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람 술탄국

 


'''마타람 술탄국'''
'''Kasultanan Mataram'''[1]
'''ꦤꦒꦫꦶꦩꦠꦫꦩ꧀'''[2]
'''Kesultanan Mataram'''[3]

1587년–1755년
수도
쿠타그데[4](Kuthagedhé, 1587–1613)
카르타(Karta, 1613–1645)
플레렛(Plered, 1645–1680)
카르타수라(Kartasura, 1680–1745)
수라카르타(1745–)
정치체제
군주제
언어
자바어(궁정어, 공용어)
순다어, 마두라어
종교
이슬람교
민족
자바인, 마두라인, 순다인
성립 이전
파장 왕국
멸망 이후
수라카르타 수난국
욕야카르타 술탄국
1. 개요
2. 역사
2.1. 초기
2.2. 술탄 아궁 시대
2.2.1. 자바와 마두라의 통합
2.2.2. 해상 원정
2.2.3. 제도 개혁과 문화
2.2.4. 역법 개혁: 자바력의 도입
2.3. 아망쿠랏 1세와 트루나자야 봉기
2.4. 계승 전쟁과 네덜란드 종속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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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자파힛 이후 군소 왕국 시대에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세력을 구축한 다른 토착 국가들이 대부분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교역을 통해 번성한 것과는 달리, 자바섬 중부의 드막 술탄국(1475–1554)[5]과 드막의 후계 세력들을 통합한 마타람 술탄국(1587–1755)은 자바 내륙의 거대한 배후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한 내륙 농업 국가였다. 지리적으로 이러한 국가 체제는 관개수로를 이용한 수도작이 군도 전체에서 특별히 발달하고, 그로 인해 높은 농업생산성을 달성하여[6]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7]를 지탱할 수 있었던 자바, 정확히는 중부 혹은 동부 자바에서만[8] 출현할 수 있었다.
마타람 술탄국은 인도네시아 중부에서 마자파힛 제국을 멸망시킨 드막 술탄국이 붕괴한 후 군소 국가들이 난립하는 형세가 이어지다 16세기 말 파장과 마타람 지역이 통합되어 생겨난 국가였다. 마타람 술탄국은 내지의 많은 인구를 기반으로 한 강한 군대를 보유하였다. 마타람 술탄국은 17세기 전반 술탄 아궁의 시대에 중부·동부 자바와 마두라섬을 완전히 통합하고, 자바 서부 대부분의 지역과 보르네오 남서부, 방카블리퉁 제도 일부까지 영향권에 편입하는 전성기를 맞아, 팔렘방[9]반자르마신[10] 지역을 제외하면 트릉가나 시대 드막 술탄국의 세력권을 거의 회복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내정의 실패로 마타람 술탄국은 여러 반란에 휘말리며 약화되어 갔다.
18세기 초반과 중반 여러 차례의 대규모 내전 자바 왕위 계승 전쟁 및 자바 중부에서 벌어진 자바 전쟁을 겪으며 결과적으로 마타람 술탄국은 외곽 영토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대거 할양하고, 수라카르타 수난국욕야카르타 술탄국으로 분리되었으며 두 국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영향권 하의 자치 번왕국이 되었다. 이 가운데 욕야카르타 술탄국은 18세기 후반에도 사실상 독립국으로 존재하였으나, 19세기 전반 프랑스 산하 네덜란드군의 침공, 영국군의 침공과 디파나가라 전쟁을 겪으며 결국 네덜란드에 종속되었다.
마타람은 자바 전통 문화의 산실이었고, 자바어 문학, 자바식 가믈란 음악, 자바 무용, 자바식 그림자극(와양 쿨릿), 바틱 공예 등 현대 자바 전통 문화의 기본 요소 가운데 많은 부분이 마타람 시대에 현재와 유사한 형태로 정립되었다. 이 가운데는 정통 이슬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있었으며, 마타람 지역은 명목상의 이슬람화 이후에도 자바 고유의 혼성 종교 문화 크자웬(Kejawèn)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섬 전역에 자바어와 자바인의 문화를 전파하였는데, 서부의 순다 지역에서도 자바 문화의 권위가 인정되어 문어로서 자바어가 쓰일 정도였고 이에 따라 순다 지역에 관해 자바어로 저술하는 순다–자바 문학이 자바 문학에서 일정한 세를 점하게 되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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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바밧 타나 자위》 장식 필사본
바밧 기얀티》 인쇄본 첫 페이지
[1] 자바어[2] 자바어(자바 문자)[3] 인도네시아어[4] 오늘날 욕야카르타시의 일부[5] 단, 드막의 경우 북쪽 바다에 가까운 자바 중북부에 세력 중심을 두었고, 드막의 양대 항구였던 즈파라의 군항과 오늘날 드막현 보낭(Bonang) 지역의 상업항도 마타람 시대에 비해 정치적, 경제적 중요도가 높았다. 드막은 이외에도 수라바야, 팔렘방, 투반을 비롯한 다수의 주요 항구를 거느리고 여전히 마자파힛을 부족하나마 계승하는 해양 세력으로서도 기능하였다.[6] 수마트라(아감 및 토바 지역은 예외)나 보르네오, 술라웨시,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 등지는 과도하게 습하거나 또는 건조하거나, 대규모 농업에 적합한 넓은 저지대가 적거나, 배수가 잘 안 되는 등의 이유로 농업이 주로 전통적으로는 화전 방식이었다. 반면 자바(넓게는 마두라, 발리, 롬복 일부를 포함)에서는 화산 지대가 만들어내는 비옥한 토질, 화산 지대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유속이 빠르고 침적토를 운반하는 , 과히 건조하거나(소순다 열도) 습하지(수마트라, 보르네오, 술라웨시, 말루쿠) 않고 적당히 습기 찬 기후 등, 여러 호조건이 맞물려 화전의 빈도가 매우 낮아졌고 쉽게 관개농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 2장 및 3장 참조.[7] 최근까지도 자바섬의 인구는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의 약 55–60%를 차지하며, 과거로 갈수록 자바의 인구 비중은 근소하게 늘어난다. 자바의 과잉인구를 주변 도서로 이주시키는 정책은 네덜란드 식민시기부터 적극 시행되어 왔다.[8] 몬순 기후인 북부 해안 지대 서부에서는 관개 사업이 오래전부터 이루어졌지만 땅이 넓지 못했다. 북부 해안을 제외한 서부 자바에서는 관개농업이 중부나 동부에 비해 어려웠고, 출현 시기도 상대적으로 늦었다. 수도작 방식의 논인 사와(sawah)는 서부 순다 고지대에서는 수므당(Sumedang) 등지에서 1750년경에 처음 생겨났고 1800년 전후에야 더 높고 넓은 반둥보고르 주변 지역, 그리고 그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 75쪽.[9] 술탄 아궁은 한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견제하기 위해 팔렘방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팔렘방으로 마타람 함대를 보내 팔렘방에 마타람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팔렘방에 대한 마타람의 세력 투사는 일시적이었고, 그 이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10] 술탄 아궁은 반자르 술탄국으로도 원정하여 보르네오 남부 전체를 마타람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려 계획하였으나, 이 원정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2.1. 초기


