤치창이 미국으로 가는 것도 손원일 전 국방 장관 여동생이자 제수인 손진실이 꼬신 것으로 파악했다.

9. 기타


[image]
그의 일가는 고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평 윤씨 문서 참고.
윤치호 본인도 3처 2첩[16]을 두었으며 자녀가 많아서 6남 9녀를 뒀다. 자녀들에게는 저마다 영어식 별칭을 함께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걸 보면 가계도가 굉장히 복잡하게 나온다.
  • 장남 영선 : 영어식 이름은 알렌(Allen). 일제 시기에는 사업을 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민씨 척족인 민유식의 딸과 결혼했다. 장남이 윤영구로 국방부 관리와 대한 통운 이사 등을 지냈는데, 이 윤영구의 맏딸과 결혼한 사람이 조선일보 사주인 방상훈이다.
  • 차남 봉선 : 일찍이 요절했다.
  • 3남 광선 : 영어식 이름은 리드 캔들러(Reid Candler). 독립 운동가 남궁억의 딸 남궁자경과 결혼했다. 일제 시기에는 낙농업과 체육계에서 일했고,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통역일을 하다가 피랍되어서 북한에서 지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딸인 윤자희와 결혼한 사위 김명호가 개성시 인민 위원장을 역임했으므로 북한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4남 장선 : 영어식 이름은 워싱턴 모트(Washington Mott). 외교부에서 일했으며 윤치호 기념 사업회를 총괄했다.
  • 5남 기선 : 영어식 이름은 램부스(Lambuth). 음악 쪽에서 일해서,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음대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미국에서 죽었다.
  • 6남 정선 : 영어식 이름은 조셉(Joseph). 역시 미국에서 거주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 내지는 소극적 협력자로 껄끄럽게 취급되다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와 2009년 대한민국 친일 진상 규명위에서 그를 '전시 체제기(일제 강점기 3기) 때 적극 협락한 친일파' 분류로 선정했다. 일부(주로 뉴라이트 세력)에서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는 민족 문제 연구소 뿐만 아닌 대한민국 정부 기관인 '친일 진상 규명위'에서도 윤치호는 '''명백한 친일파'''로 규정짓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직을 지냈다는 점과 제국 의회 칙선 의원'''에 있었다는 것이 있으니깐. 참고로, 대한민국 법원에서도 중추원 참의직에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친일 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이밖에도 매일 신문, 경성 일보 등에 윤치호가 기고한 글들과 담화문 발표한 기사글이 1편 ~ 2편의 글 정도가 아닌 수백여건이 곳곳에서 흔히 기사에 나와있다. 특히 1943년을 전후로 해서 이러한 기사글들 가운데 윤치호하고 연관된 것이 상당히 많다. 김승학이 펴낸 '친일파 군상'에 따르면, 윤치호는 '친일과 전쟁 협력이 옳지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임을 알고도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자'로 분류되어 있다.# 2008년 무렵부터 뉴라이트 계열을 중심으로 한 극우 세력에서 재평가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 임화[17]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해방 후 윤치호의 친일 행위에 격분한 어떤 조직에서 암살했는데 가문에서 그걸 숨기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작품 자체가 임화의 미군정 스파이설을 주장해서 논란이 된 작품이니[18]
2014년 문창극이 국무 총리 후보가 되면서 새삼스럽게 윤치호가 주목받게 되었다. 문창극이 윤치호를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문창극의 다른 발언 속에 있는 식민지 시혜론의 흔적을 보면 뉴라이트들의 고평가와 연결되어 있는것 같기도 하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적 관점과 연관되어 있는데, 문제는 윤치호의 친일 전력이 대동아공영권론에 엮여있는 골때린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창극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올 수록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오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윤치호가 골 때린 인물이라는 인식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상황. 한 마디로 일본 덕분에 잘 살게 됐다는 식민지 시혜론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것이니, 총리는 커녕 이런 사람이 정치판에 근처에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이후 극우파들 사이에서 저 위의 윤치호 어록이 새삼 화제가 되면서 재평가를 받는중이다. ''''약자는 과연 선량한가?'''' 라는 언더도그마를 까는 한마디때문에 극우파들 사이에서 선구자 취급받는중인데, 윤치호가 저 말을 한 것은 민중들이 자신이 속한 독립협회에 대한 지지를 거뒀다는 것 때문이었다. 문제는 독립협회가 교과서에서나 다루는 정도로 좋은 단체가 아니라는 것.
박노자는 윤치호에 대해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을 역사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처럼 국내외를 막론하고 굵직한 역사 인물들과 조우했던 윤치호의 이력이 상당히 특이하고 흥미로운 데다, 급변하던 근대 사회 속 경계인으로서 윤치호의 삶이 여러 인간적인 갈등과 한계를 보여주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다만 윤치호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점, 윤치호를 포함한 여러 역사 인물들의 후손들이 아직 살아있어[19] 영화 제작 내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9.1. 애국가의 작사자인가?


