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4세
1. 소개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왕. 카를로스 3세와 마리아 아말리아의 차남. 형인 펠리페가 정신질환을 앓아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2. 즉위 전 시절
그는 레슬링을 좋아하고 좋은 체격과 체력을 지녔으나 지적인 면이나 치정에 대해서는 부왕 카를로스 3세의 반도 못쫓아갔으며 주변사람으로부터는 둔하지만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부왕은 늘 그를 못미더워 하였으며 "카를로스, 넌 바보다." 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사촌여동생인 파르마 공녀 마리아 루이사[1] 와 결혼이 확정되었을 때 그때까지 여자랑 교제해 본적이 없던 그는 어쩔 줄 몰라했고 그때 부왕은 "바보같은 카를로스, 여자 따위는 모두 같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3. 재위 시절
1788년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4세는 아버지와 달리 정사에 무관심했고 사냥을 좋아하여 사냥에 열중하였다. 그러자 왕비는 자신에게 무신경한 남편 대신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근위병 출신에서 총리대신으로까지 임명되었다.
[image]
마누엘 고도이(1767년 5월 12일 ~ 1851년 10월 7일)
왕은 사냥에나 열중하며 놀기에 바빴는데 사실상 실권자였던 고도이가 전횡을 일삼으면서 정치를 쥐락펴락했고 그에 따라 고도이에 대한 대신들과 백성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나폴레옹에게 스페인 왕국은 속국 정도의 대우 밖에 받지 못했고,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트라팔가 해전 후 그러한 친프랑스 정책을 버렸다. 나폴레옹이 1807년에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면서 고도이는 다시 친프랑스 기조로 전환했지만, 프랑스는 더 이상 스페인과의 동맹에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프랑스와의 동맹도 고도이의 지배를 약화시켰고,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모색하는 페르난파(페르난도 왕세자의 지지자)는 활기차게 활동을 하였다.
4. 폐위 그리고 말년
1808년 스페인의 국민들은 총리인 마누엘 고도이(Manuel de Godoy y Álvarez de Faria)와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무능한 왕의 전횡을 더는 참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켜 왕을 내쫓았고 왕세자 페르난도를 새로운 스페인의 왕으로 옹립한다. 그러자 스페인의 상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화해를 주선한다는 목적으로 카를로스 4세 부부와 고도이, 페르난도 7세를 비요나로 불러들이고 그들을 감금시킨 뒤 카를로스 부처와 고도이는 퐁텐블로 성, 페르난도 7세를 발렌시아 성에 가둔 뒤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세운다.(호세 1세) 1813년에 페르난도 7세는 돌아왔지만 카를로스는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이탈리아로 갔으며 1819년 로마에서 고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5. 가족
루이사 마리아(1751년 12월 9일 ~ 1819년 1월 2일)와의 사이에서 8남 6녀를 두었으나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요절하지 않은 자식들은 볼드체로 표기.
- 카를로스 클레멘테 : 1771년 9월 19일 ~ 1774년 3월 7일
- 카를로타 호아퀴나 : 1775년 4월 25일 ~ 1830년 1월 7일 : 포르투갈 주앙 6세의 왕비
- 마리아 루이사 : 1777년 9월 11일 ~ 1782년 7월 2일
- 마리아 아말리아 : 1779년 1월 9일 ~ 1798년 7월 22일
- 카를로스 도밍고 : 1780년 3월 5일 ~ 1783년 6월 11일
- 마리아 루이사 : 1782년 7월 6일 ~ 1824년 3월 13일
-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 1783년 9월 5일 ~ 1784년 11월 11일
- 펠리페 프란시스코 : 1783년 9월 5일 ~ 1784년 10월 18일
- 페르난도 : 1784년 10월 14일 ~ 1833년 9월 29일
- 카를로스 마리아 : 1788년 3월 29일 ~ 1855년 3월 10일 - 몰리나 백작, 자칭 카를로스 5세.
- 마리아 이사벨 : 1789년 7월 6일 ~ 1848년 9월 13일
- 마리아 테레사 : 1791년 2월 16일 ~ 1794년 11월 2일
- 펠리페 마리아 : 1792년 3월 28일 ~ 1794년 3월 1일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 1794년 3월 10일 ~ 1865년 8월 13일 - 이사벨 2세의 남편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아버지
6. 여담
위 그림은 카를로스 4세가 궁정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에게 그리도록 명령한 그림이다.
혁명의 불길 속에서도 부르봉 왕가는 건재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의미를 담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고야는 이 작품을 비꼬는 의미를 담아서 그렸다. 가령 왕은 중심부에서 물러나 있고 왕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왕비가 왕 대신 왕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고 왕비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천박하게 그려진 반면에 왕은 무기력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이 그림은 뒷날 한 미술평론가에게 복권에 당첨된 빵장수의 가족 같다는 평가를 얻었다.
[1] 카를로스 4세의 숙부 파르마 공작 펠리페와 루이 15세의 딸 엘리자베트의 딸이다