마타람 술탄국을 세운 창업 군주는 드막 술탄국의 마지막 군주 아랴 프낭상의 암살자 수타위자야(Sutawijaya)였다. 수타위자야는 친아버지 키 아긍 파마나한(Ki Ageng Pamanahan, 마자파힛 제국 라자사 황가의 후손이라고 일부 연대기가 주장함)[11]이 영주로 다스리던 욕야카르타 인근 마타람 지역을 1575년 물려받아 다스리며, 인접한 파장(수라카르타 인근)을 중심으로 하는 파장 왕국(1568–1587) 산하에 있었다. 그러나 수타위자야가 점차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며 파장의 왕 하디위자야(Hadiwijaya)와 수타위자야의 사이는 점점 나빠졌고, 양 세력의 전쟁까지 발발하였으나 파장군이 마타람을 침공하다 격퇴되었다. 하디위자야 사후, 수타위자야는 파장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파장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파장 산하의 드막 지역과 함께 마타람에 합병하였다. 이렇게 파장, 마타람, 드막을 통합한 수타위자야가 왕위(파늠바한Panembahan)를 칭하고 '파늠바한 스나파티'(Panembahan Senapati, 재위 1587–1601)로서 1587년에 즉위하여 마타람 왕국을 개창하였다.
파늠바한 스나파티가 아직 수타위자야로서 파장 산하에 있을 때, 남해의 여신 냐이 라라 키둘(Nyai Rara Kidul)[12]이 수타위자야를 만났는데, 잘생긴 수타위자야와 사랑에 빠져 그를 정치적으로 조력했다는 자바의 전설이 있다. 이 냐이 라라 키둘 전설은 이후에도 이어져, 냐이 라라 키둘은 오늘날까지도 마타람과 욕야카르타 술탄가의 수호신이자, 마타람/욕야카르타 군주들의 상징적 배우자로 여기는 관습이 있다.[13]
파늠바한 스나파티는 파장과 드막을 병합한 후에도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당시 드막 술탄국의 붕괴 이후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던 중부·동부 자바 각지로 마타람의 영토를 확장하고,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여러 지역은 원정에서 승리하여 병합되었지만, 파티(Pati, 자바 중북부) 지역처럼 마타람에 자발적으로 귀부해 온 경우도 있었다. 이때 마타람과 유사하게 동부를 점차 통합하고 각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수라바야 공국 세력이 마타람의 경쟁자가 되었다. 1590년 수라바야의 조력을 받는 마디운을 공격해 점령한 파늠바한 스나파티는 1591년 크디리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한 파벌을 지원하였으나, 수라바야에서 지원받는 반대 파벌이 계승 분쟁에서 승리하여 크디리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1599년, 파늠바한 스나파티는 자바 북부의 주요 항구 즈파라(Jepara)를 보유한 칼리냐맛 왕국을 공격해 합병하였다. 1600년, 자발적으로 귀순했던 파티의 공작 프라골라 1세(Pragola I)가 마타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파늠바한 스나파티가 이끄는 마타람군이 진압하였다.
파늠바한 스나파티를 계승하여 마타람의 2대 군주가 된 것은 태자였던 파늠바한 스나파티의 아들 졸랑(Raden Mas Jolang)으로, 그의 왕호는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Panembahan Hanyakrawati, 재위 1601–1613)였다. 그러나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의 치세 전반은 형이었던 푸그르 공(Pangeran Puger, Raden Mas Kentol Kejuron)과의 권력 투쟁으로 얼룩졌다. 푸그르 공은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보다 나이가 많은 자신이 마타람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1602년 영지 드막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발생한 마타람 최초의 왕위 계승 전쟁은 1605년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가 승리하고 패배한 푸그르 공은 체포되어 쿠두스(Kudus)로 유배되었다.
치세 후반인 1610년 무렵부터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는 부왕이 펼쳤던 수라바야와의 대결 정책을 재개하였고, 1613년에는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의 마타람군이 수라바야를 침공하였으나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수라바야 침공 과정에서 수라바야 산하 그레식(Gresik)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불탔는데,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는 당시 특별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적대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사과하고, 대신 자신의 세력권인 즈파라에 새로운 동인도 회사 상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13년,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는 크라퍅(Krapyak) 숲에서 사슴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사망하였다. 마타람의 왕위는 아들 랑상(Mas Rangsang), 즉 후일의 술탄 아궁이 파늠바한 하냐크라쿠수마(Panembahan Hanyakrakusuma)로서 계승하였다.