윤치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골때리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애국가의 작사자 논란이다. 이전부터 작자 미상으로 분류되던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9.1.1.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아니다.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가 맞다는 주장의 대표적인 증거로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보유한 윤치호 친필 애국가 가사와 1908년 발행한 찬미가라는 책이 제시된다. 친필 애국가 가사에는 1907년 작사했다고 나오며, 본인이 쓴 것은 확실하지만 문제는 작성 연도가 1945년 9월이라는 점이다. 이시점은 윤치호가 친일파로 극딜을 당하던 시점이라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악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친일파 극딜에 대해서 '''난 사실 애국가 작사자임. 그런 내가 왜 친일파임둥?'''이란 구실을 삼기위해 애국가 가사를 친필로 썼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오는 상황. 또한 찬미가는 직접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역술한 것으로 명기되어있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 작사자설을 지지하는 측은 역술도 폭넓게 저작자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주장하나 다른 학자들에 의하면 그당시에도 본인의 순수한 창작이 아닌것을 역술로 표기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즉, 찬미가에 수록된 노래 가사들은 대부분 의역한 미국 찬송가들이 수록되어 있는만큼 애국가 작사자라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약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면 그 방대한 윤치호 일기 속에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것도 상당히 수상한 대목이다. 윤치호 자신이 친필로 적은 시점으로 주장한 1907년은 물론이고 어느 시점에서도 애국가에 대한 언급을 찾을수 없다. 심지어 3.1 운동에 대해서 윤치호는 철없는 것들이 독립 운동한다고 난리친다고만 적었을뿐 정작 그 당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것에는 전혀 언급도 없다. 과연 자기가 작사한 노래라면 아무 감흥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다못해 "내가 왜 저런 노래 가사를 써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선동당하게 만들었나?"라는 식으로 태클이라도 넣어야 정상적일 것인데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찬성 측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말도 못꺼낸 것이라 반박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제에 협력적이던 윤치호의 일기까지 검열할 정도는 아니었다.
찬성 측에서는 미주 지역에서 애국가에 대해 '''윤치호가 작사하고 안창호가 크게 개선했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였다'''라는 자료를 제시하고 또한 1950년대 정부에서 발간한 자료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명기하고 있는 자료를 제시하기도 하나 이것 역시 의문의 대상이 된다. 애국가의 정확한 작사자를 알지 못해서 가장 인지하기 쉬운 윤치호를 작사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 정부가 윤치호 작사로 명기한 자료가 있긴 하나 수십년 동안 작자 미상으로 정부가 공식 입장을 정한 걸 생각해보면 근거가 되긴 어렵다는 지적도 만만치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윤치호 작사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 보급 운동에 참여했던 게 와전된 게 아니냐는 추정을 하고 있다. 윤치호가 말한 1907년이란 시점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교육 활동을 하던 시점인데 안창호는 학교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교육을 장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윤치호가 1908년에 발간된 찬미가에 애국가를 수록한 것도 해명이 될 수 있다.

9.1.2.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맞다.


