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르본 술탄국

 


'''치르본 술탄국'''
'''Kasultanan Cirebon'''[1]
'''Kesultanan Cirebon'''[2]

1445년–1926년
수도
치르본
정치체제
군주제
언어
자바어, 순다어, 말레이어
종교
이슬람교
민족
순다인, 자바인
성립 이전
순다 왕국
멸망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1. 개요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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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르본 술탄국은 인도네시아 북서부 해안 치르본 인근에 15세기부터 존재하였던 국가였다. 치르본 술탄국은 16세기 이후 자바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나, 이슬람 포교의 중심지이자 문화·예술의 중심지로서 자바 전역에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역사


치르본 지역에서 토착 호족이 규합되어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진 것은 1445년경이다. 이들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순다 왕국에 공물을 바치며 복종하였으나, 전설적인 지도자이자 울라마(이슬람 법학자)인 수난 구눙자티(Sunan Gunungjati, 1448?–1568, 재위 1479–1568[3])[4]의 치세에 순다 왕국에서 독립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수난 구눙자티는 이집트의 하심가 셰이크 샤리프 압둘라 마울라나 후다(Syarif Abdullah Maulana Huda)와 순다 왕국 실리왕이 왕의 딸 라라 산탕(Nyai Rara Santang)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순다 왕국의 수도 파자자란(Pajajaran, 오늘날의 보고르)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이슬람을 공부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파쿵와티 궁(Keraton Pakungwati)에서 차르본 1세(Carbon I)로 즉위한 수난 구눙자티는 외할아버지인 실리왕이 왕에게 수도 파자자란으로 보내는 공납을 중단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고, 1482년 4월 2일 치르본 독립을 선언했다[5]. 1515년 치르본은 공식적으로 이슬람법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왕국이 된다. 수난 구눙자티는 순다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드막의 술탄 트릉가나(Trenggana)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토메 피르스(Tomé Pires)는 《동방지》(Suma Oriental, 1512–1515)에서 당대의 치르본을 순다 왕국의 배후지 가운데 하나로서 '셰로보앙'(Cheroboam) 또는 '셰리몽'(Cherimon)으로 언급했다.
수난 구눙자티의 시대에 치르본은 자바 서부의 무역항으로서 번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 교육과 포교의 중심지 기능도 수행하였다. 동남아시아 지역을 비롯하여 아랍, 인도, 중국에서도 상인들이 내항하였다. 명나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치르본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수난 구눙자티가 명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명나라의 공주 옹톈(Ong Tien)과 결혼하였는데, 결혼한 후 옹톈 공주는 이름을 라라 스만딩(Nyi Rara Semanding)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어쨌든 구눙자티 시대에 명나라와 치르본의 친선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며, 치르본은 이때 자바에서 화교 이민의 중심지가 되었다. 치르본의 차이나타운(Pecinan)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 중 하나이다. 중국과의 교류는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치르본 특유의 바틱 문양인 므가믄둥(megamendung)은 중국풍 구름 문양과 아주 닮았다.
구눙자티가 계승자로 지정했던 둘째 왕자가 1565년에 사망한 후, 구눙자티는 후손들 중 적합한 계승자를 발견하지 못해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1568년에 사망했다. 혼란기를 노려 구눙자티가 신임하던 장군 파타힐라(Fatahillah)가 잠시(1568–1570) 왕이 되었으나 곧 사망하고, 수난 구눙자티의 증손자 팡에란 마스(Pangeran Mas)가 파늠바한 라투 1세(Panembahan Ratu I, 파늠바한은 '왕'과 같은 군주 명칭)로서 왕위에 오른다. 라투 1세의 치세는 1570년부터 1649년까지 79년간이나 이어졌다. 이 시대에 치르본은 이슬람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한층 강화되어, 자바 중부의 신생국가 마타람 술탄국에까지 종교적 영향력을 미친다. 그러나 치르본의 정치적, 군사적 역량은 종교적 영향력에 비하면 미약하였다. 17세기에 마타람의 술탄 아궁이 서부 자바로 원정하자, 오히려 1619년 이래로 치르본 왕국은 마타람의 봉신국이 되어, 술탄 아궁의 요구대로 바타비아 포위전 등에서 군사를 일으켜 마타람을 도왔다. 