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구
崔允龜
1903년 8월 23일 ~ 1938년 12월 2일
일제강점기 때의 항일운동가. 중국공산당의 공산주의자. 본명은 최승팔(崔承八).# 다른 이름은 최창강(崔蒼岡)‧최윤구(崔允九)‧최윤구(崔允求)‧최윤규(崔允奎)이다.
1903년 8월 23일, 조선 평안북도 초산군 선천면의 농민 가정에서 최순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6살부터 조선독립군에 입대하여 항일 무장투쟁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가족을 따라 랴오닝 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의 라주이촌(砬嘴村)으로 이주한 이래로 남만주에서 활동을 하였다.
1929년 5월 친일파 숙청, 교민 보호, 국내 일제 기관 파괴, 일제 관리 제거, 악질 부호 응징 등을 주요 임무로 삼은 조선혁명군 결성에 참여하였다.1932년 3월 만주의 독립군단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중대장으로서 봉천성 신빈현(新賓縣) 영릉가(永陵街)‧흥경현성(興京縣城)‧흑우(黑牛)‧목기(木奇) 등지에서 만주 주둔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3년 1월 일제가 건설한 심해선(瀋海線) 철도를 파괴시키기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1935년 10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제1연대장을,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사령(司令) 등을 역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연계해서 벌인 만주 주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김활석의 휘하에 있던 조선혁명군 독립군의 잔존세력이 이러한 곤란한 현실에 직면하여 일부 간부들은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공산당계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였다. 결국 박대호와 최윤구 등은 1938년 2월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정우가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참가하여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최윤구를 선두로 조선인민혁명군에 스스로 편입한 하였다. 최윤구는 인민혁명군에 넘어온후 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1]
1938년에는 중국 공산당에서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군에 합류하여 본부의 참모장(參謀長) 등으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12월 만주 주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현재는 그의 유해는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대성산혁명열사릉에 보존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3년 8월 23일 ~ 1938년 12월 2일
1. 개요
일제강점기 때의 항일운동가. 중국공산당의 공산주의자. 본명은 최승팔(崔承八).# 다른 이름은 최창강(崔蒼岡)‧최윤구(崔允九)‧최윤구(崔允求)‧최윤규(崔允奎)이다.
2. 생애
1903년 8월 23일, 조선 평안북도 초산군 선천면의 농민 가정에서 최순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6살부터 조선독립군에 입대하여 항일 무장투쟁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가족을 따라 랴오닝 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의 라주이촌(砬嘴村)으로 이주한 이래로 남만주에서 활동을 하였다.
1929년 5월 친일파 숙청, 교민 보호, 국내 일제 기관 파괴, 일제 관리 제거, 악질 부호 응징 등을 주요 임무로 삼은 조선혁명군 결성에 참여하였다.1932년 3월 만주의 독립군단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중대장으로서 봉천성 신빈현(新賓縣) 영릉가(永陵街)‧흥경현성(興京縣城)‧흑우(黑牛)‧목기(木奇) 등지에서 만주 주둔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3년 1월 일제가 건설한 심해선(瀋海線) 철도를 파괴시키기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1935년 10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제1연대장을,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사령(司令) 등을 역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연계해서 벌인 만주 주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김활석의 휘하에 있던 조선혁명군 독립군의 잔존세력이 이러한 곤란한 현실에 직면하여 일부 간부들은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공산당계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였다. 결국 박대호와 최윤구 등은 1938년 2월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정우가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참가하여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최윤구를 선두로 조선인민혁명군에 스스로 편입한 하였다. 최윤구는 인민혁명군에 넘어온후 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1]
1938년에는 중국 공산당에서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군에 합류하여 본부의 참모장(參謀長) 등으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12월 만주 주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3. 기타
현재는 그의 유해는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대성산혁명열사릉에 보존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 한편 김활석은 30여 년이나 면면히 계승된 민족주의계 독립군으로서의 조선혁명군 전통과 명의를 포기할 수 없어 20∼3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