1908년 발간된 찬미가[20]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뿐만 아니라 여러 증거가 있다. 일정 시기 소위 무궁화 곡[21]이 수록된 창가집에서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으며 총독부에 제출된 보고서에도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발견된 무궁화 노래집을 보면, 무궁화 곡의 작사자는 윤치호로 되어 있다.[22]
애국가 창작 열풍도 대한제국 시기 독립신문을 시작으로 있었고, 이 결과물로 1902년 나온 것이 대한제국 애국가이다. 실제로 널리 퍼진 것은 대한 제국 애국가 이전 창작된 곡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애국가는 그렇게 불린 곡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곡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유명했던 1880년대 배재학당 버젼 무궁화가 등은 황제나 황실을 찬양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것이 공화주의를 천명한 임시 정부 등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가 상해 임시 정부에서 정식으로 선택된다.
만약 정말로 윤치호가 쓴 것이라면 작곡을 한 안익태 역시 명백히 친일파로 분류된 인물이기 때문에 즉 애국가라는 노래 자체가 친일파들이 합작으로 만든 노래가 되버리는 상황이니 논란이 있을 수 있어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작사자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긁어 부스럼 날 필요가 없으니까. 일단 광복 후 1955년 국사 편찬 위원회는 애국가 작사 조사 위원회를 발족하여 사실상 윤치호라는 걸 확인했으나, "미상"이라 결론 짓고 급히 조사를 마친바 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정부에서는 친일파인 윤치호 작사로 결론 짓느니 차라리 미상으로 놔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당시에는 작사자로 안창호, 최병헌 등은 자세한 언급조차 없었다.
1896년의 배재학당 학생들이 최초로 가창한 이후 120여년,[23] 임정으로부터 비준을 받은 1940년으로부터 8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친일파들의 창작물을 독립국의 국가로 사용했다는 것부터가 한국 국민들로서는 치욕일 수 밖에 없으며, 국가 브랜드 이미지에도 치명적이다. 또한 정부가 인증한 시기만 따져도 사용 기한이 100년을 향해 달려가는 안익태ㆍ윤치호 애국가를 바꾸는 사안도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다. 윤치호는 정부가 공인하고 낙인을 찍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윤치호의 작사를 정부가 인정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애국가 교체 논란이 불거질 수 밖에 없다. 새로운 가사의 공모 비용과 보급, 국민들을 향한 재교육, 새 작사가의 사상 검증 건도 만만치 않국으며 접수받은 신버전 애국가 중 특정 하나를 국민들로부터 동의를 얻는 것도 너무나 고단한 일이다.[24]
이는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광복한 직후 1950년대부터 나오던 논란인데, 당시에도 있었던 논란을 반세기가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직도 덮으려고만 하는 것은 이러한 속사정이 있던 것이다.[25] 그래서 정부도, 학계의 주류 사학자들도, 근현대 역사 관련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애국가의 작사자를 '''미상'''으로 남겨둔 채 조용히 넘어가려는 것이다.

9.2. 박중양, 이규완과의 차이점


비슷한 시대의 흑화한 계몽론자였던 박중양, 이규완과도 다소 달랐다.
그와 성향 비슷한 인물로 박중양이 지목되지만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했다. 다만 윤치호는 교육 사업과 자선 사업, 언론 계몽 활동 등으로 민도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규완은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고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이규완의 실력 양성론과는 유사했지만 조선인 스스로 참정권과 자치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10. 둘러보기