이 시대에 파라향안 등의 내륙 지대로 마타람의 통치가 미치자 순다 지역에 자바인들의 자바 문화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파늠바한 라투 2세(Panembahan Ratu II, 사후 추존 기릴라야Panembahan Girilaya, 재위 1649–1677)의 시대에 치르본 왕국은 동쪽의 마타람 술탄국과 서쪽의 반튼 술탄국 사이에 껴서 줄타기하는 형국이었다. 1650년에 마타람이 반튼을 공격할 때 60척에 이르는 치르본의 선단을 동원하여 반튼의 항구 타나하라(Tanahara)를 공격토록 하였는데, 반튼과의 이 해전은 치르본의 대패로 끝났으며 치르본 내에서는 반마타람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파늠바한 라투 2세는 마타람의 무자비한 군주 아망쿠랏 1세에 의해 마타람 수도 플레렛으로 불려가 처형되었다. 이후의 공위 시기에 왕사크르타(Wangsakerta) 왕자가 국사를 돌보고 있었으나, 왕사크르타 왕자의 두 형이 볼모로 마타람에 붙잡혀 있었다. 왕사크르타는 반튼으로 찾아가 술탄 아긍 티르타야사(Sultan Ageng Tirtayasa, 재위 1651–1683)에게 마타람에 있는 형들의 구출을 부탁했다. 마두라섬의 지방 영주 트루나자야(Trunajaya, 1649–1680)가 반마타람 봉기(1674–1681)를 일으켜 혼란한 마타람 중심부에서 반튼의 술탄 아긍 티르타야사는 비밀리에 치르본의 두 왕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치르본의 세 왕자는 왕위계승에 합의하지 못해 모두가 각자 세력권 내 서로 다른 궁에서 따로 업무를 보았으므로, 치르본 왕국은 군주 3명을 모시게 되었다. 맏형 마르타위자야 왕자(Martawijaya)는 카스푸한 궁(Keraton Kasepuhan)에 거주하는 카스푸한의 술탄(Sultan Kasepuhan)이 되었고(술탄 스푸 1세, Sultan Sepuh I, 재위 1677–1703), 둘째 카르타위자야 왕자(Kartawijaya)는 카노만 궁(Keraton Kanoman)에 거주하는 카노만의 술탄(Sultan Kanoman)이 되었으며(술탄 아놈 1세, Sultan Anom I, 재위 1677–1723), 막내 왕사크르타 왕자는 카프라보난 궁(Keraton Kaprabonan)에 거주하는 파늠바한 치르본(Panembahan Cirbon)이 되었다(재위 1677–1713). 이때부터 반튼의 술탄 아긍 티르타야사에 의해 군주 명칭으로 전통의 '파늠바한'이 아닌 술탄의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두 형의 술탄위 즉위식은 반튼에서 거행되었다. 막내 왕사크르타 왕자는 파늠바한의 칭호를 얻었으나 실질적인 영토를 받지는 않고 카프라보난[6] 궁을 이슬람 학교를 겸하여 관리하는 데 만족하였다.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18세기 초 마타람 술탄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 치르본 술탄국의 종주권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치르본 술탄국은 18세기 말까지 자바 중부의 수라카르타나 마두라섬의 공국들과 유사하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직접 영향을 행사하지 않는 자치 지역이었다. 한동안 술탄위 계승은 문제 없이 이루어졌으나, 술탄 아놈 4세(재위 1798–1803)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카노만계 술탄위 계승 분쟁이 발발하였다. 카노만의 라자 카노만 왕자(Pangeran Raja Kanoman)는 카노만 술탄위를 받지 못한다면 자신도 별도의 영지와 술탄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인도 정부는 라자 카노만 왕자를 지지하여 1807년 술탄 차르본 카치르보난(Sultan Carbon Kacirebonan)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라자 카노만 왕자는 카노만 정통 왕가에서는 '술탄'위를 사용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정통 카노만 술탄위는 술탄 아놈 5세 혹은 술탄 아놈 아부솔레 이마무딘(Sultan Anom Abusoleh Imamuddin, 재위 1803–1811)이 이어받았다.
1807년 치르본 분할에 관여함을 계기로 동인도 식민 정부의 간섭이 심해져 19세기 전반에 치르본의 모든 왕가는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26년부터는 치르본 왕가들이 모든 실질적인 통치권을 잃고 구 치르본 영토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지방으로 편입되었으며, 치르본 술탄들은 오로지 의식의 거행자이자 상징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현대까지 명목상 치르본 술탄위는 존속하였다. 최근에는 욕야카르타 특별주와 유사한 형태로 구 치르본의 강역을 아우르는 특별주를 설치하자는 제안도 나왔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 자바어, 순다어[2] 인도네시아어[3] 아마도 종교적 윤색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수난 구눙자티가 당시 기준으로 장수한 것은 맞을 것이나, 실제로 120살을 살았다고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4] 인도네시아 이슬람 성인인 '9인의 왈리'(Wali Sanga, Wali Songo) 가운데 한 명이다. 샤립 히다야툴라(Sharif Hidayatullah)라고도 한다.[5] 그래서 4월 2일은 오늘날 치르본현의 기념일이다.[6] 크프라보난Keprabonan이라고도 하는데, 카프라보난과 크프라보난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며, 카프라보난은 자바어 또는 순다어식 발음, 크프라보난은 인도네시아어식 발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