2.2. 술탄 아궁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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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아궁 시대의 마타람 술탄국
[11] 드막 붕괴 직전, 하디위자야가 드막 군주 아랴 프낭상과 반목할 때 하디위자야 편에 서서 하디위자야를 도왔으며, 그 공로로 마타람 지역의 통치권을 받았다. 마타람 왕(파늠바한)국 수립 이전의 통치자이기는 하지만, 간혹 마타람 술탄국의 군주를 언급할 때 파늠바한 스나파티 이전 초대 군주로 간주하기도 한다.[12] 자바어 현대 마타람 방언 및 인도네시아어 발음은 '냐이 로로 키둘'(Nyai Roro Kidul)이다. 간혹 'Nyai Lara Kidul', 'Nyai Loro Kidul'이라는 표기도 사용된다.[13] 이와 같은 '상징적 배우자' 관념은 오늘날(2021년 1월 기준) 술타나(여성 술탄)가 즉위할 가능성이 높은 욕야카르타 지역에서 술타나 계승에 걸림돌이 된다. 냐이 라라 키둘을 단순히 미신이자 상징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자바인들도 극단적 전통주의자를 제외하면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자바에서도 남해의 여신 전승은 전통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고, 여러 문화 요소에서 '여신'인 냐이 라라 키둘에 관한 한 욕야카르타 술탄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이는 단순히 여신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자바 문화에서 술탄의 속성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욕야카르타가 인도네시아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지역이라고는 하나 아직 동성결혼을 두고 지역 사회에서 반발하는 이들이 많다.
술탄 아궁(술탄 아궁 하냐크라쿠수마, '위대한 술탄, 우주의 지배자'[14], Sultan Agung Adi Prabu Hanyakrakusuma, 1593–1645, 재위 1613–1645)은 마타람의 제3대[15] 군주로, 마타람의 국력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마타람의 황금기를 열었다.

2.2.1. 자바와 마두라의 통합


술탄 아궁의 지휘 하에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동부의 라이벌 수라바야 공국과 11년에 걸친 긴 전쟁(1614–1625)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수라바야가 마타람 본토를 노리고 공격해오는 위기도 있었지만 술탄 아궁은 전투의 승리로 이를 극복하였으며, 차근차근 수라바야의 동맹 세력들인 라슴(Lasem, 1616년 원정), 파수루안(Pasuruan, 1616–1617년 원정), 투반(Tuban, 1619년 원정) 등을 공격해 병합하며 수라바야를 약화시켜 갔다. 수라바야도 강대한 마타람에 맞서 선전했지만, 수라바야 최후의 동맹으로 수라바야의 중요한 식량 공급처였던 마두라섬의 공국들에 대한 공략이 1624년까지 완료되고 난 후에는 술탄 아궁이 마침내 수라바야 본토를 점령하고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었다.
술탄 아궁은 수라바야를 무력으로 점령하기는 했지만 자바 동부에서 일찍 이슬람을 받아들였던 수라바야의 문화적 위신을 어느 정도 존중하였으며, 수라바야 점령 후 이슬람 성인 수난 암펠(Sunan Ampel)의 묘를 지키며 은거하고 있던 수라바야의 공자 프킥 공(Pangeran Pekik, 수라바야의 마지막 독립 공작 자얄릉카라Jayalengkara의 아들)을 1633년 마타람 궁정으로 불러와 자신(술탄 아궁)의 여자 형제와 결혼하고 궁정에 거하게 하였다. 이에 보답하여 프킥 공도 수라바야 궁정의 문화를 마타람 궁정으로 수입하여, 마타람이 정치 영역뿐 아니라 문화 영역에서도 자바를 통합함으로써 마타람의 문화 수준이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데 기여했다. 프킥 공의 노력으로 마타람인들이 수라바야를 비롯한 동부 지역에서 16세기에 쓰인 문헌들에 폭넓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하 별도의 절에서 다룬 자바력의 도입에도 프킥 공의 영향력이 일정 부분 작용하였을 수 있다. 1630년대, 자바 동부에서 수난 기리(Sunan Giri) 이래 이슬람의 중심지로 문화적 위신이 높은 지역이었던 기리(Giri, 오늘날의 그레식 지역)에서 반독립 상태였던 영주 수난 카위스 구와(Sunan Kawis Guwa)가 마타람의 지배에 반발하였다. 술탄 아궁은 종교적 권위가 높은 기리 지역을 함부로 건드리기 난처해하다가, 결국 1636년 프킥 공을 시켜 기리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프킥 공은 수난 암펠의 후손을 자처하는[16] 수라바야 공가의 인물이었는데, 수난 암펠은 기리 지역의 초대 군주 수난 기리의 스승이었으므로 당대인들에게는 제자의 후계자가 스승의 후계자에게 반항하는 형세로 마타람 측이 종교적·혈통적 정당성을 갖추게 되었다. 프킥 공이 이끄는 마타람군은 1636년 기리를 점령하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술탄 아궁은 서부 자바로도 진격하여 치르본 술탄국(1617년 원정)과 수므당라랑 왕국(1620년 귀순)[17]을 복속시키고 파라향안(오늘날의 반둥, 수므당 등) 지역을 마타람으로 통합하며 반튼 술탄국을 크게 위협하였다. 술탄 아궁은 비록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거점이던 바타비아를 두 차례에 걸쳐 포위공격(1628, 1629)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최동단의 블람방안 왕국(1639년 원정)을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고 복속시키기도 했다.