[1] 본인이 일기장이나 외국인에게 보내는 서한 등에 이렇게 표기했다.[2] 음력 1864년 12월 26일.[3] 찬송가의 처음 번역된 이름은 찬미가였다.[4] 원 명칭은 우순 소리이다. 이솝 우화의 내용 중 일부를 실었다.[5] 윤치호가 손수 번역한 문법용어들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주어/술어’를 ‘주장사/설명사’로, ‘타동사/자동사’를 ‘월과동사/불월과동사’로, ‘조동사/본동사’를 ‘보조동사/원동사’로, ‘1/2/3인칭’을 ‘아인/미인/피인’으로, ‘가정법’을 ‘만약법’, ‘accent’를 ‘고성점’, ‘apostrophe’를 ‘소유점’으로 부르고 있다. 문장의 형식으로는 1~3형식까지만 인정하며, 4형식과 5형식은 인정하지 않고 1~3형식의 응용형으로만 본다. 문장의 통사론적 구조를 시각화해서 보여주기 위해, Tree Diagram이 나오기 전 영미권 언어학계에서 자주 쓰였던 Reed-Kellogg 다이어그램을 일부 개량한 형태로 곁들여서 설명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6] 책의 예문에는 윤치호의 성향상 기독교적 예문들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희한하게도 일부 반일적으로 보이는 예문들도 들어가 있는데, "I am a Korean and you are a Japanese.", "Korea, and not the Koreans, is what they want." 등이 그 예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교과서로 인가받지는 못했으나 민간에서 널리 읽혔다고 한다.[7] 윤치호는 영어 사전까지 만들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 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1911년에 저술한 적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고 한다.[8] 정작 그가 세운 학교는 현재 인문계 일반고다.(...)[9] 윤치호는 일본 찬양이 아닌 일본정부를 찬양하는데 그만큼 일본이 좋다는게 아닌 조선정부가 옆나라 정부보다 무능하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10] 독립 운동가 간의 분열을 정확히 예측했다. #을 참고하자. 그런데 해당 기사 자료는 시기나 앞뒤 정황이 맞지가 않다. 이 사료는 1933년 10월 4일자 윤치호 일기에 있는 내용인데, 당시 안창호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여운형은 신문사 사장에 있을 때였다. 실제로 둘 다 윤치호에게 찾아가 상의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윤치호가 보는 '지역 감정' 부분은 맞는 얘기...[11] 태평양 전쟁 발발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뻔뻔하게 군 것은 일본이다.[12] 특히 성악설은 인종론과 결합해 그가 사상적으로 우승열패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적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미친다.[13] 윤치호는 청나라 시기 중국 서민들의 (본인 기준에서) 문명개화되지 않아 더럽고 게으른 생활습관을 특히 싫어했다. 그는 본인의 일기에서도 중국인을 돈미(豚尾)라고 부르면서 멸시했던 적이 있다.[14] 이완용은 민권 운동을 한 적이 없다. 이완용이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이고, 만민 공동회 역시 관민 공동회에 관원의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다. 애초에 독립 협회도 정부의 영향이 강하던 시기, 고종과 대립하던 시기 등을 쪼개서 봐야하며 그 배경 역시 좀 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15] 순종황제의 아내인 순정효황후 윤씨는 한일 합방 도장을 찍지 못하게 하려고 옥새를 치마에 숨겼는데, 이걸 삼촌인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갔다. 그 뒤로 윤덕영은 시종원경과 귀족원 의원을 지내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16] 본처인 전주 강씨, 청나라 출신인 마애방, 백매려. 첩 2명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참고로 아들의 출생 순서를 고려할 때, '''재혼, 그런거 없다'''. 윤치호 결혼사를 보면 애석한 것이 많은데, 어렸을때 정략 결혼한 본처 전주 강씨가 서출임이 탄로난 데다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여 그 충격에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한동안 사창을 드나들락 거리다가 중국인 마애방을 만나고서야 정착하게 된다.[17] 원제는 북의 시인이다. 번역본 제목이 북의 시인 임화[18] 참고로 이런 이유때문에 이어령은 이 작품을 쓰레기로 몰았는데, 전향자의 논리와 전향의 비극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작품이다. 윤치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게 신빙성이 있는 건 아니다.[19] 특히 윤치호가 속한 해평 윤씨 가문은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명문가이다.[20] 총 15곡이 수록됐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다수가 번역곡이들이였으나 애국가와 가사가 거의 동일한 무궁화 곡 및 애국가 계열 3곡만 고유 명사가 사용된 번역곡이 아니였다.[21] 가사가 현 애국가와 거의 같다[22] 참고로 그 노래집에는 안창호의 '한반도가' 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23] 심지어 이땐 안익태의 작곡 대신 올드 랭 사인의 곡조와 윤치호의 가사만 있던 시절이었다.[24] 당장 주소지를 바꾸는 도로명주소 하나만으로도 2014년 시행 후 6년이 지난 2020년까지도 진통을 앓고 있는 것이 현 대한민국이다. 하물며 국가의 작사가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의 공표와 교체는 후폭풍이 어느 정도나 될지 가늠조차 힘들다.[25] 한편 김구는 임정 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논란에 3.1 운동이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시작했으니 작사자는 문제될 것 없다고 피력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