2.2.2. 해상 원정


술탄 아궁은 드막 시대까지만 해도 자바 중부 세력이 수마트라 동부와 보르네오 남부를 지배하는 해양 세력이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해군도 정비하여 해상 원정으로 보르네오섬 서남해안의 수카다나 지역(1622년 원정)을 손에 넣었다. 이는 당시(1622년) 수카다나 지역에 마타람보다 먼저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라바야 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술탄 아궁의 마타람군은 나아가 수카다나를 거점으로 반자르 술탄국을 공격할 태세를 취했으며 반자르 술탄국 역시 마타람의 공격에 대비하였지만, 마타람 본토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보르네오에서는 병참 문제가 심각했으므로 수카다나 정복 후 마타람이 반자르를 바로 침공하지는 못했다. 마타람과 반자르 간 대치 형국이 이어지던 1637년, 결국 술탄 아궁이 무모한 보르네오 정복보다 자바 내부의 문제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하여 마타람과 반자르 간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18]
한편 수마트라 동부에서 드막 붕괴 이후 독립한 팔렘방 왕국에서 1636년 군주 마데 소칸 공(Pangeran Made Sokan)이 후계자 없이 갑자기 사망하여 팔렘방이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지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팔렘방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하였는데,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마타람도 팔렘방으로 함대를 파견하여 팔렘방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팔렘방에 대한 마타람의 개입은 짧았으며, 궁극적으로 팔렘방이 과거의 드막처럼 마타람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지는 않았다.
수마트라 동부와 인접한 방카섬블리퉁섬 등으로 구성된 방카블리퉁 제도는 원래 마자파힛 붕괴 이후 팔렘방, 반자르마신과 함께 드막 술탄국의 영향권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16세기 중반 드막 술탄국이 붕괴하자 방카섬은 조호르 술탄국이 접수하였으며, 블리퉁섬에는 북부의 바다우 왕국(Kerajaan Badau)과 남부의 발록 왕국(Kerajaan Balok)이라는 독립 왕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술탄 아궁은 수마트라 동부와 함께 방카블리퉁 제도 지역에도 드막 시대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원하였으며, 블리퉁섬 남부의 발록 왕국을 복속시키고 이 지역을 마타람의 영향권에 편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술탄 아궁의 시대에 방카블리퉁 제도 전역이 마타람 세력에 편입되지는 않았으며, 이 지역에서는 마타람 외에도 반튼 술탄국, 조호르 술탄국, 팔렘방 술탄국 등 인접 세력들의 경쟁이 17세기 내내 이어졌다.
술탄 아궁이 의욕적으로 수행한 육상 및 해상 원정으로, 술탄 아궁의 치세 후반에 마타람의 영토는 중부와 동부 자바 전역(동쪽 끝의 블람방안 지역은 안정화되지 않음), 마두라섬, 서부 자바 대부분(반튼 지역과 바타비아 제외), 보르네오섬의 수카다나 지역과 블리퉁섬 남부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2.2.3. 제도 개혁과 문화


술탄 아궁은 정복 사업과 함께 마타람의 영토에서 행정 제도를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술탄 아궁의 시대에 정식으로 이슬람 이전 시대의 '브라'(bhra, batara)에 해당하는 '아디파티'(adipati), 즉 독자적 영지를 갖춘 최고위 지방관으로서 공작이 마타람 군주가 임명하는 관직으로서 행정 제도에 통합되어 공작령(kadipaten)을 다스리게 되어, 기존의 현령(bupati)이 다스리는 현(kabupaten)과 함께 이원적 행정 체계가 갖추어졌다. 일반적으로 공작의 권한이 현령보다 넓었다. 비록 술탄 아궁 시대에도 여러 공작과 현령이 폭넓은 자치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이슬람 이전 시대나 드막, 파장 시대에 비해서는 비교적 마타람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가 진전되었다. 미정복 지역 반튼 술탄국바타비아와 대치하고 있던 자바 서부에도 새로 공작령이 들어섰는데, 자바 서부의 공작은 자바판 변경백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마타람 술탄국에서 정비된 지방 행정 단위 현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에 네덜란드가 그대로 이어 받아 자바와 마두라에서 행정 단위 체계의 일부로 사용하였으며, 인도네시아가 수립되자 전국적으로 적용되었다. 술탄 아궁은 또한 조세 체계를 개혁하였으며 보다 샤리아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술탄 아궁 시대에는 브다야(Bedhaya)[19] 무용 양식이 정립되었으며, 극예술 와양이 흥성하여 서부 파라향안 지역에서까지 유행하였고, 수많은 문학 작품이 쓰였다. 술탄 아궁 본인이 종교, 윤리, 미학 등에 대한 견해를 《사스트라 근딩》(Serat Sastra Gendhing)이라는 시문학 작품으로 적어 남기기도 했다. 술탄 아궁의 시대에 마타람은 초기 수도였던 쿠타그데(Kuthagedhé, 수도 1587–1613, 오늘날 욕야카르타의 일부로 인도네시아어식 명칭은 '코타그데'Kotagede)에서 수도를 인근의 카르타(Karta, 수도 1613–1647)로 옮겼고, 술탄 아궁은 1614년 카르타에 마타람 궁전을 신축하였다. 1632년부터는 오늘날 욕야카르타 특별주 반툴현(Kabupaten Bantul)에 마타람 왕가의 묘역인 이모기리(Imogiri)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술탄 아궁은 즉위 후 한동안 왕호로 '파늠바한'을 썼으며, 이때의 칭호는 '파늠바한 하냐크라쿠수마'(Panembahan Hanyakrakusuma)였다. 1624년 마두라 정복이 완성된 후 술탄 아궁은 격을 높여 '수수후난'을 왕호로 하였고, '수수후난 아궁 하냐크라쿠수마'(Susuhunan Agung Hanyakrakusuma)가 되었다. 술탄 아궁이 스스로 정식으로 '술탄'위에 오른 것은 말년인 1640년의 일이다. 이처럼 '술탄'은 자바에서 전통의 파늠바한과 수수후난보다 높은 격을 갖춘 왕호였으며, 특히 마타람 술탄국에서는 욕야카르타 술탄국하믕쿠부워노 1세 이전까지 '술탄 아궁의 왕호'로서 군주들이 감히 자칭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타람 술탄국에서 술탄 아궁을 계승한 후계 군주들이나, 마타람 술탄국의 후계 세력인 수라카르타 수난국의 군주들은 모두 정식 왕호로 '술탄'보다 격이 낮은 '수수후난'(수난)을 사용했다. 술탄 아궁은 또한 궁정인들 사이에서 궁정 자바어를 사용하도록 하여 궁정인들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한몸처럼 움직이도록 하였다.

2.2.4. 역법 개혁: 자바력의 도입


술탄 아궁이 시행한 개혁 가운데 문화사적으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역법 개혁이다. 술탄 아궁 이전, 자바에서는 약 2세기에 걸친 이슬람화에 따라 표면상으로 이슬람이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음력인 아랍의 히즈리(Hijri)력이 쓰이지 않았으며,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태음태양력인 힌두 샤카력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일거에 히즈리력까지 받아들인다면 기존에 샤카력을 기반으로 구축되었던 기년 체계에 혼란을 줄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탄 아궁은 샤카력의 기년법을 기반으로 하되, 히즈리력의 음력 체계를 받아들인 독특한 자바력(Penanggalan Jawa) 체계를 도입하여 그레고리력 1633년 또는 샤카력 1555년부터 공식 역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자바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바력 이전에 사용되었던 샤카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샤카력 원년은 율리우스력 78년에 해당하며, 샤카력 1년의 산정은 그레고리력 1년과 유사하므로 샤카력 기년법은 율리우스력 또는 그레고리력에서 78을 뺌으로써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샤카력 1555년은 자바력 1555년과 같다. 그러나 이제부터 자바력에서 1년, 즉 음력 1년(tahun)은 365(366)일이 아니라, 히즈리력과 유사하게 음력 주기를 따라 354(355)일로 계산하게 된다. 자바력의 1년은 열두 음력 달(wulan)로 이루어졌고, 히즈리력을 그대로 가져오되 이름을 자바식으로 붙여 30일 또는 29일이 음력 달 하나인 체계를 취했다. 이에 따르면, 자바력 1555년은 샤카력 1555년이자 그레고리력 1633년이지만, 그레고리력 2020년은 자바력 1953년으로 그레고리력과 자바력의 차이가 78년에서 67년으로 줄어들었음을 볼 수 있다. 자바력에서는 또한 히즈리력과 마찬가지로 7일이 하나의 묶음을 이루는 일주일 체계를 도입하였으며, 각 요일의 명칭으로 아랍식 명칭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그러나 자바력에서는 음력 달(wulan) 외에, 비공식적으로 자바식 샤카력에서 내려온 양력 달(mangsa) 역시 세어나갔다. 양력 달도 열두 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시 자바 고유의 명칭으로 불렸고, 그 길이는 균일하지 않고 짧으면 23일에서 길면 43일까지 들쭉날쭉했으며 이를 모두 합치면 365(366)일로 양력 1년과 같았다. 달의 길이가 들쭉날쭉한 이유는 양력 달이 자바의 기후를 기반으로 매겨졌기 때문으로 각각의 달마다 예상되는 기후와 기상 현상이 정해져 있었다. 인도나 심지어 다른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으로만 이동해도, 남반구의 우림-몬순-사바나 기후대가 혼합된 자바와 동일한 환경인 곳은 없었으므로 자바력에 따른 월별 기후는 잘 맞지 않았다. 이는 마치 타밀 역법에서 여섯 개의 계절을 나누고 각 계절마다 기후를 대응시키는 체계와 유사하다. 한편 이슬람식 7일 주일 체계 외에, 자바 고유의 5일 주일(pasaran) 체계도 그대로 폐기되지 않고 7일 주일 체계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전통 시대 자바에서 장은 5일 주일 체계에 따라 섰다.
자바력에서 태양력에 따른 기년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바력 도입 이후에도 농업 등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양력 달에 따른 절기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유용했고, 공식 음력 기년을 관료들이나 학자들이 사용한 것과 별도로 농업 현장에서는 양력 절기를 따랐다. 그레고리력 1856년, 당시 수라카르타 수난국의 군주(수난)였던 파쿠부워노 7세는 양력 달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양력 달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태양력 1년 주기가 시작되는 시기, 즉 땅에서 물이 바싹 말라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가장 황량한 양력의 첫째 달 카사(Mangsa Kasa[Kaso], 41일)가 시작되는 시기는 그레고리력 6월 지점(至點, June solstice)으로, 북반구에서는 하지점에 해당하지만 남반구에 위치한 자바에서는 동지점에 해당하는 시기이자 자바의 건기 한복판에 위치하는 시기이다.
자바력에서는 태음력에 기반한 새로운 점성술 체계 역시 도입되었다. 이를 위해 여러 음력 년을 묶어 더 긴 단위가 만들어졌다. 음력 8년은 '윈두'(windu)라는 단위로 묶였으며, 15윈두는 다시 '쿠룹'(kurup)이라는 단위로 묶였다. 하나의 쿠룹은 자바력에서 일종의 세기에 해당하며, 그레고리력 2020년 현재를 포함하는 쿠룹은 그레고리력 1936년 3월 24일에 시작되었다. 하나의 윈두 주기에 속하는 음력 년에는 각각 이름이 붙어 8년 주년 체계를 이루었다.
자바력은 17세기 이래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체계가 정비되어 그레고리력이 우세한 역법이 되는 19세기까지는 자바 대부분 지역에서 쓰였다. 그러나 17세기에 마타람 술탄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했던 자바 동부의 블람방안 왕국은 자바력을 도입하지 않았고, 인근의 발리 지역과 함께 그대로 샤카력을 사용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블람방안 정복으로 블람방안 지역의 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점차로 자바 극동부 대부분 지역도 이슬람화됨으로써 이 지역에서 샤카력은 사라졌지만, 산간 지방에서 힌두 신앙을 고수한 틍그르(Tengger)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통 역법으로는 샤카력의 변종인 틍그르력을 사용한다. 발리에서도 오늘날까지 전통 역법으로는 샤카력의 변종인 발리력을 사용하지만, 발리력의 달 체계는 음력 주기로 열두 달을 채우고 1년의 길이를 보정하기 위해 3년마다 윤달을 두는 방식으로 오늘날 자바력의 양력 달과는 다르다.

2.3. 아망쿠랏 1세와 트루나자야 봉기


술탄 아궁 사후 새로 즉위한 술탄 아궁의 아들 아망쿠랏 1세(Amangkurat I, 재위 1646–1677)는 즉위 이듬해, 기존 수도 카르타 인근의 플레렛(Plered, 수도 1647–1681)에 술탄 아궁의 것보다도 더 크고 웅장한 새 궁전을 짓고 수도를 플레렛으로 옮겼다. 마타람의 루이 14세 혹은 이반 뇌제라고 비유할 만한 아망쿠랏 1세는 자신의 영광, 그리고 마타람의 중앙집권화와 안정화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였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잔혹하고 무자비한 수단도 가리지 않고 사용하였다. 아망쿠랏 1세는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신하가 있으면 거리낌없이 투옥하거나 살해하였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사위인 치르본의 군주 기릴라야(Panembahan Girilaya, 재위 1649–1677)와 장인인 수라바야의 프킥 공(Pangeran Pekik, 1659년 살해됨)도 있었다. 아망쿠랏 1세는 반란 기도 혐의를 물어 울라마 수천 명은 물론 그 가족까지 몰살하기도 했다.
중앙 정부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아망쿠랏 1세는 자바 북부 해안 지대의 항구들을 폐쇄하거나 축소하고 선단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교역으로 부를 쌓은 항구 도시가 과거의 수라바야처럼 독립성을 주장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아망쿠랏 1세의 시대에 해양 세력으로서 마타람은 자살 상태에 빠졌고, 거의 유일한 역외(자바, 마두라 외) 속령이었던 보르네오 남서부의 수카다나 지역도 1661년 반튼 술탄국의 술탄 아긍 티르타야사(Sultan Ageng Tirtayasa, 재위 1651–1683)에게 탈취당했으며 마타람은 내륙의 농경지에만 경제를 거의 온전히 의존하게 되었다. 마타람이 아직 블리퉁섬 남부에 세력권을 유지하던 방카블리퉁 제도에서도 반튼과 마타람의 경쟁이 벌어졌는데, 1650년대 조호르 술탄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을 틈타 반튼의 술탄 아긍 티르타야사가 방카섬을 손에 넣자 마타람의 아망쿠랏 1세도 이 지역에 주목하게 되었다. 1660년대 전반, 아망쿠랏 1세는 다소 무리하게 세력 확장을 시도하여 일시적으로 반튼 세력까지 축출하고 방카블리퉁 제도 전역을 영향권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660년대 말과 1670년대에는 결국 수마트라 동부 세력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18세기, 방카블리퉁 제도는 최종적으로 수마트라 동부 팔렘방 술탄국의 영토가 되었다.
아망쿠랏 1세의 치세에는 고압적인 정책에 반발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여러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마두라 서부 방칼란 지역 내 아로스바야(Arosbaya) 지방의 영주 트루나자야(Trunajaya, 1649–1680)가 일으킨 트루나자야 봉기(1674–1681)는 마타람 술탄국에 치명적이었다. 호전적인 마두라인들과 마카사르인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마타람의 수도 플레렛으로 진격한 트루나자야는 1677년 6월에 마타람군을 물리치고 플레렛을 점령해버렸던 것이다. 아망쿠랏 1세를 지지하지 않는 푸르바야 공(Pangeran Purbaya) 세력이나 과거 중앙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동부의 기리(Giri) 지역 등 마타람 내부 세력 일부도 트루나자야를 지지하고 반란군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마타람군만으로 트루나자야 반란군을 막을 수 없음을 절감한 아망쿠랏 1세는 과거의 적이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트루나자야의 군대는 자바의 부가 모이던 영화로운 수도 플레렛을 약탈하였고, 아망쿠랏 1세는 퇴각하던 와중에 트갈(Tegal)에서 죽었다. 나중에 파쿠부워노 1세(재위 1704–1719)가 되는 푸그르 공(Pangeran Puger)도 1677년 혼란을 틈타 플레렛을 점거하고 도피 중인 아망쿠랏 1세의 계승자이자 아들인 아망쿠랏 2세(Amangkurat II, 재위 1677–1703)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망쿠랏 2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트루나자야를 물리쳤지만, 대가로 구 마타람령 서부 자바의 보고르, 카라왕, 파라향안 지역에 대한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아망쿠랏 2세는 전쟁 과정에서 아직 푸그르 공이 플레렛을 점거하고 있던 1680년 9월, 북쪽에 새로운 수도 카르타수라(Kartasura)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다. 이듬해 푸그르 공은 항복했지만, 아망쿠랏 2세는 황폐해진 플레렛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그대로 카르타수라가 마타람의 수도가 되었다. 이 카르타수라는 오늘날의 수라카르타와는 다른 곳이지만(오늘날 카르타수라는 수코하르조Sukoharjo현에 속함), 오늘날 수라카르타 바로 옆에 있으며 수라카르타 광역권에 속한다. 카르타수라는 1745년까지 마타람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2.4. 계승 전쟁과 네덜란드 종속


이후에도 마타람 술탄국은 고질적인 계승 문제로 세 차례의 자바 왕위 계승 전쟁(1차 1704–1708, 2차 1719–1723, 3차 1749–1757)을 겪어 지속적으로 국력이 과도하게 소모되었다. 또한 자바와 수마트라의 지배체제 구축을 노리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이 자바 왕위 계승 전쟁 때마다 개입하여, 네덜란드의 편에 선 세력이 제1차와 제2차 계승 전쟁을 승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가 마타람의 내정에 점점 더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마타람이 네덜란드에 종속적인 위치로 존속하던 1740년, 바타비아에서 화인들의 반네덜란드 봉기가 발생하였으나 곧 진압되었는데 후환을 우려한 네덜란드인들은 바타비아의 비화교계 거주민 집단과의 합의 하에 1740년 10월, 2주에 걸쳐 1만 명에 달하는 바타비아 화인을 학살하게 된다. 케 판장(Khe Pandjang)이 이끄는 화인 학살의 생존자들은 우선 가까운 반튼으로 가서 반튼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반튼 술탄은 이들과 연대하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화인 무리는 자바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스마랑을 향해 이동하며 마타람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마타람의 파쿠부워노 2세(Pakubuwono II, 재위 1726–1749)는 일단 겉으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계속 협력하였지만 물밑으로는 도망쳐 온 화인들을 도왔으며, 이에 따라 화인과 자바인이 연합하여 동인도 회사에 대항한 자바 전쟁(1741–1743)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은 결국 동인도 회사가 승리하고 마타람에서 북부와 동부 영토를 평화의 대가로 받아냄으로써 종료되었지만, 다음 세기에 발발한 본격적인 반네덜란드 항쟁인 디파나가라 전쟁(Perang Diponegoro, 1825–1830)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격렬했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네덜란드가 반란군의 탁월한 두 지도자 망쿠부미 공(Pangeran Mangkubumi)과 라덴 마스 사잇(Raden Mas Said)의 선전으로 고전하였지만, 망쿠부미 공과는 1755년 그의 주장을 인정하여 마타람 영토의 절반[20]을 떼어 주기로 함으로써 타협에 성공하고(기얀티Giyanti 조약, 1755년 2월 13일) 간신히 전황을 호전시킨다. 남은 라덴 마스 사잇의 세력도 만만찮아 기얀티 조약 체결 후인 1755년 10월에도 동인도 회사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1756년 2월에는 네덜란드와 타협하고 적으로 돌아선 망쿠부미의 욕야카르타를 공격해 신축한 궁전을 불태우는 등 분투했지만, 동인도 회사와 파쿠부워노 3세의 수라카르타, 망쿠부미의 욕야카르타 모두와 대립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전체적으로는 교착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1757년, 결국 라덴 마스 사잇이 협상을 거쳐 수라카르타의 파쿠부워노 3세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하고, 수라카르타에서 영토를 받아 공국을 다스리게 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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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중부 자바의 영토 분할
[14] 현대 인도네시아 혹은 자바 역사에서 '술탄 아궁'이라고 하면 거의 마타람의 술탄 아궁을 지칭하지만, 사실 '술탄 아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다른 인도네시아 지역 술탄국의 사례도 있으므로(가령 반자르 술탄국의 술탄 아궁\[재위 1663–1679\]이나 팔렘방 술탄국의 술탄 아궁 코마루딘 스리 트루노\[Sultan Agung Komaruddin Sri Teruno, 재위 1718–1727\]) 명확히 마타람의 술탄 아궁을 가리켜야 할 때는 별칭 내지 왕호 '하냐크라쿠수마'를 붙인다.[15] 엄밀히 말해 술탄 아궁 집권 이전 마르타푸라 공(Adipati Martapura)이 하루 집권하였으므로 그를 포함하면 술탄 아궁은 네 번째 군주인데, 마르타푸라 공은 마타람 왕사에서 공식적인 마타람의 군주로 간주하지 않는다.[16] 단, 이는 수라바야 공가의 주장이며 직접 증거는 희박하다.[17] 16세기 중반에 치르본 술탄국에 종속되어 있던 수므당라랑 왕국이 독립 세력으로 존재하였던 것은 약 1585년부터 1620년까지이며, 이후 마타람에 복속하였지만 마타람 산하에서 기존 토착 귀족들은 특권적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독립 수므당라랑 왕국의 마지막 군주 쿠수마디나타 3세(Kusumadinata III, 1586–1625, 재위 1608–1620)는 반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마타람에 의해 3면에서 포위된 위태로운 형국에서, 그나마 모후 하리스바야(Harisbaya)가 마타람의 초대 군주와 친척이었고 마타람의 수도와 가까운 파장(Pajang)에서 자란 것으로 인연이 있는 마타람 술탄국의 술탄 아궁을 찾아가 자발적으로 귀순하였다. 쿠수마디나타 3세는 귀순 이후에도 좋은 대접을 받아 롱가 금폴 1세(Rongga Gempol I)로서 1620–1624년간 마타람 산하에 설치된 수므당현의 1대 현령(bupati)직을 수행하였다. 롱가 금폴 1세는 술탄 아궁의 든든한 신하로 마두라 원정에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마두라 서부 방칼란의 아로스바야 지역을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다.[18]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반자르 술탄국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거나 군주의 눈 밖에 난 자바인들에게 인기 있는 망명처가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반자르 술탄국에도 당대 자바 문화가 전파되었다.[19] 자바의 궁정 무용 양식 중 하나로, 마자파힛 제국 시대에도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으나 술탄 아궁 시대에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다. 스림피(Srimpi) 무용과 함께 자바의 궁정 무용을 대표하는 세련된 무용 양식이다.[20] 이때만 하더라도 마타람 술탄국의 기존 강역은 스마랑 등 북부 해안 지대를 제외한 오늘날 중부자바주 대부분과 오늘날의 동부자바주에서 블람방안 반도와 수라바야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으로, 오늘날 욕야카르타 특별주 및 수라카르타의 배후지를 합한 지역보다 훨씬 컸다. 번왕국의 영토는 마타람 분리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등 식민 세력의 개입으로 점차적으로 축소된다.
결국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카르타 수난국, 욕야카르타 술탄국, 망쿠나가란 공국의 세 번왕국[21]으로 분리되어 각각이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었고, 기존의 마타람 술탄국은 소멸하였다. 네덜란드와 대립하던 망쿠부미 공은 욕야카르타의 초대 술탄 하믕쿠부워노 1세(Hamengkubuwono I, 재위 1755–1792)가 되었고, 네덜란드가 처음부터 지지했던 마타람의 수수후난 파쿠부워노 3세(Pakubuwono III, 재위 1749–1788)는 그대로 수라카르타의 수수후난이 되었으며[22],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라덴 마스 사잇은 망쿠나가란 공작 망쿠나가라 1세(Mangkunagara I, 재위 1757–1795)가 되었다.
단 분리된 번왕국 가운데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네덜란드의 통감(resident)이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호국이었으나, 현실적으로 18세기 중반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이 지역의 내정에 간섭할 여지는 크지 않았고, 사실상 독립국으로 존재하였으며 독자적인 외교권, 사법권, 군대를 보유했다. 18세기에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네덜란드 통감은 토착민 재상(프파티 달름pepatih dalem)과 동격으로 술탄의 신하였다. 그러나 다엔덜스 총독 시대부터 욕야카르타 통감이 술탄의 명령을 받지 않는 총독 직할직이 되었으며, 이어 래플스 부총독 시대부터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외교권과 군권이 박탈되었다. 디파나가라 전쟁이 종결된 1830년 무렵부터는 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욕야카르타에 대한 식민 통치 기구의 행정적 간섭이 심해져 명실공히 욕야카르타가 네덜란드의 종속국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이 시점부터 욕야카르타 술탄위 계승권은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과의 합의가 있어야 유효하게 되었고, 술탄의 사법권마저 식민 정부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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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wadi. 2007. Sejarah Raja-Raja Jawa. Yogyakarta: Media Ilmu.


[21] 네덜란드어로 Vorstenlanden. 영국령 인도인도 번왕국과 비슷한 개념으로 네덜란드가 간접통치하는 자바의 토착 왕국을 의미한다. 원래는 이상의 셋이었으나 1812년에 영국이 잠시 자바를 점령했을 때 영국을 도와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영국이 나타쿠수마(Natakusuma)에게 욕야카르타 일부 영토를 주어 파쿠알람(Pakualam) 1세로 삼아 파쿠알라만 공국이 덧붙여졌다.[22] 여기서 '하믕쿠부워노'(ꦲꦩꦼꦁꦏꦸꦧꦸꦮꦤ, Hamengkubuwana. 자바 문자에 따르면 두 번째 음절은 '멩'이 아니라 '믕'이다.), '파쿠부워노'(ꦦꦑꦸꦨꦸꦮꦟ, Pakubuwana) 등의 표기에는 예외적으로 자바어 마타람 방언의 어말 모음 변화 'a'→'o'를 적용하였다. 이들의 인명을 현대 인도네시아어로 표기하는 경우 어말 모음 변화를 반영하며, 이들의 인명은 이미 인도네시아어에서 한국어로 종종 옮겨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